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후처 이야기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았는데, 이름은 크투라라고 하였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지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소아를 낳아주었다. 욕산은 세바와 드단을 낳았다. 드단의 자식들에게서 아수르족, 르투스족, 르움족이 퍼졌다. 미디안의 아들들은 에바, 에벨, 하녹, 아비다, 엘다아였다. 이들은 모두 크투라의 후손들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재산을 모두 이사악에게 물려주었다. 아브라함은 소실들에게서 난 자식들에게도 살림밑천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죽기 전에 그 자식들을 아들 이사악에게서 떼어 해 뜨는 동쪽으로 보내버렸다.(창 25:1-6)

   

아브라함의 새장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창세기 16장에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창세기 21장(1-7절)에 자리하고 있다. 그 이후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곁을 떠났다.(창 21:8-21) 이야기의 속도가 빨라져서 사라는 127세를 일기로 죽는다.(창 23장)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는 창 24:1-67절에 기록되어 있다. 대를 이을 이삭이 장가갔으니 이제 아브라함의 족장사는 당연히 끝나야만 한다. 성서기자도 앞으로 벌어질 야곱과 요셉의 대서사(大敍事)를 앞두고 아브라함 이야기를 종결지고 싶었을 것이다. 사라마저 죽었으니 이제는 아브라함이 175년을 살고 죽었다는 말만 하면 된다. 예상대로 성서기자는 창 25:7절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끌어갔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독자들의 예상을 깨고 창세기 기자는 누가 보더라도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이 죽는 장면 바로 앞에(창 25:1-6) 끌어들였다. 노련한 이야기꾼인 창세기 기자의 실수처럼 보일 수 있는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새장가에 관한 것이다. 지금 아브라함이 나이가 몇인가? 사라가 127살에 죽었고, 아브라함이 175살에 죽었다는 사실과 아브라함이 사라보다 10살이 많다는 사실을 기초로 해서 계산해보면 아브라함이 홀아비로 살아야 할 햇수는 40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홀아비로 사는 게 힘들어서 그가 결혼했다는 말인가?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아브라함이 새장가 들었을 때의 나이와 그가 새 아내에게서 얻은 아들이 무려 여섯 명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름을 공동번역에 따라서 열거하면, 지무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이다. 그 아들들이 또 다시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새 아내의 이름은 쿠투라이다. 이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왜 불편한가?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받든다. 우리만이 아니라 이미 신약성서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에는 단지 신앙의 차원만이 아니라 삶까지 포함된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신앙과 나그네 대접에 충실했던 삶에서 그는 가장 모범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모습들이 그의 부부생활에까지 투영된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는 보아스와 룻 사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어떤 가정보다 모범적인 가정으로 그려진다. 물론 성서에는 우리의 예상과 약간 다른 보도들도 나오기는 한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는다.(창 16장) 성서는 그 의견을 사라가 냈다고 한다. “야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내 몸종을 받아주십시오. 그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합니다.”(창 16:2) 아브라함은 마지못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인지 모르겠으나 아내의 뜻을 따른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일반적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게 사실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사라와 하갈 사이의 계속되는 갈등을 염두에 둔다면 이 이야기의 속내는 약간 다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런 장면들은 오늘 우리의 시각에서 아브라함의 모범적인 인상에 흠집을 낼만 하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스마엘 출생 이후로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잠시 다른 지역인 그랄로 옮겨서 산 적이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몰라 사람들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자기 처소에 불러들였다가 야훼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다. 성서기자는 아브라함의 소심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성서독자들에게 아브라함의 크고 작은 인간적 한계들은 그야말로 옥에 티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은 야훼 하나님에게 절대 순종한 사람이며, 어쩔 수 없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었지만 가정적으로도 여전히 꽤 괜찮은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매끄럽게 잘 흘러가다가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에서 창세기 기자는 뜬금없이 아브라함이 새장가를 들었다고 전한다. 이삭의 장가 이야기에 이어 아브라함의 새장가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다. 만약 필자가 창세기 기자였다고 한다면 이 이야기를 삭제하고 이삭의 장가 이야기에서 직접 아브라함의 죽음 이야기로 나갔을 것이다.  굳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미지를 훼손시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게 궁금하다. 창세기의 구성이 왜 이렇게 엄밀하지 못한가?


족장 전승의 편집

성서 이야기가 엄밀하지 못하다는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이 말에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성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성서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말이다. 성서는 역사적 한계를 담고 있는,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형식에서는 역사적 한계를 안고 있지만 그것의 내면적 의미에서는 역사를 초월한다. 전자는 인식론적 관점이며, 후자는 존재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 시대의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서 성서가 역사적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성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간 문화는 역사적이다. 물리학도 역시 역사적 산물이다. 뉴턴의 기계적 역학은 바로 그런 역사적 과정에서 나온 세계관이다. 그는 결코 현대의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는 뉴턴의 물리학은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물리학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최첨단의 물리학 이론인 장이론이나 초끈이론도 역시 역사적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성서 이야기가 엄밀하지 못하다는 말은 성서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관,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는 흡사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아이의 어머니 경험과 비슷하다. 그 아이는 어머니 품에서 최고의 기쁨과 평화를 누린다. 어머니의 체취, 체온, 숨길 등이 그 아이가 어머니를 경험하는 통로이다. 이 아이의 어머니 경험이 진리이기는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그런 역사적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성서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오늘 이야기의 전후로 연결되는 대목만 보자. 창세기 기자는 필자가 앞에서 설명한대로 24장에서 이삭의 결혼 이야기를 자세하게 언급했다. 그 앞에는 이삭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도 이미 언급되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야기를 다루는 창 25:19-28절에서 창세기 기자는 이삭에 대한 정보를 다시 제공한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태어났고, 리브가를 아내로 맞을 때의 나이가 사십이었으며, 리브가는 브두엘의 딸로서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라고 했다. 나이에 관한 것만 제외하면 바로 앞에서 모두 다룬 이야기가 여기서 반복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가 원래는 각각 따로 전승된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앞에서 지적한대로 아브라함이 그랄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다.(창 20:1이하) 이삭도 그랄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다. “리브가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곳 사람들이 리브가 때문에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자기 아내라고 하기를 꺼렸던 것이다.”(창 26:7)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남의 나라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는 것이다. 두 본문에 차이가 있다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원래 아브라함의 배다른 누이였던 반면에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는 한 다리 건너 사촌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차이는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랄의 왕인 아비멜렉이 사라를 자기 처소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이며, 이삭의 경우는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의 동침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의 동기와 결과는 똑같다. 이 말은 곧 아브라함 전승과 이삭 전승이 각각 발전되어왔다는 의미이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전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삭전승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런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편집된 창세기를 오늘 우리는 읽고 있다.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은 원래의 아브라함 전승과는 다른 전승에 속한다. 아브라함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 원래의 전승은 사라와 이삭, 하갈과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발전되었고, 크투라 전승은 원래의 이야기와 별개로 발전되어 왔다. 창세기 편집자는 전체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서는 빼놓아야만 했을 크투라 전승을 앞에 놓고 고민했을 것이다. 이걸 버리고 가나, 아니면 안고 가나? 안고 간다면 그것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독자 여러분이 창세기 편집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창세가 기자는 일단 그 전승을 안고 가기로 했다. 이런 판단이 얼마나 옳은지 아닌지는 오늘 우리가 판단하기 어렵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창세기 편집자의 선택이 옳았다고 본다. 창세기 편집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라. 모든 성서의 최종 편집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인데, 성서 편집자들은 매우 많은 전승들 중에서 무엇을 자신의 이야기에 포함시킬 것인지 선택해야만했다. 여기에는 소위 깊은 신학적 영성이 필요하다. 창세기 기자의 눈에 크투라 이야기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매우 요긴한 자료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전체 아브라함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영적인 깊이가 있다면 배제보다는 포함의 원리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당시에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때가 되면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해와 해석을 미래로 열어두는 태도야말로 깊은 영성의 소산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기독교의 전통을 바르게 지켜나가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 필요 없다고 해서 모든 걸 버리고 간다면 결국 기독교의 영성은 형해화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사도신경이 그렇다. 사도신경이 로마교회의 세례문답을 원형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사도적 권위를 가진 신조로 채택되었다면 결정적으로 신학적 오류로 드러나지 않는 한 우리는 배제가 아니라 포함의 원리에 따라서 지켜나가는 게 옳다. 세례와 성만찬도 그렇다. 목사직은 또 어떤가? 만인제사장론에 근거해서 목사에게 배타적으로 허락된 설교와 성례 제도를 해체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위계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지배한다고 말할 수도 있긴 한다. 이런 주장들은 이미 지난날 충분히 제기된 바가 있다. 대표적으로 퀘이커나 형제단들이 제시하고 있는 무교회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형식을 타파한 무교회주의가 근본정신에서 틀리지는 않았지만 본질이 형태 안에 담겨야 한다는 원리에서 본다면 그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교회 예전과 교회력도 이런 원리에 속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크투라 전승이 하필이면 왜 창 25장에 자리했는지 짚자. 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 전승의 기본 골격에 따르면 생리적으로 후손 번식의 능력이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덧입혀져서 이삭을 낳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심 신학이다. 이 신학을 전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전승은 매우 드라마틱한 요소를 담고 있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 아브라함의 나그네 접대와 천사 조우, 수태예고, 사라의 웃음, 구십세와 백세의 나이 등등이 그런 요소들이다.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고 아브라함의 후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라의 생리적 능력이 끊겼다. 하갈이 대신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적자가 아니다. 이제 사라에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긴박한 순간에 줄줄이 사탕 식으로 여섯 아들을 내리 낳았다는 크투라 전승이 개입된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겠는지 상상해보라. 더구나 이 이야기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손자들 이야기까지 나온다. 창세가 편집자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능한 뒤로 미루어두는 것이다. 크투라 전승은 결국 아브라함 전체 전승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자리를 잡았다. 크투라 전승은 유행가 노랫말처럼 ‘막차를 탔다.’ 창세기 편집자의 절묘한 선택이다.

텍스트의 역사비평에 속하는 여기까지의 설명은 일반 신자들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역사비평은 보기에 따라서 필요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일단은 본문이 처한 ‘삶의 자리’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성서를 왜곡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비평은 반드시 짚어야할 작업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 자체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거나 해결될 수 없기도 할 뿐만 아니라 성서 텍스트 자체보다는 독자가 중요하다는 관점에서는, 소위 “독자중심의 성서읽기”의 관점에서는 필요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에서 저작자의 뜻보다는 독자의 입장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포스트모던 해석학에서 볼 때 이런 역사비평은 쓸데없을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작품을 해석하지 말고 그냥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필자는 성서문자주의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자들과 독자들의 주관적 해석에만 모든 해석의 권위를 부여하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결국 텍스트의 역사적 지평을 축소하거나 해체한다고 본다. 큐티식 설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적용중심으로 성서를 도구화하는 설교가 바로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어떤 성서본문을 대하든지 오늘 독자들의 삶에 실용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한다. 필자는 해석의 개방성을 전제하면서도 여전히 성서기자, 또는 성서편집자의 신학적 의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참고적으로, 위의 역사비평이 구약학계에서 어느 정도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구약학자가 아닌 필자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걸 전제하고 이제 정작 중요한 이야기로 들어가야겠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처 이야기인 크투라 전승이 말하려는 신학적 관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영웅은 없다.

필자가 보기에 창세기 편집자가 아브라함의 권위에 손상이 갈지도 모를, 그리고 이야기 구성에서 별로 어울리지 않는 크투라 전승을 굳이 끌어들인 이유는 구약성서의 큰 주제인 “영웅은 없다.”를 전하려는 데에 놓여 있다.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아브라함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 그렇고 그런 사람이네,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 당시 다른 족장들처럼 그도 역시 평범한 족장이었다. 아내가 죽고 아들이 장가를 들었지만 아브라함은 후처를 얻어서 많은 자식들을 보았다. 6절의 설명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크투라에게서 난 아들과 손자들에게도 한 살림밑천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죽기 전에 그들은 이삭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살도록 동쪽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런 행태는 아마 고대 족장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에서 우리는 어떤 뛰어난 영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 적자에게는 좋은 몫을 떼어주고 서자들에게는 조금 못한 몫을 떼어주었을 뿐이다. 요즘 재벌들의 재산 상속과도 비슷한 행태이다. 창세기 기자는 그걸 짚은 다음에 아브라함이 천수를 누린 후 죽었다고 짤막하게 마지막 멘트를 날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웅처럼 보이는 사람도 역시 겉모양만 그렇지 실제로는 범부들과 차이가 없다. 성서에서는 결코 영웅주의를 찾을 수 없다.

영웅주의 역사관과 대립하는 또 하나의 극단적 역사관은 민중사관이다. 민중사관, 또는 민중신학은 민중이 바로 역사의 주체라는 생각을 그 밑에 깔고 있다. 민중신학이 하나님의 당파성을 내세움으로서 신학적 토대를 나름으로 제공하지만 여기에는 영웅사관 못지않은 오류가 발견된다. 필자는 여기서 민중신학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종교적 엘리트주의에 빠진 주류 기독교의 영성에 비해서 민중의 삶과 일치하려는 그들의 영성이 훨씬 건강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 중심의 역사가 과연 현실 인간과 역사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한 부분들이 적지 않다. 오늘의 한국정치에서 가장 민중지향적 민노당이 민중들에게 가장 적게 지지받으며, 오히려 지식인들에게 지지받는다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인간이 중요하지 뭐가 중요한가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지금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는 게 중요하지 무엇이 중요하냐 하고 말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독교 신앙이 그런 인권과 복지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해주는 공동체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복지문제를 위해서라면 굳이 기독교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 없이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면 충분하다. ‘국경없는 의사회’나 ‘참여연대’도 좋다. 요즘 얼마나 많은 엔지오가 활동하는가.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계시, 그의 종말론적 통치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교회가 노숙자에게 잠자리와 밥을 제공하는 단체보다는 인문학 공부를 시키는 단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는 일이 밥을 주는 일보다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에 훨씬 가깝다는 말이다. 밥을 주는 일을 등한히 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보기에 성서의 역사관은 영웅주의(엘리트주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민중주의도 아니다. 성서는 모든 인간의 능력과 행위를 우습게 본다. 요셉, 모세, 다윗도 모두 우스운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만이 역사의 주체다.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렸던 욥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믿음과 그의 의로움도 그의 존재근거가 될 수 없었다. 자기의 의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그는 자기모순에 빠진 채 친구들과의 공소한 논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 명망가 설교자들은 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한결같이 종교적 영웅주의와 엘리트주의의 흔적들을 보인다. 노골적으로 그것을 부추기는 이들도 있고, 본인도 모르게 그렇게 설교하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우리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논조는 일종의 종교적 엘리트주의이다. 필자가 보기에 교회는 세상을 변혁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 우리가 나서서 설치면 설치는 정도로 이 세상은 더 망가질 가능성도 있다. 전병욱 목사는 노골적으로 영웅사관을 부추긴다.


엘리야 시대에 7천 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엘리야가 낙심했지만, 그래도 7천 명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뒤집어 놓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숨어 있는 7천 명의 바퀴벌레 같은 자들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기껏 앉아서 기도밖에 더 했겠습니까? 그들이 역사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비전무릎 101쪽)

 

물론 성서의 인물들에게 특별한 영웅적 기질과 능력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게 별로 없다. 오십보백보에 불과하다. 성서기자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였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지 그들 자체를 극대화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일어나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머물 뿐이다. 이런 것이 바로 다른 나라의 역사관과 성서기자들의 역사관의 결정적인 차이다. 세속 역사관은 영웅주의이지만 성서의 역사관은(신명기사관) 그걸 거부한다.

필자는 지금 역사허무주의에 빠져도 좋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능력을 과신하지 말자는 뜻이다. 이 세상의 진정한 변혁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않은가. 그분이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지 않는가. 우리는 그걸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하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극적인 설교를 주장했다. 성령과 청중들 사이에 영적 소통이 발생할 수 있도록 설교자는 가능한대로 옆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청중들을 방관한다는 게 아니라 설교자가 나서서 성령의 역할을 대신하지 말라는 뜻이다. 설교자는 청중들을 변화시킬 생각을 아예 하지 말고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의 영적인 길을 가면 충분하다. 그게 어떤 청중들에게는 좋은 가르침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설교자가 염려할 것은 전혀 없다. 필자가 보기에 설교자가 청중들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청중들의 영성은 파괴된다. 오세용 목사의 버전으로 말한다면 목사는 기본적으로 영적인 리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주제에 어떻게 남의 영혼에 간섭한다는 말인지. 성서에 영웅은 없다. 오늘 한국교회에도 영웅은 없다. 영웅으로 자처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허상이다. 허상을 좇는 민중들은 결국 정신적으로 모호한 세계로 들어가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며, 그 대상이 된 지도자들은 벌거벗은 임금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이런 영웅주의와 엘리트주의가 큰 힘을 얻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는 문외한에 속한 필자가 할 말이 별로 없다. 거칠게 한 마디만 한다면 사대식민사관의 반작용으로 인한 소영웅주의가 교회 안에서 종교의 옷을 입고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대학입시에서 내신점수의 비율문제를 놓고 노무현 정부와 소위 일류대학교 총장들 사이에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폐지론이 나올 정도로 한국사회는 서울대학교 출신을 정점으로 하는 엘리트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필자의 경험에 고등학교 때의 지적 평가라는 건 참조용일 뿐 그 사람의 지적 능력 자체를 평가할 근본은 되지 못한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소위 일류 사립대학교 총장들께서는 내신 비율을 줄이고 수능과 논술 비중을 높임으로써 가능한대로 지적 수준이 높은 학생을 선발하려는 것 같다.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 밑에서 대학이기주의의 방식으로라도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교를 세계 명문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을 제삼자가 나서서 뭐라 하겠는가. 다만 큰 배움, 보편적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시작한 대학(大學, University)의 초심을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기대를 할 뿐이다.

지금 필자의 입장은 성서를 영웅주의 사관으로 읽지 말자는 것이다. 그걸 바탕으로 오늘의 청중들을 소영웅주의에 빠지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소영웅주의를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면 ‘사명감’이나 ‘비전’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외국으로 단기선교를 나서고 있는데, 그게 무슨 신앙적 의미가 있는지 필자는 전혀 모르겠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이런 점에서 영적으로 상당히 ‘업’되어 있는 것 같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나 달란트 비유를 전가의 보도로 삼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신념으로 기독교 문화를 선전하고 다니는 일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냉철하게 반성해야할 것이다.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내가 말리지 않겠지만, 그렇게 설치고(?) 다닌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만은 기억하기 바란다. 필자가 보기에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일단 최선의 삶이다. 사실은 그것 자체가 힘들다. 우리는 평범한 것 자체를 못견뎌하기 때문에 우상과 영웅을 만들어낸다. 신앙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애를 쓰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현실주의적 윤리관

성서의 주된 관심이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은 윤리의 차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런 선입관 없이 성서를 읽는 사람들 중에서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비윤리적 행태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를 잇기 위해서 벌어진 아버지와 딸 사이의 성관계나 한 며느리가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꾸민 시아버지와의 성매매 같은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다윗 왕조 안에서 벌어진 온갖 파렴치한 정쟁과 성폭행들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평범한 사내로 묘사되고 있듯이 말이다. 성서의 이런 입장은 성서의 관심이 하나님에게 놓여 있지, 사람에게 놓여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래서 성서는 상처와 한계가 많은 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성서의 윤리관은 분명히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이다. 성서의 현실주의적 윤리관은 인간의 생명이 인간의 행위에 관한 가치론적인 평가라 할 수 있는 윤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배타적 원소유자인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결탁에서만 확보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서에서 절대적인 규범윤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동성애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이혼한 사람을 죄인 취급하기도 한다. 물론 성서에는 십계명을 비롯해서 규범이 있다. 그러나 그런 규범들은 이스라엘의 고대시대에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끌어내기 위해서 필요했던 현실적 기준들이었지 역사를 초월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기준은 아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이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후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살아있을 동안에 크투라를 아내로 맞아들였을 개연성을 부정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하갈과의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브라함은 축첩의 전통을 따른 사람이었다. 고대의 일부다처는 현실적 가족제도였다. 성서도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일부일처가 현실적 제도가 되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것들은 영구불변의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따르는 하부 구조에 속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 창조의 원리를 따라야 하지 않느냐 하고 주장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서로 합해서 한 가정을 꾸리게 한 것이 바로 창조의 원리라고 말이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반드시 옳은 말도 아니다. 창조설화가 알고 있는 세계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인간세계이다. 그 너머의 세계는 알지 못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세계였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이 세계가 존속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귀납법적으로 그런 창조설화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구약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그 현실은 우주적인 무게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 현실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해야만 했다. 이런 점에서 성서의 창조설화는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통로였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세계 창조자라고 믿는다면 훨씬 근원적인 역사까지 염두에 두고 이 세상과 인간의 삶에 대해서 진술해야 한다.

여러분을 잠시 오랜 과거의 역사로 안내하겠다. 만약 우리의 유전자에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그때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대략 지구의 나이를 45억년으로 계산한다면 10억년은 아무런 생명의 씨앗들이 없었고, 그 뒤로 30억년은 아주 미미한 변화만 감지되며, 지구의 나이가 40억년이 되었을 때, 지금으로부터 5억4천2백만 전에 생명체들이 폭발하듯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시기를 가리켜 ‘캄브리아’ 기(期)라고 한다. 많은 생명체들이 폭발하듯이 나타났다고 한다.(앤드류 H. 놀, 김명주 역, 생명- 최초의 30억년, 뿌리와 이파리, 2007년 참조) 인간의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는 3백만 년의 역사밖에 안 된다. 성서는 이 긴 과거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역사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지금 우리의 시간으로 계산해서 2천-5천 년 전의 역사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먹는 아기와 비슷하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 생명을 언어로 표현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성서다.

결혼제도와 연관해서 무엇이 과연 창조의 원리인지 우리는 아직 분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오해는 마시라. 오늘의 제도가 무의미하다는 게 결코 아니다. 모든 기존의 윤리관을 해체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성서가 제시하는 여러 윤리적 규범들과 가족관계는 그 당시에 그들이 선택한 최선의 길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는 우리가 선택해야만 한다.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성서가 비록 규범적인 윤리를 채택하고 있지만 성서가 그것을 절대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현실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성서기자들의 관심은, 다시 강조하지만 사람들을 모범적인 사람으로 계몽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강의가 어떤 분들에게는 신앙의 깊이로 안내하기보다는 공연히 생각만 복잡하게 만들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전체 강의를 요약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의미로 이렇게 질문해야겠다. 아브라함의 후처인 크투라 전승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브라함은 평범한 사내였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현실 인간으로 살았을 뿐이다. 그런 평범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끌어가신다. 그분의 섭리와 그분의 통치와 생명은 우리가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심연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를 감싸고 있다. 우리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생명 사건 안에서는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공연히 고지를 점령하려는 헛수고를 하지 않는 게 지혜로운 일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자기계시에 우리를 온전히 맡기는 삶 이외에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아래와 같은 바울의 신앙고백을 인용하는 것으로 오늘 강의를 마친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9-12)


(2007년6월28일, 목, 7:00, 대구성서아카데미 서울오프 공부모임, 수유리교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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