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일천번제와 꿈 이야기

왕상 3:4-15


위의 본문(왕상 3:4-15)은 집권 초기의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일천 번제와 여호와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했다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까지 약속으로 받은 꿈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천번제* 이후에 곧장 꿈 이야기로 이어지는 본문의 진행으로만 본다면 두 이야기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듯이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성서본문 자체가 그것에 대해서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 더구나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본문의 진술이 솔로몬에게 호의적인 것인지 아닌지도 정확하지 않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행위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나온 것 같지만 산당이 가나안의 토착종교에서 사용되던 성소였다는 사실과 천 마리의 번제 행위가 무조건 바람직하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본다면 성서기자가 솔로몬에 대해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무언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일천번제는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 번의 번제를 드렸다는 게 아니라 일천 마리의 짐승을 번제로 드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천 마리의 짐승이라는 진술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과장이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일천번제 전승과 지혜 전승이 원래는 별개의 것이었는데, 훗날 편집자에 의해서 통합되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는 일천번제 헌금이 유행하다시피 했다. 각종 집회 때마다 일련의 번호를 매긴 헌금을 일천 번이나 드리는 행위가 그것이다. 매번 만원씩만 드리다하더라도 결국 일천 만원을 헌금으로 드리는 셈이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수한 마음이야 이해 못할 바가 없지만 성서의 근본이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왜곡된다는 점에서 이런 행태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이런 헌금의 동기가 솔로몬의 축복(지혜, 부귀, 영광)에 대한 욕망까지 가 닿는다고 한다면, 이건 결국 여러 방식으로 성서기자가 암시하고 있는 솔로몬의 불신앙, 또는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성서기자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 성서기자의 집필 목적이 여기서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성서기자의 집필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성서텍스트의 해석학적 요청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말이다. 성서기자는 신문기자처럼 솔로몬 사건을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을 그대로 기술한 게 아니라 자기가 살던 ‘삶의 자리’에서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그걸 바탕으로 편집했다. 그런 해석이 옳은 텍스트는 살아남았으며, 틀린 텍스트는 사라지거나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전자의 텍스트가 지금 우리의 경전인 66권 신구약성서이고, 후자가 위경이나 외경들이다. 성서기자들은 하나의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 구도 정진하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성서기자의 편집 의도와 목적이 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가 성서를 읽으면서 길을 잃는 근본적인 이유라면 이유라 할 수 있다. 또는 전문적인 신학 훈련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에게 일천번제를 드렸고, 지혜를 구했다. 성서기자가 그걸 그대로 말하려는 것이냐, 하는 게 우리의 질문이다. 만약 성서기자가 솔로몬을 총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게 분명하다면 이 일천번제와 지혜 전승도 솔로몬을 빛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평가절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어떤 예단을 내리지 말고 성서기자가 안내하는 그 역사의 심층으로 들어가자. 지혜의 영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바로의 딸

오늘 본문의 바로 앞 대목에서 성서기자는 솔로몬이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혼인관계를 맺고 그의 딸을 맞이했다고 지적한다.(왕상 3:1) 고대에는 외교문제를 혼인으로 해결하는 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솔로몬도 이집트와의 끈끈한 동맹관계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서가 단순히 일반 왕족의 역사라고 한다면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솔로몬의 이 혼인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방인과 혼인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최고의 권위로 자리하고 있는 모세의 법이 그걸 명시적으로 지적한다. 그런데 지금 왕이 앞장서서 그걸 어긴 셈이다.

참고적으로, 다윗 후계자 문제로 벌어진 소위 ‘왕자의 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단 예언자는 이방인과와 혼인 문제에 대해서 왜 침묵을 하는가? 그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묵살당한 것인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이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이미 뒷발 늙은이 신세가 되고 만 것일까? 이 일이 벌어질 때가 솔로몬 재위 초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성서기자는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다윗의 뒤를 이어 최고 권력을 손에 넣은 솔로몬이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집권 초기에 바로의 딸을 데려오는 악수를 두었을까? 이에 관해서 성서기자는 아무런 말이 없다. 말이 없다고 해서 성서기자가 솔로몬의 이런 행태를 두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솔로몬의 집권과 통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가타부타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솔로몬의 집권은 정상적인 게 아니었다. 다윗이 늙자 두 왕자인 아도니아와 솔로몬이 각자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대세는 아도니아에게 쏠렸지만, 나단과 밧세바의 권모술수에 의해서 왕위는 솔로몬에게 계승되었다. 솔로몬은 아도니아를 비롯해서 그를 추종했거나 지난날 다윗을 대적했던 사람들을 싹쓸이 방식으로 처리한다. 마지막으로 시므이를 죽인다. 성서기자는 그의 죽음을 보도한 후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왕상 2:46)고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전했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버렸다.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으로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모욕했다가 다윗이 압살롬을 제압하고 돌아올 때 간신히 용서를 받은 인물이다.(삼하 16,19장 참조) 그의 행위도 행위였지만 사울의 친족이었다는 게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유언에 따라(왕상 2:8 이하) 그를 처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열왕기상 기자는 솔로몬의 입지가 강화된 그 순간에 무슨 이유로 솔로몬의 혼인 이야기를 거론하는 걸까?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 등, 할 일이 많은 그 시기에 이방인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은 솔로몬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리는 게 아닐는지. 물론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집트와의 정치적 동맹이라는 차원에서 실행된 사건이기는 하지만, 한 국가의 운명이 줄타기 방식의 외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확보된다고 보는 성서기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솔로몬에 대한 성서기자의 판단은 부정적이라는 게 분명하다. 

사실 열왕기상이 전하고 있는 솔로몬은 별로 위대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으로 왕이 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잘난 아버지와 매력적인 어머니를 만난 행운아에 속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걸 용서하시라.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기업의 총수가 된 재벌 2세와 비슷하다. 성서기자가 전하는 솔로몬의 업적은 단 한 가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다. 솔로몬은 재위 4년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도 순전히 그의 능력은 아니었다. 아버지 다윗이 이미 그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그것 이외에 솔로몬이 한 일이라고는, 조금 과장해서 주색잡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에티오피아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이야기를 전한 다음에, 솔로몬의 재산 목록이 나온다.(왕상 10장) 그가 사용하는 그릇은 모두 금이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컸다.”(왕상 10:23)고 한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하나님의 복으로 묘사한 그 즉시 솔로몬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고 지적한다.(왕상 11장) 그 뒤로 솔로몬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다만 아버지 다윗 덕분으로 당대에는 체면을 유지하지만 그 아들 대에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다. 그 책임이 전적으로 솔로몬에게 있다는 게 바로 신명기사가의 역사관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의 딸 외에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등등, 여러 이방 여인들을 후궁과 첩으로 삼은 일이다. 그 여인들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게 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했다.”(왕상 11:6) 성서기자는 이방 여인과의 혼인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했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이런 지적에 이어 솔로몬에게 후궁이 칠백 명이고, 첩이 삼백 명이었다는 보도가 나온다.(왕상 11:3)

신명기사가의 글쓰기는 절묘하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을 칭찬하는 건지, 또는 조롱하는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특히 솔로몬의 치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글머리와 몰락이 시작되는 끝 대목에서 각각 이방 여자 문제를 거론한 것이 그렇다. 필자가 보기에 3:1절에서 바로의 딸을 거론한 것은 의도적인 글쓰기로 보인다. 성서기자는 솔로몬의 떡잎이 비틀어졌다는 사실을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가장 큰 악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해석해야 한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악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도덕성이나 무능력이 아니라 우상숭배이다. 솔로몬의 말년이 이방 여인들을 통한 우상숭배로 기울어졌다는 진술은 바로 솔로몬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모르긴 해도 성서기자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을 건축했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상당히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것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니 말이다. 성서기자는 솔로몬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긴다는 심정으로 가능한대로 모든 것을 사실대로 서술했을 것이다. 솔로몬이 지혜로운 왕이었다거나 성전을 건축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름으로 국력을 신장시켰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성서기자는 3장1절에서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는 멘트를 지나가는 투로 던짐으로써 솔로몬에 대한 전체적인 판단을 부정적으로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위인들의 업적에 대해서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통 문화유산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늘 순수한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희생된 사람의 숫자만이 불구가 된 사람도 천문학적이고, 거기에 동원된 물자도 엄청났다. 로마의 콜로세움도 그렇고, 남부독일 퓌센에 있는 ‘백조의 성’도 그렇다. 군주들의 권위나 오락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이 강요된 결과물들이다. 그런 것들에 비해서 조금 소박하겠지만 얼마 전에 불탄 숭례문도 혹시 그런 그림자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는지. 오늘도 그럴 열망에 빠진 정치인들이 없지 않다. 이명박 정부는 경부운하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당할 것인지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잘 모르겠다. 더구나 경제적인 실효성도 아주 불확실한 상태에서 말이다.


선악분별의 지혜

비록 솔로몬이 욕을 먹어 싸다 하더라도 지혜를 구했다는 것만은 우리가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주장이 가능하다. 여기에 근거해서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솔로몬 같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본문의 설명을 그대로 따른다면 솔로몬은 참으로 순수한 사람이다. 우리가 그의 기도*를 흉내 내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 같다. 여호와께서 밤에 꿈으로 나타나시어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솔로몬은 기특하게도 ‘지혜’를 구했다. 그러자 여호와는 그를 무병장수고 구하지 않고, 원수 멸망도 구하지 않았다고 칭찬하시면서 지혜만이 아니라 부귀와 영광도 주겠다고 답변하셨다. 마지막 말씀은 다음과 같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4) 이보다 더 확실하고 큰 하나님의 축복을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 필자는 개신교회의 기도에 대해서 반성한 점들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기도가 너무 많다. 기도는 많을수록, 뜨거울수록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게 어떤 성서적 근거가 있는지, 어떤 신학적 근거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몇몇 근거가 댈 수는 있지만, 동시에 그것에 반대되는 근거도 댈 수 있으니, 이런 문제를 단순히 성구를 들이미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은 입을 다물게 된다. 그분의 임재 앞에서 충격을 받은 사람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필자가 보기에 기도도 배우는 게 좋다. 좋은 기도는 좋은 시처럼 우리가 따라 읽고, 받아쓰고, 가능하면 외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기도를 한번쯤 따라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아니 반드시 기도 내용에서 가능하면 솔로몬은 빼는 게 좋을 것이다. 그의 지혜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왕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르며, 그리고 솔로몬의 말년이 사울 왕의 그것처럼 불신앙적이었다고 한다면 그의 전체 삶도 불신앙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기 자식을 솔로몬처럼 지혜롭게 해달라는 기도는 결국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가능성이 높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고 야훼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신다는 위의 본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배울 게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와 더불어(왕상 3:16-28) 솔로몬의 이 꿈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애독되는 본문이다. 솔로몬은 먼저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성실하게 행했으며,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어서 솔로몬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아니라 여전히 다윗을 내세운다. 솔로몬은 주체가 아니라 다윗에게 종속되는 객체로 묘사되었다. 자신을 ‘작은 아이’라고 까지 표현했다는 사실에서(7절) 우리는 솔로몬이 자기를 철저하게 낮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서 이렇게 지혜를 구한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절) 이런 구절은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여겨도 좋을만한 아포리즘이다.

그러나 말은 누구나 그럴듯하게 할 수 있지만 그 말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가, 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이다. 지혜를 달라는 솔로몬의 진술이 직접 자신의 생각인지, 또는 연설문을 전문적으로 작성해주는 서기관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에는 뭔가 음모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다른 문제는 앞에서 짚었으니까 접어두고, 자신을 작은 아이로 표현하는 그 겸손이 실제의 솔로몬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짚어야 한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한 뒤에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호소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 르호보암은 이스라엘의 청을 받아들이라는 원로 각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솔로몬보다 더 심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젊은 친구들의 말을 듣는다. 그 뒤로 역사가 어떻게 흘렀는지는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이를 놓고 본다면 솔로몬은 백성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한 왕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정권을 잡을 때 반대파에게 행한 일련의 행동을 볼 때도 역시 그는 피눈물도 없는, 조금 과하게 말해서 하이에나처럼 권력에 몰입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친구가 자신을 ‘어린 아이’ 운운하고 있으니, 오늘 우리는 당혹스럽다.

솔로몬을 너무 나쁜 쪽으로만 보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는 분들을 위해서 아무래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다는 게 바로 이런 데서도 나타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극과 극으로 나뉜다. 보릿고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비록 정치적인 독재였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부분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느냐, 하는 주장도 있다. 경제와 정치를 구분해서 보자는 논리이다. 존재가 악하면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하다는 점에서 군사독재자의 경제적 성과마저 부정하는 쪽도 있다. 비약인지 모르겠으나, 히틀러 시대의 나치 장교에게서 우리는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가정에는 둘도 없이 따뜻한 남편이요 아버지인 이 사람은 포로수용소에서 자기 아내와 딸 같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다. 솔로몬을 전체적으로 실패한 왕, 불신앙의 전형으로 보고 그의 모든 행위를 부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괜찮은 부분은 인정해줘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볼 주제이다. 그걸 누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우리의 생각이 완전하지는 못하겠으나 가능한대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 최선의 길이 바로 성서기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는 “선악을 분별하는”(9절) 능력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필자는 구약성서의 다른 구절이 떠올랐다. 창 3:5절에서 선악과를 취하라고 이브를 유혹하는 뱀이 이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이 창세기 기자에 의하면 인간의 타락인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지혜이다. 창세기의 이 선악 분별과 본문의 그것이 히브리어로 똑같은 것인지, 그래서 신학적으로도 동일한 의미인지 필자가 단정적으로 언급할 입장은 못 된다. 다만 필자가 참고한 루터 역본에 따르면 양자는 자구(字句)마저 똑같다. “Was gut und böse ist.” 성서해석에서 낱말 맞추기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유희에 너무 큰 무게를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서 필자는 창세기와 열왕기상에서 나오는 단어가 똑같다는 사실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게 인간에게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원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재판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것이다. 가짜 엄마와 진짜 엄마를 구분한 솔로몬의 지혜는 물론 아주 놀랍다. 그러나 칼로 아이를 잘라서 각각 여자에게 주라는 솔로몬의 아이디어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는 점에서 뛰어나기는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그런 도박을 벌이는 건 결코 참된 지혜라고 보기는 힘들다. 시비조로 한 마디 더 한다면, 그런 일은 민중들의 삶을 가볍게 여기면서 자신의 권위와 지혜를 내세우는 독재자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이 아닐는지. 

선악과 설화 이래로 인간은 선악을 구분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욕망이 바벨탑 설화에서는 하늘 높은 곳까지 능력을 떨쳐보자는 욕구로 발전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슬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비둘기처럼 겸손하고 뱀처럼 슬기로우라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약의 온갖 지혜 문서에 이르기까지, 또는 깨어서 시대를 분별하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까지 지혜와 기독교인의 삶은 단단히 결탁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솔로몬이 구하는 지혜는 매우 권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왕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재판하기 위한 지혜를 구했다. 옳음과 그름을 명백하게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의 왕권은 초석에 올라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앞에서 인용한 창세기의 선악과 설화에 근거해서 볼 때 선악 구별은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려는 탐욕의 문제이다. 이런 성서의 사상을 인용하지 않고 우리의 세상살이만이라도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문제는 아주 분명하게 보인다.

다른 분야는 접어두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재판에 연관된 분야만 짚도록 하자. 오늘의 법조인들이 바로 선악을 구별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 법조인들이 세상살이의 선과 악을 명백하게 구분해낼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서로 이해타산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민사소송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실증적인 범죄 행위를 다루는 형법도 역시 선악을 온전하게 구별할 수 없음은 비슷하다. 절도, 폭력, 강간, 살인, 유괴 등등, 이런 범죄 행위가 아무리 명백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위에 이르게 된 저간의 사정은 우리 인간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다. 더구나 법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법이 인간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파괴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법 무용론을 제창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선악 분별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몫이라는 사실과, 그런 선악 분별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은 경우에 따라서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악 분별의 능력을 원하는 솔로몬의 기도가 그렇게 순수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서기자가 바로 그것을 본문의 행간에 감춰두고 있는 건 아닐는지. 


한 바탕 꿈

설령 “선악을 분별하게 해 달라.”는 솔로몬의 요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권력의 문제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축복한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하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축복의 내용보다도 그것의 결론이 중요하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4) 여호와의 길, 법도를 따르고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여호와의 축복은 모두 취소될 수밖에 없다.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지혜보다 여호와의 길과 법도가 더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다. 성서기자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오늘 지혜 전승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성서기자는 솔로몬의 지혜, 부귀, 영광이 아니라 그런 축복과 약속을 받았는데도 솔로몬이 여호와의 말씀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것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솔로몬의 지혜 전승은 왕권의 신적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한 조처라고 한다. 솔로몬은 고대 근동에서 널리 행해졌던 관습에 따라서 꿈을 통해 계시를 받기 위해서 기브온 산당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라스 샤므라 전설에 나오는 두 왕, 즉 크르트 왕과 야크트 왕,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왕의 문서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신의 특별한 계시를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는 이집트 문학의 원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스핑크스 상(像)에 새겨진 토트메스 4세 비문의 내용과 아주 흡사하다. 이 비문에 따르면 토트메스 4세는 멤피스 근처의 스핑크스 상 바로 옆에서 자다가 계시를 받고 곧 도시로 돌아와서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잔치를 베푼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린 뒤에 신의 뜻을 자신의 왕실과 신하들에게 알렸다.(John Gray, 국제성서주석, 열왕기상, 192 쪽 이하 참조)


*박노자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이 지난 고대 역사에서 별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1145년)를 근거로 한국과 일본이 늘 적대적인 것처럼 알고 있으니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왜국과 왜인들을 일관되게 반(反)문명, 야만 세력으로 묘사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전하는 것뿐이지 그 이전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르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만 근거해서 고대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것은 실체를 오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관점은 성서텍스트에도 그래도 적용된다. 성서기자가 그 이전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우리가 성서텍스트에 접근하는 단초라 할 수 있다. (“박제상은 적국으로 갔는가, 한겨레 21, 701호, 2008년 3월18일)


위에서 참조한 존 그레이의 설명이 자칫하면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서의 모든 이야기를 세속화함으로써 결국은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킨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성서에는 꿈 이야기가 많다. 오늘은 꿈에 대해서 더 이상 논의하지 말자. 그것은 오늘 여기서 지나가면서 다루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포괄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승의 전체적인 틀에 대한 그레이의 설명은 옳기도 하고, 그런 설명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권위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성서는 솔로몬을 영웅으로 보려는 게 아니라 그런 이들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전하려는 것이다. 성서기자들의 영성에 기대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시는지를 배우면 그것으로 성서읽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는 신앙생활에서 솔로몬을 더 이상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을 그만 두었으면 한다. 그가 드린 일천번제는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씀의 거역에 가까우며, 그가 구한 지혜도 역시 그의 삶 전체에 드리운 불신앙을 돋보이게 하는 것뿐이다. 솔로몬의 꿈은 한 바탕 헛된 꿈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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