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강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 6:11-18)


주후 50-55년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시기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승천이 일어난 뒤 대략 20년이 지난 기원후 50-55년 어간이다. 그 시대가 2천 년 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당시의 기독교가 어떤 형편이었을지 생각해보라. 예수의 사도들과 몇몇 추종세력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독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 이렇다 할 위세를 보이지는 못했다. 그들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지, 새로운 종교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초기 기독교의 구성원들이 거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으며, 부분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유대적 종교행태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기에는 바울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유대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유대교의 중심에서 활동하면서도, 마치 마틴 루터가 로마가톨릭 사제요 수도승으로서 가톨릭 신앙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율법 수행을 통한 의로움이라는 가르침에서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친 유대교적인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유대교의 근본을 넘어서려고 한 유일한 지도자였다고 봐도 잘못이 아니다. 그런 시도가 결국 예루살렘 공동체와 큰 충돌을 겪게 되고, 우리가 앞에서 확인했듯이 이 양자 간에 이단 논쟁과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와 바울의 이방-기독교의 이러한 신학적 차이는 복음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에서만 유발되었다기보다는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달랐다는 사실에 기인한 탓도 크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공부를 마치는 시간이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전체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도를 나가겠다.

갈라디아는 어떤 한 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중앙지역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 교회에서 토라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가르침을, 즉 복음(유앙겔리온)만을 전했다. 바울은 그곳에서 일정 기간 머문 뒤에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그 지역을 떠났다. 얼마 뒤에 토라와 할례를 강조하는 예루살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나타나서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의 기분이 어땠을는지는 불을 보듯 훤하다. 오늘의 상황과 비교하면 어떤 사람이 교회를 개척한 뒤 사정이 있어서 떠났는데 그 교회가 신천지 이단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경우와 비슷하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나름으로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믿었다.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을 믿는 건 똑같았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벌어진 문제의 발단은 부도덕한 행위들이었다.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믿어도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잘못된 행위들이 계속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에 율법주의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다. 봐라. 우리에게 이렇게 죄가 나타나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는 토라를 수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종교적으로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 대충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회유했다.* 예루살렘에서 온 이 유대-기독교인들은 세련된 사람들이다. 인간적으로 고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조상인 유대인들은 그런 노력으로 수많은 율법을 만들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으며, 이방민족과 구별되는 할례의 전통을 이루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리를 잡았다.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회유했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과 인격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순수한 동기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토라와 할례를 강조한 것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에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하다고 확신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앙에서 인격보다 인식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알지 못하면 아무리 인격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복음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니까 말이다.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었으나 바울이 주장하는 복음의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이런 인식의 문제는 신학적 훈련을 통해서 주어진다. 실제 신앙생활만으로는 토라와 할례가 요청되지만 신학적 훈련으로 우리는 복음에만 천착하는 신앙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신학 무용론이 팽배하다는 사실은 복음이 변질될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설득 당했다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우선 자신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바울은 그곳에 없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는 부도덕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능력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이런 순간에 토라와 할례가 바로 교회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찌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은 오늘도 비슷하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보시기 바란다. 토라와 할례를 다시 따라가는 식이다. 교회의 법이 얼마나 많은가. 헌금으로부터 시작해서 금주금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법들은 곧 2천 년 전 갈라디아 교인들이 당면했던 토라나 할례와 똑같습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이 종교적 업적을 구원의 길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규범들은 이론적으로도 그렇고 임상적으로도 실효성이 높다. 조금 건전한 사람들은 두 가지 다 잘하면 좋은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것이다. 법도 잘 지키고 믿음의 본질도 잘 지키면 된다고 말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술 담배 일절 하지 않고, 십일조 잘 내며, 교회 봉사 잘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된다고 말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했던 유대-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님을 잘 믿되 토라와 할례도 지키자는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매력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자신들의 교회에 벌어진 부도덕한 행위의 원인을 알게 되었고, 더구나 그것의 해결방법까지* 제공받게 된 것이다. 결국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차츰 율법과 할례까지 겸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삶의 한 방편으로 생각한다. 예수 믿고 삶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변화되었다면 물론 좋은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첫째, 예수를 믿지 않아도 변화될 사람은 변화된다. 그런 것은 감동적인 책을 한 권 읽어도 가능한 일이다. 둘째, 기독교가 말하는 변화는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이다. 무늬의 변화를 참된 변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해는 마시라. 기독교 신앙에서 변화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한 그런 변화보다는 우리의 노력과 전혀 상관없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복음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율법의 한계


바울도 원래는 율법주의자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골수 바리새파였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철저하게 율법공부를 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이제 그 율법종교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 갈라디아 신자들이 율법과 할례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는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약간 풍자적인 방식으로 11-13절에서 설명한다. 이게 갈라디아서의 결론이다. 그가 ‘큰 글자’로 쓴다는 것은 강조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볼 때 율법과 할례는 종교적 ‘겉치레’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그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요한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만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간다. 13절 말씀을 보자.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할례주의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이다. 실제로는 지키지도 못할 법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그들은 억지로 율법을 지켜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율법을 조금 더 잘 지킨 사람은 우쭐하고, 못 지킨 사람은 주눅이 든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이런 상황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십일조, 금식, 사회봉사를 자랑하는 기도를 올렸고, 세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살지 못한 세리를 오히려 칭찬했다. 바리새인은 인간이 잘못되었고, 세리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율법중심의 삶이 만들어내는 파괴적인 현상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요즘도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는 사람과 가끔 주일도 빠지는 사람이 교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돌아보라. 내신과 수능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도 역시 율법중심의 질서이다. 이런 질서에는 경쟁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맙니다. 이 세상이야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명사건에 집중해야 할 교회마저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구원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지금 율법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윤리와 도덕은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한 인간, 한 공동체, 한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울타리이다. 법, 윤리, 도덕이 없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해보라. 예컨대 학교에는 학칙이 있다. 일 년에 몇 번 결석하면 상급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시험 점수가 몇 점 이하면 낙제한다. 노력을 많이 한 학생에게는 상장도 주는데, 이런 게 모두 학칙과 율법이다. 이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교회의 법과 질서를 잘 지켜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율법은 선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이 절대화하면 율법주의가 된다.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켰나 하는 것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그런데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바르게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저 사람이 기도를 정말 정직하게 잘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율법은 일종의 필요악이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이면서 본질이기도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아무리 율법주의에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게 그나마 덜 악한 공동체를 만드는 길인가? 그것은 바로 갈라디아에서 바울을 반대한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오늘 수많은 목회자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억지로 전도하게 만들고, 억지로 헌금하게 만들어서라도 좋은 신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그것이다. 그게 복음에 배치된다면,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공동체로 남아야 하는가. 이런 입장이 바로 바울의 가르침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바울도 궁극적으로는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다. 그는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할 뿐이지 인간의 선한 행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갈 6:7-10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한다. 성령론적인 해석이다. 9,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선을 꾸준히 행하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율법적인 가르침이지만, 인간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게 아니다. 8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한다. 그는 선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결과라고 보았다. 우리가 억지로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우선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그는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율법주의에 의한 선과 성령에 의한 선이 어떻게 다른지, 아무래도 학생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해야겠다. 여기 두 학생이 있다. 한 학생은 다른 학생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다른 한 학생은 공부 자체가 놓아서 열심히 공부한다. 현실에서는 아마 공부 자체를 좋아하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신앙생활에서는 그게 분명해야 한다. 공부 자체가 좋은 학생이 곧 성령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으며, 자기만족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렇다. 사람이 생산해내지 못하는 성령만이 이 사람의 삶을 끌어간다. 우리도 정말 이렇게 살고 싶다. 내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게 아니라 흡사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면서 꾸준히 선을 행해야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화끈한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하는지, 방언을 받아야만 하는지, 필자가 여기서 끊어서 말할 수는 없다. 바울의 가르침만 한 마디 더 전하겠다.


성령과 예수의 십자가


바울에 따르면 율법주의의 특징은 ‘자랑’, 곧 ‘자기’ 자랑이다. 자기의 기도, 자기의 전도, 자기의 비전이 자랑거리이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자기의(義)라고 한다. 겉으로는 아주 순수하고 이타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여도 그 내부에는 ‘자기의’가 가득한 게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다. 이와 달리 바울은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14a절 말씀은 이렇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없다는 바울의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가 이룬 것은 실제로는 많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7) 하나의 예외만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것만이 자랑이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바울의 이 고백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사람은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한다. 모두가 연극의 주인공처럼, 공주와 왕자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자기의 것만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공허하게 들린다. 겉으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도, 그것은 자기연민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것마저 자기의(義)이다.

바울의 뒤이은 진술을 보자. “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는 바울의 진술은 무슨 뜻인가?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바울은 율법주의와 투쟁하는 중이다. 세상에서 얻으려는 모든 업적을 단절해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당연히 율법을 통한 구원과는 단절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경험이다. 바로 이 사건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을 것이다. 세상의 업적의(義)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자유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 십자가로 인해 주어지는 그 자유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런 성령의 자유를 맛본 사람은 결코 낙심하는 법 없이 꾸준히 선을 행한다. 이럴 때만 인간의 선한 행위는 의미가 있으며, 이럴 때만 인간의 선한 행위는 사람을 파괴하지 않고 살린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만이 나의 자랑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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