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강

행위냐, 믿음이냐?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14)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벌어진 황당무계한 사건 앞에서 바울은 배수진을 친 심정으로 과격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발 물러서면 자신이 전한 복음이 근본적으로 훼손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2장에서 바울은 이런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중요한 세 가지 사건을 짚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예루살렘의 승인을 통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예루살렘 예속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 바울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의 전말에 대해서 보도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로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합법화되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할례자들을 위한 전도자의 길로,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셋째,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전했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예루살렘 종교회의의 합의를 깬 사람이 베드로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함으로써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와서 토라와 할례를 강조한 예루살렘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은 양다리를 걸치는 게 아니라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과 더불어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토라 및 할례를 추종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 단절할 것인지를 말이다. 그 당시에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이 유대-기독교의 주장에 어느 정도로 빠져들었는지는, 그리고 논쟁적인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소동이 진정되었는지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힘들다. 갈라디아서의 내용과 표현 방식이 다른 서신에 비해서 과격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태가 아주 심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앞서의 진술이 개괄적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3장부터의 진술은 훨씬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갈 3장1절은 로마나 헬라의 웅변가에게서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수사학적 기교가 넘치는 진술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든지 “누가 너희를 꾀더냐?”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어리석은 사람은 꾐에도 쉽게 흔들리는 법이다. 바울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지 수신자들을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갈라디아 신자들이 너무나 또렷한 사태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전하기 위해서 이런 수사적 표현을 사용했다. 그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지금 이 편지를 읽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당연히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지겠지만 갈라디아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의 신자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유대인 목수로 살았던 한 남자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토대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확연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지금 교회 밖의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미루어보면 된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흡사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원로원의 판결에 따라서 독약을 마시고 죽은 사건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유대-기독교인이나 이방 기독교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이 사건을 배타적으로 보는지 아니면 포괄적으로 보는지에 달려 있었다. 바울의 입장을 배타적이라고 한다면,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의 입장은 포괄적이었다. 바울에게는 인간 구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버금가는 그 어떤 사건이나 전통은 가능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도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이 토라와 할례에 눈을 돌린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십자가 사건이 별로 밝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 현실에서 토라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갈라디아서 후반부에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첫 번째 문제만 짚기로 하자.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단지 정보로만 머물거나 또는 주술적 대상으로만 머물지 실제로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에 신앙적 구호와 종교적 교언영색이 난무하지만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역시 기독교 신앙이 단지 정보나 주술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1)는 바울의 표현처럼 십자가(또는 부활) 사건이 기독교인들에게 삶의 능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십자가 사건이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을 단순히 우리가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며 살아야 한다는, 즉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차원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실천 자체가 능력은 아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는 바울의 진술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에서 실천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게 분명히 드러난다. 십자가 사건의 실질 안으로 들어가는 게 여기서 관건이다.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다는 이 도그마의 실질(reality)을 이해하고, 거기에 자기 삶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 바로 첫 걸음이라는 말이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경력이 붙은 분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담긴 신앙의 내용을 잘 알고, 믿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수를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았으며,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사는가, 어떤 일을 실천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소위 말해서 ‘칭의 이후’로 우리의 관심을 돌리자는 주장이다. 주로 교양이 있는 중산층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이런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가 기독교인 되었다는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더구나 여기서 더 근본적인 것은 기독교인답게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그게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실천이 필요 없다거나 그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더 깊은 차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세례 받는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평생 구도정진*을 필요로 한다.


*용맹정진, 구도정진이 주로 선(禪)불교에서 사용되는 단어인 탓에 기독교인들에게 낯설거나 조금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런 게 아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나 늘 깨어 있으라는 바울의 충고도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어떤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근본과 본질에 천착하는 상태라는 점에서 그렇다. 불교에서 참된 자기를 찾는 노력이나 기독교에서 참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이런 구도적 삶의 태도와 연결되는 이유는 그것이 완료된 대답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안의 참된 부처도 완료될 수 없으며, 하나님도 역시 완료될 수 없다. 그것이 완료된 순간이 불교에서는 해탈일 것이며, 기독교에서는 종말일 것이다. 그런 순간에는 이미 세상의 삶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구도가 필요 없다.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삶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접어두고, 불교의 구도 문제를 화두와 연결해서 한 마디만 하겠다. 좌선에서 핵심은 화두이다. “이게 뭐꼬?” 낙엽은 무엇이고, 구름은 무엇이고, 지금 이렇게 좌선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런 화두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답은 없다. 없는 답을 어찌 찾겠는가? 답을 찾는 그 치열성이 바로 화도공부의 핵심이다. 백척간두에 올라선 사람처럼, 천길 우물 속에 빠진 사람처럼, 또는 설사 만난 사람처럼 오직 한 가지 사실에 자신의 전체 존재와 실존을 거는 그 상태 말이다. 기독교 영성의 경지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런 깨어 있는 영혼에 이르는 것이 아닐는지.

 

갈라디아 신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밝히 알고 있었는데도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에 한눈을 판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전해 들었고, 그것으로 은혜를 체험하기는 했지만 실제 삶의 능력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전도관, 통일교, JMS, 신천지 등등, 이단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우주론적 구원 행위를 실질적으로(세계관적으로) 해석하고 변증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평신도들이 이런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나름으로 신학적 훈련을 통해서 그런 작업을 펼쳐야만 한다. 일종의 신학적 영성이라 할 그런 작업이 없는 한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기는 힘들다.  한국교회가 신학무용론에 빠져 있으니, 해결의 길이 요원한 게 아닐는지.


십자가 신앙에 대해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 문제가 나왔으니 그것의 신앙적 차원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까지가 바로 예수님의 ‘수난설화’에 해당된다. 이 수난설화의 정점은 십자가 처형이다. 예수님은 다음 목요일에 밤에 체포당하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신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구원론에서 중심이다. 이미 신약성서가 구약에 근거해서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를 충실하게 해명하고 있으며, 2천년 신학의 역사도 역시 이런 작업에 충실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선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사건이다. 죄는 반드시 피와 죽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일을 감당하셨다는 것이다.

죄가 용서받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 내는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의 장막이 갈라졌다는 보도가 바로 이런 신학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십자가론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질문은 다음과 두 가지이다. 첫째, 예수는 의도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일까? 둘째, 인류를 구원하는데 십자가 처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만약 복음서를 진지한 자세로 읽는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가능한대로 그런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셨다. 비록 순간적인 유혹에 불과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왜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피하려고 했을까? 예수님도 인간이셨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억울하게 죽어야 할 경우에, 또는 국가와 어떤 이념을 위해서 죽어야 할 때 과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은 제법 있다. 더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대도 성서는 예수님의 그런 약한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속사정이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연관된다. 만약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님이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노골적으로 회피하려고 했다는 뜻은 아니다. 도살장의 어린양처럼 그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한 죽음의 길을 가셨다는 게 성서와 신학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이 기본적으로는 옳지만 우리는 이렇게 교리화한 가르침 이전에 십자가 처형의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도그마가 담고 있는 어떤 세계, 혹은 개념을 심층적으로 풀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형해화의 길을 가기 때문에 비록 귀찮거나 불안하다고 하더라도 근본에 대해서 계속 질문해야만 한다.

다시, 예수님이 반드시 십자가로 처형당해야만 인류가 구원받는 것일까?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결과로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운명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된 것, 또는 그렇게 결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역사를 그렇게 결정론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기독교의 신앙을 강화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심화할 수는 없다. 이미 신약성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당시에 무슨 의미인지 잘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2천 년 전 그 당시에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었다. 아무도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 사건으로 가능하다고 예측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뜯어 말릴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할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몇 번 예고하신 적이 있지만 그런 진술을 훨씬 많은 역사비평이 필요한 대목들이다. 당연히 예수님이 죽음을 의식하셨을 테지만 그런 구체적인 언급은 훨씬 후대에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제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까 접어두기로 하자.

예수마저 십자가 처형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정확하게 몰랐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의 의미는 손상당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몰랐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의미가 훨씬 빛난다. 십자가 처형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예수님의 순종이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예수님이 그 당시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즉 로마의 식민지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십자가로 죽으신 것이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셨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 자체는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미 예수의 순종을 통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사건으로 지양된 이후에는 그 십자가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다. ‘불가역의 원리’라는 물리학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역사가 실행된 다음에는 그 이외의 구원의 길은 가능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어떤 마술적인 힘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말이다. 그 십자가는 예수라는 분의 철저한 순종에 의한 결과이지 십자가가 원래의 목표는 아니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런 근본적인 의미를 모르고 십자가를 단지 교리적으로만 안다면 십자가 사건은 독단적인 교리로 남거나 아니면 종교적 감상주의로 떨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명제가 가리키는 구원의 리얼리티는 무엇일까? 물론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의미이겠지만 좀더 실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 이 세상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한 인생의 처절한 실패인 십자가가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이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은 결코 십자가를 성취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성취, 목회적인 성취도 결국 구원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의 근본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목회에서 실패하는 목사야말로,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철저한 순종이 전제되지만, 하나님의 구원에 가깝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자기 성취에 집중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구원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된다. 이런 점에서 목회를 철저하게 패배해도 왜 괜찮은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런 주장은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별 볼일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위하기 위한 게 아니라 분명한 신학적 고백이다. 실패를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아브라함의 의

바울은 이제 세상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메타노이아)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수립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울은 그가 평생 추구하던 행위와 업적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앞서 제5강에서 짚은 것처럼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방향전환이다. 바리새인의 율법도 여전히, 또는 더 분명히 하나님 중심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은 소매나 이마에, 그리고 문지방에 성경구절을 달아놓을 정도로 매사를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하다. 바울이 볼 때 그런 열정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율법에 충실한 삶이나 복음에 충실한 삶이나 표면적으로는 비슷해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율법은 자기에게 중심이 있는 신앙생활이며,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에게 중심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업적으로는 의로움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것도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의를 발견하거나 작동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 밖에(extra nos) 있는 예수의 의가 전가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로마서 4장에서도 바울은 아브라함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명백하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창 15장은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 출신이다. 그는 아내 사라, 조카 롯을 데리고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가나안으로 오다가 하란에 머물러 살았다. 그곳에서 데라가 죽은 뒤에 그는 아내와 조카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내려왔다.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하나님은 그를 찾아와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창 15:6) 바울은 갈 3:6절에서 바로 그 구절을 짚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의로움의 기준이라고 말이다.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소위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이다. 만약 의로움이 반드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한다면 아브라함은 의로워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바울에 따르면 의로움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속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건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미리 열어놓은 것이다.(8절)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복음’이라고 했다. 아주 과감한 표현이다. 이방인이 토라와 할례 없이 오직 믿음으로 토라와 할례를 지키는 유대-기독교인과 아무런 차이도 없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지금 우리의 눈에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런 바울의 주장을 유대-기독교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유대-기독교인들에는 야고보를 비롯해서 베드로와 바나바 등도 포함된다. 이들이 나중에 어떻게 생각을 바꿨는지, 그대로 고수했는지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지만, 갈라디아서만 본다면 그들은 바울의 입장과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바울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을 가리켜 저주 아래 있다고 악담(?)을 퍼부었다.(10절) 바울이 인용한 신명기 27:26절은 아래와 같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바울의 논리는 간단하다.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도 분명하다면 결국 율법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율법은 믿음과 뿌리가 다르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살 길을 찾아야 하고,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바울에 따르면 율법의 길은 결국 저주를, 믿음의 길은 의를 만나게 된다. 이 사태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다. 예수는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해냈다는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분명히 저주를 당한 것인데,(갈 3:13, 신 21:23)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으로 불러내심으로써 율법의 저주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것으로 이제 율법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재단하는 준거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자칫 본회퍼가 경고한 ‘값싼 은혜’로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삶의 무게가 사라진 칭의론은 우리의 전체 존재가 담겨 할 기독교 신앙을 가벼운 종교적 소일거리로 만들 수 있다. 본회퍼에 따르면 행위와 존재(Akt und Sein)는 변증법적이다. 존재는 행위라는 열매를 낳고, 행위는 존재라는 뿌리로부터 나온다. 이런 긴장이 해체될 경우에 기독교의 은혜론은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세속적 사회에서는 종교적 소비의 대상이 되고 만다. 필자가 보기에 <긍정의 힘>을 쓴 오스틴 목사의 메시지가 이를 대표한다. 그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종교 상품이 되고 말았다. 아래와 같은 유진 피터슨의 지적은 옳다.


북미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소비자 중심의 신앙이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생산품 정도로 여긴다.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미국인들은 마치 소비자처럼 가장 좋은 제품을 찾기 위해 쇼핑을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인식하지도 못한 채 거래를 시작하고, 최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외관으로 하나님이란 상품을 포장한다. (Eugene H. Peterson, 차성구 역,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56쪽)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유대-기독교와의 투쟁 가운에서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바울은 유대교와의 절충주의를 선택한 유대-기독교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 구원론을 역설하는 것뿐이었지, 윤리적 무책임성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의 성령체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바울의 주장이 반대자들을 손쉽게 제압하거나 설득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이런 분란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다른 일들도 비슷한 이치이지만, 역사 안에서는 신앙도 역시 논쟁을 벌여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그 당시가 아니라 후대에 드러난다. 바울의 주장이 역사의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의 대세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당시에는 비주류에 불과했다. 그는 그렇게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투쟁하는 방식은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그의 논리는 구약성서를 인용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이고 합리적인 해석학의 토대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갈라디아 신자들을 다시 원래의 복음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훨씬 직접적으로 경험적인 어떤 증거들이 필요했다. 그것이 곧 성령 체험이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계속해서 그런 성령 체험에 관해서 언급한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절) 바울은 3절에서도 갈라디아 신자들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었다. 5절과 14절에서도 역시 성령 체험을 칭의론의 가장 중요한 증거로 제시한다. 갈라디아 신자들은 율법 없이 믿음으로만 성령을 체험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이다.

바울이 거론하고 있는 성령 체험이 무엇인지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바울은 그것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아마 갈라디아서 수신자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전제한다면 일종의 열광주적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각종 성령의 은사(12장)나 방언(14장)도 그런 것들이다. 바울은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갈 4:6) 받는 엑스타시를 언급했고, 또한 갈라디아 신자들을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호이 프뉴마티코이)이라고 가리켰다. 그 당시는 기독교가 출발하던 초기 상황이었다. 그럴 때는 어느 종교에서나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열광적 현상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그런 현상들은 문화 안으로 융해된다. 어쨌든지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율법 없이 성령을 체험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니까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는 유대-기독교의 요구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체험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준거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인가? 오늘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경험하는가? 이 질문은 성령이란 무엇인가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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