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송아지 전승에 관해서

출 32:1-29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에 남긴 최대 업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출애굽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이다. 출애굽은 정치 사건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한다면, 율법은 종교 사건으로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 두 사건을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한 묶음으로 다루어야 한다. 다른 고대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고대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가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세의 활동 시기는 왕정이 시작하기 훨씬 전, 판관시대보다 훨씬 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출애굽은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이며, 율법도 역시 종교적이면 동시에 정치적이라는 말이다. 어쨌든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끌어간 두 축은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성서는 출애굽과 율법 사이에 시간적으로 긴 공백을 두지 않는다. 피를 말리는 듯한 파라오와의 기세 싸움에서 승리한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출애굽의 환희는 한 순간으로 끝나고 그들 앞에는 광야의 혹독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애굽 후 석 달 만에 그들은 시내 산 아래 도착했는데, 그곳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명령을 받은, 일명 호렙 산이기도 하다. 처음 소명을 받은 산을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는 법이다. 모세는 이 산에 다시 올라갔다. 그는 여기서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출 20장)을 비롯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삶과 일상까지 규정하는 법전(출 21,31장)을 부여받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난 출애굽과 율법수여 이야기는 모두 광야생활과 연관된다. 출애굽은 고대 최고 문명사회에서 광야로 진입한 것이며, 율법수여는 바로 그 광야의 한 복판에서 앞으로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집트 문명으로부터 탈출이며 동시에 가나안 문명으로의 진입이라는 점에서 광야는 일종의 세례 사건인 셈이다. 이 광야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고향이다. 예언자들은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이스라엘의 왕조, 귀족, 제사장,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민중들을 향한 광야의 목소리를 내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 광야를 기억하라고 외쳤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회상하라는 것이다. 거기서 이스라엘 조상들은 하나님을 경험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과 율법은 동일하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 경험이다. 출애굽은 하나님을 향한 열광적 경험이라고 한다면, 율법은 일상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열광적 경험이 일상에 내재화하지 않으면 역사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출애굽보다도 율법 사건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노의 하나님


성서기자는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으로 이 율법수여의 마지막 순간에 아주 불길한 사건을 보도한다. 시내 산에서 율법 수여가 종결될 그 순간에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장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서 데려 내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저들이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다지도 빨리 벗어나 저희 손으로 부어 만든 수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려 내온 우리의 신이다.’ 하고 떠드는구나!”(출 32:7,8) 그리고 이어서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10절)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순간에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모조리 쓸어버린다면 출애굽 사건도 무의미하며, 율법도 아무 소용이 없다. 도대체 시내 산 밑에서 모세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성서기자는 야훼 하나님을 분노하는 신으로 묘사하는 것일까?

본문 1-6절이 이를 간략하게 보도한다. 시내 산 아래 평지에 모세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기색이 전혀 없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세가 정확한 날짜를 말하지 않고 올라갔기 때문인지, 날짜를 정했지만 그 날짜가 지난 것인지, 그 속사정을 우리는 모른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니 한시가 급한 백성들이 초조했을 거라는 건 짐작이 간다. 그들은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출 32:1) 백성들의 이 요구를 듣고 아론은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그는 모세의 형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모세가 없는 사이에 일시적으로 책임을 맡았을 뿐이 아론이 백성들의 강력한 요구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고민의 구체적인 흔적이 성서에는 없지만 모세가 그의 책임을 개인적으로 추궁하면서도 그에게 실질적인 벌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렇게 짐작할 수는 있다. 모세가 아론의 정상을 참작한 게 아니냐, 하는 말이다. 물론 아론의 책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성서기자도 그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아론이 백성들을 제멋대로 날뛰게 해서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했다고 말이다.(출 32:25)

아론의 입장에서 이 사태를 바라본다면 그의 입장을 나름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하다. 만약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를 외면했다면 그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고, 자중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출애굽 이후 세 달이 지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출애굽이라는 열광적 사건을 경험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현실은 광야에서 겪어야 할 생존의 위기였다. 그들 앞에는 확실한 게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모세는 행방이 묘연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 아닌가. 결국 아론은, 흡사 IMF 초기에 금모으기 운동을 벌였던 우리처럼, 백성들의 금귀거리를 기증받아서 수송아지 상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상(像)을 보고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온 우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그 앞에 제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뛰놀았다고 한다.

이런 모습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신 야훼 하나님은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한 말씀을 하셨겠는가, 하고 이해가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당혹스럽다. 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심판하시는가? 버릇을 고쳐놓으려고 교육적인 차원에서 따끔하게 벌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민족 전체를 멸하겠다는 말은 인간을 창조한 자신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과 관용을 그 속성으로 하는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은, 특히 오늘 본문이 묘사하듯이 한 민족을 싹쓸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성서는 이 대목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6장 이하에는 그 유명한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온다. 야훼 하나님은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고 사람 만드신 일을 후회하면서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버리리라.”(창 6:7)고 다짐하셨다. 창세기 기자의 설명을 따르면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결심을 그대로 실행하셨다. 그 당시 사람들이 아무리 악하다고 하더라도 노아 가족 이외에 모든 인류를 멸절시켰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멸절된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 막 태어났거나 정지 지체장애로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까지 모두 죽이는 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그 말을 성서기자들은 쏟아내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


이런 성서의 보도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는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심판에 대한 성서의 진술을 실증적인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아홍수에 관한 성서의 모든 보도를 사실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그들은 인간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죄와 심판이라는 구도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구도를 모든 상황에 적용시키는 것은 성서에 대한 피상적 이해로 인해서 벌어지는 오류이다. 이런 논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죄한 자의 고난은 일단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신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결코 인과응보의 원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논리는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다. 건강하고 출세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삶이 파괴된 사람은 벌을 받은 것처럼 생각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행 5:1-11)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역설하기도 한다. 헌금에 관련된 사건인 탓인지 목회자와 신자들에게 아주 예민하게 다가가는 이야기이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래도 그들은 죽지 않는다. 오해는 마시라. 이런 성서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문제는 성서텍스트가 말하려는 근원적인 세계를 해석하지 않고 그 보도를 사실 그대로 오늘의 신앙에 적용한다는 데에 있다.

바벨론의 홍수설화나 이집트의 홍수설화와 연관해서 역사 비평적으로 다루어야 할 노아 홍수 이야기를 오늘 이 자리에서 짚을 생각이 없다. 이런 심판에 관한 성서의 전승은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잔인한 심판을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라가려면 그들이 인간의 악과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는지를 조목조목 살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서의 구원역사가 전체 인류의 보편적 역사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 근본적인 작업을 소홀히 한 채 모든 심판 보도를 실증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인다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죄 없는 사람까지 죽인다는 딜레마를 헤쳐나오기 힘들다.

둘째, 성서가 말하는 심판은 단지 교훈적인 뿐이지 실제적인 의미는 없다는 해석이다. 이것도 역시 오류이다. 성서보도를 실증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차원해서 해석되어야 할 역사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이 ‘심판’ 사상 자체가 빠지면 성서의 가르침은 와해된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전제한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심판자로 나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창조는 곧 심판을 통한 완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심판한다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관점에서도 이 심판은 빼놓을 수 없다. 예수님은 모든 진리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준거이다. 가라지와 알곡이 언제까지나 함께 뒤섞여 있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새롭게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진리를 가로막는 모든 세력이 제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서는 종말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심판받는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심판의 그렇게 엄격하다는 뜻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진리의 실체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심판이 오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여전히 가라지가 남아있을 것이며,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고 살아가야한다.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아마 지금 현실의 역사에서도 그 심판이 유효한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성서는 물론 그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바로 위에서 심판이 구원의 역사라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 현실의 심판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최후의 심판을 미리 내다보는 예증(例症)들이다. 예컨대 생태계의 파괴는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심판을 미래 내다보게 한다. 극한의 생존경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신자유주의도 역시 마지막 심판의 한 전조(前兆)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여전히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결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재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종말의 미래로 유보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오늘 우리는 최선으로 시시비비를 따져야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 잘못된 것을 배척하는 그 결단을 회피할 수 없다. 최후의 심판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아니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라도 오늘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완성을 파괴하는 악과 투쟁해야 할 역사적 책임감을 손쉽게 벗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역사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짐이다. 이런 짐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며,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심판과 사랑


성서기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역사적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살았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한가, 인간이 왜 이렇게 잔인하고 이기적인가,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내버려두시지, 그들은 이런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는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더 지속되도록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끔찍한 심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심판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조와 출애굽의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근동의 물신 신앙의 대상인 바알과 금송아지로 아주 손쉽게 돌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찌 더 두고 볼 수 있는가. 그걸 방관한다면 그 신은 참된 신이 아니며, 사랑의 신도 아니다. 참된 사랑은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파괴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출애굽기 기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출애굽기 전승에 참여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싹쓸이할 수도 있는 신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말들이 전승되어 오늘 출애굽기에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심판을 함께 묶어서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 어떻게 하나로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몇몇 속성으로 다 파악할 수 없다. 그런 속성은 성서기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최소한의 개념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직 사랑도 완전하게는 모르고 정의로운 심판도 완전하게는 모른다. 더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그의 세상 통치방식을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먹이사슬의 끔찍한 현상에 대해서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다. 말벌 한 마리가 수천, 수만 마리의 꿀벌을 죽이는 일이나 사자 무리들이 병든 물소나 어린 물소를 잡아먹는 장면은 자연세계에서 흔하다.(하늘이 선하지 않다는 도덕경의 경구가 바로 이런 뜻인가?) 그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지를 생물학적 구도에 의해서만 해명할 수는 없다. 진화론은 드러난 생명현상에 한정되는 설명일 뿐이지 그 근원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현현상과 인류의 역사에는 우리가 합리적인 논리로 모두 해명해낼 수 없는 ‘어두운 차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어두운 자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도 이런 통치방식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다른 건 접어두고 하나님의 심판이 사랑과 대립한다는 생각이 옳지 않다는 사실만 짚고 넘어가자. 아주 쉬운 예로, 어머니가 아이의 종아리를 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그 아이는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왜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그 순간에는 모른다. 왜냐하면 아이가 어머니의 깊은 생각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 훗날 이 아이가 철이 들면 어머니의 회초리는 어머니의 심판이지만 동시에 사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한 표현이다.

물론 우리가 읽은 본문의 상황을 사랑의 회초리로 비유하는 건 너무 나이브한 생각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면, 궁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전제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다. 이스라엘은 피조자들이고 선민으로 선택을 받았다. 창조와 선택에는 분명히 뜻이 있다. 그 뜻이 훼손되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그 창조와 선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다. 토기장이의 배타적 주권을 강조하는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유추해낼 수 있다.

서로 대립되는 것 같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심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전제할 때 타당한 개념이다. 뼈를 깎는 수고로 만든 작품에 약간의 흠집이 있거나, 예상했던 수준에 오르지 못했을 경우에 아낌없이 없애버리는 도예가들의 행동을 그 손에서 빚어지는 자기(磁器)들이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을 아직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더 드러낼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창조와 선택의 배타성이라는 관점에서 인류의 구원 역사에서 필수적인 하나님의 정당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통치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물을 바친 뒤 먹고 마시면서 정신없이 뛰논 것이 과연 죽어야만 할 죄인가? 그 당시 근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종교행위는 대개 이런 방식이었다. 신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고 그것을 경배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신과의 매개로 삼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조형물 앞에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는 말은 성적인 방종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 자체만으로 한 민족이 몰살당해도 좋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오랜 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살아온 타민족은 내버려둔 채 일시적으로 금송아지에 휩싸인 이스라엘 백성들만 죽어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정당한 판단이 아니다. 이건 곧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역차별 아닌가.

이 대답은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부터 하나님과 깊은 계약관계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곧 그들이 감당해야 할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뜻이다. 그 사명은 곧 야훼 하나님을 바르게 섬김으로써 이 세상에 야훼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런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다. 이제 이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별한 훈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서 율법을 준비시켰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즉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방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없이 뛰놀았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계약은 근본적으로 허물어진 것이다. 사랑을 많이 베푼 대상에게서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실망이 더 큰 법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아니, 성서기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거라고 판단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특별한 계약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생각한 성서기자들은 그것이 한쪽의 잘못으로 깨졌을 때 계약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묻지 않아도 될 더 심각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금송아지와 여로보암


금송아지 사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 텍스트가 어떤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본문이 보도하는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 이후 즉시 일어난 것인데, 이와 비슷한 사건이 한참 세월이 지난 다음 남북분열 왕조의 초기에 다시 일어난다. 북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의 장군으로 솔로몬의 명을 거역하여 이집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여로보암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여로보암이 다윗과 솔로몬 왕조를 대적하고 북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된 데에는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복잡한 사연이 담겨 있겠지만, 그중의 가장 큰 책임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에게 있다. 어쨌든지 이제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의 국력은 남유다에 비해서 다섯 배 정도나 컸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솔로몬 성전이 남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여로보암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한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상 둘을 만들어서 하나는 베델에, 다른 하나는 단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예루살렘으로 제사하러 올라가기란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신이 여기에 있다.”(왕상 12:28) 여로보암은 일반 백성들 중에서 자기 마음대로 산당의 제사장을 뽑아 임명했다. 성서기자는 여로보암이 이런 일로 죄를 얻어 지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증언한다.(왕상 13:34)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왕조 역사에서 가장 악랄한 왕으로 묘사된다. 몇몇을 제외하고 모든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앞선 사람은 바로 여로보암이었다. 그에게 정치적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는 성공한 왕이었다. 왕들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판단 기준은 경제, 군사적인 능력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였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말은 그 나라를 정의롭게 다스린다는 뜻이 포함된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오직 정략적인 목적으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으니 야훼 하나님 보기에 어떠했을지는 불문가지이다.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 그의 왕권은 끊기고 말았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사건과 시내 산 밑에서의 금송아지 사건은 깊이 연관된다고 한다. 금송아지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서기자는 시내 산 전승 이야기를 통해서 실제로는 여로보암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중이다. 아마 당시에도 북 이스라엘의 두 지역에 제단을 만든 여로보암의 이 조치가 정당하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남북 분단과 마찬가지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리어 경쟁하고 있는 마당에 자기 백성들이 적대국 수도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것은 그냥 묵과할 정치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비록 편법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서 그냥 넘어가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반대로 원칙대로 단호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적당한 비교가 될지 모르지만 요즘 삼성 비자금 문제로 불거진 삼성 특검법 발의에 대해서 서로 입장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성서기자는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 금송아지 제조와 그것을 섬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켜 민족이 멸절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범죄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종결에 해당되는 35절 말씀은 이미 여로보암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암시하고 있다. “그 뒤에 야훼께서는 백성이 아론을 시켜 수송아지를 만든 데 대한 벌을 내리셨다.”

시내 광야의 금송아지 사건은 단순히 그 당시에 겪었던 신앙적 위기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적 위기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 신앙에 끊임없이 유혹을 받았다. 바알과 아세라는 금송아지 상이 의미하는 풍요, 요즘 식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악순환에 의지하는 삶의 태도를 유발했다. 구약성서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나치리만큼 가나안 문명과 단절시키려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가나안 원주님들과 결혼하지 말아야 하고, 거래하지 말아야 한다. 아예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 성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별나 보일 정도로 성별해내는 이유는 신앙적 혼합주의를 떨쳐버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출세하는 방식의 삶이 일종의 혼합주의이다. 어느 정도의 삶이 혼합주의적인 삶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지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끊어낼 수는 없지만, 우선권이 어디 있는가는 분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다가 우연하게 찾아온 넉넉한 생활형편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으로 양쪽을 함께 추구한다면 그건 바알숭배로 일컬어지는 혼합주의이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에 해당된다. 어쨌든지 이스라엘은 이런 금송아지 상으로 대표되는 물질숭배와 신성의 사물화를 민족멸절의 위기로 보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집단살해 당한 삼천 명


이런 상황 앞에서 모세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아든 바로 그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버리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나? 다급해진 그는 피의자를 변호하는 변호사처럼 세 가지 논리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 첫째,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처벌을 받는다면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무효가 되고 만다. 둘째, 이 일로 인해서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인들의 비웃음을 받게 된다. 셋째, 야훼 하나님이 맹세를 주셨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주셔야 한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이 말을 듣고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리겠다.” 하시던 재앙을 거두셨다고 보도한다.(출 32:11-14)

어떻게 야훼의 마음이 바뀔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일단 야훼 하나님께서 모세의 변론에 감동을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형에 처해질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변호사가 변론을 잘해서 판사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만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듯이 말이다. 어린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의 용서를 구하면 혼내기로 했던 생각을 바꾸듯이 하나님도 모세의 요청으로 생각을 바꾸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세의 논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는지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모든 걸 완벽하게 알고 계신 하나님이 인간처럼 생각을 바꾼다는 주장은 그렇게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사람에게 설득당하는 신이라고 한다면 그 절대성이 허물어지는 게 아닐는지. 그런데 성서는 하나님의 절대성에 손상이 가는 걸 감수하고 생각을 바꾸신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펼친다. 소돔 성을 멸망시키려고 결정했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설득으로 여러 번에 걸쳐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 했다. 소돔 성의 멸망을 유예시킬 수 있는 의인의 숫자가 50명에서 시작해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왔다. 이런 대목만 본다면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마음을 바꾸려고 했다.(창 18:16-33) 야훼가 설득 당한다는 것은 그가 절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이 땅의 상황에 의존적인 분이라는 뜻이다.

성서가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을 바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사실에 대한 진술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하나님이 모세의 간청에 마음을 바꿨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것은 모세와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대였다. 죽어야만 할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그건 하나님이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간청한 사람의 노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인식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실증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범주화하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의 구도로 왜곡시킬 염려도 없지 않다. 다시 말해서 모세의 논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꿨다는 성서의 진술이 명시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본문의 중심이 아니라 죽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성서기자는 모세의 설득에 의해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꾼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순간을 신화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신화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신과 인간이 직접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글쓰기의 방식을 가리킨다. 

어쨌든 하나님은 분명히 마음을 바꾸셨다. 민족 멸절의 위기가 지나갔다.(pass over) 그런데 이제 문제는 모세이다. 그는 레위 후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지파에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이렇게 전달했다. “형제든 친구든 이웃이든 닥치는 대로 찔러 죽여라.”(출 32:27) 그날 삼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 끔찍한 사건이다. 종족살해다. 내전도 이런 내전이 없다.

우리는 궁금하다. 하나님은 마음을 돌리셔서 용서하셨는데, 모세는 왜 삼천 명이나 죽였을까?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질을 부린 건 아닐까? 그는 하나님이 동족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신 것처럼 레위 사람들에 다시 명령을 내렸다. 성서기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는 밝히지 않는다. 물론 민족 전체를 몰살시켜야겠다는 하나님의 처음 생각을 감안한다면 이 명령도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내리신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긴 하지만, 성서기자가 침묵하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여리고 성 공격에서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셨지 그 성의 모든 사람을 살해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명령을 내렸다. 이번의 경우에도 이 살해 명령은 모세의 정치적 판단인 게 분명하다. 우리는 성서기자들의 진술을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댄 영웅들의 모든 진술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면 안 된다. 모세는 자신의 판단으로 종족 살해를 명했다. 일종의 자위권 발동인가?

문제는 오늘 우리가 모세의 행동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모세를 무조건 두둔할 수도 없고,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동족을 죽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얻는 길이며, 일벌백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의 긴 역사를 앞에 놓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을 다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모세의 생각을 우리가 모르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더 끌고 갈 수는 없지만, 단 하루에 삼천 명 살해라는 이 엄청난 참상의 책임은 모세에게 돌아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최후의 심판에서 모세가 칭찬을 받을는지, 아니면 삼천 명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는지, 그것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몫이다. 그 마지막이 오기 이전인 역사의 중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모세의 행위를 하나님의 전체 구원 역사에 근거해서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사족 같지만,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자행하면서도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꺼림칙하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반석을 너무 강하게 두드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렇게 동족의 피를 손에 묻혔기 때문은 아닐는지. 피를 손에 많이 묻힌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듯이 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라고 하더라도 잔인한 행동은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는지.

단 하루에 삼천 명이 살해당한 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 사건의 실체를 우리가 무슨 수로 속속들이 밝혀낼 수 있단 말인가. 다만 한 가지 가능성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출애굽 공동체는 단일 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살고 있던 여러 소수 민족의 연합이며, 또한 미디안 광야 인근에 살고 있는 유목민 및 나그네들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다른 이름인 ‘히브리’는 고대 근동의 하층 계급을 통칭한다. 그렇다면 출애굽 공동체는 박해받았던 다양한 인종의 결합체인 셈이다. 그들은 일단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과정은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었다. 일종의 무정부 상태라 할 수 있는 광야로 나온 이들 사이에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는 심각한 갈등의 골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모세는 이제 결단해야만 한다. 야훼 신앙에 동참하지 못하는 그들을 안고 가는지, 아니면 그들을 제거해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그들은 바로 금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인데,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모세는 자신의 말을 따르는 친위부대인 레위 사람들을 시켜 순식간에 삼천 명을 죽였다. 무력을 통한 정적 제거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모세의 살해행위도 이런 정적 제거의 한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이런 해석은 하나의 가능성이지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은폐된 역사를 오늘 우리는 완전하게 복원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 따라서 무모한 해석을 시도한 이유는 이런 방식이 아니면 삼천 명의 동족을 살해했다는 이 성서의 보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훼 신앙의 정체는?


삼천 명을 살해한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오늘 너희가 자기 아들과 동기마저 희생시켜 가며 야훼께 충성을 다하였으니, 오늘 너희 위에 복이 내릴 것이다.”(출 32:29) 우리는 이 모세의 말이 옳은지, 또한 옳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1980년 6월 광주 민주화 항쟁에 나선 이들을 폭도로 몰아 수백 명이나 살해한 신군부가 자신들의 행위를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한 것처럼 모세의 삼천 명 살해 사건도 무조건 미화되면 곤란하다. 가족과 동족을 떼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와 야훼 하나님에게 충성을 바치는 행위가 도대체 어떻게 일치한다는 말인가?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서, 또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와 내세에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9:27-30, 막 10:28-31, 눅 18:28-30) 강도가 더 심한 말씀도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 마 10:37 참조) 하나님 신앙이 주변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배척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목들이다. 복음서에 한정해서만 본다면, 이 말씀은 가까운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킬 수 있다는 경고이지 모든 가족관계와 인간적 친밀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모세의 상황이다. 삼천 명을 살해하면서까지 야훼께 충성한다는 말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질문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정에 관해서 오늘 우리가 시시비비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건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의 뜻을 추종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당신들은 왜 그렇게 잔인해, 하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삼천 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야훼께 충성한 그들에게 야훼는 복을 내리셨을까? 무엇이 이스라엘에게 복이었는지를 먼저 논의하지 않으면 이런 질문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의 지난한 역사를 보면 복이 과연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들의 모든 신앙 행태는 전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해명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오늘 그 이야기를 읽은 우리는 그들의 신앙형태를 반복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그런 삶의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께 충성을 바쳤지만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야훼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반면에 오늘 신약시대에는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듯이 우리는 긴 역사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야훼 하나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부분에 해당된다. 예컨대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경제체제였다. 그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삼천 명을 살해하면서 야훼께 충성하려 했던 모세와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행태를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신앙행태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무엇이 오늘에도 유효한지는 신학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여전히 보수해야 할 형태도 있고, 폐기해야 할 행태도 있고, 개량해야 할 형태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앙의 본질은 곧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이런 생명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모세 시대에는 금송아지에 연루된 이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와 우리 공동체와 우리 후손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 신구약 전체와 역사 안에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적인 질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생명의 본질을 망각함으로 결국 생명으로부터 소외하게 만드는 오늘의 금송아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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