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이야기에 관해서

출 16:1-36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많은 사건들을 경험했다. 민족 전체의 생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사소한 문제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율법, 불기둥과 구름기둥, 금송아지, 놋뱀, 식수,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아론과 미리암, 성막, 크고 작은 전쟁 등등.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만나 사건이다. 크게 보면 만나와 메추라기이지만 실제로는 만나 사건이라고 보는 게 옳다. 민수기(11장)도 그렇지만 여기 출애굽기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거리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게 이 설화의 단초이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이후 한 달 반이 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에 비축했던 먹거리들이 이제 바닥 날 때쯤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들이 광야에서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약간의 들짐승을 잡는다거나, 또는 광야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에게서 조금씩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수십만, 수백만 명의 먹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이집트에서 미디안 광야로 나온다면 당연히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거라는 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들에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다는 건 무슨 이유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그들에게는 엑서더스가 긴급한 현안이어서 먹거리 조달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둘째, 그들이 나름으로 먹거리를 준비했지만 광야횡단이 예상 외로 많은 세월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먹거리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원래 이 미디안 광야를 통과하는 데는 장정 걸음으로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부녀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웬만하면 한 달 정도면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가나안 언저리까지는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계획했던 대로만 이 대장정이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이런 먹는 문제는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들이 40년을 광야에서 버텨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모세를 따라서 출애굽에 나설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모세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그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 것도 모른 채 이렇게 엑서더스의 대장정에 나섰다가 그 초장부터 뜻하지 않은 큰 시련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예상외의 사건들은 그 뒤로도 계속된다. 광야시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역사는 이런 예상외의 사건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예언자들은 바로 이 사실, 즉 이스라엘이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의 개입이야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실증이라고 선포했다. 


역사의 우연성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의 개입은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과 전체 세계가 흘러가는 역사의 속성이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길게 잡아 한 달간의 여정이면 새로운 땅 가나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이스라엘의 야무진 꿈이 초반부터 허물어진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런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고성능의 컴퓨터를 두드려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이미 결정된 대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곧 우리의 삶과 역사에 끊임없이 우연성이 개입된다는 뜻이다. 이 우연성은 곧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다.

가장 근원적인 우연성은 지구에 생명이 등장한 사건이다. 오랫동안 무기물만 가득하던 지구에 탄소(C)를 포함한 유기물이 등장한 것 자체가 우연한 사건이며, 유기물에서 핵산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단세포 생명체가 생성되었으며, 결국 지성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는 긴 진화의 과정이 무수한 우연성의 결과이다. 다른 부분은 접어두고,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조상으로부터 유인원인 호모 에렉투스(직립인)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아프리카의 지질학적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서 우리는 이런 우연성의 극치를 본다. 원래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조상이 살고 있던 아프리카 대륙이 지질학적 변형을 통해서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되었다. 서쪽은 원래의 상태인 삼림으로, 동쪽은 초원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공동조상이 결국 생존경쟁의 과정에서 직립을 습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립에 의해서 이제 대뇌의 용량과 기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발성기관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손이 자유로워짐으로써 급기야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되었다는 게 진화론에 토대한 고생물학자들의 인간 출현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아프리카의 지형이 동서로 완전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결국 인간이 지구에 출현한 것도 역시 우연성의 개입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진화론과 창조론 논쟁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사실 성서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한국에서는 소위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은데, 나는 도대체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21세기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이백 년 전으로 돌려놓겠다는 것인지. 이런 방식으로는 세계를 창조하고 종말에 완성하실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편적 진리에 근거해서 변증해온 기독교 전통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교부시대 이후로 세계 전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면서 세계 정신사를 끌어오던 기독교 신학이 18,19세기에 이르러 지동설과 진화론을 비롯한 세상의 학문과의 공소한 싸움을 벌이면서 세속의 학문으로부터 완전히 따돌림 당하게 되었다. 오늘 이런 상황을 추스르기도 힘든 마당에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이 성서의 신화적 보도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것은 비록 그 동기가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를 점점 더 위기로 몰아가는 행태이다. 그들은 성서가 인류 역사에서, 더 궁극적으로는 지구 역사에서 매우 한정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가 겉으로는 매우 신앙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광신에 가깝다.

이런 창조과학회의 방식이 아니라 자연신학적인 관점에서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노력이 최근에 많이 시도되고 있다. 몰트만도 그런 신학자 중의 하나이다. 그는 성서의 인간적 원리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늘의 과학이 밝혀주고 있는 세계상과의 차이를 해소시켜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성서의 문헌 전통들은 강한 인간적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두 가지 창조 보도(창 1-3장)는 인간의 창조를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인간을 중심 자리에 세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성적 인간이 생명의 진화에서 매우 늦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서의 문헌 전통들은 수억 년에 달하는 공룡의 역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 성서에 묘사된 종말론의 모든 상들은 이 세계의 마지막이 인간의 마지막과 함께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대 안에 오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은 다음에, 아니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하는 때에 올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올 것이다. 다시 말하여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 전체는 사멸할 수 있으며, ‘먼 미래의 우주’(far-future Universe)는 인간 없는 -어쨌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인간 없는- 우주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과학과 지혜, 115).


우주론적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민족의 역사도 역시 우연성이 아니면 해명될 수 없다. 전혀 다른 삶의 공간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이 부부가 된다는 사실도 역시 그 사이에 수많은 우연성이 개입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로마의 흥망성쇠도 역시 우연한 사건들의 개입과 연관되어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의 높이에 따라서 세계사가 달라졌을 거라는 말도 역시 이런 맥락의 의미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요정과 유령이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우연한 힘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이것은 이 세상에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이다.

성서가 하나님을 진술할 때도 늘 이런 방식이다. 이 세상의 왕들이 아무리 지략과 술수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계획대로 역사가 진행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역사에 개입하기 때문이라는 게 곧 성서 기자들의 기본적인 역사 이해이다. 하나님의 개입을 증명하는 사건들이 곧 역사의 우연성들이라는 말이다. 성서 기자들은 역사의 이런 우연한 진행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숨어 있는 손길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늘이 종잇장처럼 말리고, 바다 속에서 용들이 출몰하는 묵시 사상적 표상들과 자신이 왜 오른편으로 선택되고, 또는 왼편으로 선택되었는지 모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최후의 심판 표상(마 25:31-46)도 역시 우연한 힘의 개입으로 이 역사가 완성된다는 기독교 종말론의 성격을 가리킨다.

이런 우연성 개념은 헬라 철학자들과 중세기 철학자 및 신학자들에 의해서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기독교 신학이 철학에 영향을 끼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서 매우 소상하게 해명된 기독교의 우연성 개념은 기본적으로 창조론과 세계의 시간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재생되거나 윤회하는 게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유일회적일 수밖에 없다. 불가역의 원리라는 물리학 개념에 의해서도 역시 이 세상은 시간과 더불어 앞으로 진행되는 역사라는 게 분명한 셈이다. 이렇게 유일회적인 사건이 세계라고 한다면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곧 우연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기독교 신학에서는 바로 이 우연이 곧 자연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이다.


이스라엘의 불평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투덜거렸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3절). 모세는 이들을 향해서 여러 번에 걸쳐, 정확하게 짚는다면 7-12절 사이에 다섯 번이나 불평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민수기 11장 4절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 냄새도 맡지 못하고, 매일 만나만으로는 못살겠다고 불평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이 그렇게 투덜거리고 불평을 쏟아냈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 불평이 옳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은 이 척박한 현실에서 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불평은 불평이 없어질 정도로 환경과 조건이 좋아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지고가야 할 숙명이다. 인간 실존은 그런 조건의 변화로 인해서 참된 만족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과를 이룬 한국 사람들이 끊임없는 불평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것의 단적이 예인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게 하나도 없다. 실제로 어린 아들 딸들과 노인들이 굶고 있다면 누구인들 불평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을 텐데도 모세가 그들을 책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만이 아니라 모세 스스로 매우 당황했을 가능성이 높다. 수십만의 무리를 끌고 광야로 나섰는데, 원래 계획했던 가나안을 향한 여정에 큰 차질이 빚어졌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에 관해 무한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모세 자신도 자신이 저지른 엑서더스 자체에 대해서 순간적으로나마 후회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는 이미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해나갈 방안을 마련하긴 했겠지만, 생존에 필요한 조건들이 난관에 부닥치면서 부터는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뚫고 나가려면 훨씬 강력한 정신무장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하게 책망한 게 아닐는지. 

성서텍스트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는 차원에서 참고적으로 모세의 엑서더스 사건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한번 조명해보자. 그 엑서더스 사건이 과연 야훼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혹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모세의 야심 때문에 벌어진 정치적 사건은 아니었을까? 이 엑서더스가 이집트 파라오를 향한 반역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고대사회도 그렇고, 근대국가도 그렇지만 반역은 늘 일어나는 법이다. 성서가 보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세 이전에도 그 당시 사회 최하위 층을 대표하는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엑서더스를 꿈꾼 수많은 혁명가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대개는 히브리인들을 설득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때로는 일부만 설득했을 것이고, 좀 나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엑서더스에 성공한 예는 모세밖에는 없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는 오늘 우리가 알 길이 없으며, 모세의 경우에 어떻게 성공하게 되었는지도 우리는 정확하게 모른다. 물론 성서는 야훼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실행하셨으며, 결정적으로는 홍해를 갈랐다고 설명하지만 그건 모두 성공한 쿠데타의 역사 서술이기 때문에 무조건 실체적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 이야기가 픽션이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좀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 신앙의 근본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엑서더스의 역사성 문제는 이런 정도로 접고, 이제 민중들에게 불평을 듣고 있는 모세가 처한 상황과 그의 심리적 상태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로 하자. 어쩌면 이미 답은 주어진 것인지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사실 그들만의 불평이 아니라 이미 모세까지 매우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역사적 정황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서 불만을 터뜨릴 수 있었지만 모세는 아무에게도 그럴 수 없었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지도자의 고독을 우리는 지금 모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모두가 불안하지만 지도자는 그런 불안을 내색할 수 없는 법이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공동체 전체가 붕괴되니 말이다. 

모세는 민중들의 불평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야훼를 향한 것이라고 책망한다. “야훼께서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시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주신다. 야훼께서 당신께 불평하는 너희의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냐? 너희가 하는 불평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야훼께 하는 것이다.”(8절). 어쩌면 이 말은 자기도 야훼를 원망하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게 아닐까 모르겠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모세가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이드로의 사위로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모세를 부추겨서 이런 일을 저지르게 하신 분이 야훼라고 한다면,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런 불평을 터뜨릴 만하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민족 영웅답게, 그리고 야훼에게서 특별한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답게 자신의 힘든 형편을 안으로 삭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시 묻자. 모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야훼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말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는 생존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생존에 대해서 책임을 지신다.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랴.”이 말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존 너머의 복지와 출세를 지향하는 것과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책망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차이가 있다. 모세는 최소한 하나님이 그들 민족의 생존을 책임지신다는 확신이 있는 반면에 백성들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들 앞에 생존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건 분명하지만, 모세는 이 위기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고 백성들은 보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에서 불평은 나올 수가 없다. 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에게 인간적 욕망을 부추기지 말고 생존의 지평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성서가 말하는 영성의 본질이다. 생존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삶 자체에 집중하는 영적 태도를 가리킨다.


만나의 실체

백성들의 불평을 들은 모세와 아론은 당연히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약속에 의지해서 우여곡절 끝에 광야로 나온 백성들이 툭하면 자신들을 원망하고 있었으니, 백성들에게 마음이 갈 리가 없다. 그들이 그렇게 불평을 토로한 후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과 모세 사이에서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며, 또는 다른 종족과 전쟁을 벌여서라도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성서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지만 아마 그들 중에서 실제로 이집트로 돌아간 사람들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성서가 그런 것에 대해서 일일이 진술하지 않은 이유는 성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전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전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현실로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매우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모세에게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만한 무슨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게 아니다. 원래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모세가 야훼께 기도하고, 그 다음에 야훼가 응답하는 게 순서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전혀 그런 절차 없이 야훼가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는 방식으로 진술되고 있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야훼는 백성들의 불평 앞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4절). 이 말씀은 곧 만나를 내려주겠다는 뜻이다. 이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 광야에 매일 아침마다 만나가 깔리게 되었다. 그 뒷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 식구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여야 했다. 욕심이 발동해서 더 많이 거두어들여서 남겨두면 그 다음날 아침에 그것은 곧 상했다. 여섯째 날에 두 배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는 건 일주일에 하루씩 모든 노동을 멈추어야 한다는 안식일 규정과 연관된다.

이 만나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만나는 지금도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자연적 현상이라고 한다. 연지벌레에게서 나오는 분비물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에 떨어진 다음에 기온이 내려가는 밤중에 단단하게 굳는데, 사람들은 아침에 그걸 모아서 먹을 수 있다. 이 알맹이들은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해가 뜨면 얼마 있지 않아서 사라진다고 한다. 그게 아마 적정량 이상을 거두어들인 사람들의 만나가 그 다음날 상했다는 보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렇듯 만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서 특별하게 일으키신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여기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혼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성서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들을 그대로 믿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이야 일반적인 종교심이라는 점에서 크게 탓할 필요는 없지만, 무조건 옹호해 줄 수도 없다. 이 문제는 성서 텍스트의 기적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와 직결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이 세상은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 모든 걸 해명해낼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기 때문에 기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하지만, 성서와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그렇게 기계적인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도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성서의 기적이라는 무엇인가?”


기적이란 무엇인가?

성서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대표적으로는 홍해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태양과 별의 운행 정지, 여리고 성 붕괴, 엘리야의 불 수레 승천 사건 등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신약성서에서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 포도주로 변한 물, 오병이어, 장애인들의 치유 등등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그런 기적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걸까? 성서는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성서의 기적 이야기를 묘사된 그대로 믿을 뿐이지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 분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성서의 진술이 인간의 지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즉 자연과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 성서 기자들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근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야말로 옳은 성서읽기라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유지될 때만 성서 텍스트와 독자와의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대화에 소홀한 채 무조건적인 믿음만을 강조한다면 그건 역사를 향해 열려 있는 기독교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작은 종교적 경험을 절대화하는 사이비 이단들의 열광주의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도대체 기적이라는 게 무엇일까? 일단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건이 바로 기적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늘 바닷물로 채워져 있어야 할 홍해가 일시적으로 갈라졌다면 그건 분명히 자연법칙이 깨진 사건이다. 물이 어느 순간에 포도주가 되었다면 그것도 역시 자연법칙에 위배된다. 오병이어(五餠二魚)로 5천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면 그건 분명히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에 진술되고 있는 기적을 이해하려면 자연법칙에 대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성서가 기적적인 현상으로 묘사한 것들이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성서의 그 이야기를 굳이 기적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헬라의 철학자들로부터 최근의 황우석 박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자들이 밝혀내는 자연법칙은 자연이 작동되는 일정한 규칙이다. 삼각형 세 꼭지의 합은 180도라거나, 지구에는 일정한 정도의 만유인력과 관성이 작용한다거나, 유전자 지도는 이중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들은 모든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자연법칙과 원리들이다.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는 자연법칙에는 기본적으로 공간과 시간의 범주라는 전제가 따라다닌다. 즉 만유인력은 지구라는 공간 안에서만 통용되는 원리일 뿐이지 우주 공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또한 배아복제를 통한 줄기 세포는 지금까지 밝혀진 유전공학의 패러다임 안에서만 타당한 것이지 다른 생명기제가 작동되는 세계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자연과학이 밝혀주고 있는 자연법칙이라는 게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성서의 기적 이야기를 이런 자연법칙의 잣대로 재단하는 건 별로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서의 기적 설화가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절대적 진리라는 뜻도 아니다. 성서의 기적 설화가 생성되던 시기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자연과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성서의 기적 설화를 오늘의 자연과학과 연결해서 사실이니 아니니 하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고대인들은 이 우주를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의 구조로 보았고, 모든 자연에 주술적인 힘이 잠재해 있다고 보았으며, 화산 폭발을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식했고, 인간에게 임한 재앙을 신의 진노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서 기자들은 기적 설화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대목을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다. 성서 기자들은 그 당시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연 현상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사건들을 초자연적 기적이라고 인식함으로써 자신들의 운명과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했을 뿐이다.

성서 시대와 전혀 다른 과학의 시대에 살아가는 오늘의 독자들은 기적 설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기적 설화가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해석학적 도구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의 세계관으로 복귀할 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적합한 해석학적 도구들을 새롭게 찾아가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오늘 우리가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현대의 자연과학도 역사가 흐른 다음에는 미숙한 세계관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늘 새롭게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적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한편으로 성서의 중심을 놓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에 의해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일상의 영성

만나가 초자연적인 게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만나 사건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서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성서가 아주 일반적인 자연현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자기를 알리신다. 흡사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볕과 비를 받을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알리신다. 만약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자기를 알리신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C.S. 루이스는 자연원리와 하나님의 통치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서 자연원리를 깨지 않는다. 예컨대 남을 헤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휘두르는 야구방망이를 순간적으로 꽃다발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만 특별하게 대우 받는 걸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실 수도 없다.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시나이 반도 내륙에 살던 모든 사람이 아침마다 먹을 수 있는 자연 현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신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초자연적 기적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걸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똑같은 만나를 먹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인식했고, 다른 민족들을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을까? 여기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한 역할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과 그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인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놓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와준 사건으로 인식했다. 화산 폭발을 보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생각했다.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들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 만나 사건을 좀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자. 앞에서 짚은 대로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이후 한 달 반이 흘렀다. 출애굽 당시에 비축했던 먹을거리가 거의 바닥 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초조했을는지는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까딱하다가는 광야에서 완전히 민족 전체가 몰살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인류 역사에서 그런 방식으로 몰살당한 민족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생존의 위기로 인해 이 엑서더스 사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여론 앞에서 모세와 아론은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로서는 진퇴양난에 빠진 셈이다. 이집트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양식은 바닥났다. 그는 생존의 절대 위기를 직감했다. 그는 기도 중에서 만나가 생각났다. 성서가 보도하고 있진 않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목동으로 지내던 40년 동안 이 만나를 맛본 경험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이거라도 먹고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이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먹을거리다. 대략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 모세는 만나를 준비하신 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필자가 보기에 야훼 하나님 신앙은 바로 이처럼 일상의 영성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한다면 역사적 역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이 구체적인 역사에 개입하고 있는 하나님의 힘을, 그 은총을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서 기자들이며, 예언자들이다. 아마 그 부근에 살던 많은 여러 종족들 중에서도 이미 만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신다는 그 은총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모세는 그것을 기억하고 그 은총을 깨달았으며, 그래서 결국 백성들도 그렇게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목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일상의 영성을 발견견할 수 있도록, 그 영성으로 이 잠정적인 세상을 살아내도록, 바로 그런 길을 스스로 갈 수 있도록 돕는 행위(spiritual care)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잘 살거나 출세한다거나 건강해야 한다는 강압이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일상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일상의 은총이기도 하다. 우리 삶 자체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그런 은총을 깊은 영성으로 잡아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곧 기독교인이라는 말이다. 아래의 글은 언젠가 대구성서아카데미 연구실로 쓰고 있는 아파트 입구에서 발견한 거미에 대한 느낌을 적은 것이다. 일상의 영성에 도움이 될까 해서 여기에 실었다.



거미에 대해

오늘 오후에 예배 처소로 사용하고 있는 천호아파트 입구에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현상을 보았다. 아파트 1층은 관리사무실과 주차공간과 엘리베이터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람이 사는 집은 2층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 입구에 3미터 정도 높이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예배 후 집에 갔다가 교회로 가기 위해서 그 공간 밑을 지나가는데, 발쪽으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키면서 돌아서서 무언지 살펴보았다. 땅바닥에서 겨우 10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공중에 떠있는 거미였다. 평소에 테니스를 치던 내 순발력 탓에 다행스럽게도 거미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거미줄이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직감적으로 거미줄에 매달려 있겠거니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렇게 위험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허리를 굽혀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아마 2층 베란다 한 구석에서 겨울을 나는 중이었다가 오랜만에 봄처럼 따뜻한 날씨에 몸이 간지러웠는지 잠시 나들이를 나왔나 보다. 그런데 나들이치고는 너무나 위험했다. 만약 내가 무심코 지나가거나 아니면 순발력이 좀 떨어졌다면 그 녀석은 내 발에 밟혀 장애를 입거나 천당에 갔을 것이다.

좀 말이 옆으로 흐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천당에도 거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 거미가 없는 천당이라니! 그런 천당은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내가 어렸을 때 본 거미줄은 감동 자체였다. 아침 이슬이 초롱초롱 매달린 거미줄을 본 적이 있는지. 거미줄에 잡힌 나비나 잠자리가 거미에 의해서 생포당하는 장면은 끔찍하긴 했지만 그래도 명주실처럼 반짝이는 거미줄은 내 어린 시절의 한 귀퉁이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나는 이 녀석이 어떤 줄에 매달려 있는지 좀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바짝 다가갔다. 그런데 아무리 초점을 맞추어도 거미줄이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이 더 나빠진 건가, 아니면 거미줄 없이 이 녀석이 ‘공중부양’의 기술을 익힌 걸까?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어보았다. 그제야 거미줄이 내 망막에 포착되었다. 밝은 쪽을 향해서 바라볼 때는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보이지 않더니 좀 어두운 안쪽으로 향해서 보니까 수직으로 내리꽂힌 거미줄이 보였다. 그 순간의 놀라움이라니! 물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명체가 직접 만들어서 실용화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는 선이 3미터 가량 전혀 구부러짐이나 휘어짐 없이 햇살처럼 밑으로 내려온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 어떤 절대적인 현상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장면이 모세가 본 호렙산의 불타는 가시떨기라고 한다면 좀 불경한가? 그 끝에 겨우 2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 거미 한 마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자기의 생존을 이 한 가닥 거미줄에 완전히 맡기고 있는 이 거미의 신뢰와 그 자유의 경지를 인간이 따라갈 수 있을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가 이런 정도는 돼야 하는 게 아닐까? 지구의 중력을 극복한 듯 3미터의 줄에 매달려 있는 이 녀석의 자유를 간섭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리 아파트 개구쟁이들에게 들키는 날이면 뼈도 못 추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는 걸 생각하고 손으로 거미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그 녀석은 성깔을 부리지 않고, 그렇다고 겁먹는 태도도 안 보이면서 천천히, 중국말로 만만디(?), 순전히 우리말로 시나브로 침착하게 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2센티미터의 몸으로 300센티미터의 줄을 타고 있는 셈이다. 자기 몸의 150배다. 170센티미터의 인간에 비한다면 255미터의 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아무리 암벽타기 훈련이 잘된 산악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줄을 타려면 최소한 세 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그런데 거미는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에 거뜬히 2층 베란다까지 올라갔다. 그 모습을 디카로 잡는 건데, 아쉽다. 거미는 몸은 작지만 다리가 길어서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줄을 타고 올라가면서 그 줄을 밑으로 늘어뜨리는 사람의 줄타기와 달리 거미는 올라가면서 그 줄을 자기 몸의 한 곳으로 모았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줄이 거미의 가슴 안쪽에 모이면서 솜뭉치처럼 변했다. 그걸 다시 먹을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재활용할는지 나로서는 그 녀석의 꿍꿍이를 알 수 없다.

대략 3분 정도 나는 생명과 존재의 아찔한 경험을 한 셈이다. 고난도의 줄타기 기술을 가진 러시아 서커스를 본 것 같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이런 거미가 없는 천당은 심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우리 딸들은 거미를 보기만 하면 기겁을 한다. 오늘 저녁을 먹을 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대학생인 큰 딸은 이야기만 듣고도 소름이 끼친다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딸들은 곤충을 싫어한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미야자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면서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런 경험은 억지로 배울 수 없는 거니까 내가 딸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야훼 하나님 인식

내가 보기에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은 결국 만나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만나를 통해서 인식하게 된 하나님이다.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녁에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분이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6,7절). 12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이 야훼의 입을 통해서 모세에게 전달된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고 일러주어라.” 6절의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와 12절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는 똑같은 내용이다. 이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분이 야훼이시며, 그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의 생존을 지키시는 그 야훼께서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앞으로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 만나 사건의 핵심이다.

이 만나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돈독해지고, 그들의 하나님 인식이 심화했을까? 안타깝지만 그 뒤로도 그들은 어려움을 만나기만 하면 늘 모세를 원망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했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여전히 신앙의 본질적인 심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이 만나 사건이 그들에게 그렇게 확실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약간의 위로를 받았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나 사건만이 아니라 홍해가 갈라진 사건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을 강하게 끌고 나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또는 두 가지가 함께 결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첫째, 만나 사건이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관한 강력한 경험이었지만 역사의 과정에서 희미해졌을지 모른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의 감격이 세월과 더불어 시드는 경우와 비슷하다. 둘째, 만나 사건이 그 당시에는 별로 강력한 경험이 아니었지만, 훗날 역사과정에서 성서기자들에 의해서 아주 명백한 하나님의 구원통치로 해석되었다. 전자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역사적으로 불안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이고, 후자는 만나 사건이 구약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이다.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기독교인의 신앙역사이기도 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은 몇 가지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는 것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런 증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 말은 거꾸로 그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게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사람에 따라서 아주 놀라운 일을 보고도 거기서 아무런 생명의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사소한 일상적인 일을 보면서도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다면 사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만나는 필요 없다. 아니 우리의 주변은 늘 만나로 가득하다. 그래서 예수도 만나를 상기하고 있던 민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 6:35). 중요한 건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이 열려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영적 감수성을 갖춘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바로 영적인 만나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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