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수 7:16-26)


아이 성 전투의 패배

우리는 오늘 아주 옛날, 좀 우스꽝스럽게 표현해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기원전 13세기쯤에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히브리 사람들은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잘 견디고 요단강을 건너 팔레스틴 땅으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있는 우리의 눈에 팔레스틴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땅일지 모르지만 팔레스틴 원주민들에게는 분명히 자기들의 땅이었습니다. 고대는 아직 국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팔레스틴의 경우처럼 척박한 땅에 살려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했다는 게 별 무리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내외가 조카 롯을 데리고 처음 팔레스틴으로 왔을 때는 단지 세 명의 떠돌이에 불과했지만 이제 출애굽 이후의 히브리 민중은 팔레스틴 원주민을 압도할 만큼의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더구나 이 히브리 민중은 종교적 이유로 인해서 타민족들과 대충 어울려서 살아가지 못하고 매우 날카롭게 대립함으로써 팔레스틴 원주민과의 사이에서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손님에 불과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틴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어려운 형편을 말하고 사정을 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짜고짜로 여리고 성을 공격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서 6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의 대표자들과 사전에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는지 여부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서의 보도만 보면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여리고 성을 공격한 것 같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이런 사태의 발전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했으며, 오늘 성서를 읽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믿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조심스럽게 이런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서기자들도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많은 우파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하나님의 뜻으로 강변했습니다. 그들은 부시의 이라크 공격 결정을 신앙적으로 지지하고 백악관에서 기도를 했으며, 그곳에 파병되는 미군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참여하는 것으로 믿게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여리고, 아이 성 공격이 지금 행해진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걸 개연성이 높습니다. 성서의 사건을 역사적 비평으로 상대화한다면 결국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불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배우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좁은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과 그의 구원통치를 배우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은 이제 두 번째 공격 대상으로 아이 성을 택합니다. 그 내용이 여호수아 7,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7장1절 이하를 보면 여리고 성을 의외로 손쉽게 함락시킨 이스라엘은 아이 성도 간단히 처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처음 공격에서 여지없이 실패합니다. 여호수아는 야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이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에게 응답을 받았습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일어나거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려 있느냐? 이스라엘은 죄를 지었다. 내가 분부한 지시를 어기고 부정한 것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훔쳐다가 자기 행낭에 숨겨 두었다. 그리하여 저희들이 스스로 부정한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 군이 원수들과 맞설 수 없게 된 것은, 원수들에게 등을 보이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서 그 부정한 것을 치워 버려라. 그렇지 아니하면 다시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노획한 물건을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 같습니다. 이방인의 물건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기도 하고, 남의 것을 약탈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기도 한 그 물건으로 인해서 이제 아이 성과의 첫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들이 결코 팔레스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장본인을 색출하고 처리하는 과정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따라가 볼까요?


아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을 모두 소집했습니다.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그들을 대상으로 심지뽑기를 했는데,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유다 지파를 갈래별로 나서게 한 다음 심지뽑기를 하니까 제라 갈래가 잡혔습니다. 이런 식으로 범위를 좁혀 나갔는데, 최종적으로 아간이 선택되었습니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도 아니고 민족을 불행에 빠지게 한 장본인으로 뽑힌 아간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저지른 일이 발각되었을 때의 심정 말입니다. 간혹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돈이 분실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몇 시까지 갖다 놓으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게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수업이 끝나도 학생들을 보내지 않고 눈을 감게 한 후 위협을 하든지 달래든지 하면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씁니다. 그 방법 중에 아주 고전적인 것은 이렇습니다. 학생들 모르게 작은 항아리에 검은 물감을 푼 물을 담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 눈을 감고 자기 손을 이 항아리 속에 넣는다. 이 항아리에는 신기한 곤충이 있는데 범인의 손을 물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돈을 훔친 아이는 무서워서 손을 깊숙이 넣지 않기 때문에 손에 검은 물감이 묻지 않습니다. 이게 과학적으로는 ‘거짓말 탐지기’와 비슷한 현상인데, 어쨌든지 심지 뽑기로 아간이 범인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도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약간 유치하기는 합니다. 여기에는 다른 곡절이 숨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을 이렇게 심문합니다. “아들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위엄을 알아모시고 그에게 자백하여라. 무슨 일을 했든지 숨기지 말고 말하여라.”(19절). 아간은 자신의 행위를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제가 정녕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제가 한 일은 이러합니다. 제가 전리품 중에서 시날에서 난 좋은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는 그만 욕심이 나서 가졌습니다. 그것들은 제 천막 땅 속에다 은을 밑에 깔고 묻어 두었습니다.”(20,21).


여리고 성을 공격하면서 외투, 은, 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아간의 행위는 우리가 이해할 만합니다. 광야에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며, 겨우 생존하기에 급급했던 사람들이 여리고 성의 옷과 금 등, 고급품을 보았을 때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지요.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고, 그 공동체를 허무는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여리고를 공격할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너희는 깊이 명심하여라. 없애 버리게 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라. 없애 버리게 되어 있는 것을 가지지 말라. 그랬다가는 전멸 당하는 운명을 이스라엘 진영에 스스로 불러들이게 된다. 은이나 금이나 동제품이나 철제품은 모두 야훼께 드릴 거룩한 것이다. 그러니 야훼의 금고에 넣어야 한다.(수 6:18,19).


여호수아가 탐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인간 삶에서 탐심이 매우 중요한 추동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의 방증입니다. 어떻게 보면 탐심은 인간이 세상에 생존하려는 원초적 에너지인 에로스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심성입니다. 이런 자기중심성으로 인해서 개체는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메커니즘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탐심이 무한적으로 작동하면 공동체가 허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려내기 위해서 개인들의 탐심을 제거하려고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탐심과 그것의 억제 사이에서 긴장하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전자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생각이고, 후자는 공동체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겠지요. 이를 사회학적인 용어로 바꿔서 말한다면 전자는 자유이고, 후자는 정의이겠지요. 이 두 가지를 모두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확장시키면 사회정의가 손상 받고, 사회정의를 절대적인 가치로 내세우면 개인의 자유가 축소됩니다. 결국 이 두 요소를 모두 보장하는 게 힘든 이유는 인간의 자유라는 것은 대개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소한 예를 들자면 한 가정에서도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아버지가 티브이를 크게 틀어놓고 밤 12시까지 본다고 합시다. 아버지의 자유는 보장되는지 모르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지장을 받습니다. 식구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어느 정도 절제해야만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가정 단위에서는 어느 정도 다스려진다고 하더라도 국가 단위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는 자유와 정의가 극한의 대립을 보인 시대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유 시장 경제를 절대화하는 시스템입니다. 자기의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소유한다는 원칙이 그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철저하게 유보시키고 대신 사회정의를 절대적인 가치로 내세우는 이념이었습니다. 이 공산주의는 인간을 너무 낙관적으로 해석한 탓인지 결국 사회정의를 유지할만한 최소한의 힘마저 상실한 반면에, 자본주의는 지금도 자기모순이 많지만 어느 정도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우리가 몸으로 경험하는 신자유주의를 인류가 선택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탐심의 에너지는 일시적으로 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겠지만 결국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폐기해야할 무말랭이를 만두소로 만들어 팔았다고 해서 시끄러웠던 만두 파동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먹지 못할 것을 재료로 만두소를 만든 사람이나 그것을 공급받아 만두를 만든 사람이나, 또는 그런 만두를 OEM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판 대기업이나 모두 재화에 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야겠지요. 이번의 경우가 매우 악질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동안 이런 방식으로 처리된 게 어디 한 두 번이겠습니까? 동물 사료용 옥수수로 사람이 먹는 과자를 만든다거나 고춧가루에 톱밥을 넣기도 하고, 콩나물을 재배하면서 독약을 쓰기도 하는 등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이번 만두 파동에 연루된 사람들도 이 문제를 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재료를 100도씨 이상으로 끊이는 방식으로 소독을 하면 국민의 건강에는 직접적인 해가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요. 저는 이들을 단죄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돈이 절대적인 가치로 돌아가는 구조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상으로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이런 시류에 휩쓸리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지만 그런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이제 몇 달 후에 새롭게 시작할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권이 일방적으로 자유 시장 논리에 치우친다면 결국 대한민국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고 말겠지요. 우리 모두는 제2의 아간이 될지 모르겠군요.


여호수아의 선택

여호수아는 사람들을 시켜서 아간의 집을 압수 수색했습니다. 아간의 고백대로 외투와 은, 금이 나왔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을 끌고 은과 외투와 금덩이를 거두어 아골 골짜기로 올라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과 딸을 비롯해서, 소, 나귀, 양, 천막, 그에게 딸린 모든 것을 갖고 올라갔으며, 그 뒤를 이스라엘 백성이 따랐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여호수아를 선두로 이스라엘 민중들은 아간을 처단하기 위해서 지금 아골 골짜기로 올라갑니다. 이들의 손에는 아간과 그 가족들에게 던질 돌이 들려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중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지난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끝내고 이제 좀 살만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는데, 여기서 자신들의 형제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게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미루어 짐작컨대 이들 중에는 아간처럼 물건을 숨겨놓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하면서 좋은 물건을 보고 욕심이 생긴 사람이 아간뿐이었을 리가 없으며, 비록 여호수아의 엄명이 있긴 했지만 그런 물건을 숨겨놓은 사람이 아간뿐이었을 리가 없습니다. 일단 그런 유혹을 받았다는 점에서 아골 골짜기로 올라가는 모든 사람들이 아간과 동범이며, 더구나 자기 집에 숨겨진 물건이 있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양심상 돌을 던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자기의 죄를 고백할 수 없었으며, 아간의 구명운동을 펼칠 수도 없었습니다. 똑같은 죄를 지었으면서 아간을 죽여야 한다는 그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는지 불을 보듯 훤합니다.

앞에서 저는 이들의 심지 뽑기로 아간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어떤 곡절이 숨어있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서의 보도를 따르면 다섯 번의 심지를 뽑았습니다. 유다, 제라, 잡디, 가르미, 아간의 순서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이렇게 족집게처럼 아간을 골라냈다고 믿어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간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제 각각 여리고 성의 물건에 손을 댔을 겁니다. 그러니까 심지가 누구를 찍던지 그 사람은 범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런던에서 어떤 사람이 그 지역의 유명 인사들에게 이런 전보를 보냈다고 합니다. “당신 일이 발각되었으니 오늘밤 당장 튀어라.” 그런데 이 전보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7,80%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날 밤 실제로 튀었다고 합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지난 대선에서 위장전입과 위장취업 등등, 도덕성 문제가 전혀 이슈로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공범의식에 빠진 탓이 아닐까 모르겠군요.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완벽하게 추적할 도리는 없지만,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중들이 아간처럼 값진 물건에 욕심을 부렸을 것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간처럼 물건을 숨겼을 개연성은 높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이런 개개인의 부도덕성이 이스라엘 민중 전체에게 전염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태를 눈치 챈 여호수아는 내부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일벌백계 식으로 아간을 처단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골 골짜기에 도착한 다음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던진 말에서 우리는 여호수아의 속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네가 우리에게 이런 참혹한 일을 당하게 했느냐? 너도 오늘 야훼께 참혹한 일을 당하리라.”(25절).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서

아간이 죽게 되는 일은 아간에게 참혹한 일이기는 하지만, 여호수와 이스라엘 민중이 참혹한 일을 당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 성을 공격했다가 도리어 자기들만 삼십 육명(5절)이 죽은 일인가요? 물론 이 일로 백성들이 낙담하긴 했지만 그런 큰 전쟁에서 삼십 육 명이 죽은 것을 그렇게 참혹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들과 같이 어려운 길을 걸어온 동지이며 친구이며 친척인 아간을 돌로 쳐 죽이는 것 자체가 참혹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이 도둑질(탈세) 때문에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한 사람과 그 가족 전체를 몰살시킬 정도로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었을 것입니다. 8장 앞부분에서 여호수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이 곧 여호수아의 고민을 말해줍니다. 자기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온 친구를 죽인다는 것,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범죄의 가능성이 있었던 그런 책임을 묻는다는 것, 뿐만 아니라 연좌제가 연상되는 그런 책임을 아간 가족 모두에게 묻는다는 것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이 문제를 끔찍한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아들과 딸을 포함한 아간 가족 전부를 아골 골짜기에서 친구와 일가친족들이 돌로 때려죽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학살당한 아간 가족에서 아간의 아내가 거론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군요.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제라의 아들 아간을 끌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를 거두어 아골 골짜기로 올라갔다. 그의 아들딸을 비롯하여 소, 나귀, 양, 그의 천막과 그에게 딸린 모든 것을 가지고 올라가는데 온 이스라엘이 그를 따라 나셨다.


모르는 문제는 접어두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간 가족을 돌로 때려죽인 여호수아의 처사는 잘한 걸까요, 아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성서는 여호수아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런 일을 무조건 잘한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좀더 두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셨겠습니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하고 말씀하셨을까요? 아간에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다짐을 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요?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여호수아의 행위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처한 상황을 전제해야만 합니다. 광야생활을 끝내고 팔레스틴을 정복해야만 할 그들의 상황은 전시와 같았습니다. 개인의 욕망을 눈감아줄 만큼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지켜내려고 했던 것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깨지면 이스라엘은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결단은 옳았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런 방식으로 극한의 악조건 가운데서도 생존의 토대를 탄탄하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아골 골짜기에 남아 있는 돌무더기에 얽힌 이 참혹하고 슬픈 사연은 이스라엘 민중들의 입을 통해서 계속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그 위에 쌓아 올린 큰 돌무더기는 오늘까지 남아 있다. 그제야 야훼의 극렬한 분노가 걷혔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 그 곳 이름을 오늘날에도 아골 골짜기라고 부르는 것이다.”(26절). 오늘 우리에게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공동체의 정의를 세워나가야 할 때가 간혹 있을 겁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