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강

성령론적 윤리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5:16-6:10 )


우리가 앞에서 몇 번이나 확인한 것이지만, 바울은 예루살렘 공동체 지도자들과의 전선을 명백히 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믿음 이외에 토라와 할례를 겸해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다른 복음’이며, 결국 바울이 처음에 전한 참된 복음을 훼손시킬 수밖에 없다. 바울이 그들을 얼마나 노골적으로 비난했는지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다. 급기야 지난 10강의 본문인 갈 5:12절에서는 조롱하는 듯한 어투로 그들을 비난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소중한 신앙의 선배이고, 그들을 비난하는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거의 이단논쟁의 수준에서 다투고 있다는 상황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지 불행한 일이지만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과 바울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다시 신앙적으로 일치를 이루기 힘든 그 마지노선을 넘어버린 셈이다. 그게 일정한 기간이었지만, 초기 기독교가 처한 자리였다. 

바울은 이제 할 말은 대충 다 한 셈이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를 남겨두고 있다. 갈라디아 교우들이 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유혹에 넘어갔는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그 문제를 앞에서 우회적으로만 언급했지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아마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글쓰기의 기술일 수도 있다. 모든 관계를 청산하는 게 아니라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능한 대로 피하는 게 좋다. 그러나 편지를 끝내기 전에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벌어진 부도덕한 행위들이다. 갈라디아 교우들은 바울이 전한 참된 복음으로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도덕한 행위 앞에서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이런 사건들은 그들이 추종하던 복음의 본질에 대한 신뢰마저 흔들고 말았다. 바울이 가르친 복음이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바로 그 순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토라와 할례를 들고 나왔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삶을 놓치지 않으려면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사건들은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런 문제들 곧 복음과 윤리의 관계를 말한다.


복음과 윤리 

교회를 향한 비판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말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실제로 평화와 정의를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비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들보다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서 더 뛰어난 것도 아니다. 이런 윤리적 실천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유무에 상관없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 성윤리에서도 그렇고, 경제윤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의 강남지역에서 아파트 투기하는 분들 중에 기독교인들도 제법 많을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가 중심 종교로 자리하는 유럽과 미국이 티베트나 인도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하는 건데, 신앙이 실제 삶과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반성해야 할 질문들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윤리에 중심을 둔 설교를 하고, 그런데 중심을 둔 목회를 꾸린다. 기독교인답게 정직하고, 정의롭고, 희생적이어야 한다고 다그친다. 약간 접근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보수적인 목사나 진보적인 목사의 관점이 모두 비슷하다. 전자는 주로 개인윤리에, 후자는 사회윤리에 천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조건 동의하고 싶지도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이 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더라도 사람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표면적으로는 바뀔 수 있다. 줄담배 피우다가 담배를 끊고, 놀음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손을 씻고 몰라보게 새로워진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제자훈련을 통해서 매일 자신을 신앙적으로 성찰하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제법 많다. 우리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듯이 사람은 노력으로 어느 정도로 세련된 교양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단지 무늬의 차원에 머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가 교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물론 교양은 필요하다. 교양이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편한 반면에 교양이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짜증스럽다. 종교적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와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교양은 그렇게 결정적인 게 못된다. 그것은 삶의 능력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오늘 중산층 교양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한국사회의 변혁을 주도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별로 기대할 게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둘째, 복음은 윤리 너머(meta-ethics)의 차원이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는 일종의 윤리라 할 율법에 의한 역사적 예수의 죽음이며, 부활은 인간의 종교적 업적과 윤리적 행위와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배타적 생명사건이다. 이 사건이 복음인 이유는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능력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졌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태양을 만들지 못하고 폭풍을 일으킬 수 없듯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복음은 메타-윤리적 차원이다. 

어떤 사람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아리아 “밤의 여왕”을 노래했다고 하자. 그는 그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과의 존재론적 일치를 경험했다. 그 순간에 그가 얼마나 윤리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음악의 원초적 세계에 들어가는 게 아니면 윤리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온전한 음악경험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음악은 순전히 음악의 세계일뿐이다. 복음도 역시 그렇다. 여기에는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차이가 없다. 바울은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고까지 말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기독교 신앙이 윤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 윤리는 신앙에 의한 하나의 귀결이다. 신앙의 중심은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건이며, 윤리는 그 사건에서 창조적으로 발생한다. 그래도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구체적인 윤리적 지침, 규범들을 가르쳐야하지 않느냐, 하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이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듯이 신자들에게 일일이 살아가는 방법까지 지시하곤 한다. 그런 것들은 신앙 이전에 상식이며 교양이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생각해야 할 대목들이다. 상식과 교양을 복음인양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윤리의 근거는 자기 안에 놓이는 게 아니라 복음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윤리는 인간의 불가능성과 하나님의 가능성 사이에 놓여 있는 셈이다.(위 단락은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 ‘신학단상’의 내용을 조금 고쳐 적은 것)

  

성령과 윤리

위의 인용한 글에서 필자는 기독교 윤리는 독립적인 게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서 나오는 귀결(consequence)이라고 지적했다. 바울도 역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벌어지는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서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 성서를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상식과 전(前)이해에 머물지 말고 성서기자의 영성 안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오늘 본문의 이해에서도 역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 그의 윤리신학은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성령론적 윤리’이다. 많은 이들이 바울의 이런 입장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인 윤리학을 위해서는 성령론적 시각보다는 인간론적 접근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말이다. 성령 중심적 신앙이 결국 삶의 무책임만 불러 온다고 말이다. 이런 논란은 여기서 한 두 마디로 해결될 수 없으니, 접어두고 아래와 같은 두 가지 명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넘어가자. 첫째,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행위가 중요한 경우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는다. 둘째, 성령은 우리의 존재론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기독교는 이런 존재론적 변화를 참된 변화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5:16절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내가 이르노니”라는 관용어는 바울이 무엇을 강조할 때 등장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프뉴마티 페리파테이테)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진술한다. 18절에서도 “성령의 인도하시는”이라고 했으며, 25절에서도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라고 했다. 성령을 따라서 행한다거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게 무엇인가?

우선 성령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잠시 살펴보자.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의 번역이다. 구약성서는 그것을 ‘루아흐’라고 불렀다. 그 뜻은 영, 또는 바람이다. 그들이 영과 바람을 하나로 본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바람, 공기는 사람과 대지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기도 하고 제거하는 힘이었다. 봄의 따뜻한 공기와 바람이 생명을 살리며, 거꾸로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바람이 생명을 죽이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숨을 쉬고, 죽으면서 숨을 거두는 게 바로 그런 현상이다. 고대인들은 바람이 공기의 이동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다만 그들 앞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이 이런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직관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영이라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영은 곧 생명의 영이다. 그 영은 곧 창조자 하나님의 영이다.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의 숨이 인간의 코에 들어왔는데, 그 숨이 곧 영이다. 이 영은 전쟁에도 개입하면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담보하기도 했다. 이처럼 성서는 영을 ‘생명’이라는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생명의 영을 따라서 행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생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이 생명 문제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책 한권의 분량으로도 모든 걸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논의는 일단 접고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쪽으로 논의를 모아야겠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그 당시의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열광주의적 신앙에 머물러 있었다. 방언, 신유, 입신 등등의 현상들이 성령 체험의 실증으로 제시되곤 했다. 이런 건 고린도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서읽기와 성서해석의 어려움이 시작된다. 그들의 열광적 성령체험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는 걸려내야 하는지가 관건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걸러낸다는 말은 고대인들의 세계경험이 우리와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예컨대 그들은 질병을 죄 문제와 연결시켰으며, 불행을 사탄의 소행으로 생각했다. 복음서에 예수의 축귀가 메시아적 징표로 그려지고 있는 것들도 이런 사태와 연결된다. 우리가 성서에서 고대인들 특유의 세계관을 걸러낸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늘의 세계관이 고대인들의 세계관보다 탁월하다는 주장도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시각은 바울이 기독교인의 신앙에 관계된 문제를 철저하게 성령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를 영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바울의 입장은 그것을 토라의 차원으로 보는 유대-기독교의 입장과 대립한다. 양쪽은 똑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 신앙을 인식하는 토대가 다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영이고, 유대-기독교에게는 토라이다. 갈라디아 교우들은 영을 진리 인식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바울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갈라디아 교우들의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영은 우리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바람처럼 임의로 활동하는 영에 의존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토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토라는 실증이기 때문이다.


성령과 육체

바울이 성령론적 윤리를 주장하는 이유는 이 성령의 삶만이 육체의 욕심(에피투미아 사르코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본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절)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내 삶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행할 수 없다. 성령이 주도권을 행사하든지 아니면 육체가 그렇게 할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사르크스)는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의 육체적 본능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가리킨다. 만약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으로 자기중심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 배척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않는다는 주장도(18절) 성령의 주도권을 가리킨다. 우리에게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활동한다면 자기의(義)인 율법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위의 설명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이론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성령의 인도를 실질적으로(real)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 여기서 결정적인 요인인데, 그것을 여기서 자세하게 거론할 수는 없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억지로 경험하게 해줄 수 없듯이 성령 경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리의 존재론적 깊이를 억지로 깨닫게 해줄 수 없듯이, 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에 억지로 충격을 받게 해 줄 수 없듯이 성령의 도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의 설명을 조금 더 따라가자.

그는 19절부터 육체의 일에 대한 목록을 기록한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등등, 총 15개 항목이다. 목록을 열거한 뒤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라는 표현은 종말론적 예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이 말이 종말론적 차원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22절부터 소위 성령의 열매에 대한 목록을 제시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총 아홉 개 항목이다. 여기서 사랑, 희락, 화평이 한 묶음이고, 오래 참음, 자비, 양성이 또 한 묶음이며, 충성, 온유, 절제가 세 번째 묶음이라고 한다.

19-23절에 나오는 이 목록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1) 개개 개념들은 특별히 기독교적인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인습적인 도덕이다. 2) 그것들은 헬라 철학적 윤리의 악과 덕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악의 세력과 영의 권능의 현상인데, 이런 목록은 영지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3) 덕의 목록만 성령과 관계된다. 4) 악의 목록은 무질서하지만 덕의 목록은 잘된 배열이다. 이런 목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런 목록이 특히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기독교들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윤리적 규범들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그 당시 최소한 상식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지켜야 할 그런 덕목들을 단순하게 나열한 것뿐이다. 따라서 이런 목록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바울의 생각을 정확하게 따라가는 게 못된다.

바울은 갈 5:25-6:10절에서 여러 종류의 경구를 제시한다. 19-23절의 목록이 단지 단어의 나열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제시되는 것은 문장의 나열인 셈이다. 이 경구 모음집에도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없다. 고대 헬라와 로마의 선생들에게서 나올만한 격언들이다. 이 말은 곧 바울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특히 기독교적인 윤리를 강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당시 헬라 교육이 일반적으로 가르치던 내용에 한정되어 있다. 예컨대 6:6절을 보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승과 제자의 덕스러운 관계는 그 당시의 교육 공동체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던 것들이었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가 중심이 된 공동체에서 이런 유형의 문장들이 흔히 발견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교육기관(신학교?)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성령 중심의 윤리이다. 성령이 우리를 주관할 때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그럴 때만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6:8) 바울의 이런 주장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거룩한 영인 성령에게 의존할 때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거론한 이유는 성령에 의존하는 윤리의 입장에 선다고 하더라도 갈라디아 교회에서 벌어진 부도덕한 행위들을 용납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 때문이다. 바울에 따르면 성령에 의존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다. 하나는 참된 자유이며, 다른 하나는 방종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방종을 두려워하다가 결국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성령의 도우심에 온전히 의지한다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성령에 상응하는 열매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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