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7편 강해-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편을 읽겠습니다. 1절부터 40절까지입니다. 비교적 좀 긴 시편인데요, 일단 제가 읽을 테니까 귀로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시〛

1.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12.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

13.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

14.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15.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

16.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17.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18.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19.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나

20.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21.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22.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이렇게 우리가 읽다 보면 그 내용이 마치 하나님이 인과응보로 행하시는 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표현은 그런 방식이긴 하지만 이 시인의 영적인 촉수가 가 닿은 곳은 인과응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이러한 신앙고백이 나오는 거지요. 이것은 신앙고백이자 세계에 대한 정확한 통찰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려 있어요. 이 두 가지를 연결해서 잘 생각하지 못하면 이 성서의 내용이 담고 있는 기독교 교리, 그것의 종교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적 고백, 이런 것들이 어떤 현실성을 담지 못합니다. 따로 놀 수 있는 거예요. 이 신앙고백은 이 세계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아주 뚜렷한 통찰과 해석이 담겨 있다, 그걸 꼭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 두 개를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실텐데요, 신앙고백, 교리, 성서의 표현들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거든요?

 

물론 내용을 보면 직접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직접적인 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나중에 설명할 때 제가 잊지 않으면 다시 좀 이야기 하겠습니다마는 그래도 미리 말씀이 나온 김에 한 마디만 짚고 넘어가면 이렇습니다. 신앙고백적인 언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현실과 사실 너머의 어떤 것을 향하고 있어요. 그 너머의 어떤 것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하고는 다른 거거든요. 우리 다비아에 매일 묵상이 있습니다. 매일 성서묵상, 소위 QT라고 하는 식으로 매일 쓰고 있는 건데요? 거기에 어떤 분이 그렇게 댓글을 달았어요. 요즘 이런 묵상과 설교와 예배 등등.. 전반적인 것들 속에서 예전, 예배, 그리고 묵상, 성서, 전반적인 큰 틀 속에서 ‘붉은 실’이 보이는 것 같다고 얘기를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성서기자들이 본 것은 바로 ‘붉은 실’이지요. 이 세계는 이렇게 저렇게 막 엉켜 있습니다. 세계는요, 그걸 유기적이라고 하고요, 불교에서는 그것을 연기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도저히 계산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다 연결되어 있는데요,

 

엉클어진 모습으로 보일 때도 많이 있고요, 실제로 우리에게 그런 모든 것들이 확연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실타래가 막 엉켜있는 것 같지만 거기에 붉은 실 하나가 쭉 흘러가고 있는 거지요. 그걸 보는 겁니다. 그게 어떤 때는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이지 않기도 하고요, 엉클어진 실의 뒤로 들어가게 되면 안 보이게 되잖아요? 그게 다시 나오면 또 다시 보이게 되고요, 보이다 안 보이다, 그리고 또 우리가 그런 붉은 색을 볼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시력이 없다면 영적인 색맹이라고 한다면 또 붉은 실은 들어오지 않는 거지요. 그 시편기자들 영성가들 이런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겁니다. 사람들에게는 그게 잘 안 보이니까 겉에 드러난 엉클어진 실타래, 그것만을 보기 때문에 성서 기자들이 말하는 이 이야기가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거지요. 교회를 다녀도 그렇게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인과응보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23절입니다.

 

23.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5.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27.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28.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9.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30.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31.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2.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33.여호와는 그를 악인의 손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하지 아니하시리로다

34.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35.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36.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7.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38.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

39.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40.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아멘! 긴 구절입니다. 성서학자들의 그 설명에 따르면 이 시인은 원로급 되는 사람이 인생을 거의 다 산 사람이 그 젊은 사람들에게 주는 신앙적 충고라고 합니다. 오늘 여기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그러냐, 안 그러냐 따지고 들면 이 말씀 안으로 들어가기가 힘든 것 같아요. 어떤 상태에서 어떠한 것을 배경에 두고 이 시편을 기록했는가 하는 걸 일단 염두에 두고 읽어야 됩니다. 시편만 아니라 다른 성서도 마찬가지지요. 다 그것은 글이 쓰여진 구체적인 삶의 상황, 삶의 자리라고 보통 이야기 하는데 거기에 맞는 이야기예요. 거기에 맞는 이야기, 그 자리에 맞는 이야기, 그걸 가져다가 그 자리가 아닌 상황에다가 탁 던져 버리면 그러면 아전인수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아전인수라고 하는 말이 거기 적합한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설교할 때도 그 본문을 너무 일반화 시키잖아요? 어떤 것들을 갖다가 다 본인들이 알고 있는 신앙의 틀에다가 맞춰 버린다는 말 이예요.

 

그리고 신자들의 삶에 적용시켜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혼하지 말라, 그런 성경구절이 어디 있던가요? 예를 들자면, 그걸 갖다가 그냥 일반적인 것으로 확 던져 버리면 어쩔 수 없이 이혼해야 될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 닿지 않는 거지요. 그 당시에 필요했던 어떤 삶의 기준이기도 하고 그런 방식으로 이해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일반화 시켜서 어디서나 다 적용될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성서를 잘 못 아는 거다라는 겁니다. 이 시편 35편도 인생을 다 산 사람이 돌아보니까 삶이 보이잖아요? 이 노인들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삶에서 나오기 때문에 참 귀한 겁니다. 이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거지요. 모든 노인들이 다 지혜가 있는 게 아니지요. 자칫하면 자기 삶을 성찰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게 되면 오히려 탐욕이라고 할까요? 자기 선입관이 강화되는 방식 그래서 아주 고집불통이 되어 버리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경우가 더 많이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여기 시편기자, 나이 드신 이 분은 정말 지혜로운 분이죠, 평생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을 영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서 나온 말들은 정말 살아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전제를 해야 됩니다. 이게 젊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될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악한 사람들은 멸한다, 그리고 그들은 길지 못하다, 곧 망한다, 의로운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도우신다, 잘 된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말은 현실로 와 닿지 않습니다. 당장 보면 악한 사람들은 잘 되지 않아요? 그들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말예요, 그리고 그렇게 악한 사람들에게 당한 사람들에게 보통 소위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람들이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주근 모습들도 볼 수 있고요, 젊은 사람들의 눈으로는 이런 노인들의 지혜가 와 닿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삶을 충분하게 성찰하면서 산 사람에게서 나오는 신앙의 가르침이다, 삶에 대한 충고다, 그걸 전제하고 읽어야 되겠습니다. 길기 때문에 모든 구절을 다 설명하기는 힘들고요, 사실은 지금 말씀 드린 것만으로도 전체적인 핵심은 어느 정도는 짚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향만 정한 거지요. 아직 내용으로는 제가 말씀 드리지 못한 거예요. 되는 만큼 우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이렇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쉽지 않지요.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 이걸 구별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악을 그들이 인정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면서 우리가 사니까 그걸 이야기하는 거지요.

 

악을 행하면서 결국 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어떤 사람, 어떤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 벌을 받지 않더라도 악을 통해서 자기 이익을 구하기 때문에 이익을 챙기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는 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수가 있지요. 불평할 수 있죠, 저 친구들은 저렇게 사기를 친다, 예를 들자면요, 저런 방식으로 잘 살 게 되었다,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요, 불평하지 마라,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시기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그냥 도덕군자처럼 살아라 그런 뜻은 아니죠, 성서기자들은 그런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기에 도덕적인 가르침도 많이 있어요. 당연히 그렇게 살라고 하는 충고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공리주의 도덕주의 그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관계에서 나오는 거예요. 자기 삶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냐, 그런 걸 지금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방금 말씀 드린 대로 그거겠지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삶을 받아 드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악을 행하는 사람, 또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좀 잘 되었다고 그래서 그것으로 크게 불평하거나 시기하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또 한 가지는 뒤에서 쭉 나오는 대로 결국 그 악과 불의 이런 것들은 망한다고 하는 그런 믿음이 있는 겁니다. 인간 삶에 대한 이해가 있는 거지요. 두 가지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리 삶을 집중시키는 사람은 당연히 그런 악을 행한 사람, 불의를 행한 사람들을 시기하거나 불평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잘 되었다는 것 때문에 배 아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악과 불의 이런 것들은 결국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점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그 얘기죠, 여기서 그들이 망한다고 하는 이야기, 이것도 그냥 이 세상의 일들만 보면 그렇게 정확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도 반사회적인 그런 일들을 통해서 돈을 벌고 사는 사람들도 당장 망하는 일은 보이지 않잖아요? 이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 볼 때 이해가 되는 말씀인 거예요. 악과 불의를 행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이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심판인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잘 되면 괜찮으려니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거지요. 그 맥락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쉽지 않다기보다도 예민한 부분이 돼서요. 그 쪽으로 정리가 되지 않으면 이런 말들이 너무 관념적인 것으로 들리게 되요. 조금 더 본문 나겠습니다. 2절,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그렇습니다. 베임을 당하고 쇠잔하게 된다. 3절,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우리 양식으로 삼으라고 하는 거지요. 그것만 어떻게 먹고 사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깨끗하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는 얘기냐, 그렇게만 먹고 어떻게 사냐, 그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는다고 하는 것, 그게 무얼까요? 사실 그 한구절만 붙들고도 생각해야 될 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성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될까요?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신다고 하는 걸까요? 그런 이야기도 가능하겠지요. 의로운 사람들을 지키신다고 하는 것도 그 분의 성실성이고요, 악을 징벌하신다, 굴복시키신다고 하는 것도 그의 성실하심이고요, 변하지 않는 진리의 힘들로 우리의 삶을 끌어가시는 분의 어떤 속성, 그런 것들을 우리는 성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성실성을, 우리 먹을거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토대로 삼는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 먹을거리로 삼을 수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옳은 이야기인가 하는 이야기지요. 옳은가, 아닌가,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런 방식으로는 증명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어쨌든지간에 힘 있는 사람들이 더 떵떵거리며 살고 무조건 그들이 망한다고 하는 보장도 없고요, 고난 받은 사람들이 또 잘 된다고 하는 보장도 없고요. 조금 더 우리가 이 문제를 사회과학적으로 살펴본다면 도대체 악과 의의 기준을 어디에 둘 수 있느냐, 하는 질문도 가능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 드려 볼까요? 세금포탈이라고 하는 것 있잖습니까? 사업, 기업을 하면서 많은 기업가들이 세금포탈을 한다는 말이예요. 그걸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이 있겠고 아닌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신앙인이냐 아니냐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세무행정이 많이 좋아졌는지 모르지만 옛날에 상당히 사회정의가 떨어 졌을 때 세무공무원들이 인정과세를 보통 많이 하잖아요? 보통 식당 같은데 가서 세금 얼마인데 깎아 주고 돈 받고 이런 일들이 관행처럼 이뤄졌다고 하잖아요?

 

이럴 때 예수 믿는 사람이 식당을 운영하는데 하루 매상이 백 만원 올라간다, 그런데 세무공무원이 와서 오십만원으로 해 주고 그 사이에 얼마를 원한다고 할 때 곧이곧대로 하고 그냥 세금을 내냐, 아니면 깎아 주는 것을 바라고 커미션을 주느냐,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게 불의하게 살고, 어떤 게 의롭게 사는 것 이런 것 마저도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끊어서 말하기 힘든데 어떻게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여기 본문처럼 풀처럼 속히 베임을 당하게 하시냐, 하는 질문이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는 그 하나님의 행위를 그 분의 성실성으로 믿고 받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 하냐, 이런 질문이 가능한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증거, 증명을 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이거는요, 결국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에 가능한 겁니다. 지금 역사 안에서 이뤄지는 증명들은 다 부분적인 거예요.

 

이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아주 실증적인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실성을 믿겠다 생각한다면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겁니다. 이번 사업만 잘 되면 어떻게 하겠다든지 저 나쁜 사람이 고꾸라지는 걸 봐야, 내가 하나님이 정의롭다는 것을 알겠다든지, 이런 방식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성서의 말씀이 그렇게 증명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는 거지요. 이게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기도 하고 딜레마이기도 하고 또 마땅히 우리가 갈 길이기도 합니다. 긴장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이미 손에 무엇을 딱 잡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믿는 거예요. 성서 말씀에도 약속을 한 것이고 그리고 또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도, 일반적인 역사에서 증명되는 그런 것들은 아니고요.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행하신 그런 하나님의 성실성에 대한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거거든요. 그것을 붙들고 사는 거지요.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마지막 때에 확연하게 드러내리라고 하는 희망을 갖고 사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 시련, 이런 것도 여전히 우리는 견딜 수 있는 거지요. 의로운 삶을 향해서 우리가 뚜벅뚜벅 걸어 갈 수 있는 거지요. 이러한 신앙적인 방향에 대해서 또 반론도 가능합니다. 그건 자기합리화 아니냐 이거죠, 증명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무조건 믿고 산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확실성이 있냐, 그런 거지요. 그건 마치 이솝우화에 여우가 포도를 따 먹으려고 하다가 높아서 못 따먹으니까 저건 시어서 먹기 힘들거야, 그런 이야기처럼 이 세상에서 비실비실되고 실패하니까 그걸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 하는 게 아니냐, 자기 위로에 빠지려고 하는 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비판하는 철학자들이나 역사 혁명가들이 많이 있었지요. 기독교인들은 비굴하다, 그런 식으로요,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자기합리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합리화가 결코 아닙니다. 창세기서부터 꾸준하게 전해져 내려온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인거지요. 그것이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중요하겠네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 중요한 거지요. 이런 하나님의 성실성이 정말 옳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 삶으로 우리가 증명 한다기보다도 우리 삶에서 현실로 끌어들여야 되는 겁니다. 아, 여기서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네요. 말하다보니까 이렇게 또 설명이 쉽지 않기도 한데, 중요하기도 하기도 그래서 그랬습니다. 요즘 제 목소리가 탁해지고요, 목소리가 갈라지고 성대에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 말하는데도 물을 마시지 않으면 더 갈라질 것 같아서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4절,5절이요,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유명한 구절입니다. *게르하르트라고 독일 시인의 시로 인해서 아주 유명해진 구절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을 여호와께 맡기는 거지요. 이것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로는 우리가 그렇게 얘기하는데 온갖 방법, 그리고 염려 이런 것들로 우리의 미래, 우리의 삶, 이런 것들을 계획하기에 바쁩니다. 그렇게 또 열심히 살아야지요.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고 맹하니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 중심에는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되는 거지요. 하나님께 나의 미래를 온전히 맡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좀 어려움이 오면 그것대로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 대로 결국 그것이 절대적으로 내 삶을 결정해 버리지는 않게 됩니다. 어렵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고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들뜨지 않고요, 그냥 평상심으로 길을 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우리 삶을 온전히 맡길 때 이런 일들이 가능합니다.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07.3.12.~1676.5.27.]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신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여기 37편의 주제구절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네 길을 여호와께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신다, 6절,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문학적인 표현이죠,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7절에도 아주 중요한 말씀들이 이어지고 있군요. 오늘 40절까지 말씀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맥상통하는 건 아닙니다. 누구 한 사람이 쓴 시가 아니라 여러 시들이 수집된 거예요. 그래서 말이 반복되지요. 그래도 어떤 흐름에서는 공통점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의 시편, 37편으로 수집된 겁니다. 7절에도 의로운 사람, 여호와께 미래를 맡긴 사람의 삶의 태도가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들은 떠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런데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에 대해서 놀라운 아주 기대감으로 우리가 바라 볼 수 있을 뿐이지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그 분에게 요구할 수 있고, 기도라고 하는 차원에서 아뢸 수는 있지만 내 생각대로 감히 마음대로 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그 분을 설득할 수 있겠어요? 잠잠한다, 잠잠하고, 그렇게 참고 우리 앞에서, 우리 인생길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로 인해서 일희일비 하는 게 아니라 참는다, 이건 수동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참는 게 정말 적극적인 거거든요, 참지 않는 게 오히려 쉬어요. 참 어떤 말을 들어도 사람들에게 참는다, 이게 꼭 기계적으로 참는다, 아무 말 안한다, 그런 차원이 아니고 또 이것을 우리의 어떤 마음수련 같은 걸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예요. 하나님에게 내 운명 미래를 맡긴다고 하는 사실을 정말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럼 거기서 참는 게 뭔지를 알게 되는 거지요.

 

당장 싫은 소리를 들어도 그게 결정적으로 내 영혼을 혼란 가운데 빠지지 못하기 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거지요. 기다리라, 기다림, 다 연관되는 문제네요. 오늘 앞에서 5절이 중요한 주제구절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7절도 정말 중요하네요.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린다. 세 가지 설교 요령을 가르치게 된다면, 쉽게 쉽게 설교를 한다면 7절 한 구절만 가지고도 설교 한 편이 되겠네요.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사람” 이런 제목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잠잠하라, 둘째 참는다, 셋째 기다린다, 이렇게 적절한 예를 곁들여서 쉬운 방식으로 설교를 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러면서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이런 것 불평하지 마라, 쉽지는 않죠, 이것은 우리 영적인 경지가 달라져야만 가능한 일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 그리고 인간의 삶들을 끌어간다고 하는 정확한 증명의 차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말씀드렸고요,

 

증명되는 건 아니지만 아주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삶에 들어와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뒤에 계속 그런 표현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8절에도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그 다음에 쭉 하나님께서 악을 갚는다는 표현들이 쭉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예, 중간에 있는 말씀들을 다 보기는 힘들고요, 뒷부분으로 가서 정리하겠습니다.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길을 가게 되면 도를 지키면 땅을 차지한다고 해서 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그러나 악인은 끊어진다, 그것을 분명히 볼 것이다,

 

35절, 36절, 35.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36.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악이 잠시 무성한 것 같지만 속히 그 모든 힘을 잃는다고 하는 거지요. 이런 것에 대한 역사의 어떤 증거들, 그런 걸 제가 일일이 말씀 드릴 필요도 없겠지요? 모든 힘을 앞 세웠던 제국들도 다 사라졌지요. 모든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39절,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의인들의 구원, 의인이라고 해서 아주 엄청나게 의를 행하는 사람이라기보다도 악을 행하지 않으면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더 근본적으로는 의는 하나님에게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 있는 물질, 권력, 그런 것들을 의존하게 되면 결국 악을 행하게 되거든요? 그걸 얻으려면 경쟁에서 이겨야 되고 또 수단방법 가리지 않게 되기 때문에 악으로 갈 가능성이 높은 거고요,

 

의인은 하나님에게만 삶의 근거를 두는 사람들이라서 이 세상의 있는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비열한 방법은 결코 쓰지 않습니다. 그런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온다, 여호와로부터 온다, 이게 원로급의 이 시편기자가 말하고 싶은 거지요. 그걸 봐라, 그게 진리다라고 하지요. 40절, 마지막 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하나님의 의인들을 악인들의 틈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 의인들은 다른 게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그의 성실하심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예, 2009년이 시작했습니다. 처음 수요 시편 공부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 여기에 우리 금년 한 해 우리의 모든 영성을 한 번 기울여서 열심히 살아 봅시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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