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7편 강해-바벨론에서의 고통스런 기억

 

오늘 우리 함께 공부할 시편은 137편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아멘! 예, 137편, 이것도 좀 유명한, 잘 알려진 그러한 시편입니다.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의 시편이네요.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제가 몇 번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린 대로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어떤 일입니다. 성경이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 안에서 나온 거거든요? 역사에 있었던 어떤 일들을 기초로 해서 됬습니다. 신약성경도 물론이고요.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사건이 핵심이죠, 또 뭘까요? 신약성경을 예로 든다면 예수님의 사건과 초기그리스도교의 구체적인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그렇거든요? 구체적인 그러한 예수님의 사건과 초기그리스도교회의 일들입니다. 구약은 방금 말씀 드린 대로 기원전 587년,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죠. 그 때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 되었습니다.이 햇수예요. 다시 한 번 그 햇수만 딱 끊어서 중요하다고 할 수 없죠,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바벨론이 아주 큰 제국이고요. 그 당시 그 근동지방을 주름잡던 나라이기 때문에 이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조공도 바치면서 겨우겨우 지탱해 나갔거든요? 그 때 외교가 필요한 거죠, 지금 우리나라하고도 비슷합니다. 비슷해요. 러시아 중국, 일본 이게 다 제국들이었잖아요? 지금도 제국인 나라들도 있고, 미국, 이러한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 국가의 운명이 달라지잖아요? 일제에 우리가 합병될 때는 일본에 기대는 게 그나마 낫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됬거든요? 외교 전략을 잘 못 짠 거죠, 지금도 굉장히 중요한 때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이 그러한 외교의 실수로 이런 저런 문제로 인해서 결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완전히 끔찍한 사건이었어요. 그런 충격적인 사건을 맞게 되면 어떻습니까, 근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잖아요? 우리도 당장 불치병에 딱 걸렸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6개월이다, 시한부로 결정이 딱 나왔다고 하면 뭔가를 근본적으로 생각할거예요.

 

자기 삶을 뒤돌아보기도 하고, 죽음이 무엇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기원전 587년 이때에 자기네의 이러한 근본적인 회의가 든거지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회의예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 이렇게 멸망당한다고 하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멸되고요. 성전이 궤멸 됬습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37편은 바로 이 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합니다. 기원전 587년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왕족을 비롯한 많은 당시 귀족들, 그리고 지도급 인사들이 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다 간 건 아니지요. 많은 수가 갔습니다. 그들이 예뻐서 바벨론사람들을 끌고 간 게 아니라 그게 식민정책이거든요? 식민지의 정신을 희석시키는 거지요. 그 정신세계를 끌어갈 지도자들을 바벨론 수도로 데려가서 왕궁에서 잘 먹이고 다니엘서 같은 데에 나오지 않습니까, 왕궁에서 왕의 음식을 같이 먹게 하고 잘 대접을 한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 사람이 일제사람이 일본에 유학가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지도자들을 바벨론을 끌어가는 것하고 또 하나 식민정책에 중요한 것은 토착예루살렘하고 유대나라에 자기네 바벨론 사람들을 끌어다가 이주시키는 거지요. 이런 일들을 꾸준하게 행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지역에는 여러 나라 민족들이 휩쓸려서 살았어요. 순수자기 민족이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그런 거거든요, 다른 나라 제국들이 이주해서 살았을 때 그들하고 쉽게 가족관계도 맺고 결혼하고 혼합된 지역을 가리켜서 사마리아라고 해요. 사마리아 지역에는 이방 제국사람들이 들어와서 같이 어울려서 살았습니다. 많이 혼합되었지요. 남쪽인 유대에서는 그걸 극구 반대해서 자기들의 혈통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대하고 사마리아는 계속해서 배척, 대립하고 그랬지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예,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서 50년 정도 살았습니다.

 

포로로 갔다가 몇 년에 걸쳐서 귀환을 하게 되는데요, 그게 50년 만에 돌아오고 2차, 3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서 경험했던 것을 지금 뒤돌아보면서 쓴 시예요. 50년 쯤 지난 다음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이제 바벨론이 망했지요. 페르시아에 의해서 망하잖아요? 그런 역사적인 흐름을 보면서 바벨론에서 있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리는 그런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 이렇게 노래합니다. 1.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바벨론 강가에 앉아서 이렇게 울었다고 하는 것, 같이 모여서 유대인들끼리 모였으니까요, 뭔가 종교적인 행위를 했겠지요? 그게 금지됬다면 몰래 했겠지요? 바벨론 강가라고 하면 어디를 얘기할까요? 바벨론 강가이면 유프라테스강 유역, 티그리스 강이라든지, 뭐, 그런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바벨론 문명의 발생지가 거기잖아요?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의 유역입니다. 아마 근처 강변에 모여서 고국을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탄식하는 노래지요. 이건 아주 절실해요. 아마 이런 묘사가 시편 여기 말고 다른 데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제가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울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슬픔, 이걸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마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끌려간 왕족이나 지식인들의 신세하고 비슷합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를 막론하고 비슷하게 역사가 흘러 간 것 같아요. 그래서 싸우고 나라가 커지면 주변 나라 넘보게 되고 지배하고 식민지 만들고 거기서 자기들의 문명을 이식시키려고 하고, 그들이 얼마나 고독했을지 억울했을지 불안해했을지 그걸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시온을 기억했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을 기억했다고 하는 거거든요? 똑 같은 뜻입니다. 시온이라고 불리는 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입니다. 이건 뭐, 누구나 다 자기고국이 그립지요. 그런 점에서 아주 일반적인 마음이기도 하고요.

 

이스라엘 민족은 특이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대한 집착은 더 심합니다. 거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하지요. 그건 하나님이 계시는 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곳,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거기를 떠났다고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저들이 어쩔 수 없이 바벨론의 강제이주로 인해서 떠났는데, 그건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심정이거든요? 마음대로 돌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강가에 앉아서 슬퍼서 자기들끼리 노래 부르고 고국을 그리워하고 그랬어요. 저도 유학생활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건 곧 돌아온다는 생각이 있었어도 외국에 산다고 하는 게 어떤지는 조금 짐작이 갑니다. 어떤 절기, 축제기간이나 그 나라 절기가 되면 독일에는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다 집으로 가거든요? 외국인 학생들만 거기 남아가지고 외롭게 지내지요.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좀 이상한 표현이 나와요.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악기잖아요? 악기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 거죠? 노래라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수금을 걸었다고 하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만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못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만 접어 두는 거지요. 그 이유는 3절에서 자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 한 번 노래 불러봐, 너희 나라 노래 불러봐, 이렇게 조롱한 것 같아요. 조롱이기도 하고 강제였든 거 같습니다. 바벨론의 이 귀족들이이나 이런 사람들이 양반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궁정이나 이런데서 잔치를 베풀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연주도 시키고 노래도 시키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걸 그만 두었다고 하는 겁니다. 한쪽은,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들이잖아요? 저쪽은 주인입니다. 주인이 포로들에게 그걸 요구했어요. 이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수모였습니다.

 

수금을 아예, 버드나무에 걸어 두었다, 이 표현은 굉장히 문학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입니다마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심정을 4절에서 6절 사이에 쭉 설명하고 있네요. 4절 이렇습니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사실 이방 땅 에서도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긴 해야 되겠지요. 어디서나 하나님을 기억해야 되니까요. 그러나 이건 그 상황이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들의 강제 적인 요구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불러야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작부들처럼 술집에서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비슷한 신세거든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노래가 하나의 유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지요. 우리는 그렇게 실감이 되지 않는데 그 당시 이 시편기자의 심정은 대단했을 겁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끊임없는 피식민지 생활이었거든요? 끊임없는 디아스포라 신세여서 그렇거든요?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자기들끼리의 종교와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던 그들, 그러나 끊임없이 손가락질을 받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심정이 이런데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찌 이 이방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냐고 하는 겁니다. 5절에 이렇게 표현하지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은 도시인데 이게 부른다고 해서 대답하는 건 아니지요. 이건 의인화라고 합니까? 사람처럼 보면서 부르는 거예요.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이방인들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이건 하나님을 파는 것과 비슷한 거니까 그건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成인 예루살렘을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예루살렘을 잊는 것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오른손이 재주를 잊는 게 낫다, 오른손의 재주는 이 수금을 타는 재주지요? 악기를 잘 다루는 재주, 그게 없는 게 낫다, 그걸 잊어버리는 게 낫지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6절도 마찬가지네요.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거지요?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할 바에야 그런 거예요. 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내가 예루살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만약에 그렇게 말한다면 이방인들을 위해서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즐거움에 빠지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쪽 문화에, 바벨론 문화에 완전히 예속되는 거지요. 당분간이라도 그렇게 엔터테이먼트라고 할까, 유흥에 빠지게 된다면,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벙어리가 되는 게 낫겠다, 그 얘기입니다. 이 시편기자가 예루살렘을 향한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에요,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중심으로 한 여러 유대인 포로수용소를 운영했잖아요? 그런 영화에 보면, 다큐멘타리도 나오고요, 영화에도 있고요. 그런 장면이 많이 있습니다.

 

포로들 중에서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을 다 모아요, 그들 교향악단을 만듭니다. 그리로 사람들이 가요. 일단 교향악단에 들어가면 죽는 건 면 하니까 그러니까 포로수용소에서 악기를 연주합니다. 포로수용소 소장이나 그들을 위해서라든지 군대에는 그런 장교들이나 사병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포로수용소를 그 당시에는 군대가 운영했으니까요, 하여튼 거기 운영하는 직원들까지 포함해서 그런 잔치 같은 걸 베풀고 하면 연주를 해야 됬습니다. 그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리고 이런 연주하는 장면들이 기억납니다. 새로운 포로들이 수용소 안으로 들어 올 때 환영하는 뜻으로 연주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들 동료, 친지들이 들어오는데 죽음의 수용소로 들어오는데 어쩔 수 없이 연주할 수 밖 에 없는 그들의 심정을 오늘 여기 본문 하고 빗대서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참혹한 거예요.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안 할 수도 없고 아예 벙어리가 되는 게 낫고 손이 망가지는 게 낫지 어떻게 예루살렘을 외면하는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겠냐, 그러한 시인의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7절에 이 시인은 분위기를 바꿔서, 자기 아픔 심정들, 경험을 노래한 다음에 하나님을 향해서 탄원합니다. 원수를 갚아 달라, 거의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기억해달라고 그러지요?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이 어땠을까요? 상상이 가지요? 바벨론에 있는 바벨론 군사들 당시 가장 막강한 화력을 갖고 있었던 군사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을 다 무너뜨리고 다윗성을 다 무너뜨리고 솔로몬 성전 남아 있던 집기들을 다 훔쳐내고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어요? 다 불태워지고 완전히 초토화 됬지요. 전쟁의 장면은 어떤지 제가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알겁니다. 특별히 패전국가의 백성들은 그건 뭐, 사람이 아니지요. 짐승과 같이 다뤄지죠. 모든 재물들 다 빼앗기고요, 강탈당하고요, 노약자들이 많이 죽고 많은 또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그런 일들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패전국이 끔찍한 일들을 많이 당하는 거예요.

 

그날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거지요. 에돔 자손을 치소서 지금 시편기자의 마음이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들이 당했던 끔찍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심정으로 에돔 자손을 치소서, 에돔 자손이 그 지역을 다스리던 바벨론 족속이거든요? 그 전체 지역을 가리켜서 에돔 자손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이죠, 그들의 말이, 에돔 자손들이요. 지금 바벨론 군사들로 대표되는 그들이 이렇게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에 외쳤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예루살렘을 깡그리 박살냈다는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치소서,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8절과 9절에 이어서 시편기자는 자신의 증오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대단히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바벨론을 향한 저주가 막 쏟아져요. 8절에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8.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절에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9.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아, 이런 대목은 찬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끝까지 이렇게까지 앙갚음을 할 수 있냐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들끼리 모여서 이것 갚자, 어린아이들까지 죽이자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요구한다고 하는 게 이게 가능하냐고 하는 겁니다. 오늘 여기 137편은 바벨론이라고 하는 한 민족을 향한 거지만 시편 앞부분에는 그 개인을 향한 증오심도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구절들만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자기가 당한대로 다 갚아야 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어요.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과 반대되는 가르침을 많이 받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듣고요. 또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그러한 바울의 가르침도 듣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오늘 여기 137편과 같은 증오심에 찬 구절은 없긴 해요.

 

구약에는 그런 게 많이 나옵니다. 시편에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참 힘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걸 받아 드려야 할까요? 이건 구약의 한계니까 이건 잘 못 된 거다, 이렇게 말해야 될까요? 아니면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해야 될까요? 좀 어렵습니다. 그걸 바르게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 말 자체만 가지고 옳다 그르다 말하기는 힘든 거예요. 일단 이건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시편기자의 호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했던 날에 받았던 그의 아픔이 얼마나 깊은 건지를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런 것 없이 참아라, 라든지 이런 방식으로 얘기하면 그건 참 어렵거든요?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마는 노동자들도 운동 많이 하잖아요? 왜 폭력적으로 하느냐,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는데 무조건 폭력적이면 안 된다, 이렇게 기독교가 나서서 뜯어 말리는 건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일단 폭력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일단 이해해야 되고, 그런 방식으로라도 정말 비인간적인 구조적인 악과 대항 할 수 밖 에 없는 그들의 삶의 자리라고 할까요? 일단 이해를 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는 그런 신약성서의 가르침도 또 옳은 거예요. 이 긴장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딱 들어서 이렇게 해, 저렇게 해 규범으로써 말하기는 힘듭니다. 이 긴장가운데서 그가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는 거예요. 여기서 그런 정도만 이야기하면 그만이냐,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조금 더 이 말씀이 주는 영적인 메시지가 없냐, 그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영적인 메시지라기보다도 지금 이렇게 어린아이까지 다 바위에 내어 치는 것이 낫다, 그걸 바란다, 그런 식의 이 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조금 더 한 번 나가보자고 하는 거지요.

 

제가 아까 이 구절을 말하면서, 바로 전에 이게 자기들끼리 구체적으로 음모를 꾸며서 저 바벨론 자손들 어린애까지 우리가 죽이려고 작전을 짜자, 그런 얘기를 한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노래했고 기도했다고 하는 말을 했지요. 그게 왜 자기들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에게 이런 기도를 어떻게 드릴 수 있느냐, 좀 난감하다, 우리가 받아드리기 난감하다, 그런 얘기를 드렸습니다. 거기에 오히려 초점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 드린 기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들은 자기들이 어떤 분노와 적개심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해달라고 하는 영적인 태도가 여기 있는 거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이게 제가 정확한 해석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부분이 있을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증오심을, 카타르시스라고 할까요?

 

해소시키는 어떤 작용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쟁과 원수 갚기의 악순환은 여기서 끊어지는 거지요. 그들이 직접 원수 갚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앞에서 이 사람들의 증오심을 무조건 잘 못 되었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말씀 드렸어요. 그건 당연합니다. 증오심 느끼는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건 모두가 다 부처님처럼 다 인자하게만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서 그것이 어떻게 폭력과 전쟁의 악순환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되는가, 그게 핵심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하나님께 외치고 노래하고 간절히 구하고, 그렇게 확신하고 하는 이러한 이 시편기자의 영적인 태도, 신앙적인 태도가 옳지 않냐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런 시편을 읽으면서 자기들이 당한 그러한 극심한 환란의 역사를 뚫고 나갈 수 있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들은 아주 놀라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민족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수금을 타던 이들이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수모 당하던 역사의 현장을 뒤돌아봅니다. 원수를 향한 증오심이 없을 수 없음을 저희들이 또한 공감합니다. 오늘의 현실 역사에도 똑 같이 반복됩니다. 우리에게 임박하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또 같이 우리가 힘을 합해서 뚫고 나가야 될 이 악한 현실에서 우리가 그 악의 악순환 원수 갚기의 악순환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관계에서 오늘의 이 어두운 역사를 잘 뚫고 나가도록 주님, 역사해 주옵소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역사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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