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아브라함의 믿음과 모세의 율법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갈 3:15-22)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의 주제는 어제(2008년 2월17일) 샘터교회에서 행한 설교 “믿음이란 무엇인가?”(롬 4:1-5, 13-17)의 주제와 비슷하다. 그 설교를 기초로 해서 필요한 내용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오늘의 공부를 진행하겠다.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관계, 또는 그 대립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에서도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다. 바울은 이미 아 단락에서(갈 3:1-14) 아브라함을 거론했는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것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또한 신학적 깊이에서 다루고 있다. 바울이 자신의 신학적 근거로 삼고 있는 아브라함, 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만큼 유명세를 탄 인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구약의 역사에서 원역사(창 1-11장) 이후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기자는 아브라함을 13-23장까지 자그마치 11장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거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이삭은 변변치 못한 인물로 등장한다. 카리스마가 강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대개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가 그런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아브라함은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귀중한 자리를 차지한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정도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누군가?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인 갈대아 우르 출신이다. 그곳은 바빌로니아 문명의 발생지인데,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데라의 세 아들 중의 하나로 태어났다.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역할을 데라가 했다고 보아야 한다. 창세기의 보도에 따르면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 그리고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다.(창 11: 31) 데라는 가나안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하란에서 205세를 일기로 죽었다. 거기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데라가 죽은 뒤에 이제 주도권은 아브라함에게 넘어간다. 그는 아내와 함께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 남쪽 지역인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다른 종족과 구별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바빌로니아에 속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이 바빌로니아 출신이라는 사실은 바로 구약성서에 창조설화나 노아홍수와 같은 바빌로니아 설화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어쨌든지 아브라함은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시작된 인류의 여러 후손 중의 하나로서,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교들이나 이슬람교도들만이 아니라 혈통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는가, 하는 질문과 다를 게 없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시대에 살았던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이 침묵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그런 문제까지 직접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오늘 공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답은 곧 바울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을 제시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교회가 처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조금 살펴야 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이미 앞에서 몇 번 짚은 거지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공부할 때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니까 한번 더 짚도록 하자. 

바울이 편지를 쓰던 당시의 초기 기독교는 유대-기독교와 투쟁 중이었다. 우리는 보통 바울이 유대교와 투쟁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유대-기독교이다. 물론 유대-기독교가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유대교라고 불러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이방인 기독교와 공동의 신앙적 토대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유대-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로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이 활동하던 예루살렘이 그 중심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이긴 하지만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대교인들이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토라와 할례가 없는 기독교 신앙을 주창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혼란스러울 수 있다. 첫째는 유대-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유대교의 종교적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유대교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데도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둘째는 초기 기독교에서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신앙적 갈등이 심각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두 집단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중요한 기초에서는 일치했지만 율법으로 인해서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역사적 사실이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해주고 있으며, 로마서도 역시 그걸 기초로 한다. 바울은 이 투쟁과 갈등을 미봉책으로 넘어가지 않고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그는 아브라함을 근거로 자기의 논리를 피력하는 것이 유대-기독교인들을 설득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율법 논쟁에서 아브라함이 갖는 위치는 구약의 역사에서 매우 실증적이다. 오늘 본문 갈 3:17절을 보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백삼십 년이라는 숫자는 출 12:40절에 근거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소수 민족으로 살다가 모세의 인도로 탈출에 성공했다.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요셉 시대에 야곱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울의 연대기는 정확한 게 아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 연대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모세의 토라에 의해서 폐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토라의 종교적 권위를 파기하고 있다. 이런 바울의 논리가 유대-기독교인들을 설득하는데 실효성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의 논리가 성서적으로 틀림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브라함의 의

바울이 모세의 토라에 의해서 상대화될 수 없다고 본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더 근본적으로,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가능하게 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인가? 바울은 창세기 15:6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갈 3:6, 롬 4:3) 이런 성서의 진술을 너무 상투적이고 시시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믿음과 의로움이라는 문제는 바울의 기독교 이해에서 핵심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배워야 할 신앙의 깊이를 담고 있다. 왜 그런가?

첫째,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고대인들에게 이 의로움은 곧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았다. 사람은 의롭지 못함으로 인해서, 즉 죄로 인해서 참된 생명을 잃어버렸다. 죽음도 바로 죄의 결과이다.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죽음을 넘어서서 영생에 이르려면 당연히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바로 의로워진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가 참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사실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둘째,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유가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이다. 여기서의 믿음은 공로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의롭다고 인정받을 공로가 없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관계에서 옳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인물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격적으로 우유부단하고, 소심하기도 했다. 아내 사라와 아내의 몸종인 하갈 사이에서 처신을 잘못해서 가정의 평화를 깨기도 했고, 신상이 위태하다고 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도 있다. 그의 처신만 놓고 본다면 의롭다고 인정받을 게 별로 없다. 물론 그가 조카 롯에게 땅을 양보했다거나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등, 모범적인 면모가 보이긴 했지만, 그런 거야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정도의 사람은 주변에 널려 있었다. 그런 행동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정도의 공로는 아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그의 믿음이다. 창세기 15:6절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인가? 앞서의 강의에서 잠간 짚은 내용인데,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짚어보자. 어느 날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큰 상을 내리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당시 아브라함의 심정은 답답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가문을 이을 자식이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아브라함의 하소연을 들은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기자는 이 말씀에 이어서 곧 아브라함이 야훼를 믿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믿음이 결국은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인가?

아브라함이 살던 고대인들은 후손에 대한 열망이 아주 강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는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오래 전에 고국을 떠나서 이제 팔레스틴 땅에 자리를 잡았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한인 교포를 생각해보라. 몇 십 년 동안 고생하면서 돈은 모았지만 자식이 하나도 없다. 고국을 떠난 걸 후회했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는 말씀을 들었으니, 아브라함이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은 아니다. 그는 자식을 믿은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믿었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약속)을 믿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러나 조금 엄밀하게 볼 때 아브라함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브라함은 훗날 얻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만약 자식을 믿었다면 그는 그런 명령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믿었었다.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근거이다.

야훼 하나님만을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다는 것인가? 아직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는데, 누구를 믿는다는 건가? 여기서 자칫 길을 잃으면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모든 삶의 현실들과 무게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에만 몰두하는 광신도가 될 수 있다. 바울이 제시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것이 율법적인 신앙을 전제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그걸 포기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율법의 실천은 사람을 성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율법의 알짬인 십계명만 해도 그렇다. 십계명대로 따라 살기만 한다면 그건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라고 생각할 만하다.

그런데 바울은 그 당시에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누가 옳은가?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율법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기독교인들이 옳은가, 아니면 그들의 주장을 배격하는 바울이 옳은가?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이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가 바울을 배척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율법은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운 실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아주 실용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주장을 오늘 우리의 삶과 비교해보자.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매달리고 있다.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회의 모든 행사들이 바로 이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교회 성장은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이다. 그런 것을 교회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 것은 복음의 왜곡이라고 말이다. 바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은 성공, 부자가 되는 것에만 모든 가치를 걸어두고 있다. 아무도 이런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공하는 건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신앙과 삶의 토대를 전혀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루는 공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집중하라는 요구이다. 즉 자기공로, 자기업적, 자기집중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이 곧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은 이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이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분은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높은 점수를 주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다. 착한 일 하면 사탕 하나 씩 주는 부모님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많이 기울여도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점수를 딸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의 평가 기준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훗날 여러분이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그 결과를 보고 놀랄 것이다. 칭찬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책망을 듣고, 책망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칭찬을 듣게 될 테니까 말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점수를 딸 수는 없다.


부활의 능력, 창조의 능력

혹시 이런 설명 앞에서, 막막하다,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하고 불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능력이 있느냐, 공로가 있느냐 하는 방식으로 평가를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생각 자체를 버리고, 대신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며, 구원받는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공로 없이 우리를 인정하고 구원하시는 분이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다. 로마서 4:15절을 다음과 같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바울은 갈 3:10절에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놓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떤 노력과 공로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완성할 수 없는 바로 그것으로 심판을 당한다. 바울은 법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너무 과격(radical)하다. 그렇지만, 이런 과격성으로 인해서 오늘의 복음공동체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두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법 없이 살지 못한다. 바울은 지금 영적인 차원을 말하는 중이다. 몸으로는 여전히 법의 지배를 받지만 영적으로는 거기서 벗어났다. 우리의 궁극적인 생명을 우리의 노력인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완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에게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맡긴 최초의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이 나오기 훨씬 전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 즉 모세보다 훨씬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한 사람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구자에 불과했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의 조상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혈통이 다른 우리도 믿음으로 그의 후손이 아닌가.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16b절에서 창 17:5절 말씀을 인용한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영적 깊이에서 볼 때 바울의 이런 해석은 정당하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만이 부활의 능력자이며, 창조의 능력자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롬 4:17b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바울이 아브라함의 칭의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다가 부활과 창조를 거론하는 게 조금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다시 율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 율법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규범을 가리킨다. 그런 것들은 모두 선하고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이나 창조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속하지만 부활과 창조는 하나님의 행위에 속한다.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활과 창조가 말하는 생명의 근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완전히 의존하는 삶이 바로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믿음이다.

이런 삶이 무엇인지 아직 손에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다면, 요 3:1-10절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 경험이 많아도 거듭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자기가 이룬 업적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게 힘들 것이다. 오직 부활과 창조의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으며,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실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 공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부활과 창조의 하나님에게만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것이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배워야 할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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