생명의 영

롬 8:1-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신(독일어 Geist는 ‘정신’과 ‘영’이라는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역주)과 정신의 세계에 대해서 말할 때 주로 예술, 문학, 학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서가 영을 언급할 때는 인간의 의식이나 사상이 아니며, 또한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문화의 세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공동의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뢰할만한 언어관용이 영에 대한 성서의 생각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일종의 학급이나 전체 학교에 영감을 불어넣는 정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우리는 단체 정신(Geist)이나 흥겹게 노는 모임의 정신에 대해서, 또는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민족 정신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우리는 성령강림절 사건에서도 역시 인간 집단을 충만하게 하는 영(정신)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에서는 개인들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도록 고양시키고 고무시키는 어떤 능력이 관건으로 등장합니다.
개인들도 자기 자신에게서 이런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를 능가하는 어떤 영감이나, 또는 우리를 밝혀주는 통찰,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는 강력한 느낌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에는 늘 영이 힘으로 등장합니다. 그 영의 엑스타시로서 작용합니다. 이 작용은 우리를 일상성에서 일탈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선포한 구약성서에서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술가들도 자신들의 작업에 영이 특별하게 임함으로써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모든 영적인 삶에는 이러한 몰아적 경험에 대한 그 무엇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영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모든 영감이 선한 것은 아닙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꼼짝 못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짱한 정신으로 판단할 수 없도록 무엇에 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선한 영은 우리를 고양시키며, 그 다음에는 그저 단순한 기분전환이 아니라 말짱한 정신을 차리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이르기를, 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영은 어떤 근거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까?
1. 영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바울은 영이 생명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교회의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역시 영을 고백합니다. 그는 “주이시며, 우리를 살린다.”고 말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자들의 새로운 생명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피조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의 힘은 모든 생명체에서 활동합니다. 이 양자는 서로 연관됩니다. 우선 우리가 영을 모든 생명의 능력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또한 신약성서가 하나님의 영에게 돌린 그 특별한 활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 영의 작용에 대한 이러한 직관은 구약성서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생명’은 단순히 어떤 구체적인 질료에 담긴 특징이 아닙니다. 생명은 육체의 현존에 부가되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의 창조설화에는 인간의 창조가 보도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선 흙에서 한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형태의 코에 호흡을 불어넣었습니다. 이 호흡은 생명이며, 영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영은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붑니다. 여러분은 그 소리를 듣지만 그 영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생명을 주는 호흡과 숨은 이런 점에서 동일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시편 104편에 등장하는 단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편 104편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30절). 이런 문장은 요즘 우리 주변에서 느끼고 있는 이 봄의 계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록색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는 식물세계의 갱신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당연히 비와 태양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생기 있게 만드는 바람과 하나님의 호흡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하나님의 호흡이 세계를 관통하고 모든 곳에 생명을 불러옵니다. 사실상 모든 생명은 호흡처럼 우리를 관통해 나갑니다. 그 호흡은 우리를 생기 있게 하며, 또한 우리는 그 호흡에 의존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호흡을 단지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자기 자신의 피안에 있는 어떤 것을 받아먹고 삽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를 초월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서 자기를 초월해나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작용합니다. 우리의 학문은 여전히 이런 통찰의 깊이에 들어가기 위한 도상에 있습니다. 생명은 살아있는 세포 현상만이 아닙니다. 생명에는 주변환경이 있습니다. 땅과 자연, 공기, 다른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생명은 이 모든 것에서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구약성서는 이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영의 활동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2.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영은 죽은 자가 부활하여 얻게 될 새로운 생명의 원천입니다. 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인 것처럼 기독교적 희망이 지향하고 있는 모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식물과 동물의 자연적 생명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생명도 역시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성서는 이에 대한 근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영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 피조물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려고 하며, 자신들의 뿌리와 단절되려고 합니다. 따라서 피조물들은 죽습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이런 독립이 자기 모색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육신’에 속한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곧 그가 우리 생명의 연약성을, 또한 그것과 연결된 탐욕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 탐욕은 자기 모색의 특징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연약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우리 자신에게 설정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을 놓치고 맙니다. 이것은 ‘죄’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번역입니다. 죄는 우리 스스로 생명을 모색하고 유지하는 방식을 통해서 생명을 놓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에 의지하지 않고 대신 이런 연약한 현존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자기 모색을 통해서 생명의 뿌리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생기 있게 만드는 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이런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따라서 죽음에 떨어졌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연결된다는 것은 그것을 향해 개방된다는 뜻인데, 이를 통해서 구원받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한 분에 대한 믿음으로 그 영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바로 이러한 부활한 분에게서 이미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갖고 있다면 죄와 죽음은 우리를 생명으로부터 더 이상 분리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롬 8:11).
성령강림절의 기쁨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축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늘 우리에게 머물고 있는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된 모든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이 성령강림절에 축제를 여는 것입니다. 또한 봄의 절정기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그렇게 빛나고 있는 그 모든 것의 완성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독교의 기쁨으로 돌입합니다. 창조물에 들어있는 허무의 슬픔이 여기서 사라집니다.
3. 이런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결국 평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이 이 평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6절).
생명과 평화는 분명히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평화는 생명의 부분들 사이에 있는 조화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생명에는 분명히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살지 않는 생명체는 자기와의 갈등에서 쇠잔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당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시나브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떨어져 있는 동안에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발버둥 칠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훨씬 옳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중에서도 역시 우리는 우리 생명의 허무함과 화해를 이루었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잘못과 한계와 부끄러움과 화해를 이루었다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를 이리저리 휘감아 도는 운명과도 화해를 이루었으며, 늙음, 병, 고독과도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생명의 약속은 우리를 이러한 모든 한계로부터 해방시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게 하는 아들의 영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한번만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그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강림절의 영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서로간에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여기서 정치적 타협에 의한 평화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나, 또는 세계가 주는 평화만이 핵심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이러한 평화를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인간은 이런 평화 없이 지낼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열매를 맺는 평화는 훨씬 심원합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이 영을 통해서 우리와 내면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자라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인간 공동체의 이러한 갱신을 역사의 마지막에 임할 하나님 나라로부터 희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아직도 이런 평화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서로간에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친교와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축제입니다. 성령강림절은 특별히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모든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희망하고 기도하게 만듭니다. 이 분열은 역사의 진행 가운데 있는 교회를 갈라놓았으며, 또한 오늘날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되기 위한 이러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모든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성만찬의 축제와 늘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빵과 포도주의 형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시며, 또한 그를 통해서 상호간에 일치를 이루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일치는 바로 세상을 위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그리고 우리에게 그의 영이 보증해주는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감사할만한 기쁨에 의해서 우리 자신과의 평화가, 하나님과의 평화가, 사람들과의 평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여기에 바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일어납니다. (1982, 성령강림절, 로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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