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통곡

삼하 19:1-9


압살롬의 반역

오늘 본문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이 식음 전폐하고 통곡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렇게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 내 자식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이게 웬일이냐?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삼하 19:1)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다윗은 지금 참척(慘慽)의 슬픔에 빠져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다윗의 이런 태도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반역자였다. 그는 아버지 다윗을 없애려고 했다. 다윗은 구사일생으로 죽을 고비를 바로 전에 겨우 넘긴 상태였다. 그는 지금 요압 장군을 앞세워 압살롬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전쟁에 승리했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전체 백성들과 함께 승전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 게 순리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성서기자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어떤 곡절이 숨어 있는 게 아닐는지.

고대 절대군주들과 마찬가지로 다윗에게는 배다른 아들들이 많았다. 성서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왕자들을 나이순으로 거론하면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그리고 솔로몬이다. 이들 중간에 다른 왕자들도 적지 않았겠지만, 성서는 이들을 중심으로 다윗과 솔로몬 왕조의 역사를 서술한다. 이 네 명은 모두 출중한 왕자들이었다. 순리를 따른다면 큰 아들인 암논이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가야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어린 솔로몬이 그 자리를 꿰찼다. 뜻밖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고대 황실의 암투를 전제한다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그 이유를 오늘 우리는 잘 모른다. 원인과 결과를 나름으로 분석이야 할 수 있겠지만 거기서 어떤 필연성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상상력을 너무 크게 발휘하지 말고 성서가 제공하는 몇몇 정보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왕조 초기의 역사적 흔적을 따라가는 게 최선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들이자 반역자인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는 다윗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많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대답을 시도했지만, 결정적인 대답을 얻는 건 마치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요원하다. 하나님이 종말에나 그 실체를 드러내듯이 역사도 역시 종말에나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역사적 현상은 우리가 어느 정도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지만 역사 전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고대역사인 삼국시대로부터 지금 남북분단 시대까지의 이 과정을 누가 예측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실의 역사는 수십억 만분의 일보다 적은 가능성이 결정된 어떤 것이다. 이것은 곧 지구의 생명현상을 부분적으로는 그 원리를 제시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예컨대 3일 이후의 일기예보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지만 1년 후의 날씨를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아예 말도 되지 않는다. 물리현상이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역사에는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들이 개입하기 때문에 결국 종말에 가서야 그 실체가 드러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곧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이다.


구약이 보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총체적으로 다윗을 정점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식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초대 왕은 사울이지만 그는 아들 요나단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시조로는 자격 미달이다. 사울과의 권력 투쟁에서 성공한 다윗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초대 왕이라 해도 좋다. 그는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남북왕조에 등장했던 왕들 중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이들은 모두 다윗을 그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심지어 메시아는 다윗 왕조에서 나와야 했다. 이런 다윗 중심의 역사관은 신약에도 계속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이렇게 위대한 다윗이지만 성서기자들은 그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 짓궂어 보이거나 깎아내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냉정하게 평가한다. 다윗은 성공적으로(?) 사울을 제거한다. 물론 성서는 사울과 다윗이 투쟁하던 초기에 사울을 부조리하고 비열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다윗을 모범적인 인간으로 부각시키지만 실제로 그랬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듯이 우리는 성서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어쨌든지 다윗은 명실상부한 왕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한다. 예루살렘의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를 세운다. 그런데 성서기자들은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의 도덕성에 큰 흠집이 날만한 사건을 보도한다. 다윗은 장군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손에 넣는다. 영웅은 여색을 밝힌다는 말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이 다윗은 망명 생활 중에서도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손에 넣은 적도 있다.(삼상 25장) 성서 기자는 다윗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서는 다윗 왕조의 원초적 욕망과 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것은 곧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이다. 그 대미는 솔로몬이 집권하게 된 왕자의 난이다.

삼하13장 이하에서 성서기자는 다윗 왕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런 치졸하고 잔혹한 사건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은 배다른 누이인 다말을 성폭행했다. 암논은 자신의 욕심을 채운 다음에 다말을 창녀 보듯 밀쳐냈다. 여기서의 다말은 창녀로 위장해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한 다말과 동명이인이다.(창 38장) 그 상황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삼하 13:15) 버림받은 다말은 친오빠인 압살롬의 집에서 쓸쓸하게 지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들은 다윗은 암논이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고 그냥 없던 일처럼 지나치고 말았다. 어쩌면 밧세바 사건이 그에게 양심의 가책으로 작용했는지 모른다.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2년쯤 지난 뒤에 압살롬은 흉계를 꾸며서 암논을 죽이고 그술 왕 암미훗의 아들 탈매에게 도움을 받아 젊은 시절의 다윗처럼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카인의 아벨 살해를 연상시키는 이 사건이 오빠로서의 본능적인, 그리고 정의로운 분노인지, 아니면 권력투쟁의 결과인지 그 속사정은 잘 모르겠다. 양쪽 모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어쨌든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인 다윗 가문에서 일어난 수치를 성서기자는 삼하 13장에서 가감 없이 사실대로 전하고 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이런 상태로 3년의 세월이 흐르자 암논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게 되었고, 따라서 압살롬을 향한 노기도 풀렸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요압 장군이 다윗을 설득해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압살롬의 귀국을 허락받았다. 가신이 출세하는 길은 왕의 중심을 헤아리는 게 아니겠는가.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상당히 오랜 동안 왕을 알현하지 못하고 쥐 죽은 듯이 지내야만 했다. 2년이 지난 후에야 정상적으로 왕자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압살롬은 계획적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면서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이렇게 4년 동안 애를 쓴 결과 그는 수하에 많은 장군, 책사, 제사장, 관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고, 아울러 백성들의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왕으로 나서는 일만 남았다. 다윗을 추종하는 주류 세력이 예루살렘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은 일단 헤브론으로 나가서 거사를 일으켰다. 일종의 쿠데타였다.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모인다는 소문을 들은 다윗과 측근들은 야반도주하듯이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 그렇지 않으면 압살롬에게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사태가 위급했다. 젊은 시절에는 사울 왕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다윗의 심정이 어땠을는지는 긴 말이 필요 없다. 그 이후의 과정은 삼하 15-18장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요한 대목을 중심으로 성서기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조금만 더 따라가 보자. 


*대중적인 지지는 정치인들에게 약이며 동시에 독이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대중적 지지를 곧 자신의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지난 세계 역사를 보더라도 독재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민중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히틀러의 정책은 당시 독일 민중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다. 게르만 민족의 세계 지배에 대한 히틀러의 꿈이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결국 그와 민족 전체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대중적인 지지를 발판으로 군사독재의 길을 걸었다. 종교적인 교주들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박태선과 문선명 등에게서 보듯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지하는 민중들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신한다. 물론 정통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도 이런 오류가 자주 일어난다. 오늘 한국의 민중들은 무엇을 지지하고 있을까? 황우석 사태로부터 시작해서 심형래 감독의 디-워 현상에 이르기까지 민중은 철저히 대중 심리에 의해서 작동된다. 그 대중 심리가 건강한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하겠지만, 병든 사회는 병들 수밖에 없다. 필자가 보기에 민중은 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바른 선택과 잘못된 선택을 오가고 있을 뿐이지 지고지선의 주체가 결코 아니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에 대한 개념 정리를 보다 냉정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닐는지.  


압살롬의 죽음

압살롬과 다윗의 싸움은 누가 보더라도 오랫동안 쿠데타를 준비한 압살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그는 야망이 대단한 사람 같다. 누이 다말이 성폭행을 당한 뒤로 2년 동안 꾹 참고 있다가 배다른 형 암논을 죽였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지만, 그 뒤로 3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견뎌냈다는 사실도 그렇다. 일국의 왕자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추호도 흐트러짐 없이 그 상황을 버텨냈다는 사실은 좋은 뜻이건 나쁜 뜻이 건 불문하고 그의 정신력을 웅변적으로 나타내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귀국해서 2년은 죽은 듯이 살았고, 그 뒤로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4년을 준비했으니까 11년을 기다린 셈이다. 그동안 그는 수많은 죽음과 삶의 기로에 부닥쳐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밑바탕으로 해서 그는 자신의 야망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서의 표현에 따르면 압살롬처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잘 생긴 사람이 이스라엘에 없었다고 한다.(삼하 14:25) 더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백성들의 어려운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었다. 주도권을 쥔 압살롬의 기세에 눌려 다윗 일행은 예루살렘 성을 포기하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순리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연한 힘의 개입으로 달라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압살롬의 쿠데타와 다윗의 방어 과정에는 두 가지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 가지는 내부 사건이고, 다른 한 가지는 외부 사건이다. 잠옷 바람으로 야반도주하는 다윗 일행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압살롬 진영은 두 쪽으로 의견이 갈렸다. 군사령관 아히도벨은 초전박살의 의견을 냈다. 다윗이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유를 주지 말고 밀고 들어가야만 백성들이 겁을 먹고 압살롬에게 돌아온다는 주장이었다. 초기에 대세를 잡는 게 급선무라는 뜻이다. 반면에 다윗의 친구였다가 다윗과 함께 도망가지 않고 예루살렘 성에 남았다가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새는 정반대의 의견을 냈다. 그렇게 서두르기보다는 천천히 더 큰 세력을 결집해서 천천히 압박해 들어가서 다윗을 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주장이었었다. 양측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었다. 압살롬은 후새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게 압살롬과 다윗의 운명을 바꿔놓은 셈이다. 다윗 일행은 지금 그야말로 일패도지(一敗塗地)의 형국이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다윗은 자기를 방어할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더구나 천하의 다윗도 백성들의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백성들은 늘 힘 있는 사람을 따르는 법이다. 만약 압살롬이 그날 아히도벨의 의견을 따랐다면 다윗은 생명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윗은 후새 지략 덕분으로 전력을 추스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순간에 압살롬은 모르는 게 있었다. 후새는 다윗의 사람이었다. 

외부 사건은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 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윗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숨어 기다리던 다윗의 밀정 두 사람이 압살롬 군에게 발각되었지만, 그들을 우물 속에 감추어 준 어떤 여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무사히 다윗에게 가서 압살롬의 계략을 전달할 수 있었다. 당장 다윗을 쳐야한다는 강공책을 냈다가 묵살당한 아히도벨은 다윗 일행이 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목매달아 죽었다. 그 순간부터 민심이 조금씩 압살롬으로부터 다윗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실제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리라는 건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성서기자는 전쟁이 진행된 전말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대신 압살롬의 죽음을 자세하게 보도한다. 삼하 18장은 바로 그의 죽음에 대한 보도이다. 압살롬은 처참하게 죽는다. 그를 죽인 사람은 요압 장군이다. 요압은 압살롬이 망명 생활할 때 다윗을 설득해서 데리고 온 인물이다. 그렇다면 압살롬에게 호감을 가질 만도 한데, 그는 압살롬을 직접 살해한다. 여기에는 다윗과 요압 사이의 어떤 알력이 작용한 게 아닌가 모르겠다.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는 하되 압살롬은 자기 얼굴을 봐서라도 죽이지는 말라고 명령했다. 정확하게는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이라고 해야 좋을 것이다. 삼하 18:5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요압과 아비새와 이때에게, 압살롬은 아직 철이 없으니 자기를 보아서라도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라고 당부하였다. 왕이 전 지휘관에게 압살롬을 두고 부탁하는 말을 전군이 들었다.” 싸움에서 압살롬 군은 크게 패한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상수리 나뭇가지에 머리가 걸렸고, 그 사이에 노새는 빠져나갔다. 압살롬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이를 발견한 군인들이 요압에게 보고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다. 군인들은 요압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 왕의 명령 때문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 그러자 요압은 직접 창 세 개를 던져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채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고 합니다. 압살롬이 그렇게 끔찍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통곡하고 있는 중이다.


요압의 위협

승전 잔치를 벌여도 시원치 않은 판국에 왕이 통곡하고 있으니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압은 통곡하고 있는 다윗 왕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임금을 위해서 우리가 생명을 걸고 싸웠는데 이럴 수 있느냐? 우리가 죽고 압살롬이 살아있는 게 당신에게 훨씬 좋았을 것 같다. 더 이상 울지 말고 신하들에게 따뜻한 말을 하시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이라도 모든 신하들이 당신 곁을 떠나게 될 것이며, 결국 당신은 지금까지 당한 것보다 더 큰 불행을 당할 것이다.(삼하 19:6-8) 요압의 말을 들은 다윗은 마지못해 왕이 신하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문으로 나갔다. 이것으로 압살롬의 반역에 얽힌 이야기가 끝났다.

요압이 다윗에게 한 말은 이중적이다. 그는 한 나라의 총사령관답게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왕에게 진언을 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왕을 위협한 것이기도 하다. 요압의 말에는 다윗이 자신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들을 끌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나라를 세우겠다는, 반역을 일으키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요압이 비록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긴 하지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왕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백성들의 눈도 있고 하니 요압을 당장 처벌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책임 추궁은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다윗이 책임을 추궁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말 안 들으면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요압의 위협 앞에서 다윗이 아무소리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언가 속사정이 있는 게 아닐는지.

그 당시의 다윗은 왕권을 행사할만한 위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조짐은 이미 압살롬의 반역에서 드러났다. 아무리 압살롬이 민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반역을 한다는 건 다윗의 왕권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표면적으로 다윗은 용맹을 떨친 장군이요, 나라를 통일시키고 믿음이 좋은 성군이지만 실제로는 가정 하나 바르게 이끌지 못한 무능력한 사람인지 모른다. 암논이 다말을 범했을 때 가정의 기강을 세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나 형을 죽인 압살롬을 동정했다는 사실은 다윗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기질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타났다. 바울은 사울의 둘째 딸 미갈을 아내로 맞았는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법궤를 다윗 성으로 갖고 올 때 다윗이 춤을 추자 미갈이 비웃으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체통이 참 불만하더군요.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들 보는 앞에서 몸을 온통 드러내시다니.”(삼하 6:20)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삼하 6:23) 미갈의 핀잔을 듣고 다윗이 미갈과 동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정실부인인 미갈을 제대로 대우하지도, 처리하지도 못한 것 같다. 그는 원래 정서적으로 예민한 예술가였다. 악기 연주를 잘했다. 그런 탓인지 눈물도 많았던 것 같다. 밧세바 사건 뒤에 나단의 지적을 받고 그는 침상이 썩을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전체적으로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요소들이다.

다윗이 압살롬의 쿠데타를 막아내고 왕권을 지켜내긴 했지만 실제의 권력은 요압에게 넘어간 것인지 모른다. 요압은 그 이후로 다윗의 재위 기간에 실세로 행세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줄을 잘못 서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다윗의 기력이 쇄하자 후계자 문제가 부상했다. 이제 남은 왕자는 아도니아와 솔로몬이다. 최고 권력의 이행기에 궁중에서 어떤 권모술수가 일어났을는지는 성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불을 보듯 훤하다. 밧세바와 솔로몬의 승리였다. 늙은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은 밧세바였다. 기력을 찾게 해주기 위해서 젊고 아름다운 수넴 여자 아비삭을 다윗의 침실에 들여보냈지만 왕이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왕상 1:4) 만약 아비삭이 다윗의 마음을 잡을 수만 있었다면 권력의 행방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 많은 여자 중에서 다윗이 실제로 가장 깊이 사랑한 여자는 밧세바였던 것 같다. <밧세바와 다윗>이라는 역사소설을 쓴다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밧세바는 정치력도 대단한 여자였던 것 같다. 그녀는 다윗이 죽기 전에 왕위를 솔로몬에게 넘기게 했다. 참고적으로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는 죽었고, 솔로몬은 밧세바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런 작업에 공모한 이들은 제사장 사독, 선지자 나단, 장군 브나야였다. 이들 중에서 다윗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나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압은 아도니아를 왕으로 만드는 쪽에 섰다가 브나야의 손에 죽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솔로몬에 내린 유언 중에 요압을 죽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요압 제거를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남겼다는 사실은 재위 중에 자신의 힘으로는 요압을 처리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묘사된 다윗의 통곡과 연결되는 게 아닐는지.


다윗의 통곡

다윗은 지금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왕의 체통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통곡하고 있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눈물인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압살롬이 누군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는 다윗을 이어 왕이 될 형 암논을 죽였다. 다윗의 용서를 받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다음에 다시 반역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기도 했다. 패역무도한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이 정말 슬퍼했을까?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대목에서 다윗의 부성애를 강조하면서 추켜세운다. 옳은 말인가?


*다윗 왕조는 자랑스럽다기보다는 부끄러움이 많다. 이런 가문에서 메시아야 나와야 한다는 성서기자들의 주장을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문제는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격이 있는가, 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다.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와 다윗 왕조에 특별히 본받을만한 게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가 그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특별히 나은 것이 없는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이 사실은 왜 옳은가?


필자가 보기에 다윗은 지금 압살롬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 때문에 울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는 압살롬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압살롬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실제로 그에게 부담이 되는 사람은 요압이다. 요압은 이스라엘의 실세였다. 평생 전쟁만 하던 다윗은 결국 군인들에 의해서 왕권을 행사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른 셈이다. 그는 지금 압살롬의 죽음을 핑계로 자기가 처한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련의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다윗이 비록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위대한 왕이었지만 그의 실제 삶은 일개 촌부의 그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서기자들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행간에 담아내려고 했는지는 지금 우리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앞에서 살핀 대로 그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 아닌가. 그가 이룬 위대한 정치적, 군사적 업적도 그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거꾸로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는 관료와 장군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평생 동안 쌓아온 엄청난 업적들이 모두 부질없었다는 말이 된다. 삶의 근본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업적을 남긴 왕이나 아무런 업적이 없는 촌부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다윗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지금 예수 믿는 우리의 인생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인가? 아니다. 다윗은 비록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았지만 야훼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은 잃지 않았다. 이런 믿음으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실제 삶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믿음이 있건 없건 모두 똑같이 시련을 당하고, 교만하고, 울고 웃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개인의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의 차원이다.

첫째,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기우뚱거리면서도 자신이 궁극적으로 삶의 무게를 두어야 할 대상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삶의 중심을 유지하는 사람은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에 반성할 줄 아는 것이 곧 기독교 영성이다. 이런 영성의 심화를 통해서 삶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더 확실하게 구분하게 되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다시 영적인 깊이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통곡은 한편으로 자신을 향한 연민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을 향한 호소라 할 수 있다. 전자는 인간의 한계이며, 후자는 영적인 깊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붙들어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게 아닐는지.

둘째,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한 개인에게서 결정되거나 끝나는 게 아니라 역사를 형성(역사화)한다. 다윗에게서 보듯이 개인은 신앙의 삶을 실패할 수 있다. 아니, 실패하는 게 당연하다. 개인은 역사를 실존적으로만 경험한다는 사실과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이 땅에서 신앙적으로 완벽한 삶을 실현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수행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공동체가 곧 교회이다. 개인으로서는 한계와 오류가 많지만, 교회로서는 바른 길을 간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개인보다 더 큰 오류에 빠질 때가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그 교회는 단지 보이는 교회, 투쟁하는 교회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불가시적 교회, 승리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이런 교회는 어떤 악한 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인간의 죄가 극복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궁극적인 승리가 선취되었듯이 이런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부터 나오는 빛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역사는 구체적인 사건에 의해서 구성되듯이 이런 하나님 나라에 근거한 교회에서도 역시 개인들의 신앙은 구성적이다. 따라서 오늘 보이는 교회, 투쟁하는 교회에 속해 있는 기독교인들은 불가시적, 승리하는 교회로부터 영적 힘을 얻어야 하며, 또한 그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이런 신구약을 이어가는 역사적 신앙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잘 감당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비아 서울오프 공부, 2008년 2월23일, 향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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