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최초의 순교자 스데파노
                       (행 6:8-15)         11월16일
스데파노의 등장
예상 외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오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회오리바람에 휩싸이게 되는 계기는 그들에게서 최초의 순교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 순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최초의 순교자는 예수님의 12 사도들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도들의 행정 업무를 돕던 일곱 지도자들 중에서 나왔다는 게 좀 특이하다. 그 사람이 곧 스데파노였는데, 우리는 왜 그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대충 몇 가지 가능성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가장 큰 가능성은 앞 단락(6:1-7) 공부에서 확인했듯이 일곱 집사가 단순히 12사도의 보조 역할만 한 게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독립된 그리스 계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는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지만 스데파노로 대표되는 그리스 계 공동체는 율법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스데파노가 다른 사도나 지도자들에 비해서 유독 튀는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을지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말이다.
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험스럽게 보기 시작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 한명을 선택했는데, 공교롭게 스데파노가 걸려든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역사의 전개는 ‘필연’보다는 오히려 ‘우연’의 힘들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스데파노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순교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지금 우리가 그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최초의 순교자였다는 사실은 거의 정확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일들은 그 공동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쉽게 잊혀지거나 변질되지 않는 법이다. 이 스데파노 전승을 익히 잘 알고 있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일종의 역사가적 시각에서 이 사건을 초기 기독교가 새로운 상황으로 빠져드는 계기로 설명하고 있다. 비교적 극단적인 마찰 없이 어울려 지내던 유대교와의 전선에 회복될 수 없는 틈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곧 스데파노의 순교였다고 말이다.

은총과 성령의 힘
스데파노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았다는 8절의 표현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5절의 표현은 거의 같은 의미이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은총(카리스)과 권능(뒤나미스)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을까? 이런 용어가 가리키는 핵심은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능력들은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전혀 유전적 기질을 물려받지 못한 아이들 중에서 천재적인 예술성을 보이는 아이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현상 같은 것들을 카리스와 뒤나미스라고 볼 수 있다.
계몽주의 이후로 현대인들은 이런 카리스와 뒤나미스보다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에 훨씬 높은 가치를 두고 살아간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발하고 계몽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확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지금도 세계 모든 나라가 경제발전과 과학발전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세계관은 황제와 교황에 의해 인간이 소모품으로 다루어지던 중세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필요했지만, 그 결과로 생태계와 인간성의 파괴만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계속 유재해야할 유일한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삶을 완성시키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계발해야 한다는 인문주의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학문적 연구는 신학자들의 소관이니까 접어두고 교회 생활과 연관해서 한 마디만 지적하자.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적으로 거의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에 치우쳐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이 임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인간의 의도와 목표가 거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놀라운 일들
누가는 위에서 언급한 은총과 권능이 가득한 스데파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놀라운 일들과 기적이 일어난다고 증언한다. 이런 현상들이 무엇인지 누가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기적과 놀라운 일들’(5:12-16)과 동일하다고 한다면 질병 치유와 축귀일 것이다. 고대인들은 이런 난치병과 귀신들림 현상을 의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이들의 의학적 지식이 미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그들보다 근본적으로 월등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의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병들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 전혀 새로운 병들이 새롭게 발생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은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범주에서만, 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주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형태의 지식을 가리켜 ‘계량(計量)적 사유’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을 인간의 계량에서 벗어나는 분으로 인식했다. 경우에 따라서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또는 정치적 사건으로 표현될 뿐이지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인간들이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불러일으키는 분이라는 고백이 핵심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간혹 성서가 표현하고 있는 초자연적인 그 현상 자체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있다. 홍해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과 구름기둥, 욥 이야기, 가나의 포도주 사건 같은 것들을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방식의 성서읽기에 머물러 있게 되면 우리는 창조와 종말의 영이신 하나님을 성서시대의 주관적 인식에 한정시키고 말 것이다. 늘 새롭게 자신의 능력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는 게 가장 바른 성서읽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마음을 열어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을 포기하고 단지 열광적인 상태에 빠지는 것과는 다르다.

논쟁, 매수, 선동
스데파노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이 ‘자유인의 회당’에 속했다는 사실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이 키리네와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출신들이라는 것은 곧 그들이 디아스포라였다는 뜻이다. 원래 디아스포라였던 스데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은 당연히 팔레스타인 유대인이어야 자연스러웠다는 말이다. 아마 누가는 그리스 계 유대인들이 스데파노를 박했다는 전승이 이미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변경하지 못하고 그대로 인용한 것 같다.
어쨌든지 이들은 우선 회당에서 스데파노와 논쟁을 벌였지만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사람들을 매수해서 그에게 불리한 사실을 증언하도록 시켰다. 그들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을 선동하여 스데파노를 의회에 고발했다. 일련의 사건들이 예수의 재판과정과 비슷하게 진행된 셈이다.
그들이 스데파노의 죄를 지적하는 대목은 두 군데이다. “우리는 스데파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11). “이 사람은 언제나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 사람에게서 나자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고 또 모세가 전해 준 관습을 뜯어 고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13,14). 이 두 진술의 내용은 똑같다. 핵심은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성전을 거부했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이 다르다고 하는 것, 또한 그것 때문에 서로 논쟁한다는 것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조직이나 사상도 일사불란보다는 다양성을 확보하는 게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다만 논쟁이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매수하고 선동으로 발전될 경우에 문제의 본질은 사라지고 비본질이 득세하게 된다. 논쟁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되기 위해서는 이 논쟁(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관적 감정과 인식에 치우치지 말고 근원에 대한 관심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적인 논쟁은 인간이 자기의 주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발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천사 같은 얼굴
스데파노에 대한 논고가 끝나자 그 재판정에 앉았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런데 스데파노의 얼굴이 천사 같이 보였다고 한다(15). 이미 8절에서 스데파노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았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모함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천사 같이 보였다는 이 진술은 일관성이 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모세의 얼굴에도 후광이 비쳤고, 예수의 승천 순간에 나타났던 사람의 흰옷도 역시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에게는 그 겉모습에도 역시 하나님의 빛이 감돈다는 게 성서의 설명이다.
이런 현상은 그렇게 별난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은 자기가 집중하고 있는 그 대상을 그 얼굴에 그대로 나타낸다는 말이다. 독서삼매에 빠진 사람의 얼굴에는 그 책의 내용이 표현되고, 한눈팔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얼굴에도 역시 그 음악의 세계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광을 심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당연히 거룩한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물론 ‘미녀와 야수’처럼 아주 특별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은 자기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그것을 얼굴에 그린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얼굴에 분노와 절망이 보인다면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산 사람일 것이다.
순교를 앞둔 스데파노의 얼굴이 ‘천사’ 같이 보였다는 이 사실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이 놓여야 할 새로운 생명의 지평을 읽을 수 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