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누가 정통인가?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갈 2:1-10)


바울은 1장 후반부에서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한번 언급한 뒤에 2장에서 다시 또 하나의 새로운 예루살렘 방문을 언급한다. 예루살렘 방문 숫자가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이 서로 다르다. 사도행전은 기본적으로 세 번에 걸친 바울의 세계 선교를 예루살렘 방문과 연결시켜서 설명했다. 회심 직후의 방문과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신학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방문을 합하면,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그 사건인데, 사도행전은 최소 다섯 번의 예루살렘 방문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을 몇 번이나 방문했는지 정확한 정보를 알 도리가 없으며, 본문을 공부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의 관계이다. 그들이 실제로 완전히 대립적이었는지, 예루살렘 교회의 피치 못한 형편으로 인한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인지, 바울의 극단적 신학으로 인해서 벌어진 점진적 소원 관계였는지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두 번에 걸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사이의 간격은 14년이다. 그 사이에 그가 예루살렘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는지는 갈라디아서만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다른 서신이나 사도행전으로도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어쨌든지 그는 지난 14년 동안 수리아와 길리기아, 그리고 갈라디아의 여러 곳에 복음을 전했다. 이런 지역은 모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가 구도정진의 자세로 추진했던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는 사도행전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는 안디옥이다. 이 안디옥 교회에 매우 심각한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는데, 우리는 이에 관한 정보를 사도행전 15장에서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예루살렘)로부터 안디옥으로 와서 바울 및 바나바가 가르치던 내용과 다른 것을 주장했다. 그것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으로(행 15:1) 바울과 바나바가 그동안 가르치던 내용과 충돌했다. 이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갈 1:8) 사람들이라고 일컬은, 그리고 ‘거짓 형제’라고(갈 2:4) 일컬은 이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개척한 안디옥 교회에 와서 분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 곤란하다. 그들은 아마 안디옥 신자들을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라와 할례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이들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을 오늘의 경우로 비교한다면 노회나 총회에서 파송한 사람들이 개 교회에 와서 청문회를 여는 것과 비슷하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로 파송한다. 사도들과 예수의 동생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라 할 종교회의*를 개최한다. 사도행전에서도 어느 정도 그런 흔적이 엿보이지만 이 종교회의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양측 사이에 불을 뿜는 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토라와 할례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반 바울파라 할 바리새인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선교 태도를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이방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토라를 따르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와 예수님의 동생인 야보고는 중간의 위치에서 회의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칫하면 교회의 분열로 치달을 수도 있는 이 회의의 결과는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의 입장을 수용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안디옥 교회에 공식 문서를 전달한다. 그 내용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멀리해야 할 네 가지 사항 이외에는 그 어떤 율법도 강요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네 가지는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이다.(행 15:29) 이 네 항목은 단지 기독교인들만의 고유한 가치가 아니라 당시의 보편적인 가치였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를 최초의 종교회의(concil)라고 일컬을 수는 있으나, 실제로 공인된 에큐메니컬 종교회의는 325년의 니케아에서 열린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론의 핵심이라 할 예수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질론(헤테로우시오스)의 대표자는 아리우스이며, 동일하다는 동질론(호모우시오스)의 대표자는 아다나시우스였다. 2차 종교회의는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는데,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을 놓은 이 두 종교회의가 각각 콘스탄티누스와 데오도시우스라는 로마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다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종교회의에서 작성된 신조(creed)가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이룬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오늘 한국기독교가 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성격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거짓 형제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거론하는 이유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바울의 논리는 아주 명백하다. 예루살렘에서 파송을 받아 안디옥 교회에 내려와서 분란을 일으킨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이 이제 다시 갈라디아 지역으로 들어와서 다시 신앙적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일단락 된 것이다. 그 당시 기독교의 최고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에 의해서 일단락된 문제가 거듭해서 불거지고 있다는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광범위하게 지지를 얻은 게 아니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권위가 생각보다는 강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 일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행위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리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입장을 바꿔서 유대-기독교 측에서 바울을 바라보면 상황이 어떻게 보일까? 그들 중에서도 매파와 비둘기파가 있었는데, 바울과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매파의 시각에서 바울은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게 옳다 하더라도 토라와 할례까지 거부한다는 것은 구약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기에 용납할 수 없었다. 여전히 유대교의 큰 틀 안에 머물러 있던 그들은 이렇게 유대교의 근본이 허물어지는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초기 기독교가 구약성서를 그대로 경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보더라도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가 내외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은 물론이고, 바울도 처음부터 그런 큰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울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토라와 할례 문제로 인해서 결국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은 바울을 신앙적 동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만약 이들 유대-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기독교의 주류로 남았다면 오늘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유대교와의 일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 대답은 아무도 모른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기독교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 바울의 전통이 바로 오늘 기독교의 역사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즉 전통은 열려 있다는 뜻이다.


*구약성서와 기독교의 관계는 한 두 마디로 끊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사연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간단히 생각해보라. 초기 기독교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교가 선정한 39권의 경전을 무슨 이유에서 자신들의 경전으로 받아들였을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을 강조하고 있는 학자들은 구약성서를 교회의 경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세기 어간에 베를린에서 교회사가로 활동한 하르낙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2세기에 구약을 거부했던 것은 잘못이었지만 위대한 교회는 이 거부를 올바르게 거절하였다. 16세기에 구약을 그대로 간직했던 것은 종교개혁이 아직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구약을 프로테스탄트의 경전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교회적 마비의 결과이다. ... 여기서 구약 자체를 일소해버리는 것, 그리고 고백과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에 명예를 주는 것, 이것은 오늘날 -이제 너무나 늦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요구되는 위대한 행위이다.” (에벨링의 ‘신학연구개론’ 39,40에서 재인용. A.v. Harnack, Marcion. Das Evangelium von fremden Gott, 1921, 1924, Neudruck 1960, 217, 222)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은 상호보완의 긴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가 구약을 받아들인 것은 잘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한스 유르겐 헤르미씨온(H.J. Hermission)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확실한 것을 제시해야 한다면 그것은 구약 없이는 말할 수 없으며, 양자의 것이 함께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헤닝 쉬레어, 신학이란 무엇인가, 142).

   

아직 기독교 역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 혼돈의 시기에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과의 신학적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바울의 복음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그는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로 낙인찍혔을지 모른다. 그의 투쟁은 그만큼 치열했다는 뜻인데, 그 흔적이 바로 갈라디아서다. 그는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자신의 입장에서 서술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다. 제 삼자가 기록한 사도행전의 보도와 달리 바울의 입장에서 기록한 본문이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바울은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밝힌다. 이런 표현도 역시 자신의 복음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로부터 승인받은 게 아니라 독자적인 것이라는 갈라디아 전체의 주제와 상응한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을 “유력한 자들”에게 따로 전했다고 한다. 아마 공개적으로 토론을 하기 전에 그들을 미리 설득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데서 바울이 회담을 전략적으로 끌고 갈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드러난다. 회담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바울의 전략을 나쁘게 볼 건 하나도 없다.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에 해당되는 게 아닐는지. 그가 전략적으로 접근했던 이 회담의 핵심은 복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이 종교회의에서 바울이 원하지 않는 쪽으로 결과가 나왔다면 그의 선교행위는 헛된 일이 되었을지 모른다. 헛되다는 말은 곧 토라와 할례가 없는 복음이 부정된다는 뜻이다. 바울은 지금 매우 절박한 상태에서, 수세적인 입장에서 배수진을 치고 이 종교회의에 참여했으며,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다. 회의 결과가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왔다고 해서 바울의 입장이 무조건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회담이든지 늘 진리가 드러나는 쪽으로만 결론이 나지는 않는다. 진리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권력이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권력의 메커니즘을 행사하는 게 곧 위에서 말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권력 자체는 칼처럼 중립적이다. 옳게 사용하면 선하고, 나쁘게 사용하면 악할 뿐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자기의 입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몰아갔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유력한 자들을 따로 만나서 자기의 선교행위에 관해서 해명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암시가 아니겠는가.

예루살렘 종교회의 과정에서 하나의 에피소드가 발생한다. 그것은 동행한 디도의 할례 여부였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편지를 줄 정도로(디도서) 디도는 바울의 선교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디모데처럼 바울의 제자이다. 사도행전에 그가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 사도행전의 저자가 수집한 전승에 디도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필자가 이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할 입장은 못 된다. 바울이 왜 디도를 예루살렘 종교회의에 데리고 갔을까? 가능한대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과 화해해야 할 그 자리에 뜨거운 감자라 할 헬라 젊은이를 대동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봐도 지혜로운 행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할례 없는 헬라 젊은이지만 예수를 바르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번 여행에 자신들을 도와줄 젊은이가 디도 외에는 없었는지 정확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예루살렘 현지에서 디도 문제가 그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바울에게 이방인 선교에 관해서 미리 해명을 받은 예루살렘의 유력자들은 디도의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할례를 필수적인 것으로 주장하던 사람들은 압력을 행사한 것 같다. 번역에 따라서 그 대목이 약간 씩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데, 공동번역은 4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 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분위기 앞에서 바울은 타협하지 않는다. 그가 관용이 없다거나 고집불통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게 무너지면 복음의 진리 가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방인 할례를 기독교인이 되는 필수 요소로 강조하는 이들을 가리켜 바울은 ‘거짓 형제’라고 표현했다. 표현이 과격하다. 그가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갈라디아서를 쓰는 그 순간에 바울의 심리가 매우 격정적인 상태라는 걸 말해준다. 지금 바울은 지난 날 예루살렘에서 열린 종교회의를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현재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다. 이미 결론이 난 이방인 선교 문제를 계속해서 트집 잡고, 실제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 신자들을 크게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사람들을 좋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거짓 형제들을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세 가지로 규정한다. 1) 그들은 가만히 들어왔다. 2)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있다. 3) 그들은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한다. 몰래 들어와서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종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결코 형제가 아니라 원수, 혹은 미혹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이고, 종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오늘 우리는 복음의 자유를, 또는 자유의 복음을 경험하고 있는가? 무엇이, 또는 누가 그것을 빼앗는가?

자유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토라와 할례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토라와 할례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이루어야 할 종교적인 업적이다.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서기관들이며,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유대의 율법은 아무리 칭송을 받아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개인과 공동체를 바르게 건설해나가는 규범들이다. 이런 규범들은 종교의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차원에서도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으며, 그 세부 내용들이 확대 생산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있는 삶의 내용들을 조금만 검토해보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드러난다. 공부, 사업, 인간관계 등이 모두 자기를 확대하는 수단들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평가하는 준거로 작동된다. 표면적으로 볼 때 종교적인 율법과 세속적인 규범은 우리의 종교와 세속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이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 자유의 축소는 삶의 파괴가 아닌가. 이게 이상한 현상이다. 자유를 보장할 것처럼 생각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게 말이다.

필자는 지금 종교적으로, 또는 세속적으로 성실하게 사는 걸 부정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불성실함으로 실패한 삶보다는 성실함으로 성공한 삶이 보기에도 좋고, 바람직하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이 궁극적인 삶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런 것들은 우리를 결코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게 분명하다. 그 이유는 업적과 성취는 또 따른 성취를 계속해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원리이다. 목회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교회를 개척한 사람은 일백 명이 목표이고, 그것을 이룬 다음에는 이백 명이라는 목표를 세운다. 그 지역세서 제일 큰 교회,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목표로 삼는 업적주의가 곧 율법주의이다. 이런 목회 메커니즘에서는 목회자의 자유가 결코 보장되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자유의 복음을 알고,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신앙생활에서도 경쟁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애를 쓴다. 바울이 토라와 할례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의 신앙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십일조와 성수주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이 그것일지 모른다. 지금 한국교회에 절대규범으로 자리하고 있는 십일조와 성수주일은 현대의 토라와 할례라는 말이다. 그런 비교를 지나치다고 생각할 분들 있을지 모르지만, 지나친 게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바울이 거짓 형제들이라고 호칭한 이들은 토라와 할례가 없는 자유의 복음을 배격했다. 그들은 마치 스토커처럼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다른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의 주장을 일소에 부쳤다.

바울 시대에 다른 복음을 전한 이들이 모두 비인격자이거나 그들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나름으로 성실하고 모범적인 기독교인들이었다. 다만 바울이 말하는 자유의 복음에 동의할 수 없어서 바울을 배격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이런 투쟁의 역사를 통해서 진리를 구성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가톨릭의 교황청과 거기에 속한, 아주 경건하고 종교적인 대다수의 사람들도 루터의 주장을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했다. 패러다임이 다를 때는 아무리 인격적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근본적인 입장이 서로 다를 때는 두 가지 옵션밖에 없다. 하나는 한쪽이 백기를 들 때까지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적기에 서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예루살렘 종교회의는 후자를 선택했다. 물론 예루살렘의 많은 이들이 여전히 바울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회의 결과에 상관없이 바울의 위치가 계속해서 흔들렸지만, 중심이 되는 이들은 바울과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길을 선택했다. 단일성 안의 다원성이라는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 내용을 바울은 6-10절에서 설명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세 기둥인 야고보, 게바, 요한은 할례자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간다는 결론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안에 놓인 속사정은 이렇게 한 두 시간에 모든 설명이 끝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예를 들자면 7,8절에서는 ‘베드로’로 호칭하더니 9절은 ‘게바’로 호칭한다. 특히 같은 단락에서 베드로와 게바로 나뉘는 경우는 이 본문이 유일하다. 예루살렘 종교회의 결과를 담은 공식 문서를 따를 때는 베드로로,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을 따를 때는 게바를 사용했을 것이다. 7,8,9절은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도대체 바울은 무슨 이유로 이런 방식으로 글을 썼을까? 그리고 본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는 구제금을 다루는 10절에서 바울은 주어를 일인칭 복수에서 일인칭 단수로 바꾸었다. 여기에도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전문적인 신약학자들에게나 필요한 문제니까 여기서는 접어두고,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선교의 역할을 분리했다는 사실만 조금 더 검토하자.

바울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교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선교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b절) 여기서 유력한 이들은 물론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다. 구체적으로는 야고보, 게바, 요한이다.(9a절) 그런데 유력한 이들을 거론하면서 바울은 이런 단서를 붙인다.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나하시나니”(6a절) 바울이 그 당시에 예루살렘의 교권에 나름으로 압력을 느껴서 이런 표현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지 그 당시 가장 권위가 크고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바울의 선교 방식과 내용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위의 내용이 바울의 소극적인 자기변증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9절) 가게 되었다는 진술은 보다 적극적인 변증이다. 아주 짧은 진술이지만 이것은 명실상부하게 기독교적 정체성을 얻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각각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이제 바울의 복음은 유대-기독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때로 치열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자기의 길을 가야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판단은 역사의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사도행전 15장이 전하는 예루살렘 종교회의 결과와 갈라디아서 2장이 전하는 결과는 큰 틀에서 비슷하지만 작은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다.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두 텍스트가 공통으로 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이방인이 멀리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거론하는 반면에 갈라디아서는 그런 언급이 없이 게바와 바울의 선교 대상이 완전히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바울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갈라디아서는 바울 일행이 그들로부터 독립적인 길을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바울의 권위가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대등하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였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의 기독교와 바울의 이방인 기독교가 제 삼자가 보기에 민망할 정도의 격한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 누가 옳고, 누가 그릇된 것인가?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복음과 더불어 토라와 할례를 인정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인가, 오직 복음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한 바울인가? 마지막 심판 때 주님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실 건가? 종말에 이르는 긴 역사의 한 지점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과연 진리의 중심에 들어 가 있는가, 아니면 주변을 맴돌고 있는가? 오늘 결론은 이것이다. 진리가 열린 것처럼 정통도 역시 열려 있다. 마지막 심판 때까지! (2008년 7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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