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딸 디나 이야기

창 34:1-31



이 글의 제목이 <야곱의 딸 디나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야곱의 아들들 이야기>라고 해야 옳다. 창세기 34장에서 디나는 한 번도 주체적인 인격체로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오빠들이자 야곱의 아들들이 주인공처럼 활개를 쳤다. 여성신학자들은 이런 본문을 언짢게 생각할 것이다. 굳이 그런 시각이 아니라 하더라도 디나 전승은 호감이 가는 이야기가 못된다. 이 이야기에는 체면, 양심, 관용, 화해가 없다. 거의 조폭들에게나 볼 수 있는 폭력과 기만이 지배한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도 나오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내 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 대목은 제쳐놓으라고 일러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성서기자는 디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했던 것일까?


청혼 이야기


창세기 기자가 제시하는 족장의 역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진다. 이 네 족장 중에서 이삭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떨어지고, 나머지 족장들은 비슷하다. 아브라함은 12-23장, 이삭은 24-27장, 야곱은 28-33장에서 중심인물로 다루어지며, 그 뒤로 34-50장의 이야기는 요셉을 중심으로 한 야곱의 아들들에 관한 것이다. 디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34장은 야곱의 시대가 끝나고 그 아들들의 시대가 시작되는 길목에 해당된다. 창세기 기자는 아마 그것을 의식하고 이 사건을 이 자리에 놓은 것 같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고 형 에서에게서 금의환향은 아니라 하더라도 비교적 환대에 가까운 대접을 받은 야곱은 세겜에 자리를 잡았다. 창 33:18-20절에 따르면 야곱은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백 크시타를 주고 그 땅을 샀다. 여기서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이상해 보인다. 그냥 하몰의 아들들이라고 하면 충분한데도 세겜의 아버지라는 말을 덧 붙였다는 건 그만한 사정이 있다는 뜻이리라. 이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세겜의 아버지가 하몰이라는 것이며, 하몰에게는 세겜 이외에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겜과 하몰이 부자관계라는 것을 적시하면서 하몰의 아들들을 거론한다는 것은 세겜과 나머지 형제들의 관계도 복잡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세겜이 지명이면서 동시에 인명으로도 거론된다는 사실에서 그런 상황을 내다볼 수 있다. 일단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세겜은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지명이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세겜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세겜과 그의 아버지인 하몰의 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34장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야곱 아들들과의 흥정에서도 하몰의 주장과 세겜의 주장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세겜과 하몰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야곱이 가나안의 세겜 땅에 자리를 잡았다는 짤막한 정보를 제공한 다음 창세기 기자는 이제 34장에서 본격적으로 디나 이야기를 펼친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1절) 디나는 호기심이 많은 그 또래의 다른 처녀들처럼 그 고장 친구들과 놀고 싶었다는 뜻이리라. 집안에 득실대는 오빠들보다는 집밖의 여자 친구들과 지내는 게 훨씬 재미있었을 것이다. 본문은 말하지 않지만 디나는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놀러 다녔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만 일이 벌어졌다. 세겜이 디나에게 성폭력을 행사했다. 본문은 그 저간의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디나가 먼저 세겜을 유혹했는지, 아니면 세겜이 디나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건지, 또는 세겜이 충동적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 별 말이 없다.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라는 구절을 근거로 본다면 세겜의 행위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겜은 디나를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청년이 처녀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 거야 시대를 초월해서 진리 아닌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성폭력으로 치닫기 전에 중매쟁이를 붙여서 정식으로 청혼하는 게 순리였겠지만, 젊은이들의 성적 욕망은 간단히 제어되는 게 아니다. 

세겜은 아버지 하몰에게 디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졸랐고(4절) 하몰은 아들을 위해서 야곱에게 청혼하러 왔다.(6절) 자기 누이가 성폭력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오빠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라.”(7절) 하몰은 아들 혼인 건을 정식으로 제기했다.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8절) 이어서 양쪽 집안이 사돈을 맺으면 얻을 수 있는 메리트를 제시했다. 이 지역 어느 곳에서나 양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세겜이 한몫 거들었다. 디나를 아내로 맞을 수만 있다면 몸값은 얼마든지 제공하겠다고 했다.(12절) 신랑 쪽의 청혼 과정은 자연스럽다. 그들은 무례하지 않았다. 아닌 말로 당신 딸은 이미 버린 몸이니 우리에게 넘겨라, 할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예의바르게 처신했다. 목축지를 확보해주거나 신부 몸값을 충분히 제공하겠다는 제의도 그들이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하몰이 그 지역의 군주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친절이 돋보인다.

야곱은 이 장면에서 완전히 배경으로 밀려나고 대신 아들들이 전면에 나선다. 그들은 누이 디나가 욕본 것에 화가 치밀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할례를 핑계로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라.”(14절) 하몰과 세겜 부자는 예상외의 반응에 당황했을 것이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할례라니! 야곱의 아들들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혼인이 가능한 유일한 길은 하몰 휘하에 있는 히위 사람들이 할례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위협조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만일 우리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17절) 그 당시 디나는 세겜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디나를 데리고 여기를 떠나겠다는 말은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몰과 세겜은 자기 주민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설득했다. 하몰이 히위 족의 군주이기도 했고, 하몰이 설명하는 야곱 가(家)의 내력이나 혼인으로 인해서 얻어질 결과들이 좋아 보였는지, 히위 사람들은 할례를 받았다. 계략에 걸려든 것이다.

이 두 장면만 비교한다면 하몰 집안이 야곱 집안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창세기 기자는 하몰과 세겜 부자의 청혼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에 반해 야곱의 아들들의 태도에는 음모가 엿보인다. 야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성서기자가 오히려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성서기자가 이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몰과 세겜의 인격적 행동과 야곱 아들들의 비열한 행동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기자에게는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일종의 목적론적 윤리관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는 데는 그 어떤 야비한 행동도 허용될 수 있다고 말이다. 어쨌든지 순수한 쪽과 불순한 쪽 사이에서 벌어지는 청혼 과정에서 우리는 무언가 불길한 조짐을 느끼게 된다. 그 뒷이야기를 따라가자.


칼을 든 시므온과 레위


할례로 인한 상처가 아물려면 최소 일주일은 필요하다. 고통이 가장 심할 때인 삼일 째 되는 날 야곱의 아들 중에서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높이 치켜들고 세겜 성을 습격했다. 디나의 오빠는 이들 이외에서 네 명이 더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이 특히 용맹한 탓인지 선봉에 섰다. 그들은 할례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히위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도 칼로 죽이고, 그 집에 있던 디나를 데리고 나왔다. 만약 이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다면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바로 이 장면에서 관객석으로부터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오지 않았을는지.

시므온과 레위 일당이 히위 남자들을 모조리 죽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야곱 아들들의 분노가 무자비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것인지, 또는 그 당시에는 그런 방식의 전쟁이 일반적인 것이었는지 오늘 우리가 모든 형편을 세세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시므온과 레위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따귀 한 대 맞은 사람이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상대방의 얼굴을 가격한 것보다 더 심한 행동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과 동일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의 조상들이 이토록 잔인했다는 사실 앞에서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잔인성은 비단 이번 사건만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에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필두로 하는 가나안 정복 역사는 이런 잔인한, 그리고 더러운 전쟁의 과정이다. 그들은 다른 민족에게만 잔인한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마찬가지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겼다는 이유로 하루에 수천 명을 살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도 아간 가족을 참혹하게 죽였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팔레스틴 원주민들과 그런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한다면 다른 민족들보다 훨씬 높은 관용정신을 보여야 당연하겠지만 유대인들은 오히려 반대였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잔인하게 행동하는가? 그것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루이스의 말을 들어보자.


여기서도 ‘더 높은 곳일수록, 더 위험한 곳’이라는 말이 적용됩니다. 유대인들이 이교도들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지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초자연이 들어오면 인간의 영혼에는 늘 좋은 쪽과 나쁜 쪽 모두를 향해 새로운 가능성이 활짝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기 시작합니다. 경건과 사랑과 겸손을 향해 나아가는 길과, 영적 교만과 자기 의와 박해의 광기로 나아가는 길이 그것입니다. 아직 영혼이 깨어나지 못했을 때의 그 평범한 미덕과 악덕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훨씬 나쁜 존재로 만듭니다. 온갖 악인들 중에서도 가장 악한 사람은 종교적 악인입니다. 모든 창조물 중에서 가장 사악한 것은 본래 하나님의 직접적 현존 앞에 서 있었던 존재(사탄)입니다. 이 갈래 길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비용을 계산하라.’(누가 14:25-35)는 주님의 말씀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C.S. Lewis, 이종태 역, 시편사색, 홍성사 2004년, 49쪽)


시므온과 레위를 중심으로 한 야곱 아들들이 저지른 집단 살해 사건은 일차적으로 종교적 광기가 몰고 온 만행(蠻行)이다. 종교적 자기 정당화는 그 무엇으로도 억제하기 힘들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집행한다는 확신이 서기만 한다면 십자군 전쟁도, 마녀사냥도 거리낌 없다. 기독교 역사에도 이런 광기의 역사가 적지 않았다. 제 2의 시므온과 레위가 우리 기독교인 셈이다. 그건 과거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 집단 살해 사건은 이차적으로 물질적 탐욕이 만들어낸 추악한 범죄 행위이다. 이 이야기의 전개과정을 보라. 시므온과 레위가 히위 남자들을 모조리 칼로 베어 죽인 다음에,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시체를 털고 온 성을 털었다고 한다. 28,29절이 이를 상세하게 보도한다.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그들은 질이 나쁜 강도들처럼 시체와 집을 털었다.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서 사로잡았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최소한의 전쟁 윤리가 작동되지 않던 고대인들의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폭력적인가?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나무랐다. 살인, 강도짓 자체를 나무란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받게 될 신상의 어려움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라.” 야곱의 발언은 얄미울 정도로 아주 현실적이다. 야곱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추궁에 아들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1절) 이게 디나 이야기의 마지막 멘트이다. 엄청난 일을 저지른 아들들에게 야곱은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 디나 이야기는 이 마지막 멘트를 하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오늘 글쓰기의 흐름이 약간 옆으로 빠지는 위험성을 감수하고 ‘누이’라는 단어를 알레고리 방식으로 해석해보자. 어쩌면 이 누이는 유대민족 자체를 의미할지 모른다. 성서기자는 디나 이야기를 통해서 유대민족이 주변을 향해서 거칠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변의 제국들이 유대민족을 창녀처럼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몰과 세겜이 청혼하러 온 처음 장면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한 말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라.”(7절) 이런 방식의 해석이 가능하다면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잔인한 행위도 용납된다. 그런 잔인한 방식의 원수 갚기가 아니라면 유대민족이 그 땅에서 버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자칫 견강부회로 이용될 때가 많으니까 여기서 접도록 하고, 아들들의 반응을 조금 더 따라가자.

디나 이야기의 전반에 깔린 기조는 야곱 아들들의 분노이다. 처음과 끝 장면이 온통 분노로 뒤덮여 있으며, 청혼의 과정에서도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가 당한 것에 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시므온과 레위가 히위 족을 진멸시킨 사건은 인간의 원초적 분노가 아니면 해명이 불가능하다. 전쟁 후에 그 지역에서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일단 히위 사람들을 전멸시켜야만 했다. 야곱의 아들들만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유대인들은 늘 이런 분노를 안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것은 피해의식일 수도 있고, 선민의식일 수도 있다. 그들은 실제로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으며, 그것이 아주 독특한 선민의식과 결합하게 된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이 더러운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한 그 실체는 본문이 여러 번 강조하고 있듯이 누이 디나가 세겜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당시에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고대인들만이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런 성폭력 사건 앞에서 유대인들도 떳떳할 게 하나도 없다. 그들에게는 더 심각한 사건들이 많았다. 예컨대 디나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곱의 큰 아들인 르우벤은 아버지의 소실인 빌하를 범한다.(창 35:21,22) 유다와 며느리 사이에 벌어진 성 매매라든지 다윗과 밧세바 사건을 비롯해서 다윗 왕조의 궁정에서 일어난 근친상간이 그런 것들이다.

성폭력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그것을 막을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주제는 또 다른 전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필자가 심도 있게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성서본문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상식적인 관점으로 한 마디 하자. 성이 폭력적으로 행사되는 이유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성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수십만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와 결합하기 위해서 극심한 경쟁을 거쳐야 하듯이 인간 종의 유전자에 생존경재의 원초적 힘들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성폭력은 그런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셈이다. 오해는 마시라. 필자가 유전자 결정론을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남자들의 성폭력으로 인해서 여자들의 삶이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는지는 내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성인을 향한 성폭력도 그렇지만 미성년을 향한 성폭력은, 또는 성매매는 두말 할 것 없이 가장 파렴치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런 성폭력을 방지하거나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것의 근원적인 작동 원인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의 폭력이 거론된 셈이다. 성폭력과 살해폭력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아주 원초적이다. 폭력을 통해서 자기와 그 후손을 지켜야 한다는 이 생존본능이 유인원 시절부터 인간의 삶에 깊이 뿌리내렸다. 생각해보라. 아프리카 초원에서 다른 야수들과 생존경쟁에 노출된 우리의 선조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직립인)가 그 악조건을 버텨온 과정을 말이다. 다른 야수들과의 경쟁만이 아니라 빙하기를 비롯한 자연과의 투쟁도 그들을 폭력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 폭력은 인류의 숙명이다. 오늘도 여전한 숙명이다.

창세기 기자는 실낙원 이후 인류가 맞은 현실을 피비린내 나는 폭력 사건으로 시작한다.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돌로 쳐 죽인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성서가 이런 잔인한 형제 살해 사건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성서기자의 눈에 이 세상이 그렇게 비쳤다는 데에 있다. 성서기자들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인간의 저주스런 역사를 두 눈 부릅뜨고 직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인간은 형제까지 살해할 준비를 갖춘 종(種)으로 보였다.

이제 노골적으로 묻자. 인간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인가? 에릭 프롬은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상,하권)에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폭력성은 문명과 정비례했다. 문명권과 비(非)문명권이 조우하면 늘 문명권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잉카 문명을 파괴한 스페인이나 북미의 인디언을 대량 학살한 영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 이외에도 크고 작은 전쟁에서 보듯이 문명국가는 그렇지 않은 세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고 한다. 고대 야만인들이 지금 세련된 문명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보다 훨씬 폭력적이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분석이다. 여하튼 지금 고도의 문명생활에 심취하고 있는 21세기의 우리가 여전히 여러 차원에서 여전히 폭력적이며 파괴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글머리에서 필자는 성서기자가 디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 왔다. 그런데 대답이 쉽게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성서기자는 야곱 형제들을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는다. 객관적인 독자의 눈에도 야곱의 아들들보다는 하몰과 세겜의 태도가 훨씬 신사적인 것으로 비친다. 더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다. 이 이야기의 처음은 디나가 놀러나갔다가 세겜에게 강간당했다는 사실에 대한 보도이며, 마지막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했다는 야곱 아들들의 뻔뻔한 자기변호이다. 이 이야기의 어느 구석에도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흔적이 없다. 할례 운운은 단지 그들의 핑계일 뿐이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역시 잔혹한 전쟁 영웅의 면모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에 직면했다. 사사들과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돈독했다. 그런데 유독 창 34장에 보도되는 디나 이야기에서만은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별로 유쾌하지도 않고, 신앙적이지도 않은 디나 이야기를 성서기자가 이 대목에서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성서기자의 깊은 통찰과 반성에서 나온 결과이다. 필자는 그것을 두 가지로 본다.

첫째, 폭력은 결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구약의 다른 대목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폭력을 명령하는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본문은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받은 훨씬 큰 폭력을 전제한다. 반면에 디나에게 벌어진 사건은 야곱 가족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하몰과 세겜의 청혼으로 인해서 야곱 아들들의 반(反)폭력은 정당성을 잃는다.

둘째, 폭력적인 방식으로는 이스라엘이 생존할 수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금 비굴하게 보이는 야곱의 자조 섞인 한탄이 바로 그 사실을 암시한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지금 야곱의 아들들은 그런 위험을 자초한 것이다. 성서기자는 야곱 아들들이 하몰과 세겜에게 앙갚음을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무모했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닐는지.


디나 이야기 다시 쓰기


오늘 우리는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의 어두운 모습이다. 이렇게 성경읽기를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본문을 새롭게 읽어보자. 아니 오늘 본문을 다시 써보자. 이런 작업은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들도 교육적인 관점에서 흔히 하는 일 아닌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위해 해피엔딩으로 재구성해보겠다. 

히위 족이 살고 있는 동네에 디나 가족이 이주해 왔다. 그들은 모두 양을 치는 사람들이다. 장날을 맞아 디나는 놀러 나왔다. 그 동네 처녀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 동네 총각인 세겜이 디나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세겜은 자기의 사랑을 디나에게 고백했고, 그 뒤로 두 사람은 깊이 사귀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갈수록 디나의 걱정은 늘어만 갔다. 이방인과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아버지와 오빠들에게서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디나는 이 사정을 세겜에게 전하고 헤어지자고 했다.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세겜은 결국 일을 저질렀다. 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둘은 몸을 섞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디나의 가족들이 세겜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에서 말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듯이 야곱은 이들의 혼인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들도 분을 삭이기 힘들었지만 이제 어찌하겠는가, 누이가 세겜을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디나와 세겜은 우여곡절 끝에 혼인에 성공해서 아들 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한다. 평화의 영이여, 저희에게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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