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복음의 자유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 3:23-4:7)


바울은 앞에서(갈 3:1-22)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율법의 상대성과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것을 두 가지 논리로 제시한다. 첫째, 모든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아브라함의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실증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믿음이 율법 행위보다 상위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둘째,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한 의로움은 모세의 율법 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앞선 사건이다. 즉 율법이 아무리 귀중하다고 하더라도 시간적으로 430년이나 앞서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 사건을 넘어설 수 없다는 뜻이다. 이제 바울은 율법의 정체를 좀더 구체적으로 규명하면서 믿음(복음)의 새로운 차원을 해명한다.


초등교사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은 초등교사이다.(24절) 이 초등교사(파이다고고스)는 교사(디다스칼로스)가 아니다. ‘디다스칼로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학생들의 지적 활동을 돕는 선생이지만, ‘파이다고고스’는 어린학생을 단순히 도와주는 노예이다. 이 노예가 하는 일은 학생이 등하교 시에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공부에 필요한 학습도구를 준비하는 것이다. 헬라 시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파이다고고스는 사람들에게 결코 존경을 받지 못했다. 바울은 아마 그런 걸 염두에 두고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파이다고고스에 불과한 율법은 독자적으로는 아무 능력도 없다. 주인의 아들과 딸을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만 하는 노예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수동적으로 도울 뿐이다.

24절의 문장 구조만 보면 율법이 나름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 문장에서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이 강조되는 게 결코 아니다. 율법의 역할은 그리스도 이전까지에 한정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일 뿐이다. 그래서 25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온 후로 우리가 초등교사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한다. 초등교사와 믿음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연결점이 없다. 바울에게 율법과 믿음은 이원론적으로까지 구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율법과 믿음(복음)의 관계를 너무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5:17절 이하의 말씀에 따른다면 이런 의심은 더 심각해진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그 유명한 산상수훈에 나온 말씀이다. 우리는 마태복음이 처한 삶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전제하고 이런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마태공동체는 유대-기독교적 전통이 강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파괴된 이후로 유대교는 율법을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종교적인 차원에 이스라엘의 운명을 걸기로 했다. 이런 일에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이 안성맞춤이다. 이때부터 유대교는 그동안 느슨한 관계를 맺어왔던 유대-기독교를 향해서 율법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마태 공동체의 입장에서 이건 생존의 위기였다. 유대교의 요구를 거부하면 이제 그들은 로마의 정치적 압박에 그대로 노출된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서로 다른 정략으로 접근했다. 정치적으로는 더욱 폭력적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유화적이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했다는 뜻이다. 마태 공동체는 그동안 유대교라는 일종의 ‘핵우산’ 아래서 로마의 압박을 피할 수 있었다. 유대교도 마태 공동체를 향해서 별 다른 요구를 강요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상황은 변했다. 그래서 유대교의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었던 마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고 진술한다.

마태 공동체가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유대교와 타협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중심을 완전히 포기하는 건 아니다. 산상수훈에서 마태는 모세의 율법을 복음의 차원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마태 5:21-48절이 그 내용을 담고 있다. “너희가 ...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우리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마태복음의 진술만을 근거로 복음에서 율법이 나름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다른 주제로 마찬가지이지만 율법 문제도 역시 일단 각각의 성서 텍스트가 말하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에, 그것을 다른 성서와 연관해서 유기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마태복음과는 전혀 다른 상황과 전혀 다른 신학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다. 우리가 앞에서 몇 번 지적한 것처럼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바울은 지금 마태복음 공동체가 속해 있는 유대-기독교의 지도자들과 신학적으로 투쟁하는 중이다. 마태복음 공동체는 생존을 위해서 유대교의 율법을 재해석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지만 바울은 철저하게 거부했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 나름으로 최선을 다 한 것만은 분명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바울의 선택이 옳았다.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의 신앙적 토대와 율법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다르다면 왜 두 문서 모두 신약성서 안에 들어왔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여기서도 우리는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첫째, 각각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 특성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것들이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충되기도 한다. 그런 특성들이 역사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둘째, 각권의 성서는, 특히 복음서는 초기 기독교의 다양한 신학에 영향을 받은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마태복음에 유대-기독교적 신학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복음적 신학도 담겨 있다. 2천년이라는 역사적 차이를 두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에서 그런 특성들을 잘 분석하고 해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유대-기독교가 여전히 붙잡고 있는 율법은 기껏해야 노예와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으로는 아무도 의로움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는 경우에 우리를 파괴할 뿐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는 율법 안에서 노예처럼 살아야만 했다. 율법을 수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전혀 다른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노예가 아니라 아들의 세상이다. 그런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된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3:27)고 표현한다. 속은 옛날의 그대로이지만 세례를 통해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의가 덧입혀진 것이다. 이런 세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진정한 깨우침으로만, 즉 인식과 삶의 일치로만 경험*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정치적 사회적 이상이나 실천들과 연계해서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물리학자가 전자현미경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물 분자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하자. 그는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H2O) 물리학자에게는 이 구조가 실증이지만 청중들에게는 단지 개념으로만 전달될 뿐이다. 신앙의 세계에 대한 설명도 이와 마찬가지로 실증이 아니라 개념으로만 가능하다. 자칫하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거나 광신으로 빠질 수도 있다.


첫째, 유대인과 헬라인은 하나다. 유대인들에게 바울의 이런 주장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헬라인(이방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바울도 이전에는 이런 생각에 젖어 있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버려야만 했다. 심지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조건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으니, 바울의 세계관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긴 말이 필요 없다.

둘째, 종과 자유인은 하나다. 바울의 이 말이 언제 선포된 것인지를 생각하라. 2천 년 전이다. 그 당시에는 노예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던 어느 장군 같은 혁명가 이외에는 종과 자유인이 하나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바울에 의해서 역사적 예수의 사회 변혁적 복음이 관념화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것이다. 바울이 실제로 사회혁명을 주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의 권세에게 복종하라는(롬 13장) 주장한 건 사실이다. 바울이 그런 주장을 한 이유는 세상의 악한 권세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는 무질서가 더 위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라크의 후세인을 제거했지만 실제로 이라크 민중들은 후세인 시대보다 지금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쨌든지 바울은 더 근본적인 혁명을 제시한 셈이다. 종과 자유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하나다. 종도 그리스도의 것이며, 자유인도 그리스도의 것이다.

셋째, 남자와 여자는 하나다. 2천 년 전에 이런 말을 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성차별의 장본이라고 비평하는 여성신학자도 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전 11:3)라거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해야한다는 진술(고전 14:34)이 그런 비판의 근거가 된다. 바울의 이런 진술은 그가 처한 삶의 자리를 전제하고 해석되어야 한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가 살고 있던 고대사회의 여성관을 참작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 시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른 하나는 바울의 진술은 독자들의 특별한 상황을 배경에 둔 것이다. 바울은 방언, 입신 등등,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열광적 현상이 몰고 올 위험성을 경계하려는 생각으로 여성을 언급했을 뿐이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라는 오늘 분문에 따른다면 바울은 기원 1세기의 페미니스트(feminist)이다.

가장 철저한 혁명이라 할 바울의 이런 주장의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함으로써 그들의 차이가 근본적으로 해소되고 만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바울의 주장은 어떤 현실성이 있는 건가? 증거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오늘 각자가 처한 형편에서 아는 것만큼, 깨우친 것만큼 그 답을 찾아 나설 수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바울의 이런 철저한 혁명사관은 우주론적 차원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바울의 이런 주장을 유대-기독교인들이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바울은 더 놀라운 사실을 언급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다.(갈 3:29)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직 한 사람인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진술에 근거할 때(갈 3:16)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에 그대로 참여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4:6) 이 개념은 이미 3:26절에도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하다.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반해서 바울은 지금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미래의 사건이 현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의 주장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바울의 이런 논리에는 일관성이 있다. 그는 앞에서 율법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했다. 그 율법은 바로 종의 질서를 가리키지만, 새롭게 시작된 믿음의 시대는 바로 주인의 질서를 가리킨다. 그 주인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울은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했다고 설명한다.(4:6) 여기서 아들의 영은 물론 성령이다. 그 성령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체험을 근거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이런 주장이 담고 있는 신앙적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성령 체험이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에서는 주로 방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를 성령체험의 증거로 제시되는데, 그런 것들은 초기 기독교의 특수한 상황을 전제할 때만 설득력이 있다. 특수한 상황은 바로 열광주의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초기에는 합리적 사유보다는 그것을 모두 뛰어넘는 열광적 현상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그런 열광적 현상을 오늘 우리의 눈으로만 재단하면 곤란하다. 그런 현상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영을 인식하는 통로로 작용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예컨대 출애굽 이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산 폭발 현상을 보고 야훼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신다고 믿었던 것과 비슷하다. 비록 그들의 지질 경험이 미숙했지만 야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영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작동시켰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고대인들의 세계 경험이 진리가 아닌데도 하나님 경험은 진리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그들의 세계 경험에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것을 통한 하나님 경험도 잘못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반론이다. 신생아의 어머니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비교해보라. 그 아이들은 어머니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성령 경험이 열광적 은사 중심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하나님 경험은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성서의 세계 경험과 하나님 경험을 구분하면서 하나님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개념은 우리 앞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다. 공생애 중에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아빠 호 파테르)라고 불렀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무슨 말인지.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앞에서 짚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3:26)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인격체다. 서로 다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그에게 속하며, 그와 하나가 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바울이 제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육체적으로 자식을 낳는다는 말인가? 이에 관해서는 판넨베르크의 도움을 받자. 그는 <사도신경해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대목을 이렇게 설명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근원적으로 예수가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특징화하는 게 아니었으며, 또한 예수를 일종의 신적인, 초인간적인 존재로 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유대의 왕은 확실히 한 인간이었다. 유대적 전승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의 기능만을, 즉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개입을 특징적으로 말한 것뿐이지 그의 본성(Natur)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헬라적 표상영역에서는 달랐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인간 예수에게서 ‘일어난’, 그러나 그와는 구별된 초인간적-신적 본질(Wesen)로 특징화 되었다. 이러한 신적 본질이 뜻하는 바는 인간적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 육체 가운데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바울은 로마서 8장3절과 갈라디아서 4장4절을 통해서 이를 밝히고 있다. 사도신경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의심 없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선재적인, 즉 예수의 지상적 탄생 이전에 하나님의 영원성 가운데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로서 말이다. 이 본질은 예수 탄생에서 인간적 형태를, 그리고 인간적 본질을 취한 그것이다. (판넨베르크, 정용섭 역, 사도신경해설)


여기서 오해는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똑같은 차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

오늘의 주제는 “복음의 자유”이다. 예루살렘 공동체와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갈라디아 공동체는 복음과 율법을 겸해서 섬김으로써 결국 복음의 자유를 상실했다. 바울은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율법주의를 거부하고 복음에만 신앙의 무게를 두었다. 그 이유는 율법은 신자들을 종교적 짐을 지우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같은 경구에서 보듯이 종교적 율법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시킨다. 복음의 정체는 자유이다. 십자가는 죄로부터의 자유, 실패로부터의 자유이며, 부활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갈라디아 교우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자유를 유보하고 다시 율법의 짐으로 돌아섰다. 그런 일은 지금도 반복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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