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의 아들 아브라함

(창세기 12:1-9)




아브라함의 전(前)역사, 데라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현대에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온 인류의 조상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그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신약에 이르기까지 가장 모범적인 신앙을 소유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도 삭개오 사건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 19:9)라고 말씀하셨고, 바울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거론할 때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다.(로마 4장) 이 아브라함 이야기가 오늘 본문 창 12:1-9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그에 앞서 창 11:26절이다.

창 7,8장의 노아 홍수 이야기와 창 11:1-9절의 바벨탑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창세기 기자는 노아의 첫 아들인 셈의 후손을 열거한다.(창 11:10-26) 이런 족보의 끝자락에 ‘데라’가 등장하는데, 그 데라의 세 아들은 아브람, 나홀, 하란이었다. 이들의 고향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였다. 데라는 아브람과 아브람의 아내, 즉 데라의 며누리인 사래, 그리고 일찍 죽은 아들인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원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지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하란’에 자리 잡고 살았다. 데라는 하란에서 천수를 다하고 이백오세에 죽었다. 이 데라의 삶에도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 한 사람의 운명은 인류 전체의 운명에 맞설 정도로 무겁고 깊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아브라함에 관한 서사(敍事)가 본격적으로 서술되기 이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필자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데라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순종이라는 주제가 앞뒤 콘텍스트 없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데에 있다. 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전체적인 맥락을 가능한대로 폭넓게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성서에 전승된 이야기들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삶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에 성서가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녹아있는 삶의 리얼리티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전 역사에 관해서 조금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데라는 자기 식구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려고 했다. 그의 계획에 차질이 벌어진 것 같다. 당시 모든 식구들이 다 따라 나서지 않았다. 아브람과 롯과 사래만 따라나섰다. 나머지 식구들은 왜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일까? 하란은 일찍 죽었으니까 접어두자.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데라의 아내가 아예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데라가 아들 세 명을 낳았다고 한다면 분명히 아내가 있었을 텐데, 성서는 아무 말이 없다. 이유가 무엇인가? 데라의 아내와 아들 하란이 전염병으로, 아니면 큰 사고로 죽은 것은 아닐는지. 나홀 부부도 아버지 데라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아들 중에는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데라를 따랐다. 사래와 조카 롯까지 아브라함이 설득했을지 모른다.

식구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할 이유에 대해 데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결국 각자 생각에 따라서 머물 사람은 머물고 떠날 사람은 떠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난다는 건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안정된 삶을 포기해야만 한다. 나홀 부부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혹시 이런 문제로 식구들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데라는 아들 아브라함 내외와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리를 떠났다. 아브라함과 사래와 롯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 이르는 긴 여행 중에서도 아버지 데라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하란에 거주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새겨들을 준비를 갖추었고,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록 아버지가 하란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는 하란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오늘 본문 1-3절의 주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것은 본문만이 아니라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음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한 다음에도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다시 나타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절)고 약속하셨다.

성서의 이런 진술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약간 당혹스럽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는 왜 나타나지 않으실까? 고대 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어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걸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는 이런 진술이 가리키는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표현을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서 그 사람이 알아듣는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큰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서의 세계를 바르게 알려면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신다면 무슨 언어를 사용하시겠는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사용하던 언어로, 또는 하란 지역의 언어로 말씀하셨다는 말인가? 에벨링은 1959년 12월20일 남독일 방송국에서 방송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분으로 표상할 수 있는가? 말씀하신다고 한다면 어떤 언어를 사용하시는가? 하나님의 고유한 언어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비밀스러운 번역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언어가 사람의 언어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간접적이거나 상징적인 반사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번역된 것을 우리가 직접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나 한 것처럼 말하기에는 너무 문제가 많은 인간의 말이 아니겠는가?(Gerhard Ebeling, Das Wesen des Glaubens, 178쪽)


하나님이 사람처럼 성대를 통한 언어를 사용하신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는 우리와 차원이 다른 진리와 생명의 영이며,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기에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고 볼 수 없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 문제가 있다. 도대체 언어는 무엇인가? 우리는 늘 사람이 나누는 말과 글자만을 언어로 생각한다. 그것만큼 큰 착각도 없다. 인간의 언어는 오히려 궁극적인 진리를 전하기에는 제한적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공연한 게 아니다. 참된 언어는 훨씬 본질적이며, 창조적이다. 언어라는 뜻의 히브리어 ‘다바르’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다. ‘로고스’도 따지고 보면 창조의 능력이다. 세계와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2-4)라는 시편기자의 고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 설교자들은 밤안개와 숲이 나누는 언어를 듣는가? 그게 들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강인한의 시 ‘라일락나무에서 흐르는 밤’ 제 1연은 다음과 같다.


라일락나무 연초록 가지와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일 때

안돼, 안돼

연등(燃燈)인 양 꽃숭어리를 흔들며

라일락나무 말갛게 눈흘긴다.

(창비 2002, 가을호)


시인은 바람이 라일락나무가지 사이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노래한다. 라일락은 “안돼, 안돼”라고 말한다. 이게 사실일까? 이런 시를 읽으면서 시인을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정신 나간 사람이다. 또는 이 시의 표현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영적인 태도이다. 시인은 모든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참된 예술가들은 모두가 그렇다. 다시 생각해보자. 꽃은 시인들에게 어떻게 말하는 걸까? 산과 강은 예술가들에게 무어라고 말하는가? 바람과 대지는 일반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은밀한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들리는 신비로운 음성이며, 볼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신비로운 빛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강물이 말하는 걸 듣고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위의 설명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보도하는데, 그것을 시인의 시적인 영감과 비슷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거 아니냐 하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성서를 접근하면 그는 ‘죽었다 깨도’ 성서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다. 성서의 언어가 신문이나 역사책이나 과학책에서 사용되는 사실 언어라기보다는 문학에서 사용되는 시어(詩語)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성서의 심층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 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는 단지 표면적인 사실만 전달할 뿐이지만 성서의 언어는 그것의 심층이라 할 영적인 세계를 담고 있다. 영적인 세계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생명의 세계를 가리킨다. 창조주만이 그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는 토기장이이고 우리는 질그릇이다. 질그릇의 시각에 토기장이의 창조행위는 신비이며 비밀이다. 토기장이 자체가 비밀이다.(E.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하나님이 비밀이라는 말은 그가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야 확연하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어인 계시를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실증적으로 경험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꽃에게서 실제 인간의 음성을 들으려는 어리석음과 같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영적인 감수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성서 기자들은 모두가 이런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모세는 호렙 산 가시떨기 나무에서 이런 영적인 시야가 트였다.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거룩한 힘의 움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계시록을 집필한 요한은 밧모섬에서 고독한 실존 안에서 경천동지 할 신비한 현상을 목도할 수 있었다. 모두가 영적 시인들이며, 영적 예술가들이다.


하나님의 약속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집을 떠나라고 내린 명령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요즘의 이야기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신앙이 깊은 어떤 가족이 호주로 이민을 떠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자.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기도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기도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도 구하고 가족회의도 열면서 그들은 이민 가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정했다. 그들은 계획대로 이민을 떠났다. 몇 세대가 흐른 다음에 그 후손들은 처음 이민 계획을 세웠던 그 조상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도 역시 이와 비슷하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에게서 가나안으로 이민가야 할 이유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는 이런 저런 삶의 과정에서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이다. 성서는 이 아브라함의 탈(脫)갈대아 우르 사건에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 작용했다는 사실만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 대신 성서는 신이 인간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는 그 당시의 ‘신화적’ 서술 방식으로 마치 하나님이 직접 소리를 내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뜻을 일러주신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성서읽기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성서가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삶의 흔적들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개입해 있다. 위에서 인용한 강인한의 시에서 시인의 숨어 있는 생각과 느낌을 읽어야 하듯이 성서의 행간에 숨어 있는 어떤 사건과 사실들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는 독자들에게 침묵한다. 오늘 설교자들에게서 성서읽기의 왜곡과 남용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심각하게 일어나는지는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성서의 놀라운 세계는 묻히고 청중들의 종교적 호기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허다하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의 특징들이 무엇인지 유심히 보라. 그 핵심은 큰 민족, 복, 이름을 떨침, 축복과 저주의 근원 같은 단어에 있다. 이 단어에는 데라와 아브라함 부자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유와 목적이 담겨 있다. 창 11:30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불임이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으며, 곧 이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하는 걸 보면, 데라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혹은 하란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 가족이 번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갈대아 우르가 우상숭배의 도시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기 위해서 떠났다는 주장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건 물론 아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긴 했겠지만 불임의 상황과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가나안으로 오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는 사실만은 추정 가능하다. 생존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후손 번성에서 보았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후손번성을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으로 보았지만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않는다. 지금도 인류를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가 지구라는 이 작은 별*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기에 여전히 후손 번성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긴 하지만 그 의미가 아브라함 시대와는 분명히 다르다.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를 지속가능한 별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숫자가 줄어드는 게 훨씬 바람직할지 모른다. 


* 우리는 왜 지구를 작은 별이라고 불러야 할까? 태양을 탁구공이라고 한다면 지구는 쌀 한 톨과 비슷한 크기로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태양은 우주에 무한히 널려있는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거의 120억 광년의 세월동안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또 하나의 태양까지의 거리가 대략 2광년 정도 된다고 한다. 1초에 30만 km의 속도로 운동하는 빛이 2년 동안 달려간 거리가 얼마나 될지 상상해보시라. 참고적으로 태양에서 1억5천만 km 떨어진 지구까지 태양빛이 도달하려면 대략 9분 정도가 소요된다. 참으로 까마득한 거리이다. 가장 가까운 별이 2광년이니까 수십 광년이나 수백 광년 떨어진 별들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지구는 그야말로 태평양에 떠 있는 솔방울 하나보다 훨씬 작은 별이다. 거의 무한의 크기에 가까운 우주에 외롭게 푸른빛을 반사시키며 태양을 돌고 있는 지구에 생명이 존속한다는 건 기적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는 이런 진술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일찌감치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선택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해주시는지 그 영적인 깊이를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한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란을 떠나는 것이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일까?


길 떠남

오늘 본문에는 길을 ‘떠나’거나 집을 떠나 어디로 ‘갔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분부대로 길을 떠났고, 롯도 함께 떠났으며, 그가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세였고(4절), 모든 재산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5절), 그 땅을 ‘지나’(6절)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9절) 위 본문에서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평생 나그네처럼 길 위에서 살았으며, 그의 후손들도 역시 이런 도상(道上)의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서 텍스트는 간단하게 떠났다, 혹은 옮겨갔다고 보도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외롭게 결단한 것이다. 이런 간단한 표현에도 역시 아브라함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담겨있다. 그에게는 떠남의 선택이 곧 절대적인 존재를 향한 순종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순종에서 자기를 계시하셨다. 아브라함의 이런 운명을 가리켜 ‘길의 영성’ 혹은 ‘떠남의 영성’이라 해도 좋다. 이런 떠남의 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떠남 자체라기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향해서 자기 모든 삶을 집중시킨다는 사실이다.

‘길’이라는 메타포는 예수를 이해하거나 그를 따르는 신앙에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예수 자신이 “나는 길이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길이라는 건 진리와 생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요 14:6). 그런데 이 길과 진리와 생명에는 또 하나의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곧 궁극적인 게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 자체가 이미 길이며, 과정이며,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철학을 ‘사유의 길’이라고 언급한 하이데거나 “Reality is a process.”라고 언급한 화이트헤드도 역시 어떤 근원을 동적이고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사유와 상응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종말론이다. 모든 잠정적인 것이 완전히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그 종말론적 지평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의 역동성이 확보될 수 있는 토대이다. 엘리스터 맥그레쓰는 기독교인의 삶을 ‘여행’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앙여정의 히치하이크’라는 대목에서 여행의 숙련자들과 잠시 함께 하는 여행을 아래와 같이 재미있게 전달하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대중문화의 가장 오래 남는 상징 가운데 하나는 더글러스 아담스의 <히치하이커의 은하수 가이드>(The Hitchhiker's Guide to Galaxy) 같은 책 제목에 나타난 “히치하이커”다. 히치하이커란 친절한 트럭 운전자들의 차에 편승해 세상을 떠돌던 자요, 천하에 시름거리가 없던 자였다. 이것은 기독교 영성에 극히 유익한 이미지로, 길가는 우리가 혼자일 필요가 없으며 내 자원만 의지할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준다. 다른 대안이 열려있다.(Alister McGreth, The Journey, 내 평생에 가는 길, 44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크게 볼 때 출애굽 이후의 광야생활 40년과 가나안 정착 사이의 경계선을 중심으로 이등분된다. 경제구조적인 점에서 유목민에서 농경민으로 바뀌었으며, 정치구조적인 점에서 부족국가에서 왕정국가로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신앙이 생존의 자리에서 풍요의 자리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광야시절에 그들은 단지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지만 가나안 시절에는 원래 그곳에 원주민으로 살던 사람들만큼 풍요로워져야 한다는 조급증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원초적인 행복감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가나안 풍요의 신인 바알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구약성서를 읽는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대목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여러 번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지 말라는 예언자들의 경고를 반복적으로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다산과 풍년을 약속하는 바알과 아세라가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건 모든 인류에게 피치 못할 운명이다. 신자유주의를 마치 메시아인양 추종하는 현대인들의 삶도 역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성장지상주의에 지배당하는 교회도 역시 명분만 하나님을 내세울 뿐이지 내심으로는 풍요와 복지의 우상을 섬기는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자기의 업적과 성공과 소유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에게만 존재의 근거를 설정하는 공동체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을까?


선택과 순종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란을 떠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였고 사래는 65세였다. 임신할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난 노년기에 이들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조카 롯을 데리고 이삿짐을 꾸렸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니까 당연히 떠나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신 게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자기 인생을 결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응답 사이에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서 가변적이고, 훨씬 역동적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 결정론적인 게 아니라 역사 개방적이다. 바른 선택을 우리는 ‘순종’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순종이라는 부르는 이유도 역시 그가 바르게 선택했다는 데에 있다. 사람의 바른 선택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가 된다. 오해는 마시라. 하나님의 계시가 순전히 인간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으로 이 세상에 계시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바르게 선택하지 못한다면 그 계시는 은폐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태를 좀 더 검토해보자.

아브라함에게는 하란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가능성과 떠나야 할 가능성이 반반이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는 표현만 본다면 그가 아무런 고민 없이 무조건 길을 떠난 것 같지만 실체적 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서 이미 삶의 기반을 잡았다. 5절 말씀을 보자.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버지 데라가 성실할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을 정도로 하란에서 크게 성공했다. 하란에서 그냥 그대로 머물러 살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확실했던 삶의 토대를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길을 떠났다. 그 당시에는 그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 아브라함의 선택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게 바로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역사이다.

지금도 우리는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살아간다. 우리에게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 삶이 최선의 삶이 될 수 있는 길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분별하여 선택하는 데 있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하나님의 약속인지 확인할 수 있는 뾰족한 길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우리 앞에서 주어졌을 뿐이지 어디에도 확실한 표시는 없다. 흡사 정확한 답을 모른 채 넷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아야 할 ‘사지선다’ 형 시험문제를 앞에 둔 학생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렇다고 우리의 선택이 단지 요행수에 의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우리의 삶과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준이 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 기준에 따라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길을 떠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며, 순종의 표상이 되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이며, 구원 역사이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가장 구체적이고 분명한 구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비추어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데라에게서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처해 있는 삶을 되돌아보고 한 가지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 하란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가나안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날 것인가? 그는 비록 불확실한 길이었지만 가나안이 바로 자신과 후손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미련 없이 하란을 떠났다. 그 결과 그는 온 인류 앞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믿음의 본질을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다.

오늘 우리는 하란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전승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초적인 문제를 신학과 인문학적 관점에서 검토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아브라함의 반응이 어떤 삶의 무게를 담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논의의 핵심이었다. 필자가 본문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풀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설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한 가지 관점에서만이라도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성서텍스트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그것을 청중들에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영성이 심화되도록 돕기 위해서는 인간 삶과 역사의 심층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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