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출세이야기

(창 37:18-36, 41:37-57, 47:13-26)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는 4대에 걸친 이들 족장 전승은 야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드라마틱하게 설명한다. 족장들 중에서 이삭의 무게는 좀 떨어지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흡사 대하소설 같은 삶을 살았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아브라함, 20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 이집트로 팔려갔다가 결국 이집트의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른 요셉의 삶에는 각각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다. 특히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거주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나 실제로 그 이야기를 다룬 본문의 분량이 많다는 점에서 가장 뛰어난 서사라고 볼 수 있다.


이집트로 팔려가는 요셉(창 37:18-36)


요셉 설화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의 편애에서 시작된다. 야곱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했다고(창 37:3) 창세기 기자가 설명한다. 야곱은 요셉에게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했다고 한다. 이런 옷은 왕족의 예복이다. 그렇다면 결국 요셉은 그 형들과는 달리 노동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 된다. 야곱에게 많은 종들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 목축업이 순전히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기에 아들들도 역시 노동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라. 자기들은 매일 양들과 씨름하면서 사는데 요셉은 예복이나 입고 앉아 있었다면 약 오르지 않을 형제들이 있었겠는가? 우리 큰딸도 설거지를 시키면 왜 동생은 시키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린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정확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성서 기자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건 그렇게 정확한 이유가 아니다. 요셉은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에서 열 한 번째다. 막내는 베냐민이다. 요셉은 이미 그 당시에 열일곱 살이 되었다.(2절) 야곱이 훨씬 어린 막내아들인 베냐민을 제쳐놓고 요셉을 편애했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요셉의 어머니가 라헬이기 때문인가? 야곱에게 아들들을 낳아준 네 명의 여자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한 여자는 분명히 라헬이었지만 이것도 이 맥락에서 정답이 아니다. 베냐민의 어머니도 역시 라헬이다. 더구나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다.(창 35:16-20)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죽음을 불사하고 낳은 아들이 베냐민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다른 아들보다 애착이 더 가야 할 텐데, 야곱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요셉을 편애했다고 한다.

성서는 탐정추리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불문곡직하고 야곱이 요셉을 특별하게 대우했다는 사실만 언급한다. 성서 기자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야곱이 왜 요셉을 편애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서를 읽는 우리도 그런 부분들은 대충 넘어가도 된다. 아니 대충 넘어가야만 성서의 근본을 포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소한 사실이 훨씬 근원적인 어떤 사건으로 들어가기 위한 동기로 작용한다는 사실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게 인간 삶의 우여곡절과 그 안에 침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가 엮어내고 있는 신비이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다는 사실은 아무런 합리적인 타당성이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어떤 의미 있는 사건이 진행된다는 게 바로 성서 기자들이 성서를 기술하고 있는 방식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의미 있는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에 대한 설명이다. 요셉의 형들이 세겜으로 양떼를 몰고 갔을 때 야곱은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사업이 잘되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어떤 무역회사 사장이 아들을 시켜서 외국 지사에 출장을 보내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이다. 지금은 인공사료를 쓰거나 일정한 장소에서 풀을 뜯게 하지만 고대의 목축사업은 풀이 있는 곳으로 양떼를 몰고 다녔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풀과 물이 있는 적당하게 있는 곳을 찾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 왜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며칠이나 걸리는 힘든 여행길이다. 더구나 본문에 따르면 형제들이 세겜에 머물지 않고 도다인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렇게 위험한 곳을 곱게 자란, 그래서 늘 특별한 옷만 입고 자란 요셉을 보낸다는 게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서기자는 이런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요점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결국 요셉은 물어물어 형들이 양치는 곳까지 왔으며,(17절) 요셉의 모습을 발견한 형들은 그를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다.(18절) 여기서부터 요셉 설화의 속도가 빨라진다. 그들은 이렇게 의논했다고 성서 기자가 서술한다. “야, 꿈장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아무 구덩이에나 처넣고는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보자.”(19,20절) 이 형들이 왜 요셉을 죽일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 또는 자기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한다는 사실, 혹은 형들과 아버지까지 요셉 자신에게 절하는 꿈 이야기 때문에 죽일 생각을 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은 아주 사소한 문제만으로도 적개심을 느끼고, 어떤 경우에는 죽일 모의까지 꾸밉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사람이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많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 이 형들의 음모는 그렇게 진지한 게 아니라 가볍게 던진 말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인지 모른다. 열 명의 형제들 중에서 아무든지 장난삼아 “저 요셉이라는 녀석을 한번 혼 구멍을 내주어야 하지 않겠어? 요즘 너무 까분단 말이야.”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몇 명이 옆에서 맞장구를 치다보면 자기들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동네아들이 무심결에 던진 돌이 개구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맏형인 르우벤이 중재에 나섰다. “피만은 흘리지 말아라. 그 녀석을 이 빈들에 있는 구덩이에 처넣고 손만은 대지 말아라.”(22절). 르우벤은 나중에 자기가 요셉을 구해낼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말에 따라서 결국 그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처넣었다.

오늘 본문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요셉이 침묵을 지킨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앞에서 고자질을 잘하고, 자기 꿈 이야기를 떠벌리던 요셉이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에게 왜 이런 못된 짓을 하느냐? 아버지가 결국 이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내가 잘못했으니 한번만 살려 달라. 당연히 이런 말을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성서기자는 이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뒤에서 벌어지는 위급한 순간에도 요셉의 침묵은 계속된다. 요셉을 둘러싼 사람들의 주장과 고함과 격론은 분분한데 요셉은 정반대로 일언반구도 없다. 왜 그럴까? 요셉이 그만큼 신중하다는 말인지, 그가 너무 놀란 나머지 실어증에 걸렸다는 말인지.

성서 기자의 관심은 요셉의 말과 그의 행동이 아니었다는 게 그 대답이다. 지금 성서 기자는 요셉의 운명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것 너머의 어떤 손길을 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손길과 직접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 성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사려가 깊은 독자라고 한다면 요셉이 침묵하고 있는 바로 이 대목에서 ‘행위’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형들이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미면서 한 말을 기억해보라. “그 꿈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보자.”(20후) 이들의 입을 빌려서 성서 기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형들의 말과 요셉의 침묵을 통해서 성서기자는 하나님의 손길을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창세기 기자가 이런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밀고 나가는지 본문을 좀 더 따라가자.

구덩이에 빠진 요셉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이런 이야기를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옛날이야기처럼 전해 듣는 이스라엘 어린이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구덩이에서 굶어죽는가, 아니면 르우벤의 계획대로 나중에 구출되는가? 이 이야기는 예상외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동생 요셉을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높은 구덩이에 밀어 넣고 형들은 그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25절) 우리의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서 이 장면을 그려본다면, 웅덩이 안에서 살려달라는 요셉의 고함소리가 들렸을지 모른다. 예수의 모형에 가장 가까운 구약의 인물이 요셉이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그는 조용히 기도했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대목에서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어쨌든지 동생을 구덩이에 몰아넣은 상황에서 천연덕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건 참으로 고약한 모습이다. 그 순간에 길르앗으로부터 낙타를 몰고 오는 이스마엘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할아버지인 이삭의 이복동생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다. 마침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가 형제들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그래도 우리 동기인데 그를 죽이고 그 피를 덮어 버린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니? 그러니 그 애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고 우리는 손을 대지 말자. 아무래도 우리 동기요, 우리 혈육이 아니냐?”(26,27절) 형제들이 유다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는 사이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그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 냥에 팔아넘겼다.(28절) 이런 증언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요셉을 판 사람들은 요셉의 형제들이 아니라 미디안 상인들이다. 그런데 36절에 보면 요셉을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에게 판 사람들이 미디안 사람이다. 이 요셉 설화에는 서로 다른 두 전승이 결합된 것 같다. 하나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이스마엘인들에게 팔린 J 문서이며, 다른 하나는 요셉의 형제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미디안 상인들이 요셉을 웅덩이에서 끌어내어 이스마엘인들에게 판 E 문서이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 뒤에는 또 다시 요셉의 형들이 꾸민 음모가 계속된다. 그들은 요셉의 장신구로 꾸민 옷에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보여주었다. 요셉의 옷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야곱은 평생 상복을 벗지 않고 살겠다는 심정으로 아들들과 며느리들의 위로를 마다하며 이렇게 외친다. “아니다. 나는 지하로 내 아들한테 울면서 내려가겠다.”(35절).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야곱의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건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형과 아버지와 삼촌을 기만하던 야곱이 결국 자식들에게 기만당하며 끝없이 깊은 슬픔 속에 빠져드는 장면이다.

앞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질 때 침묵했다고 지적했듯이, 미디안 상인들에 의해서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게 참으로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인간 삶의 모순이며 질곡이다. 요셉을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거짓은 늘 말이 많은 법이다. 아들들에게 속은 야곱도 말이 많다.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 자기 연민에 휩싸이는 사람도 역시 말이 많은 법이다. 이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 말이 없다. 요셉이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요셉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니다.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행위에 관해서 독자들에게 해명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요셉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빠진 요셉은 지금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침묵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인지 모른다. 우리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동하시는 순간이 아닐는지. 우리의 삶에는 그런 순간들이 많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 그런 상황 말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벌어진 뒤로 지난 40여 일 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이런 어려움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다. 처음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필자는 다비아에서 그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자고 주장했다. 지금 사람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마당에 기독교 공격적 선교 등에 관한 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말보다는 침묵이 훨씬 옳을 때가 많다.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말이 너무 많다. 아니 우리는 늘 사람의 말을 통해서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런 말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침묵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발견해야만 한다. 침묵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상은 2005년 8월7일, 샘터교회에서 행한 설교를 정리한 내용)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요셉(창 41:37-57)


요셉은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에게 노예로 팔렸다. 그 사건도 전승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난다. 창 37:36절에 따르면 미디안 사람들이 보디발에게 팔았지만, 창 39:1절에 의하면 이스마엘 사람이 팔았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약간 황당무계하게 보일 정도로 비약이 심하지만 성서기자가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다. 요셉의 운명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보디발에게 팔린 요셉은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으므로 앞길이 열려 이집트 사람 주인집의 한 식구처럼 되었다.”(창 39:2) 그 주인은 야훼께서 요셉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았으며,(39:3) 야훼께서 요셉을 보아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한다.(5절) 보디발의 아내 사건으로 인해서 감옥에 갇혔지만 거기서도 “야훼께서는 요셉을 돌보셨다.”고 한다. 야훼께서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과 은총을 베푸셨다.(21절)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전권을 위임받은 것처럼 감옥에서도 전권을 위임받았다. 불행 가운데서도 신상의 일이 잘 풀린 이유는 “야훼께서 그를 돌보시어 그가 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잘되게 해주셨던 것” 때문이다.(23절) 결국 요셉은 감옥에서 시종장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한 인연으로 파라오의 꿈을 해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론 그 해몽도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해몽하라는 파라오의 명령을 받은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무슨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폐하께 복된 말씀을 일러주실 이는 하느님뿐이십니다.”(41:16) 이런 말은 이미 감옥에서 두 시종장의 꿈을 해몽할 때 한 말과 똑같다.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40:8) 요셉의 이야기를 대하는 독자들은 요셉의 훌륭한 인품과 신앙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요셉의 기구한 운명에 개입하셔서 전혀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요셉의 역할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건 참으로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바로 삶의 수용성이 아닐는지. 요나처럼 자기의 운명을 거부하더라도 야훼 하나님의 의지가 개입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던 요나가 결국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다른 건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순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는 요즘 한국교회에서 흔하게 회자되는 <긍정의 힘>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긍정의 힘은 일종의 심리학이나, 또는 불가능은 없다 식의 처세술에 불과하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오스틴 목사 부부의 간증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들이 어느 날 멋진 집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그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간정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들은 결국 그 집을 손에 넣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힘은 이처럼 집도 차지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처세술을 왜 신앙적인 차원으로 끌어들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보기에 따라서 그들의 주장에 순수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극한의 경쟁구도 속에서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신자들에게 이런 방식으로라도 확신을 심어주고, 결과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해주고 싶어 한다는 순수성 말이다. 순수하다고 해서 모두 옳은 건 아니다. 이런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며, 대중추수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교회의 영성이 이런 방식으로 이용되다보면 결국 기독교 신앙이 정신 치유의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대체적으로 정신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이런 정신 치료 차원의 종교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열린예배나 찬양과 경배 류의 집회는 고급스러운 심리치료 행위이며, 부흥회 류의 집회는 막나가는 심리치료 행위이다. 필자가 보기에 감동적인 예화에 치우친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도 역시 고상한 심리치료에 가깝다. 물론 그들은 그런 방식의 집회와 설교에서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빠부대 소녀들이 자기가 우상으로 받드는 가수나 탤런트의 몸짓 하나하나에 괴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종교생활에서도 아무런 내용이 없이 단지 감성적 자극만으로도 얼마든지 은혜 체험이 가능하다. 이런 방식이라 하더라도 은혜만 받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이비 이단에 대해서 아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도 나름으로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순전히 율법적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그들은 웬만해서는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감동도 받지 않는다. 아마 열린예배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율법적인 신앙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율법적인 사람들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차원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결국 그들도 심리적인 만족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찬양 치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신앙현상과 다르지 않다. 감성 중심이나 의지 중심이나 무늬만 달랐지 양자 모두 자기집중이며, 자기연민이다.

필자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1) 한국교회의 신앙이 모두 이렇게 병들었다는 말인가? 2) 비록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생활만 잘 하면 괜찮은 거 아니냐? 3) 구체적으로 대안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은 따로 시간을 내서 대답해야 할 정도로 그 맥락이 복잡하며, 오늘 공부의 중심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접어두고 두 번째의 질문에 대해서만 간단히 대답하겠다. 자기집중과 자기연민에 대한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자기집중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죄다. 실정법을 위반하거나 관습법을 어기는 것, 또는 파렴치한 행위는 죄의 결과일 뿐이지 죄 자체는 아니다. 죄가 교만이라는 어거스틴의 주장이나 자기사랑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모두 그 사실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첫 선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이다. 여기서 회개(메타노이아)는 도덕, 윤리적인 잘못을 고치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삶의 중심으로 옮기라는 뜻이다. 세상은 자기집중과 자기연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업적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기독교 죄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성서와 기독교는 왜 자기집중을 죄라고 말하는가? 죄를 왜 문제 삼는가? 답은 하나이다. 그것이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자기집중은 우리의 영혼을 소진시킨다. 영적인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이 곧 죽음이 아니겠는가? 사이비 이단들이 위험하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약간씩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추종자들의 영혼을 자기 자신의 업적에 매달리게 만든다. 뉴 에이지 류의 종교도 역시 인간의 내부에서 생명을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결국은 우리를 허무로 몰아가고 말 것이다. 물론 그들도 중간에 부분적인 희열을 맛볼 것이다. 그런 일시적인 희열에 대중은 속는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의 예들 더 들어야겠다. 이런 문제가 한국교회에서 매우 심각할 정도로 만연해 있기 때문에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한 교회를 실명으로 거론하겠다. <사랑의교회>는 수년전부터 ‘특새’를 열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이런 이벤트에는 형식만 기독교일 뿐이지 실제로는 뉴 에이지적인 성격이 아주 깊이 담겨 있다. 그들은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특새에 참여한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대동한다. 그들은 똑같은 신앙적 감수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희열을 맛보고 있다. 사랑의교회에 순장으로 참여하고 있는 어떤 분의 말을 빌리면(그는 다비안이기도 함) 첫해는 무언가 신선한 것 같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식상했다고 한다. 필자는 첫해부터 그런 건 길이 아니라고 보았다.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 같은 슬로건으로 모이는 특새에 무슨 기독교 영성이 살아나겠는가 말이다. 이런 이벤트 성 특새는 사랑의교회만이 아니라 명성교회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형편이다. 

다시 우리의 글쓰기의 중심으로 돌아와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는 인간론이 아니라 신론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와 그의 통치를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운명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런 삶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영성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불안감의 표출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맞닿아 있을 때 나오는 삶의 능력이다. 폴 틸리히의 표현으로 한다면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이다. 이에 반해서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에 영적인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수용하지 못한다. 내면에서 참된 만족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주변의 조건에만 마음을 소진시킬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그들의 삶은 황폐화된다. 나우엔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하라.


What do we do in our solitude? The first answer is nothing. Just be present to the One who wants your attention and listen. It is precisely in this useless presence to God that we can gradually die to our illusions of power and control and give ear to the voice of love hidden in the center of our being. But doing nothing, being useless is not as passive as it sounds. In fact it requires effort and great attentiveness. It calls us to an active listening in which we make ourselves available to God's healing presence and can be made new.” (Henri Nouwen, The Road to Peace 중에서, 밑줄은 필자)


요셉이 자기에게 닥친 기구한 운명을 수용했다는 말은 결국 그가 하나님의 뜻에 영적인 주파수를 맞추었다는 뜻이리라. 고대인들에게 신의 뜻이 전달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받아들여졌던 꿈이 요셉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역시 그가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에 모든 영혼을 기울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요셉을 영성이 풍요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요셉은 살찐 암소 일곱 마리와 마른 소 일곱 마리, 그리고 잘 여문 일곱 이삭과 여물지 못한 일곱 이삭에 관한 파라오의 꿈을 해몽했다. 앞으로 이집트에 일곱 해의 풍년과 일곱 해의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요셉은 해몽으로 끝나지 않고 풍년이 드는 동안 흉년을 대비해서 곡식을 거두어 보관하라고 대처방식까지 제시했다. 요셉의 해몽과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인 파라오는 요셉을 일인지하만인지상의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요셉의 지위는 아래와 같은 파라오의 진술에서 확인된다. “내가 왕이지만 너의 승낙 없이는 이집트 전국에서 사람들은 손 하나 발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41:44)

이런 이야기의 전개는 작위적으로 비친다. 일개 노예였으며, 지금은 주인의 아내에게 성폭력을 행사했다는 죄명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외국 청년의 말을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가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그렇게 자연스럽지는 않다. 요셉의 해몽이 그럴듯하게 보였다 하더라도 실무자가 아니라 실제의 권력을 제공한다는 사실도 별로 개연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해몽 한 가지 이유로 요셉이 벼락출세를 한다는 것도 비약이 심해 보인다. 성서기자는 지금 그런 논리를 제공하려는 게 아니라 요셉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행위를 전하는데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다. 야곱 일행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다. 이런 한 가지의 집필 목적을 제공하기 위해서 성서기자는 논리적 비약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이제 이집트에서 권력 서열 두 번째로 올라선 요셉의 신상에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생겼다. 그에게 ‘사브낫바네아’라는 이집트 식 이름이 주어졌다. 이를테면 창씨개명이다. ‘온’이라는 곳의 사제 보디베라의 딸 아세낫을 아내로 맞았다. 보디베라는 먼저 요셉이 주인으로 섬기던 보디발과 동일한 이름이다. 요셉은 아세낫을 통해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첫 아들의 이름은 므나쎄이며,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함이다. 가나안에서 무역상들에게 팔려 이집트에 온 젊은이 요셉의 신분이 천양지차로 바뀌었다. 친구의 모함으로 로마의 노예가 되어 군함에서 노를 젓던 벤허가 죽기 직전의 장군을 살려내고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벤허>의 줄거리와 비슷하다.

위에서 필자는 요셉의 출세 이야기에 논리성이 떨어지는 이유가 이 전승이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관점은 요셉의 신분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이집트 사람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훗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속하게 되는 그의 두 아들은 어머니가 이집트 제사장의 딸이다. 이방인과 혼인을 맺지 말라거나 심지어 같은 민족인 사마리아 사람을 무시하는 이스라엘의 혈통주의에 완전히 반하는 일들이 요셉에게 일어난 것이다. 성서기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비해서 이런 문제들이 사소하게 보였다는 게 이런 비논리성의 이유이다.

어쨌든지 이제 요셉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자리까지 올랐다. 그의 해몽대로 칠년 동안 풍년이 들었으며(41:47), 다시 칠년 동안 흉년이 들었다.(54절) 요셉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기근은 이집트만이 아니라 온 세계를 휩쓸었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의 요셉에게로 몰려들었다. 창 41:57절로 요셉의 출세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온 세계를 휩쓴 대기근이 요셉에게는 오히려 이름을 낼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었다.

성서기자는 이 순간에 독자들의 관심을 다시 야곱 가족에게로 돌린다.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가서 요셉을 만나게 된다는 서사가 42:1에서부터 47:12절까지 이어진다. 그 와중에서 베냐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서술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 베냐민 에피소드는 서사의 긴장감을 크게 떨어뜨린다. 서사의 사실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뭔가 아쉬운 대목이다. 이런 문제는 지금 전혀 다른 삶의 자리에서 창세기를 일고 있는 필자가 왈가왈부할 주제는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이해하는데 훨씬 친근하게 다가왔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하기 때문이다.


매점매석과 요셉(창 47:13-26)


이제 야곱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터를 잡게 된 그 역사적 배경이 충분히 설명된 셈이다. 그렇다면 야곱과 요셉 전승은 마무리되어야 한다. 그 마무리는 야곱과 요셉의 죽음이다. 그 이야기는 창 47:27절부터 마지막 50:26절까지 진행된다. 그 보도에 의하면 야곱과 요셉은 모두 이집트의 왕궁 전통에 따라서 미이라로 처리되었다. 야곱의 시신은 가나안 요단강 건너편 아닷의 타작마당에 묻혔고, 요셉은 이집트에 묻혔다. 창세기 말미에 나오는 요셉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죽을 터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올라가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다. 너희는 그 때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가거라.(창 50:24,25)


요셉의 이 유언은 자연인 한 사람의 유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주의 사관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존재 근거이다. 그 하나님은 먼 훗날 모세의 소명을 통해서 그들을 찾아오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김이 없다. 그리고 그 약속은 늘 새롭게 갱신된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약속의 완성은 종말에 완전히 성취되겠지만, 역사 안에서는 예수 사건에서 선취되었다.

야곱 가족이 요셉의 권력에 힘입어 이집트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야곱과 요셉의 죽음 사이에 사족과 같은 이야기가 끼어들었다. 창 47:13-26절이 보도하고 있는 요셉의 정치에 관한 것이다. 그게 조금 이상하다. 뭔가 이야기가 비틀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에 이야기꾼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 아니면 우연하게 그렇게 됐는지는 우리가 판단하기 어렵다. 야곱 가족의 이집트 이주 이야기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요셉이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제외한 최고 권력을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그 이야기는 충분히 거론된 상태이다. 7년의 풍년 기간에 곡식을 충분히 비축했으며, 흉년이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이집트의 요셉에게도 몰려들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그 후로 야곱 아들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요셉을 만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요셉에 관해서 무엇이 더 필요한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창세기 기자는 어떤 극적인 사건을 질질 끄는 한국 티브이 일일 드라마처럼 이미 상황이 종료됐는데도 요셉의 정치 활약상을 반복해서 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근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이집트만이 아니라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까지 기근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이집트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이 모두 요셉의 손에 들어왔고, 그 돈은 다시 파라오 황실로 넘겨졌다.(창 47:13,14) 민중들이 요셉에게 와서 돈이 없다고 하자 대신 가축이라도 가져오라고 했다. 그들은 가축을 요셉에게로 가져왔다. 요셉은 말, 소, 양, 나귀를 받고 양식을 내주었다고 한다.(17절) 그 많은 가축을 요셉이 관리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축이 파라오에게 속했다는 사실을 문서로 확인하고 그 관리를 원래의 주인에게 위임했을지 모른다. 가축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결국 파라오에게도 손해가 가니 말이다. 그 다음 해에도 여전히 흉년이었다. 민중들은 돈, 가축을 바쳤고, 이제는 몸뚱이와 땅밖에 없었다. 결국 농민들은 토지를 요셉에게 팔았다. 요셉은 그것을 파라오에게 바쳤다. 이집트의 온 땅이 파라오의 것이 되었고, 온 이집트 땅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그의 종이 되었다고 한다.(20,21절) 요셉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협정을 맺었다. 소출의 2할을 파라오에게 바쳐야만 했다. 이 단락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맺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 토지에 관하여 요셉이 만든 법령은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는데, 그것은 즉 파라오에게 오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들의 땅만은 파라오의 것이 되지 않았다.”(창 47:26)

이 단락에는 이집트의 자유농이 완전히 농노로 추락하는 그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첫 단계로 돈을 잃었고, 그 다음에는 가축을, 마지막으로는 몸뚱이와 땅을 잃었다. 이집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파라오의 종이며, 모든 땅을 파라오의 소유가 되었다. 여기서 요셉은 전형적인 사업가 기질을 보인다. 풍년이 들었을 때 싼값으로 곡식을 대량으로 매입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제 가격을 받고, 또는 더 높은 가격을 받고 팔았다. 이런 것만 본다면 요셉은 분명히 매점매석을 통해서 이집트의 모든 재산을 긁어모은 고약한 사업가의 전형이다. 요셉의 행동은 이자를 받지 말라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지 말라는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볼 때도 바람직하지 못했다.

오늘 우리는 성서를 오늘의 관점으로 읽을 게 아니라 그 당시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성서가 말하려는 것은 요셉이 악덕 기업가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이집트 사람들이 아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47:25절에서 이집트 민중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른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른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파라오의 종이 되겠습니다.” 이집트 민중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말이다. 오늘의 관점으로는 요셉의 매점매석 행위가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고대의 관점으로는 비난받지 않아도 된다. 성서는 경제윤리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있었다는 말이다. 성서나 기독교 신앙을 경제윤리의 차원에서 무언가 분명한 대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자칫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신앙과 경제윤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간단하게 해결될 수는 없다. 예컨대 최근 몇 달 동안 한국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된 이랜드 사태만 보아도 그렇다. 이랜드 사측은 비정규직의 위치에서 계산대 업무를 보던 이들과의 계약을 폐기하고 그 일을 외부 용역으로 바꿨다. 그들은 그런 조치를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노조 측은 아무리 합법이라지만 부도덕하다고 주장하면서 지금도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개인적으로는 노조 측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지만 노조의 주장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제구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랜드라는 기업에 태생적인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경제 문제를 신앙문제와 직결시킨 것 같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철저하게 의존해야 할 기독교 신앙으로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기업을 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힘을 쏟는 삶의 태도이지만, 기업은 경쟁력 제고를 통한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한다. 우리가 포도원 주인에 대한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독교 신앙으로 오늘의 경제 윤리를 재단할 수 없다. 혹시 이랜드 사측에 속한 분들이 기업 운영은 철저하게 기업적인 마인드로 하고, 거기서 얻어지는 경제적 이윤을 교회활동에 사용하는 것이 바로 기독 기업인의 자세라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기업과 기독교를 일치시키지 말아야 했다. 그게 정상이다. 

이런 점에서는 저는 교회와 이 세상의 관계를 말할 때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Zweireichlehre)이 옳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은 두 나라의 긴장 가운데서 살아간다. 하나는 하늘의 왕국이며, 다른 하나는 땅의 왕국입니다. 전자는 영적인 질서로 움직이며, 후자는 세속적인 질서로 움직입니다. 전자는 교회에게 부여된 세계라면 후자는 정치에 부여된 세계이다.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는 이런 두왕국론을 이원론적 세계관이라고 비판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에 따르면 요즘 한국교회에서 벌이고 있는 ‘성시화운동’이나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입장이 옳을 것이다. 아마 이랜드 사주들도 그런 입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 기업을 운영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기독교적인 생각을 정치와 기업에서 살려나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는 자신 있는 대답을 못할 것이다. 만약 기독교적인 정신이 투철하다고 한다면 대통령 후보 경쟁에 나서지 말아야만 했고, 나섰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치켜세워야만 했다. 지금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세속적인 정치나 경제는 그 패러다임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논의를 정리하자. 요셉 전승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여기서 요셉의 꿈을 강조한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벼락출세를 하게 된 이유가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우리도 꿈을 꾸자고 선동한다. 이런 성서읽기는 심각한 왜곡이다. 요셉이 꿈을 꾸거나 남의 꿈을 해몽한 것은 성서기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작은 단서에 불과하다. 연극 무대에서 꿈은 작은 소품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실행하고, 또한 더 큰 구원인 출애굽을 준비하기 위해서 요셉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요셉의 출세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요셉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끌어가셨을 것이다. 요셉처럼 꿈을 꾸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게 좋은 훨씬 바람직한 신앙적 태도이다. 다만 앞에서 짚은 것처럼 요셉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삶의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도 결국은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영적인 시선을 둘 때 가능할 것이다. 칼 바르트 버전으로 이 글을 마친다. 우리는 성서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온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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