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325 히브리서 11장.hwp

 

우리 같이 오늘도 히브리서 공부하겠습니다. 11장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각각 특징이 있어요. 믿음장하면 보통 히브리서 11장을 얘기합니다. 로마서에도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 있긴 한데요. 그건 로마서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요. 이 히브리서는 조금 더 색다르게 11장에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장하면 고린도전서 13장 이렇게 얘기하고요. 또 바울이 그런 주제로 많이 썼어요. 부활장하면 고린도전서 15, 은사장하면 고린도전서 14장 그러한 특징들이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특징을 보이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것도 길어요. 10장도 39절까지 있는데 이것도 40절까지 있네요. 전체가 13장까지 돼있고요. 오늘부터 시작해서 세 번만하면 히브리서를 다 마치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강의 요약문에 보면 다섯 대목으로 나누었어요. 다섯 패러그래프에요. 해당하는 구절들을 부분적으로 읽어가면서 공부하겠습니다. 도대체 이 히브리서가 믿음을 어떻게 얘기하는지 봅시다. 먼저 1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오늘은 교독으로 말고 저와 함께 통독하겠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멘. 1절 보십시오.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게 번역이에요. 헬라어로부터 번역이 됐습니다. 헬라어는 철학적인 언어에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제논 등등 굵직굵직한 서양 철학의 대표자들이 다 헬라어로 자기의 철학을 논한 거예요. 이게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런데요. 이게 문자잖아요. 글이잖아요. 단어잖아요. 이 단어가 어떤 근본을 그대로 잘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안 됩니다. 물론 사물들은 가능하죠. 책이다, 하는 것들은 가능한데 철학적 언어들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했는데 그가 말하는 질료와 형상이 낱말로 다 해명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철학자들이 쓴 글, 혹은 성령도 마찬가지인데요. 성령이 오순절 강림 때 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령에 대한 표현들이 많이 있잖아요. 성령이라는 말 자체로 정말 성령을 다 담아 낼 수 있냐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됐다면 신학은 필요가 없어요. 확 들어나게 된다면. 삼위일체라고 하는 게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얘기할 때 핵심 개념이잖아요. 트리니티라고 하는 거, 이걸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확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잘 전달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거예요. 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위격으로는 셋인데 본질로서는 하나라고 말하는 거 아니겠어요. 여기서 말한 위격이 뭐냐, 본질이 뭐냐를 알아야 삼위일체가 들어오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게 뭔지를 설명은 할 수는 있지만 아직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확인하기는 힘든 겁니다. 페르조나라고 하는 게 위격이라고 합니다. 이 페르조나에서는 분리된다, 우시우스라는 이 본질에서는 동일하다는 게 삼위일체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제가 괜히 빙빙 돌려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기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라고 번역이 됐잖아요. 실상이 뭐냐, 헬라어에서 번역된 거거든요. 지금 제가 헬라어를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게 번역이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어요.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번역이 돼야합니다. 정확한 말로 해야 되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에요. 루터의 번역을 제가 그대로 직역을 해서 다시 번역을 했습니다. 믿음은 희망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신뢰이고, 이 마틴 루터의 성경이 우리말 성경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 부분인데 실상이라고 하는 것을 루터는 분명한 신뢰라고 번역했어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죠. 그 다음에, 보지 못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증거라고 하는 단어를 루터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독일어로 그렇게 돼있어요. 이거는 하나의 예인데 성경의 세계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지금도 학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려고 애를 쓰고 있고요. 그리고 번역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1절 아주 유명한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이렇게 하면서 그게 뭐냐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합니다. 설명하면서 구약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 끌어들여요. 여기 11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 이름, 그리고 그 사람들의 어떤 활동, 이런 것만 알아도 사실은 구약 성경을 다 꿰뚫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오는지 우리가 차차 보겠습니다.

 

그 실상이라고 하는 단어가 우리나라 말로 그렇게 되어 있지만 딱 그건 아니다를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거고요. 오히려 그것을 진리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있듯이 이렇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모든 진리가 경험되고 실현된다. 이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입니다. 전달이 됐죠. 그런데 이걸 막연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믿음이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안되지만 믿습니다해가지고 믿는 건 아닌 거예요. 그 믿음은 어떤 진리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근거가 없는 대상을 향해서 믿는 것은 아닌 거죠. 왜 하나님이 믿을 만한 분이냐는 것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고 그 근거가 있기 때문에 바로 그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그게 아직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신뢰하는 거죠. 그럼 이제 그게 진리에 도달하는 바른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일상적인 것으로 조금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부부 간이라도 좋고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좋습니다. 정말 상대방을 신뢰할 만하다는 그 관계가 정말 참되려면 그 사람을 믿어야 되는 거죠. 허황되게 믿는 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자식이 지금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다고 하더라도 믿으면 그 길을 가게 되거든요. 그게 언젠가는 드러나죠. 아직까지는 묻혀있어서 그걸 믿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해 가는 영적인 태도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사람 관계도 그럴 진대요. 자식들도 그렇게 정말 믿어주면 그렇게 되죠. 그렇게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자꾸 우리 입장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하지만 어쨌든 믿음의 관계가 사람 사이에서도 그게 중요한데 하물며 하나님 관계에서야 두말할 것도 없죠. 그런 걸 바탕에 놓고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있는 사람들을 나열하면서 믿음의 본질, 실체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우선 1절에서 7절까지 나오는 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에 나오는 인물이에요. 아담은 제외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저렇게 두드러지는 인물들 세 사람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에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니고요. 이건 역사가 아니라, 보통 신학에서는 원역사라고 얘기합니다. 역사의 근원이 되는 역사, 모든 인류의 보편사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노아 홍수까지예요. 노아 홍수가 끝나고 바벨탑 사건까지겠죠. 다 홍수와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 전체 보편적인 근거를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세 사람 인물 아벨, 에녹, 노아가 나옵니다. 재밌는 것은 이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과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나왔어요. 그걸 근거로 해서 그런지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고 판단을 하네요. 그러니까 아벨이 형 가인보다 믿음이 좋았다 그런 얘기입니다. 4절에 나와 있어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 근데 사실은 이게 실제로 창세기 안에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아벨이 가인보다 믿음으로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은 없고 결과적으로 이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시면 되겠어요.

 

에녹 이야기. 에녹 이야기도 별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엘리야와 더불어서 성경퀴즈대회 많이 나왔던 이야기인데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 두 사람이 누구냐고 할 때 엘리야하고 에녹이거든요. 사실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건 그 당시의 문학적인 표현이고, 어떻게 두 사람이 죽지 않고 승천하겠습니까. 그건 그들의 믿음이 그만큼 돈독하다는 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거죠.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야 되는 거예요. 아담 이후로 죽음은 우리의 통과해야 될 문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이 에녹도 결국은 믿음으로 죽지 않고 옮겨졌다고 이야기해요. 근데 이건 사실적인 이야기라기보다 믿음을 강조하는 뜻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노아 이야기. 이것도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7절에 나왔어요. 노아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건 뭐냐. 홍수 사건이 아직 멀었잖아요. 대충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가 일어날 거다 약속이 있은 다음에 몇 년 후에 일어났죠? 120년 후 정도 될 겁니다. 상당히 후에요. 몇 년 후가 아니라 우리 지금 시대로 말하면 몇 세대, 30년을 한 세대라고 한다면, 고대 창세기의 나이 계산이 좀 다르긴 했습니다마는, 상당히 여러 세대가 흘러갈 정도의 기간이 지난 후에 홍수가 시작이 되거든요. 그 전까지는 노아가 감당해야할 짐은 무거웠던 거예요. 사람들이 볼 때 웃기는 이야기거든요. 노아가 산꼭대기 비슷한데 가서 방주 짓고 하는 게 전혀 근거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믿음을 갖고 120년 후의 어떤 사건을 확실한 것으로 자기가 받아들인 거죠. , 그런 점을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나와 있는 인물을 짚고 있어요.

 

그런데 이건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면 된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말한 대상이 신뢰할만한 분이여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그거를 기다리고 뚫고 나가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거는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죠. 오스틴 목사라는 사람이 긍정의 힘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맨 앞부분부터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젊었을 때 어디 길을 가다보니까 멋진 전원주택이 있어서 하나님께 믿고 기도했더니 이루어지더라. 이걸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그 차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기독교 신앙이, 성서 신앙이 왜곡되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단락, 드디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세 번째 단락에서도 이어지는데 두 번째 단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8절에서 16, 이것도 같이 통독하겠습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는 바울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핵심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다는 그 주제요. 그게 이제 기독교 전체의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고 특별히 로마 카톨릭하고 비교할 때 개신교의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그 이야기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게 복음의 핵심인데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강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어요. 바울은 아브라함을 봐라.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 얘기를 했어요. 히브리서 기자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단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거론하는 핵심은 땅에 대한 거예요. 팔레스타인 가나안땅. 갈데아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다가, 거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인 거기서, 고향이 거기에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가나안이 아니라 이방, 바벨론 문명의, 메소포타미아, 바벨론 같은 지역이죠. 거기였어요. 아버지가 데라였고, 거기를 떠나라. 이주하는 여러 가지 과정들이 창세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약속의 땅이 가나안이었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될지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나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이 거기에 신뢰를 갖고 떠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아직 갈 바를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미래의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111절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아주 분명한 신뢰이고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진리이고 의심하지 않는 것. 그런 차원이라고 하는 거죠.

 

이걸 우리 기독교의 신앙생활과 연결해서 생각할 하면요. 아직 우리는 부활 실체가 아니잖아요. 약속으로 받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은 같이 부활의 생명으로 변한다는 약속을 받은 겁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걸 온전히 믿으면 믿음에 의해서, 혹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부활이 주어지는 거죠. 그런데 이런 표현들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확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걸 극복하는 게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영성이기도 하고요. 아직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의 증거, 실체, 의심하지 않는 것, 진리로 경험하는 겁니다.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잘못하면 망상으로 떨어지는 이상한 집단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사이비 이단들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음으로 처리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에요. 우리가 믿고 있는 바의 그 내용이 온전하게 우리가 정말 신뢰를 하고 의심하지 않되 그것이 왜 근거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을 꾸준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자기 성찰이 없어요. 그냥 믿는다고 하는 자기 주관성에 빠져버린 겁니다. 자기 성찰을 하려면 역사적인 검증도 받아야 되고 신학적인 검증도 받아야 되고 그러한 것들이 같이 가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 주류는 계속해서 그런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논쟁도 있었고 그러면서 점점 기독교 진리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깊어지게 됐습니다.

 

약속의 땅을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거를 믿고, 나왔고, 길을 갔고, 그래서 이미 그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죠. 시간, 역사의 흐름은 어떤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의 과정이었어요. 여기서 과정이라고 해서 금방 차근차근 그대로 순서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오히려 약속이 아닌 거 아닌가하는 그런 회의와 시행착오가 많은 거예요. 그럴 때 방향을 잘 정해서 꾸준하게 일관성을 갖고 가야되죠.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경건 훈련도 필요하고요. 그런 점에서는 믿음의 동지들도 필요하고 같이 가는 도반들도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중요한 겁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명석하고 영성이 깊어도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아닌 거예요. 같이 격려하고 더불어서 같이 성찰하고 그러한 공동체에 근거하여 그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같이 신앙에서 실제로 담아내야 되는 거죠. , 약속의 땅 그 문제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곁들여서 사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라가 믿음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구약성서는 남성 중심으로 많이 되어 있어요. 그 당시는 가부장적이어서 여자들은 종속변수로 등장이 됩니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했을 때 사라가 처음에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얘기하고, 말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결과론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아까 아벨을 얘기할 때도 아벨이 정말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지는 창세기에서 말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니까 믿음으로 드렸다고 해석하는 것처럼 이 사라 이야기도 사라가 믿음이 있었다는 근거는 창세기에 없지만 그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다는 결과를 놓고 보면 믿음이 있었다고 보는 거죠. 세 번째 단락이요. 17절부터 22절까지입니다. 여기도 우리 같이 통독하겠습니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아멘, 여기까지요. 여기서 한 번 더 아브라함이 언급돼요. 족장들의 선봉장이라서 그렇습니다. 족장들은 대표적으로 네 명이에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까지입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족장 전승이라고 해요. 전승이란 말을 이해하시겠죠. 구전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얽힌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이삭, 야곱, 요셉, 이런 것들이 사실은 독립적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창세기를 편집한 어떤 학자가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다시 정리를 한 거예요. 성경에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되어있는데 그렇게 말 하냐. 이걸 신학적으로 연구하면 다 나옵니다. 그런 것까지는 일반 신자들이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역사가 있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대표적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족장이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로 보면요 일반 역사하고 비슷한 거예요. 보통 인류 고대사를 따질 때 씨족사회가 있고 그 다음에 부족 사회가 있고 왕정이 있고 봉건주의 그 다음에 민주사회가 쭉 내려오잖아요. 어쩐 체재가요. 씨족사회가 성경에 보면 족장들 시대에요. 아브라함은 씨족이에요. 이스라엘 씨족의 우두머리들입니다. 씨족사회가 쭉 진행이 됐고요. 그 다음에 인류의 역사에서 부족 사회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사사들이에요. 사사들은 말하자면 작은 군주에요. 씨족에서 확장된 거예요. 사사시대에 마지막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사이기도 하고 예언자이기도 하고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 기능 자체가. 사무엘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어요. 부족사회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오는 그 길목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무엘 뒤에 왕정시대가 시작이 되잖아요. 사울이 첫 왕이 됐습니다만 사울을 왕으로 삼지 않습니다. 왕정시대의 특징은 세습이에요. 아들이 왕이 돼야 되요. 사울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왕이라고 할 수 없고요. 다윗이 실제 왕이고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조입니다. 다윗 왕조라고 하죠. 사실은 이스라엘에 다툼은 많았습니다. 그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인데 성경에는 일관되게 흐름이 있긴 한데 그 안에서도 서로 싸우고 북왕조, 남왕조 분리 되고 그런데서 우리나라가 북한과 남한이 갈라져 있듯이 서로 정통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단락에 족장들이 나와요. 아브라함, 이삭이야기가 나와요. 이게 다 믿음으로 된 거예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간단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두 가지의 하나님 명령에 끼어있던 거예요. 하나는, 친자식 이삭이 후손이 된다는 분명한 약속이었어요. 또 하나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여기서 이게 어려운거죠. 이걸 그대로 순종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결국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에 다 충실한 거예요. 이삭을 바치라는 말에도 순종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 후손이 이삭을 통해서 된다는 사실을 의심한 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확실하게 믿은 거죠. 서로 충돌되는 사건인데 같이 믿은 거예요. 거기에 어떤 믿음을 통해서 결정적인 사건이 증거가 되고 확실성이 되고 그게 정말 모든 것의 근거, 진리다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죠. 오늘 이 시간에 믿음의 정체를 다 빠삭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닌데, 이게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도피적으로 그냥 믿습니다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를 꿰뚫고 들어가는 영적인 태도에요. 이거는 근거가 없어서 종교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실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신비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참된 신뢰 안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될 바른 영적 태도입니다. 이런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이고요. 그게 정말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삭, 야곱, 에서, 쭉 얘기 나오지요. 그 다음 네 번째 단락, 23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여기는 모세가 주로 나와요. 이거는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23절 읽겠습니다.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여기 모세에 대한 이야기인데 거의 기계적으로 믿음으로 했다고 구절구절마다 강조를 했습니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모든 걸 다 믿음으로 기록을 했어요.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시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참된 것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절 보세요. 믿음으로 쭉 나오죠. 23, 24, 27, 28, 29, 30, 31, 라합까지 나오네요. 기생 라합. 여리고성을 칠 때 정탐꾼들을 도와줬던 여자입니다. 그건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스라엘 역사를 쭉 따라가면서 이 모든 게 다 믿음으로 일어났던 사건이다를 말하려는 거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이 믿음은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어서 어디로 도피하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 과학은 확실한 거고, 실증적인 거고 이 믿음은 그렇지 않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계가 그렇게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얘기 잠깐 더 붙이면요.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 가나안 까지 들어가서 약속의 땅으로 거기서 정착하게 될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어요. 그거는 계산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거기에 우연한 많은 사건들이 개입돼서 아브라함의 전체 역사에 드러나게 된 거죠. 우리는 굉장히 복잡하지 않습니까. 생각할 것도 많고요. 정치도 있고, 교육, 가정, 사회, 많은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골치 아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명이 완성되는가 하는, 여기에도 솔깃하고 저기에도 솔깃하고 많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면 안 되죠.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이야기하는 고유한 삶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은 놓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의 시각, 혹은 그러한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 계산해 내도 다 답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붙드는 것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에요. 거룩한 영적 상상력, 거룩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32절에서 40절입니다. 여기 사사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요. 여기도 교독 하실까요. 제가 32절을 읽겠습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11장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장엄해요. 어떻게 보면 큰 교향악단의 노래를 듣듯이 이 믿음의 세계를 아주 화려한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서 풀어가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공부를 위해서 몇 번 읽었어요. 많이 더 깨달았습니다. 어떻다고 하는 게. 목사도 나름대로 교회 전문가이고 신학 전문가인데 멈춰 있는 게 아니에요. 거의 종말까지 계속 열려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진보, 앞으로 신앙이 나가야 되는 거예요. 목사도 계속 수행적인, 구도적인 자세로 일을 해야겠죠. 오늘도 이렇게 읽으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 말씀이 깊은 어떤 것들을 전해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엄한 필치로 그 내용을 담고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나오는 사람들, 사사들이에요. 사사들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나오네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가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온다면 다윗이 아니라 사무엘이 나와야 되죠. 순서대로 따진다면.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거든요. 그런데 순서가 좀 바뀌었어요. 아마 히브리서 기자가 사무엘을 거의 왕 수준으로 보는 건지요. 시대적으로 보자면 사무엘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사울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다윗이 나와야 되는 거죠. 여기서 순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지자들도 나와요. 이름은 나오지 않네요.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아까 제가 말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보세요. 씨족 사회, 족장들, 그 다음에 부족, 사사 시대, 그 다음 왕정 시대로 내려오는데, 예언자들이 주로 어느 때 활동을 했을까요. 당연히 왕정 시대죠. 그 전에는 사사들이 직접 그런 일들도 했으니까요. 왕정 시대에 들어오면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물론 이스라엘은 그래도 여전히 하나였지만, 그래도 좀 하는 역할이 분리되고 문명, 문화가 발달하면서 서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때가 왕정시대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생활을 했다. 믿음으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얘기 하면서요. 특별히 이 대목에서 강조하는 거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다고 얘기합니다. 선지자들도 고난 많이 당했어요. 다음 주가 종려주일이고요. 고난주간이라고도 합니다. 부활절 앞두고 있는 주일인데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 그게 지금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셨지. 그리고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으로써 여기에 오셔서 그렇게 감당하셔야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의 비천한 데에 오셔서 정말 낮은 데에 처하셨지, 케노시스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짐, 이런 것들을 굉장히 많이 들어서 알고 있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자연스러웠을까요? 그건 굉장히 앞, 뒤가 안 맞는 얘기예요. 메시야가 고난 받고 죽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은 그동안의 해석을 통해서 구약의 여러 가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야기나 시편에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가 충분히 해석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걸 알아듣는 거죠. 정말 예수님의 제자들하고 추종하던 사람들하고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건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난 받는 얘기가 쭉 나오잖아요. 결국 36절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뭘 말하는 걸까요. 믿음으로 사사 역할을 하고 선지자 얘기 하고 다윗처럼 왕의 역할을 했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과 조롱을 받았다.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런 고난을 지금 받고 있다. 그러니 영적인 전통이 기독교인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거다.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초기 기독교인들은 믿음, 믿음이 유대인들과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온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 받은 고난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어요. 시대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좀 괜찮을 때도 있었어요. 황제에 따라서 좀 난폭한 황제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조금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 있으면 마이너리티를 공격함으로써 정치 위기를 헤쳐 나가지 않습니까. 로마 황제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정말 그 땐 어려웠고요. 그리고 로마 제도가, 기독교는 로마하고 뗄 수 없습니다. 로마 정치. 로마 황제, 황제주의죠 말하자면. 거기는 왕하고는 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가 굉장히 세련된 집단입니다. 왕이라고 하면 세습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황제들은 세습을 하지 않습니다. 원로원이나 이런데서 민주적으로 뽑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로마의 황제, 이 제도를 우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곳곳 관공서 이런데다가, 황제의 이름을 까먹었는데, 황제 상을 세워놓고 공무원 되는 사람들은 절하고 인사하고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거 안 하니까 로마 공무원이 되지 못하고 그런 등등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여러분 강의안을 좀 보시죠. 밑에서 마지막 넷째 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러한 믿음에 의해서 살던 사람들이 받은 고난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를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모범들이,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전수된다는 사실을 전한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인물들은 믿음을 통해서 참된, 이거는 나중에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쓴 거예요. 구약의 위대한 사람들, 믿음을 통해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갔지만 약속된 것은 받지 못했다. 그 약속된 게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요. 부활이요.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그건 못 받았어요. 그들만 있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를 통해서 구약의 믿음이 완성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지자나 사사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도 그 약속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쭉 설명합니다. 재미있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11, 믿음장에서 나오는 믿음의 실체,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천년 전 히브리서 기자의 이 놀라운 신학 선언, 그리고 간증, 혹은 설교, 이것을 오늘 우리들이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부활 생명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더 깊어지고 그것을 이미 오늘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주님 이렇게 한 주간의 중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또 같이 공부하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각각 여러 형편들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필요한데로 인도하시사 믿음의 길을 잘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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