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3편 강해-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

 

시편 오늘은 43편입니다. 지난 번 42편에 이은 내용입니다. 구약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42편과 43편은 원래 한 묶음이었다고 해요. 42편과 1연과 2연에 해당되고 43편이 제 3연에 해당됩니다. 각각 연마다 마지막 대목에 후렴구가 같이 붙어 있어요. 그 후렴구는 다음과 같은 거지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 하리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42편 5절에도 있고요, 11절에도 있고, 오늘 우리가 같이 읽고 공부하게 될 43편 5절에도 있습니다. 이제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 하리이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 하리로다

 

아멘! 짧은 구절입니다. 예, 이런 시편기자들의 영혼이 얼마나 간절하고 진지한지 우리가 사실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일상적인 삶을 살은 건데요, 그런 가운데서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그런 삶의 수렁도 경험했고요. 그런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삶의 수렁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영적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시편기자들의 신앙경험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지 쉽지 않은 것은요, 일단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그런 점도 있고, 아마 그게 제일 크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만이 아니라 이런 점도 있을 겁니다. 이게 직접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죽음과 같은 절대적인 어떤 사건을 만나거나 그것을 통과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그런 영적경험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의 영적경지가 아주 평범하기 때문에 그럴 수 밖 에 없는 이유가 되긴 합니다마는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직면해야 될 때가 된다면 그 때는 우리 영혼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영혼이 훈련을 받는다고 하는 것, 그래서 우리 영혼이 점점 성숙해지고 보통 우리가 얘기하는 성자의 버금가는 그런 영적인 수준에 도달해야 되는데, 그러기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매번 죽음의 문제를 안고 그런 훈련을 거쳐야 되지 않느냐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말씀이 앞에서 말씀드린 우리가 그 영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그런 문제가 죽음과 같은 절대적인 경험들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실존들이 다 무화되는 거잖아요? 그게 우리 일반적으로 살아 갈 때는 그런 경험들을 못합니다. 조금 노력해서 자기를 비우고 살아 갈수는 있어요. 상대적으로 조금 더 할 수도 있고, 덜 할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그렇게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예요. 늘 우리는 나를 비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기댈 곳을 찾고 있고, 기댈 곳이 있습니다. 직장을 잃었다고 한다면 아직 건강은 남아 있을 거고요, 건강을 좀 잃었다고 한다면 가족들이 있을 것이고요, 가족들이 떠나게 된다면 그럼 처지가 절박하긴 한데, 우리가 또 의지할 것이 있습니다. 이건 아주 극단으로 떨어진 사람의 경우이고 일반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기댈만한 것들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고요, 그걸 더 강화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라든지, 또 웰빙, 이런 삶의 습관이라든지, 노후보장을 위한 여러 가지 복지를 준비한다든지 이런 것이 다 그렇거든요. 거기에 기댈 곳이 있기 때문에 내가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그런 상태, 그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절대 무와 하나님, 창조, 죽음, 부활, 생명 이런 것하고도 연관되는 문제거든요?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어딘가 기댈 곳이 많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은 그 영적인 경험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제적으로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8복에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고, 등등 그런 것을 이야기 하셨어요. 성서에는 그런 비슷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그런 가장 절박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영적인 경험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절박한 상황에 떨어진 사람들이 영적인 경험을 한다는 게 무조건 보장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이건 기댈 곳이 없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만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이거든요. 시편기자들, 신비주의자들, 영성가들, 이런 사람들은 다 이런 죽음의 문제, 자기 모든 것이 無로 돌아가는 그런 차원까지 떨어진 경험들이 있는 거지요. 이제 그럴 때만 흔들리지 않는 참된 희망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우리들이 그런 것을 경험 할 수 있는 거지요. 우리들은 너무 안이한 태도로 접근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들을 실질적으로 가슴에 와 닿도록 읽기는 쉽지는 않습니다.

 

오늘 여기 43편에서도 이 시편기자가 고백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어떤 나쁜 조건들을 좋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것보다도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들어가 있고 싶다고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나라라고 그러는데 다른 번역으로는 백성이라고도 되어 있어요. 경건하지 않은 백성에 대하여 혹은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물론 겉으로 보면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봐 주십사, 여기서 좀 건져 주십사 그런 내용이죠,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시인의 영혼은 그렇게 삶의 형편들이 좋아지는 것에 전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자기가 확인하고 싶은 거지요. 그 안에 들어가 있고 싶은 거지요. 하나님의 현재 통치가 나와 함께 한다고 하는, 사실이 이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놀라운 경험들 있잖아요? 그러한 것들이 보통 때는 모든 게 잘 되고 하면 하나님이 나를 돕는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서 건강 하고 자식들도 잘 되고 우리도 보존되고 그렇게들 생각들 하잖습니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건 아시겠지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만은 아니라 앞서 이야기 한 것과 연관되는데요? 오히려 어떤 절대적인 궁핍, 거기에 빠졌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현존에 가까이 간다고 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제가 이런 것들을 자신 있게 말할 만한 입장은 되지 못해요. 왜냐하면 그런 절대적인 궁핍, 무화, 이런 것들이 지금 저에게 없으니까요. 그래도 넉넉하게 여러 가지 면에서 그냥 편안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 젊었을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야 누구나 다 지나가는 것이고요,

 

그래서 지금 제가 가장 극심한 어려움, 육체적인 질병이나 경제적인 문제나 인간적인 외로움이라든지, 그런데에 어쩔 수 없는 나락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편기자의 이런 말들을 내 것으로 육화해 가지고 말씀 드릴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제가 알고 있고 그렇게 따라 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배우는 것이지만, 그리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그게 길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말씀 드리는 거예요. 아주 밑바닥에 떨어지는 경험들이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들인데요. 그러나 그런 게 오면 당분간은 힘들어요. 그러나 어느 단계에 가게 되면 우리 영혼이 투명하게 됩니다. 맑아지는 거지요.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한 기대를 놓는 거지요. 삶에 대한 살고 싶다고 하는 의지, 이런 것도 놓을 수도 있는 거거든요? 보통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거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부정하고 불평, 괴로워하다가 나중에는 순순히 받아 드린다고 해요.

 

개인에 따라서 좀 차이가 있긴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순순히 받아 드린다고 합니다. 그 때는 평화로운 거지요. 죽음을 수용할 단계, 그 보다 더 투명한 상태, 그 보다 더 순수한 영혼의 상태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죽음과 상황 그런 것들을 간접 경험해야 되겠지요. 어쩌면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아닐까요? 내가 누구한테 의논할 사람이 없을 때 하나님에게 하는 거잖아요? 우리 주변에 너무 사람들이 많고 의논할 만한 사람도 많고, 의지할 게 많으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참된 기도는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그분에게만 희망을 거는 태도잖아요? 그럴 때 그런 하나님의 현존에서만 우리의 영적인 평화가 보장된다고 하는 사실들을 우리가 이런 시편이라든지, 다른 영성가 들의 글들, 신학적인 책들을 통해서 배우는 거지요. 그러면서 그런 것들을 간접 경험 하는 거지요.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영적훈련, 그게 경건훈련이지요.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여전히 기댈 곳이 많지만 하나님에게만 기대고 사는 삶의 태도, 경지 이런데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런 말을 어디서 한 것 같은데요? 제가 정확한 구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부자이지만 부자 아닌 것처럼 살라, 권력을 가졌지만 권력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살라, 그런 말씀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댈 만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살라고 하는 거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인간관계나 기대할 것이 필요합니다. 그 자체를 제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예요. 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요, 좋은 인간관계도 있어야 되고 또 외로울 때 의지할 만한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친구도 좋고, 선후배도 좋고, 가족 관계도 좋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건 필요한 것들 이예요. 그렇게 이 세상에 살 동안은 살아야지요. 다만 그렇게 살더라도 아닌 것처럼 하는, 실제로 아닌 것의 상태, 없는 것의 상태로 우리가 끊임없이 들어가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 시편기자가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내가 이야기를 하는 건데, 실제로는 그런데서 건짐을 받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현존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는 그런 신앙입니다. 2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이 사람의 처한 곤궁한 그런 형편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은 물론 아니지요.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과 같은 그런 상황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하는 그런 사실로 사람이 들어가고 싶은 거지요. 그런 믿음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렇게 3절에 다시 기도합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이게 무슨 뜻일까요? 자기가 옛날에 성전에서 일하던 그런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할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건 접어두고요, 그렇게 넘어가고요,

 

4절,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 하리이다 예, 3절과 4절,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성전에서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싶다는 소망이고요, 또는 하나님이 현존한다고 하는 그 사실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그런 고백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5절, 이 5절이 시편 42편 1연과 2연에 나와 있는 후렴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 해 하는가 이런 불안들, 낙심들 많이 있지요. 이걸 우리가 어떻게 떨쳐 버릴 수 있을까요? 죽을 때까지는 불가능할 겁니다. 그걸 안고 살아야 되겠지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 하리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영적인 실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우리들에게 영적인 실존인데, 영적인 긴장이 있는 거지요.

 

두 가지 사이에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낙심과 불안들이요. 낙심과 불안들, 크고 작은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서 떨어 질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삶, 한쪽으로는 낙심될 만한 일들인데 구체적으로 특별히 어려운 일을 만났기 때문에 낙심되는 건 아닙니다. 주로 그런 일들이지만 낙심과 불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기 때문에 우리 일들이 잘 풀린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걸 망각할 수는 있어요. 마치 마약을 섭취해서 현실을 외면함으로 현실도피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우리가 나 괜찮다, 나 괜찮다, 다 좋다, 이런 식으로 잠시 외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낙심과 불안을 떨쳐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조건이 좋다, 나쁘다 그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인간 심연에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 지지 않는 인간의 숙명적 실존덩어리라고 할 수 있지요.

 

왜 그럴까요? 이런 문제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는 삶의 형태라고 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 결합되어서, 혹은 엮어져서 만들어 내는 어떤 상황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지나간다는 말 이예요. 그렇게 다 모든 게 지나가게 되니까, 거기서 만족할 수는 없는 거지요.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영적이지 않는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낙심과 불안 이런 것들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동물들에게서 좀 보듯이요. 그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에 그냥 묶여 있는 거예요. 자연적인 거지요. 그래서 거기에는 자연과 일치되어 있어요. 그들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없는 거지요. 그 안에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우리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흐름으로 보니까요, 동물들은 그런 것을 느끼지를 못하는 거지요.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마치 물고기들이 물을 못 보고 물과 하나가 되어 있듯이 동물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안 그렇거든요?

 

그게 기독교 성서적인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숨, 루아흐, 숨으로 우리가 생명이 되었다는 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그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 하나님의 숨으로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 그런 데서 인간에게 주어진 다른 동물들과 완전히 다른 특징이 바로 그겁니다. 동물들은 그런 자연과 완전히 일치 되서 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미래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에 확실성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불안한 거지요. 그런 일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존적 불안과 낙심이 한 편으로 있지만 그러나 성서의 전통에 근거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둔다는 말 이예요. 이런 말들도 여러분들이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둔다고 하는 것, 그게 과연 무얼까 하는 겁니다.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또 한 두 마디로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핵심적인 건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거기에 우리의 실존 전체를 맡기며 산다, 그런 이야기가 되지요. 그런 예수 부활과 하나님의 창조와 그런 종말의 하나님의 나라 이런 것들과 다 연관 되서 점 점 깊이 생각해야만 이런 내용들이 우리들에게 풍요롭게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고 하는 것이 구구단 외우듯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들과 더불어서 유기적으로 연관된 기독교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두라, 그 다음에 오늘 이 마지막 부분,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 하리로다 42절에서도 두 번이나 읽은 후렴구인데요? 우리들에게 일단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대답이 우리 삶과 일치하고 있느냐 아니냐 거기에 있겠지요.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 한다, 걱정과 낙심과 불안 이런 삶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도우시는 손길을 절감하고 깊이 느끼고 거기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지요? 이게 무조건 광신적인 데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흔히 볼 수 있는 게 인간의 이성을 다 마비시키고 광적인 상태로 몰아가는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그 순간에는 걱정과 불안이 없기 때문에 된 것 같아요. 뜬 구름 잡는 식이라도 된 것 같습니다.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춤추며 노래 부르고 화끈하게 스트레스 해소하는 그런 느낌들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성서가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광신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처해있는 삶의 현실들, 실존들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두려움들, 죽음, 고통들, 배신감들 이런 많은 것들이요. 그렇지만 그것을 뚫고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다고 하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되겠지요. 그걸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보게 될 겁니다. 볼 거예요. 죽음이 임박하게 오게 되면 여실하게 느끼게 될 겁니다. 죽음은 안식이라고 하잖아요? 영원한 안식이요.

 

김수환 추기경께서 이 틀 전에 선종하셨다고 하는데요? 편안하게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그렇게 평화로웠으면 좋겠어요. 그게 가능할 겁니다. 그 전에는 불안할지 모르지만 딱 부닥치게 되면 그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서 참된 평화, 참된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게 할 겁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지 않아요. 여기서는 완벽하게 우리가 그런 것을 경험 할 수 없습니다. 투쟁이죠, 살아 있으나 죽음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산다고 하는 거지요. 그것이 세례 받을 때 죽고 산다고 하는 그런 인식이라고 맞닿아 있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세례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고 산다, 죽음과 삶, 이럴 때는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수가 있지요.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우리가 붙들려던 것이 다 떠나가고 예외가 없지요?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직면해야 할 죽음, 그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 통치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 현재 삶을 온전하게 지배하게 될 때,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되고요, 우리는 하나님을 어려움 가운데, 시련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생명의 빛을 우리가 경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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