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318 히브리서 10장.hwp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본문은 히브리서 10장입니다. 좀 구절이 많습니다. 이게 39절까지 있어요. 이 히브리서 장들 중에서 가장 긴 장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39절까지 있으니까요. 다른 짧은 장에 비해서, 보통 20, 16절까지 있는 것들에 비해서 두 배에 해당하네요.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가기에는 분량이 좀 많네요. 우리가 되는대로 읽은 때는 읽고 뛰어 넘을 때는 뛰어 넘으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0장까지 전체 주제는 몇 번 검토를 했기 때문에 아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 근거해서 변증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변호사가 재판정에서 어떤 것을 변론하듯이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 근거해서 왜 옳은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10장을 전체적으로 다섯 대목으로 나눴습니다. 여러분 강의안을 보십시오. 일단 소제목만 읽어도 10장을 전체를 대충 얼개 그림으로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1절에서 10절입니다. 완전하지 못한 제사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것은 구약이 이야기하는 제사죠. 동물을 잡아서 바치는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유대인들은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게 왜 완전하지 못 하냐 하는 것을 여기 1절에서 10절 사이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앞부분에서도 여러 번 나온 이야기에요. 히브리서는 여러 번 반복해서 어떤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주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이 말하는 희생 제물보다 완벽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 얘기인 거죠. 그러한 것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1절에서 10절까지는 구약의 제사 행위의 완전하지 못한 이유, 근거들을 말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11절부터 1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일회적이고 완전한 제사다.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 합니다. 자연스러운 얘기죠. 구약이 얘기하고 있는 제사 행위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리키고 있는 제사의 완전성, 그게 또 유일회적이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유일회적이라는 말을 왜 붙이는 걸 대충 이해하시겠죠. 구약 제사하고 비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행위의 절대성을 가리키는 겁니다. 구약 제사는 반복하죠. 계속해서 똑같이 해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 속죄의 사죄행위는 유일회적으로 한 번에 끝난 거예요.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유일하듯이 이 제사행위도 단 한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이었다라고 두 번째 단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은 19절에서 25절이에요. 앞에 나와 있는 두 가지를 전제하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을 굳게 지켜야 된다. 그냥 신앙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도 되지만 여기서는 희망, 희망의 신앙, 희망한다는 말이에요. 속죄 받았으니까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 이 말은 곧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희망의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켜라. 유대인들의 제사 행위 그런 걸로 정신이 혼란스러워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회적이고 온전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고 생명의 세계로 인도된다는 사실에 대한 희망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단락은 26절에서 31절입니다. 여기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왔다가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요. 초기 기독교에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일종의 배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아들었고 왔었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해서 떠난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26절에서 31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32절에서 39절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 이게 오늘 10장의 전체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섯 단락으로 나눴어요. 우리가 천천히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10절까지 교독해서 읽으시죠.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내용을 잘 보면서 읽으세요.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아멘. 1절에서 10절까지 같이 읽었습니다. 강의 요약문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종교적 전통을 매개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내용입니다. 구약 전통의 핵심은 율법과 제사는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1절이 이것을 정확하게 짚고 있어요. 율법은 그림자다. 실체가 아닌 거죠.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필요 없는 거예요. 실체가 오지 않았을 때는 그림자만이라도 조금 필요합니다. 율법은 그런 정도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아시겠죠. 제사와 연관된 문제인데요. 1절 후반절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과 제사는 온전한 게 아니라 그림자에요.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모사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낱말 뜻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질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좀 다릅니다. 그걸 조금 더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돼요. 율법도 좋은 거예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해하시죠. 그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고요. 지금도 율법 없이는 못 삽니다. 교회 생활하는 것 자체가 율법인 거예요. 주일을 지킨다든지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기 위해서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하고요. 우리가 기독교인들답게 사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율법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우리가 인정받을 수 없는 거예요. 완전한 상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 사람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조금 덜 하고 그런 차이가 있는 거죠. 더 많이 봉사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고 약간 덜 하는 사람이 못하고 이런 건 사람의 기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그림자이지 그걸로 사람을 완전히 평가하기는 힘든 겁니다. 약간 겉으로 볼 때는 봉사를 덜 하더라도 그래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한 사람이 있는데 그거는 율법으로 평가를 못하는 거예요. 율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윤리, 도덕, 법하고 비슷한 건데, 그런 윤리, 도덕, 법이 아무리 많이 발달됐다고 해도 그 사회가 그것만으로 온전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닿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 인정하는 데로 들어가는 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그러한 관점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됩니다. 물론 알고 계시는 문제인데 그래도 놓칠 때가 많이 있어요. 강의 요약문 다시 보세요. 율법은 그림자이며 또 그래서 그것에 근거한 제사는 온전하지 못하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사람의 죄를 없애지 못 한다. 이게 다 율법에 따른 제사 행위에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시편 406절을 근거로 해서 확인합니다. 인용을 한 거예요. 시편 406절 이하의 내용이 히브리서 105절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해서 각주를 달았어요. 그걸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 하시나니, 그걸 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핵심은 아니라는 뜻이죠. 이에 내가 말하기를, 시편기자의 하나님 경험입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거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뜻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건데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제사와 예물, 이것으로는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로만으로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인용한 이야기를 8절에서 다시 해석을 해요.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 않는다. 강조법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반드시 있었어야 되는 거였어요. 그림자마저 없으면 혼돈 속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림자만이라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그것은 참된 것은 아닌 것, 실체는 아닌 것이죠. 그래서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걸 다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아무리 반복해서 제사를 지내도 실제로 속죄가 가능하지 않는 거죠. 반복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제사에는 이제 매달릴 필요가 없는 거죠. 여전히 율법에 매달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일어난 참된 것을 몰랐기 때문이죠. 참된 것을 모를 때는 약간 사이비 이런 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분명하게 이야기하네요.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의 의가 아니라, 내가 의로워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여기에 구약과 다른 복음의 능력이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게 자칫 오해하게 되면 값싼 율법 무용론에 떨어질 수 있어요. 율법 해체론에 떨어지는 것, 이것은 복음은 아닌 거예요. 율법의 한계를 극복하고 율법보다 더 분명한 삶의 내용들을 담아 낼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핵심인거죠. 복음을 오해하면 무율법주의에 떨어지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에 실제로 있었어요. 이제 우리는 맘대로 살아도 된다. 이미 율법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니골라당인가? 그런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런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 안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무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이걸 다 포함하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율법을 내가 스스로 지는 이러한 긴장, 이게 복음의 능력인 겁니다. 최선의 노력은 하지만 이게 부담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써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들을 잘 감당해나가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락입니다. 11절에서 18절이에요. 이것도 교독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11절 읽겠습니다.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예수 죽음을 통해서 드려진 희생제사의 유일회적이며 완벽한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재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다. 예수 스스로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신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은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 사도신경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죠. 시편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요. 내 오른편에 앉으라는 표현들이 시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차원의 영적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가 확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 보세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제물로 드렸다는 이 말을 아마 세상 사람들은 잘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유대인의 한 남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어떻게 인류의 죄를 용서받냐고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일 거예요. 이 부분은 그들을 설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어떤 깊이를 이해할 때만 이게 자기에게 정말 진리로서 와 닿게 되는 거지 그게 안 돼 있으면 어려운 거예요. 이런 게 있습니다. 기독교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능한대로 설득시켜야 되는데 설득을 모두 시킬 수는 없어요.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눅이 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건 클래식 음악을 예로 들자면 클래식 음악에 깊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설득 시킬 수 있겠어요? 안 되는 겁니다.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바둑도 마찬 가지에요. 프로기사들이 두는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창호, 이세돌의 이 수를 아냐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알아듣겠어요? 안 되는 거예요.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비밀스러운 그러한 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관없이 무조건 내 길만 간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능사는 아니고요. 가능한대로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준비를 하되 안 된다고 해서 불안하게 생각할 건 없고 일단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한발 한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방금 제가 예로 들은 것처럼 바둑의 어떤 수의 깊이로 들어가야만 프로 바둑 기사가 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도 영적인 전문가가 돼야 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이말, 이걸 지금 제가 다시 설명하지 않겠어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아는 걸 전제하고 쓰는 겁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많은 필요한 거예요. 인간이 왜 죽냐. 이런 문제부터 시작해서 왜 죄의 결과가 죽음이냐, 우리가 죽어야 될 운명에서 어떻게 생명을 얻느냐, 죄가 용서 받아야 되는데 인간의 죄가 용서 받는 길이 뭐냐 이런 것들을 촘촘히 따라가야 되는 거거든요. 이런 것들을 제가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미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아는 것으로 전제하고 기록하기 때문에 천천히 더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그 사실, 영적 권위가 예수에게, 권세죠, 그것이 확보되었다는 사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우편이라고 하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밌어요. 이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는 한데 모든 악이 제거되기까지 그리스도는 기다리신다. 모든 악이 제거된다는 것을 여기서는 어떤 단어로 설명했을까요. 13절에 나온 걸 보면,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이러한 표현이 모든 악이 제거되고 완벽한 세계가 완성된다고 하는 것, 그걸 가리키는 겁니다. 발등상이라고 하는 것은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발걸이를 가리키는 거예요. 악이 제거되는 거죠. 보통 우리가 사탄, , 귀신, 이렇게 얘기하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어떤 세력들을 마귀, , 사탄,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는 이 세계에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잖아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완전한 생명을 얻으셨는데 아직은 과도기에요. 신학적인 용어로 중간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시대가 있고 마지막이 완성되는 것, 이건 악이, 원수가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는 때에요. 이때까지 과도기가 있습니다. 이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거죠.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레미야 3133절 이하를 인용합니다. 9절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그것은 옛 약속이 아니라 새 약속이다. 그 약속은 돌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새긴 것이다. 11절에서 18절 이야기를 제가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이 돌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십계명이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는 뜻이죠. 다시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 이게 정말 확실한 거다 그 얘기죠. 이 마음을 주관하는 이는 성령이고요. 그 약속이 구약에는 돌판에 새겨졌어요. 율법, 문자로 됐어요. 이제는 우리 마음에 새겨진 겁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내용은 뭐냐. 그걸 이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한 겁니다. 예레미야서를 인용해서 설명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의 죄와 불법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약속인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의 방법은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 데까지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많이 노력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죠.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거죠. 그 방식으로는 우리가 완전한 거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레미야서를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을 하고 바울도 로마서하고 갈라디아서 등등에서 여러 번 반복을 이야기 했듯이, 요즘 말로 하면 패러다임이 바뀐 거예요. 어떤 틀이 바뀐 거예요. 우리가 노력해서 이만큼 수준에 올라가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걸 기억도 안하는 거예요. 무얼 통해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그렇다고 하는 거죠.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거예요. 이게 실감이 나지 않으면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한 거고요. 이게 실질적으로 리얼하게 이해가 되고 경험이 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온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러한 죄와 불법을 아예 기억을 하지 않으신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또 죄와 불법을 행해도 된다? 그건 아니죠. 그걸 오해하게 되면 혼란스럽게 돼요. 구원파에 가면, 그런 사이비 이단들은 전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잘 가요. 그래서 정통 교회가 좀 놓쳤던 부분들을 잘 붙들고 가요. 가다가 너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되는 겁니다. 구원파라든지, 영지주의 이런데서 그런 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다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 드릴 필요가 없는 거죠. 제사 행위의 유일회성입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이야기했는데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속죄 제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다시 한 번 제사를 반복하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예수 십자가 죽음으로 유일회적으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걸 반복적으로 드리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거예요. 됐습니다. 세 번째 단락 19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이것도 읽어 보실까요. 교독하겠습니다. 마지막절은 같이 읽어야겠네요.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그 단락은 강의 요약을 읽는 것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설명은 더 하지 않겠어요. 보십시오. 앞에서 말한 그 이야기들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성소에 들어갈 용기를 얻는다. 그 근거는 예수의 피다. 예수의 죽음이다. 성소는 생명의 세계를 가리킨다. 22절에서 기독교인의 영적 실존이 잘 설명돼 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예수의 피 뿌림이죠.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악한 양심이 뭐에요. 죽음에 대한 공포에요. 거기서 벗어나고, 정말 놀라운 생명 경험이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성령에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됐다는 거예요. 세상이 요구하는 틀이 있잖아요.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성령에 의존하는 것. 그러니까 성경의 언어가 종교적이기 때문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근본을 잘 살펴서 이해하셔야 됩니다.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런 뜻이에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멋진 권면이에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입니다. 25절에는 실제 신앙생활에 대한 권면이 나와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하지 말라. 같은 기독교인들인데 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여러 종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어요. 우리가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굉장히 애매한 표현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종류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보다 어수선했어요. 지금은 오랫동안 역사 과정을 통해서 검증되고 잘못된 것 떨어져 나가고, 사이비 이단 떨어져 나가고 그렇게 논증을 통해서 기독교가 체계를 잡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교파가 다르다고 해도 기본적인 것은 똑같습니다. 사도신경 이런 거는 똑같은 거예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달라봐야 거기서 거기인데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달랐습니다. 그건 제가 언젠가 초기기독교의 형성이라는 책을 설명한 적이 있을 텐데 거기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 이 말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얘기죠. 모여 봐야 뭐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거 이게 매너리즘입니다. 똑같이 공부하고 예배드리고 성찬하고 여기에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렇게 할 건 없다.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 기독교인들이 있었겠죠. 그래서 모이는 걸 등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 가까이 예수님께서 오신다. 재림의 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재림하면 가장 먼저 뭐가 생각나세요. 그림으로도 생각날 거고 의미로도 생각날 텐데 휴거 이런 걸 생각하겠죠. 그거는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한 그림들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묘사된 겁니다. 너무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 근본 의미를 아닌 게 중요하죠. 예수의 재림하면 생명의 완성이에요. 우리는 지금 생명이 완성되지 않은 거예요. 그 생명이 완성되는 때가 오기를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그게 완성된다고 봤죠. 다음 네 번째 단락, 26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이것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초기 기독교가 굉장히 여러 가지로 다양했다. 그리고 이단들도 대단히 많았다고 말씀드렸어요. 26절부터는 그런 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으로 나쁜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왔다가 완전히 배교, 배신이죠.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 메시지가 여기 있어요. 2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죠.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여기서 진리는 뭐죠. 그리스도 사건, 예수를 앎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배웠는데도 짐짓 죄를, 의도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부인하는 거죠. 의도적으로 부정하면 다시 속죄 받을 수 없다 그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런 논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단 한 번이라고 했잖아요. 근데 그거 자체를 부정하게 되니까, 한 번 끝났으니까 다시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배신, 배교, 기독교를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완전히 막을 수는 없잖아요. 이건 아마 히브리서 교회 공동체에 특별한 사건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몰라요. 아마 공동체가 허물어질 정도로 배교행위가 일반화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례 받고 다시 또 죄를 졌을 때에 용서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초기 기독교에 상당히 예민한 문제였어요. 여러분들이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기독교를 로마에 공인한 황제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한 황제가 따로 있고 공인한 황제가 따로 있어요. 공인한 것이 중요한 거죠. 밀라노 칙령이죠. 그 사람의 이름이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가 전쟁을 앞두고 십자가 환상을 봤나 봐요. 전쟁에서 이겼어요. 그래서 기독교를 공인한 일을 하고 그 때부터 기독교가 로마의 중심 종교가 됐습니다.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한 60년 이상 정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테오도시우스라는 황제가 정식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했어요. 그러니까 로마의 식민 통치가 있는 나라에서는 태어나자마자 모두가 다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게 기독교 쪽에서 볼 때 잘 된 거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교회 역사학자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제는 로마 제국의 어용적인 태도를 기독교가 좀 보이게 됐어요. 그러니까 황제로부터 수도원 생기면 땅 많이 받고 사제들은 군대도 안가지 등등해서 많이 챙겨주니까 황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교회가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쨌든 옆으로 얘기 나가지 말고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렇게 기독교 신앙이, 진짜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있는 걸로 자기가 공인을 하고 업적도 많이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는 죽기직전에 받았어요. 그 이유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고 죄지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게 세월이 지나면서 신학적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래서 더 이상 누구도 세례 받고 죄 지은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이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가 처음 생성될 때 아주 생생하고 아직 정리가 되지 않고 그리고 기독교가 생존의 위기에 빠져있는 그런 걸 전제하고 읽으셔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가 사실은 유대교와 로마 정치 사이에서 버텨내서 이렇게 세계 종교가 됐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런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공동체의 위기를 경험한 히브리서 기자가 배교한 사람들에 대한 아주 준엄한 경고로써 속죄하면 더 이상 제사가 없다. 그들은 끝장이다.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쭉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절망적이라는 걸 얘기해요. 31절에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그러니까 배교한 사람들이 당해야 될 어떤 두려운 미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형벌, 사죄 없음, 용서 받지 못함, 그런 걸로 끝나지 않아요. 그거는 어쩔 수 없이 짚어야 될 부분이고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라 다음이에요. 31절부터 39절까지, 이것도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쭉 하고, 상처 난 이야기도 하다가, 또 과격한 표현도 하다가, 이제 신앙의 근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걸로 10장이 정리가 됩니다. 32절부터 34절까지 한 번 눈으로 보세요. 그 구절이 무얼 가리키는지. 32절부터 34, 초기 기독교인들이 당했던 고난, 아주 비참했다고 하는 걸 알 수 있겠죠.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내긴 했어요. 비방과 환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방 당하고, 환란 당하고 그리고 구경거리가 되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릴 수밖에 없어요. 이 사회에 참여하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소유를 빼앗기기도 하고 등등. 그러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처참했던 고난의 과정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그렇게 표현해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버텨 냈기 때문에 기독교가 역사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거죠. 그게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고난을 버텨냈을지 참 신기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부끄러운 건 아니잖아요. 세계 종교 얘기도 하고 미국이나 유럽 이런데서 종교가, 뭐 이슬람 같은 종교는 약간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데, 기독교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거 자체로 어려움을 당할 일이 없지만 초기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가 신흥 종교에요. 그리고 기독교가 믿고 있는 대상이 십자가에 죽은 자에요. 그리고 나이도 어려, 삼십대 초반이에요.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이러한 불이익을 감당하면서까지 그걸 견뎌 냈을지요. 그 안에 뭔가 있는 거예요. 그들의 신앙 경험이 말이죠.

 

, 그런 것들을 바탕에 놓고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그 경험의 내용을 한 가지로 요약을 한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인거예요. 그리스도라는 것은 구원자라는 뜻이에요.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을 가리킵니다.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가 생명이다. 이런 경험이 그들에게 확실했던 거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 시대를 버틸 수 없습니다. 잠깐 추종하다가 시련이 오면 다 떠나지 이렇게 계속 붙어있을 수가 없었어요. , 이러한 어려움의 시절을 조금 지나왔어요. 그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35절에 너희들 그렇게 고난의 행군을 다 거쳤으니 이제 담대함을 버리지 마라. 받을 상이 크다, 큰 상을 얻게 된다. 여기서 상을 얻는다는 것은 당연히 생명을 얻는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희락과 평강,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그게 상인 거예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고요. 또 하나 필요한 게 있다고 하는데 36절에 보면 인내에요. 두 가지를 얘기했어요. 담대한 거하고 인내. 담대함만 갖고는 조금 안 되죠. 용기만 갖고는 힘들어요. 이게 한 번 내가 용기를 내갖고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서 해결되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계속 오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걸 버텨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그 두 가지요. 담대함과 인내를 히브리서 기자가 독자에게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구약을 인용하네요. 하박국이에요. 히브리서 10장은 구약을 세 군데 인용했습니다. 시편, 예레미야, 그 다음에 하박국이에요.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인용을 했습니다. 인용을 할 때 어떤 때는 히브리 성경을 인용도 하고 칠십인역도 하고. 이 칠십인역을 많이 했죠.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하박국의 유명한 구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이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39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거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정말 소중한 말씀이네요. 우리는 뒤로 물러가서 멸망당할 자가 아니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도망가는 거죠, 그래서 멸망당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다고 했습니다. 영혼 구원, 보통 기독교에서 영혼 구원 얘기 많이 합니다. 이것도 오해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삶은 아무 쓸데없고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혼, 영은 생명의 총체성을 가리키는 거예요. 정말 생명의 근본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거는 영, 육이 둘로 갈라졌기 때문에 육은 썩어 문드러져도 되고 영만 구원 받으면 된다 이건 영지주의자들의 입장이고 기독교에서는 구약, 신약 통틀어서 이원론적으로 인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보면 우리 부활 때도 영혼만 부활된다고 하지 않고 몸이 부활된다고 하고 있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몸이라는 것도 단백질로 구성된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고요. 여전히 생명의 본체, 실질은 하나님 안에 비밀로 감춰져 있는 것인데 그것이 혼, , 그런 쪽으로만이 아니라 아주 총체로써의 인간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몸으로 다시 부활하고, 여기서는 영혼의 구원함이라고 하는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다, 우리가 그렇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놀라운 히브리서 기자가 전해준 말씀 중에 한 장, 10장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한 주간의 가운데 요일, 수요일. 봄비가 하루 종일 이른 새벽부터 내린 정말 좋은 날, 이 지구의 비라는 현상에 우리가 감동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생명 현상에 찬양을 부르기도 하는 이러한 때, 이 수요일 저녁 더욱 놀랍게 이 말씀을 같이 공부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이 히브리서 기자의 우리를 향한 권면이 우리의 신앙의 초석이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담대함과 인내를 허락하시어 주님 오실 때까지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잘 간수하고 확장 시킬 수 있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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