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칭의가 답이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11-21)


안디옥 교회의 논쟁

바울이 위의 본문에서 원시 기독교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사건을 전한다. 그 내용도 뜻밖이고, 그 표현방식도 상당히 과격하다. 바울은 게바(베드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면전에서 창피를 주었다는 뜻인데, 게바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이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 교회의 첫 주교로 첫 교황이다. 복음서에 묘사된 베드로는 급한 성격 때문에 간혹 실수도 하지만 어느 모로 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권위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그를 책망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그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베드로(게바)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가 왜, 무슨 이유로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는지는 본문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 사건에 관한 사도행전의 보도(10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 사실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한 적도 있다.(행 11장) 베드로는 이방인 교회를 대표하는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심도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업무를 전달하기 위한 방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그는 이방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유대인의 토라를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로 그 순간에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이 닥쳤다. 바울은 그들을 할례자라고 불렀다. 토라와 할례를 엄격하게 추종하는 유대-기독교인들로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 세력이었다. 그들은 베드로가 이미 안디옥 교회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이런 문제가 아주 복잡하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 이어 두 번째의 서열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다. 그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을 안디옥으로 파송한다는 것은 베드로의 행동이 예루살렘의 주류 세력에게 의심을 받고 있었다는 뜻인지 모른다. 또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베드로가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우연하게 이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만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지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의 식탁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우리는 베드로가 왜 이렇게 행동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다. 베드로는 왜 그들을 두려워했을까? 이 두려워했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방인들과 밥을 먹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는 순간에 자리를 떴다는 것은 분명히 위선적인 행동이다. 바울의 일방적인 진술만으로 베드로의 행동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훗날 천당에 가서 베드로까지 불러서 삼자대면해야만 가장 정확한 속사정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없는 말을 한 게 아니라고 한다면 베드로가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더구나 베드로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서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도 역시 외식에 유혹되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비난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절) 이 문장을 이해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다. 베드로가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않았다는 말이 베드로의 전체 신앙과 신학에 대한 평가인지 아니면 바로 직전에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는 사실에 한정되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전자에 해당된다면 베드로는 이중인격자로 낙인찍힐 만하지만, 후자라고 한다면 정상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이미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 기독교인과의 식탁을 마련해두었다면 베드로가 그걸 굳이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진술에 담긴 뉘앙스만 본다면 베드로는 평소에도 골수분자 유대인 행세를 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유대-기독교인 중에서 가장 온건한 사람에 속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는 바울과 신앙적으로 통할 수 있는 몇몇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셈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가 태도를 바꾸었으니 바울이 격분할 만하다.

안디옥 교회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제 유대-기독교와 이방 기독교 사이의 틈이 훨씬 크게 벌어졌다. 유대-기독교의 온건파들이 설 자리를 잃었으며, 또한 이방-기독교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미련을 접게 되었다. 원시 기독교의 역사가 이렇게 흘러간 이유는 기본적으로 유대-기독교가 보수화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방인 기독교가 시나브로 극단으로 치우쳤다는 사실이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유대교의 배타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대-기독교는 ‘당신들, 토라와 할례를 포기하는 거 아냐?’ 하는 유대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는 마태복음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공동체는 기원후 80년대 초라는 시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시대는 70년에 예루살렘이 붕괴된 이후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결속과 부흥이 크게 강조되던 때였다. 그런 상황은 마태공동체에게 일종의 위기였다. 유대교로부터의 압박이 강화됨으로써 마태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축출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더구나 이방인(헬라파) 기독교는 율법을 포기하고 새로운 복음 공동체로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도 율법 무용론이 나름으로 힘을 얻고 있었다. 마태공동체는 그들의 입장을 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하게 한다고 말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우리는 바울의 입장과 마태 공동체의 입장이 서로 대립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대립도 상당히 극단적이다. 한쪽은 복음과 율법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켜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하였으며, 다른 한쪽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투철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오늘 본문에서 묘사되는 바울과 베드로의 신학적 차이도 이와 비슷한데, 이런 갈등은 각각의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가 달랐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의로움의 문제

유대-기독교와 대립하고 있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본질은 칭의,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이다. 의는 기본적으로 유대교에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율법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기 위한 규범들이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모든 율법의 핵심이 바로 의로움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무슨 방법으로도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 바울도 바로 이런 확신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율법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부활의 예수를 경험한 이루로 전혀 다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2:16b)

바울은 로마서 2-4장에서도 이 칭의론을 구약성서와 인간학적인 바탕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단정한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그것을 그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모두 동일하게 죄 아래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율법 없이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고 평생 노력하는 사람도 결국은 의롭지 않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죄가 바로 인간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단순히 실정법이나 관습과 도덕법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심층적인 것이다. 우리가 훈련을 받으면 어느 정도 윤리적인 포즈를 취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죽어야만 죄에서 벗어난다. 우리와 숙명적으로 결탁되어 있는 이런 죄를 어거스틴은 휘브리스(교만)이라고,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자기애)라고 했으며, 판넨베르크는 자기집중이라고 했다. 어떤 개념이든지 여기서 핵심은 ‘자기’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다. 이런 점에서 율법도 역시 자기집중이며, 자기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율법적인 삶이, 즉 자신의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업적에 자기 삶의 근거를 세우는 삶이(업적의) 바로 죄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죽어야만 죄에서 자유로워진다.

중교개혁자들의 신학적 관심도 바로 이 ‘업적의’, 즉 ‘자기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의로워지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아니라 그 믿음에 걸맞은 업적이 필요하다는 가톨릭교회 당국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 나름대로의 논리구조를 갖고 있긴 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자기의(義)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sola fide)뿐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고 줄기차게 밀고 나갔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에 의한 의는 ‘능동적’ 의이며, 믿음에 의한 의는 ‘수동적’ 의이다. 수동적 의가 왜 능동적 의보다 상위인지, 능동적 의가 수동적 의의 자리에 올라섰을 때 벌어지는 문제가 무엇인지 루터의 말을 들어보자.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상, 1535년 판, 루터신학대학교 출판부, 2003년)의 앞부분에서 중요한 단락을 아래에 인용하겠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 기독교적 의를 ‘수동적’ 의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이것은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의이다. 세상은 이해하기 못하며, 더구나 유혹에 빠진 상태에서는 그 뜻을 알지 못한다.(20)

이것이 우리의 신학이다. 능동과 수동, 이 두 가지 의 사이에 있는 정확한 구별을 우리는 이 신학으로 가르친다. 그리하여 도덕과 신앙, 공로와 은혜, 세속 사회와 종교가 혼돈되지 않도록 하여야만 한다.(24)

그러므로 바울은 이 서신에서 우리를 가르치고 위로하여, 가장 뛰어난 기독교적 의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 머물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일 의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이 의를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터키인과 교황주의자들과 종파주의자들이다. 율법의 능동적 의와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 이 두 종류의 의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독교적 의에서 빗나간 사람은 누구나 능동적 의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면 자신의 공로를 신뢰하는 데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26)

오늘날 우리는 이 은총의 의에 관하여 아무 것도 올바로 가르치고 있지 못하며 가르칠 수도 없는 열광주의적 심령론자들과 분파주의자들에게서 이 사실을 본다. 그들은 다만 우리의 입에서, 그리고 우리의 문서들에서 말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만 말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질적인 내용에 관하여는 논의하지도 않으며 다루지도 않으며 주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이리하여 그들은 교황 아래 있을 때와 꼭 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다. 확실히 그들은 새 이름과 새 사역을 발명한다. 그러나 내용은 그대로이다. ...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하고 위대하고 어려운 일을 수행한다. 그러나 내용은 다르지 않다.(27)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경고한다. 특히 양심적인 교사가 되려는 여러분 각자가 연구와 독서와 명상과 기도로 실천하여, 유혹이 올 때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양심을 가르칠 수 있게 되고 위로할 수 있게 되고 율법에서 은혜로, 능동적인 의에서 수동적인 의로, 다시 말하면 모세에서 그리스도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역경에 처하거나 양심에 갈등을 경험할 때 우리를 율법으로 놀라게 하고 죄의식, 우리가 악한 과거,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 지옥과 영원한 사망을 우리 면전에 놓는 것이 마귀의 관행이다.

     

우리가 율법의와 칭의를 혼동하는 이유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말하는 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는 말 그대로 그렇게 인정받는다는 뜻이지 실제로 그렿게 변화된다는 뜻이 아니다. 율법의는 실제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는 성만찬의 임재설과 화체설의 차이와 같다. 루터는 성만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본 반면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변화하는 건 아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다는 말은 그렇게 명백한 게 아니다. 술, 담배와 도박을 끊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인격적으로 사는 게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허무한가? 교양윤리* 한 과목을 잘 새겨듣기만 해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신앙의 본질과 결부시키는 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태도이다. 그런 게 업적의이다. 그렇다.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것은 실제로 의로워진다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의라는 것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轉嫁, imputation))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 설교단에서 외쳐지는 도덕적 회심 설교는 오늘날 생동적인 기독교 신앙심을 갱신시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그럴듯한 방식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 전통의 참회적 멘털리티에 기초한,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설교에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도식이 집요하게 존속됨으로써 거듭해서 반복되는 관찰 방식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 자신의 죄에 물든 실존을 후회막급하게 생각하는 것에만 고착되어 버린다면 이는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자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로써 막연한 죄의식과 자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서 얻어진 칭의에 대한 믿음이 마귀 떼처럼 강화되는 일이 드물지 않을 것이다. (판넨베르크, 개신교 영성)


그건 말장난이야, 하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다른 인격체의 의가 전가될 수 있느냐, 또는 실제로는 의롭지 않으면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고 말이다. 유대-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바울의 이방-기독교와 결별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들도 기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지만 바울처럼 철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토라와 할례의 짐을 여전히 지웠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칭의론이 세상이나 다른 종교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 몰입해야 한다. 바로 그 한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을 해석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 대목에서 제기될 수 있는 하나의 질문은, 칭의론에 따르면 결국 율법 폐기론이 정당하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바울이 칭의론의 뼈대를 세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후반부에 윤리적 기준들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칭의론에서 윤리가 실종되는 게 결코 아니다. 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전혀 새롭다는 것이다. 율법은 윤리적 규범을 절대화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를 절대화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새로워진 사람은 당연히 삶을 새롭게 받아들인다. 삶과 구원이 은총으로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자기 개인만이 아니라 주변 세계에 확장하기 위해서 매진할 것이다. 앞에서 짚은 루터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의는 칭의의 하부에 속해야만 한다.

이 문제를 자녀교육을 예로 설명해보자. 세 종류의 부모가 가능하다. 첫째,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규범을 제시한다. 가정 예절부터 공부,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어떤 기준을 맞추라고 강요한다. 둘째, 완전히 자유방임에 기울어진 부모도 있다. 그들은 자식이 귀엽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다. 셋째는 부모와 자식의 존재론적 관계에 집중하는 교육이 가능하다. 이 경우의 부모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어야 할 신뢰관계에 교육의 중심을 둔다. 삶의 의미와 인간의 우주론적 위치, 더 나아가서 하나님 경험 같은 주제에 서로 집중하는 교육이다. 칭의론은 바로 세 번째의 교육방식과 비슷하다.

사람은 규범적으로 가르쳐야지 존재론적으로는 변화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여전히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서도 신자들의 삶에 일일이 기준을 제시하려고 한다. 사랑의교회 옥 목사님의 제자훈련이 대표적이다.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제자훈련은 단지 형식만 세련되게 할 뿐이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30년 이상 계속해서 변화된 삶을 강조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그의 하소연을 들어봐도 제자훈련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서지 못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규범이 아니라 믿음과 칭의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가야 할 변화된 삶의 단초가 아니겠는가.


칭의론의 기본 요소

바울은 19,20절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칭의론의 신학적 골격 네 가지를 “나”를 주어로 한 문장 형식으로 제시한다. 벳츠(H.D. Betz)의 <갈라디아서>(국제성서주석 37, 한국신학연구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셋째,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 넷째,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요소를 보충해서 설명하겠다.

1) 여기서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인데, 어떻게 그것을 버린다는 말인가? 바울의 관점에 따르면 율법은 근본적으로 구약공동체를 살리는 법이었지만,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법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인간 문명의 속성인지 모른다. 실정법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강제규정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안식일(법)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법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법은 가능한 축소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확대되는 삶, 세상, 질서가 필요하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의 열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바울의 두 번째 진술은 곧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첫 번째 진술의 구체화이다. 이 말은 곧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율법적인 업적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 예전으로는 세례이며, 삶으로는 철저한 자기 비움이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자기의 것이라도 내 세울 것은 하나도 없는 것 아닌가. 자신의 업적은 물론이고, 자기의 의도 없다. 오직 칭의만 가능할 뿐이다.

3) 바울에게 율법적인 이전의 삶은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이제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죽음으로만 끝난 게 아니라 부활로 올림을 받았듯이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자기 안에 산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그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거나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간다는 의미만은 아니라 생명의 훨씬 심층적인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 차원은 신비이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다. 바울은 이제 율법을 완성해나가는 삶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결합하는 전혀 새로운 삶으로 전향한 것이다.

4) 그런 신비적 결합은 실제적인 육체적 삶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신비적 신앙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아직 부활의 실체로 들어가기 이전인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은 육체 안에서(엔 사르키) 살아야 한다. 육체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믿음 안에서(엔 피스테이)의 삶이다. 결국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된다. 기독교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결합이다. 기독교인은 여전히 육체로 살아간다. 그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그 믿음의 대상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즉 믿음이 육체라는 현실과 신비로운 하나님의 생명 사이를 이어주는 영적인 다리이다. (2008년 8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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