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강

복음과 자유

(갈 5:1-15)


바울은 4:31절에서 여종 하갈과 주인 여자 사라를 비교한 뒤에서, 이제 5:1절부터 본격적으로 기독교 복음의 정체성인 ‘자유’를 논증하기 시작한다. 이 한 구절의 내막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다.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 교우들은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고 율법의 종이 되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형과 부활이다. 예수의 십자가형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으며, 그것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이라 할 율법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억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자유로워진 것이다. 부활은 이 사실의 확증이다. 구원을 우리가 이루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로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것은 복음(유앙겔리온)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율법의 길에 머문다는 것은 종의 멍에를 매는 것이다. 바울이 볼 때 이런 종의 멍에는 일종의 종교적 퇴행인 셈이다. 

갈라디아 교우들은 바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해 바울이 ‘오버’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갈라디아 교우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토라와 할례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 토라와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요소였다. 유대-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안 되었지만, 이방인 기독교인들인 갈라디아 교우들은 토라와 할례 없이 복음으로 살아가다가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려고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 것이다. 물론 이것도 바울의 시각에서 문제로 보일 뿐이지 갈라디아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갈라디아 교우들은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 공동체에 훨씬 유익하다고, 더 나아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게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과 갈라디아 교우들의 생각이 갈라지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자들 사이의 신학적 차이에 기인한다. 

우리는 바울이 주도하고 있는 이방 기독교와 야고보 및 베드로가 주도하고 있는 유대-기독교 사이의 충돌을 앞에서 여러 번 확인했다. 도대체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렇게 치열하게 투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단 토라와 할례가 관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미처 다 알 수 없는 이런 충돌의 속사정이 모두 풀리는 건 아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렇게 절충안을 그들에게 제시할 수 있다. 유대-기독교인들은 저들이 살아온 습관 그대로 토라와 할례를 지키고,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된다고 말이다. 이 안은 이미 갈 2:9절에서 바울이 진술하고 있듯이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다. 바울 일행은 이방인에게로, 야고보와 베드로는 할례자에게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와서 토라와 할례를 지시함으로써 쌍방의 이런 결정이 깨지게 된 것이다. 바울의 반발을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도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에 관여한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 우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 교우들이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주장에 넘어가게 된 이유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의 11강에서 간접적로나마 대답이 주어질 것이다.

어쨌든지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우들이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 앞에서 참담한 심정이 되었으며, 그래서 때로는 논리적으로, 때로는 감정적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다. 갈라디아 교우들의 선택이 왜 종의 멍에를 매는 것인지에 대해서 바울은 할례를 통해서 설명해나가기 시작했다. 할례가 바로 토라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상징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절) 듣기에 따라서 좀 민망하게 들리는 이런 진술을 통해서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우들을 강하게 압박하는 중이다. 바울이 이렇게 과격한 언사로 압박을 가한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이 아주 급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할례 문제에 관한 갈라디아 교우들의 생각과 바울의 생각을 이렇게 도식화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도 ... 그리고 저것도!”의 논리라고 한다면, 바울은 “이것이냐 ... 아니면 저것이냐?”의 논리이다.*


*필자가 보기에 바울의 요구는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전통을 따르는 셈이다. 예언자들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가나안의 바알을 따르려고 한 이스라엘 민중들의 절충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중들이 바알을 섬기고 싶어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알은 아주 현실적인 신(神)이다. 당장 삶에서 유용한 것들을 해결해 주는 신이다. 이에 반해서 야훼 하나님은 미래적인 지평에 관심을 두는 신이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민중들의 바알 숭배를 용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결국은 혼합주의(syncretism)로 빠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갈라디아 교회와 예루살렘 유대-기독교의 신앙도 이런 절충주의 내지는 혼합주의의 위험성이 없지 않다. 바울은 이 사태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위기로 보고, 할례를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인 것으로 설정한 것이다.


바울의 논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3절이 말하고 있는 대로 할례 자체의 한계이다. 율법에 대한 동의인 할례는 율법을 완전히 수행했을 때만 효력이 있다. 그런데 인간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할례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위한) 온전한 법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을 종으로 만들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도덕 개량주의와 비슷해서 상대적으로 양호한 삶의 형식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삶의 본질이라 할 자유의 세계를 확보해주지는 않는다. 율법의 전문가 집단인 바리새파 중에서도 극단적인 바리새파에 속했던 바울은 율법의 이런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바울의 이런 논리는 불교의 돈점(頓漸) 논쟁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아니라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개념으로 말한다면, 칭의와 성화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성화론자들과 달리 그것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적 칭의론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4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로 복음에 의한 할례의 상대화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고전 13:10절 말씀처럼 의로움의 완전한 길인 복음 앞에서 이제 할례(율법)는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절 말씀을 보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아주 과격하게 들리지만 정확한 진술이다. 물론 갈라디아 교우들이나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예루살렘 지도자들도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 사이에 놓인 차이가 사소할 수도 있지만 결정적일 수도 있다. 갈라디아 교회는 사소한 것으로 본 반면에 바울은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관용의 측면에서는 갈라디아 교회가 옳고, 기독교의 정체성 확보라는 측면에서는 바울이 옳다. 기독교 역사에서만 본다면 후자가 정당성을 획득했다. 바울의 논리를 더 따라가 보자. 

토라와 할례를 통한 의로움이 그리스도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는 옳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바울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만약 갈라디아 교우들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 율법에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갈라디아 교우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배타적으로 생각했는지 지금 우리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또 다시 갈라디아 교우들이 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말에 솔깃해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그들의 신앙적 본질이 흔들린 것인지, 아니면 교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차원에서 그쪽의 요구를 받아들였는지 하는 것이다. 어쨌든지 지금 문제는 바울이 외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정체성이다. 이것에 따라서 바울이 제기하는 주장하는 논리의 정당성 여부가 판가름날 것이다.

바울이 지금 의로움의 문제를 유대인, 또는 유대-기독교인들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유대인들에게 의로움의 핵심은 물론 율법 수행이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이다.(sola fide) 그런데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율법 수행이 의에 더 가깝다. 경건과 도덕성은 인류 역사에서 의로움의 기준이자, 실증으로 인정받고 있다. 믿음에는 그런 실증들이 없다. 이게 문제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잘 믿어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이건 바로 오늘 현실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회의 법을 잘 지키고 사회적으로도 도덕적이고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믿음 좋은 사람들로 인정받는다. 바울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5절이 핵심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이런 문장은 바울이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완벽하게 번역, 해석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가 말하는 “성령으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진리, 생명, 창조의 영이며,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인 이 성령은 로마서도 그렇지만 갈라디아서에도 기독교 진리를 인식하고 드러내는데 결정적인 요소이다. 고린도교회나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성령은 주로 은사 체험으로 이해되지만, 여기 본문에서는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그 영을 가리키는 것 같다. “믿음을 따라”에 관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든 3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여기서 믿음은 바로 율법보다 상위 개념이다.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중요하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종말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의의 조건이나 현상들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말이 된다. 사람들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는 롬 8:6-11절도 의로움에 대한 종말론적 성격을 가리킨다.

 성령 가운데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이 현재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뿐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그것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뿐이라고 한다면 결국 기독교 신앙은 현실에서 무능력한 게 아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 교우들을 혼란스럽게 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며, 오늘 우리가 기독교적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세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서도 무언가 확실한, 실증적인 것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런 확실한 것들은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처리될 차원이지 하나님의 차원은 아니다. 의로움은 바로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처리될 차원이기 때문에 사람에 의해서 재단되거나 범주화될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통치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태도를 실질적으로 유지할 수만 있다면 종말론적 의로움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지금 우리의 현실에 강한 능력(dynamis)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게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바울의 진술이(고전 4:20) 가리키고 있는 그 능력은 원칙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웅들의 업적을 능력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장 큰 능력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는 어떤 것, 즉 우리를 생명과 평화로 끌어주는 힘이다.(롬 8:6) 


십자가의 걸림돌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들이 기울어져 있는 할례가 실효성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후에(6절) 다시 7-12절에서 그들의 신앙을 혼란케 만든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난한다. 그들은 달음질을 잘 하던 갈라디아 교우들을 가로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했다.(7절) 그들의 주장은 갈라디아 교우들을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뿌리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와 바울의 이방 기독교는 도저히 같은 배를 타고 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때 그 초대교회는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갖는 동안 오순절 성령체험을 하고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안디옥을 거쳐서 갈라디아, 마케도니아, 아카야 등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진술을 따른다면 이런 생각을 근본적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지금 역사에 자리 잡은 기독교는 예루살렘 교회와 그 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록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수사학적 표현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그 차이를 극복하게 하신다는 점에서 이런 차이를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교회 분열이라는 배수진을 치면서까지 지켜내려고 했던 복음의 진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은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우들을 향해서 여전히 신뢰를 보내는 반면에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절) 더 나아가 그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스스로 거세되어야 한다고 풍자적인 발언을 덧붙인다.(12절)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우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는데,(4:17)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와 예루살렘 지도자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한다.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줄다리기의 현상만 놓고 본다면, 마치 한 여자를 놓고 서로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두 남자의 싸움 같다.

이런 와중에 바울은 자신이 당한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11a) 이 문장을 찬찬이 뜯어보면 그 당시에 갈라디아 교회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전투구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여전히 할례를 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던 것 같다. 바울이 타고난 유대인이며, 바리새파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런 소문이 날만하다. 적대자들은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바울이 여전히 할례를 전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할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는지 모르겠다.

바울은 그런 소문을 일축한다. 할례를 여전히 유효한 종교적 행위로 붙들고 있었다면 박해를 받지 않았다는, 즉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걸림돌(스칸달론)은 바울의 십자가 신학에서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두 가지 차원에서 걸림돌이다. 첫째, 십자가는 유대교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토라 수행을 통한 구원 개념의 무효선언이기 때문이다. 둘째, 십자가는 그레꼬-로마 문화에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헬라의 파이데이아(교육, 훈련) 개념을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 십자가 신학은 고전 1:23절 이하의 진술과 직결된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절)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걸림돌 신학에 비추어볼 때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바르게 지켜내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종교적 수행과 업적에 과도하게 압도당하고 있다. 오늘 교회에서 실행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유대-기독교가 추구하던 토라와 할례와 다를 게 없다. 현대 기독교의 삶은 로마의 정치와 헬라의 문화적 경향에 종속적이다. 대형교회의 신앙적 관심이 무엇인지 조금만 살펴보면 그 정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두 가지 종류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기복적인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교양이다. 이 양자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성서시대의 그레꼬 로마 사람들이 추구하던 파이데이아와 일치한다. 십자가가 단지 구원받기 위한 주술의 차원에 떨어졌을 뿐이지 종교와 정치, 문화에서 걸림돌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는 것으로 갈라디아 교우들의 마음을 다시 돌려놓을 수는 없다. 바울의 신학이 아무리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갈라디아 교회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면 그 능력이 의심받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갈 5:13절부터 이런 실제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복음은 분명히 자유를 허락하지만, 문제는 그 자유가 교회 현장에서 남용될 수 있다는 데에 놓여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들은 갈라디아 교회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말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실제적인 이유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바울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지경까지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5:13b, 참조 4:8) 갈라디아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바울은 이렇게 공자 왈 투로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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