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01 히브리서 12장.hwp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 함께 보고 있는 히브리서, 거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12장입니다. 전체가 13장까지 있으니까 다음 주면 끝나겠어요. 오늘 히브리서 12장입니다. 13장까지 마치고 제가 좀 생각을 했는데 신학책을 읽는 것 보다는 성경을 그대로 좀 공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성경 한 번하고 신학책 한 번하는 거였는데요. 신학책 여러 번 했으니까 성경을 통해서 신앙 훈련하는 게 낫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집사람 압력을 받아서 제가 꼭 그렇게 한 거는 아니고 샘터교회 초기 창단 멤버의 의견을 받아서 조금 참고를 했습니다. 이것 히브리서 다 끝나면 구약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평소에 조금 더 깊이 읽고 싶었던 욥기를 공부할까 생각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121절부터 29절까지 있는 것, 같이 읽으면서 공부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강의안 보면 네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가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11장하고 이어집니다. 12장은 11장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그 유명한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역의 여러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원역사에 나와 있던 사람들 쭉 열거하면서, 심지어 사사들하고 예언자들에 이르기까지 쭉 열거하면서 믿음의 본질이 뭔가 설명을 했습니다. 지난번에 공부한 거 기억이 나시죠?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은 못 받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모르는 그런 상태에 있었는데 기독교인을 통해서 유대인들도 언약, 혹은 약속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언자들과 구약에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전통이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완성이 되었다고 1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갖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 믿음의 삶, 믿음의 길, 이런 것들을 12장에서 지금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걸 네 항목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항목은 1절부터 11절까지예요. 징계와 연단입니다. 징계인데 그걸 통해서 연단이 되고 또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의 어떤 열매들이 맺혀진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걸 1절부터 11절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12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그 이야기를 이제 에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에서와 쌍둥이 형제 야곱의 장자의 명분, 직분이 어떻게 가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고요. 그 다음 세 번째 항목은 18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다시 한 번 히브리서 기자의 특징이 나타나요. 구약에 있는 이야기를 잘 해주죠. 거기에 믿음도 있고 제사도 있고 속죄도 있고 다 있어요. 그러나 그것으로는 완전하지 않은 것들을 짚어요. 여기서도 시내산을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분명히 약속을 받았다. 모세의 십계명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살아가야할 이런저런 것들을 받았는데 그것은 불완전한 거죠.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 여기서 약속의 말씀이 정말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항목은 25절부터 29절까지예요.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시온산에서 주는 말씀이야말로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말씀이다. 세계를 완성하는 말씀이다. 시내산에서도 사람들이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이 시온산의 말씀에서는 더 근원적인 두려움, 떨림. 우리의 삶이 다 새로워져야 되는 거죠.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것을 붙드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우리가 좀 살펴봅시다. 1절부터 11절까지 같이 교독으로 하겠는데요. 홀수니까 마지막 절은 함께 읽으면 되겠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 번 읽는 것으로는 확 들어오지 않죠. 이 히브리서에는 그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이게 구약의 이런저런 어떤 상징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에요. 그래도 천천히 읽어보면 대체적으로 모를 거는 없습니다. 첫 번째 단락 1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근거한 믿음의 전통을 바르게 받았어요. 그리고 믿음이 완성되는 겁니다. 구약에 나와 있는 여러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들마저 알지 못했던 언약을 우리는 알기에 그 믿음의 길을 잘 가야하는 거죠. 그런데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고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한 번 뜨거워져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이라고 하는 게 조수미가 몇 일 날에 콘서트를 여니까 티켓을 사가지고 가지고 있는 것, 이런 상태 아니잖아요. 그거는 과정입니다. 바울도 그런 것들을 여러 번 얘기했어요. 젖을 먹는 상태에 머물지 말고 장성하라,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하고요. 꾸준하게 가야되는 겁니다. 다른 인생살이도 비슷하잖아요. 노래를 배우는 사람도 초보자였다가 점점 좋아지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에서도 어린아이부터 성장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건 일종의 구도라고 할 수 있고 근본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단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번갯불에 맞아 갖고 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서, 하나하나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요. 거기서 당연히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불행한 일도 있고, 여러 가지 차원에서요. 그걸 감수해야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약간 착각하는 게 있어요. 자기에게 좀 어려운 일만 생기면 하나님한테 잘못한 게 있나 이런 쪽으로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죄책감 비슷하게 빠지게 됩니다. 자기의 삶 하나하나를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그걸 죄의식 같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편지를 쓰고 있는 공동체에서도 신자들이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이 있고 이런저런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 사람은 어떻게 받아 들이냐면, 징계로 보았는데, 말은 징계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내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벌 받는 건가 이런 차원에서의 징계는 아닙니다. 원어로 징계라는 뜻은 교육하다는 뜻이 더 강한 거예요. 가르치다, 교육하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의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는 어떤 과정으로 받아드린 겁니다. 그래서 여기 재밌는 표현이 있잖아요. 7절 이후에 쭉 나오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혼내거나 할 때 정말 친아들이니까 그렇게 하지 징계를 받지 않는 아들이 있다면 이거는 좋은 게 아니라 사생자, 친아들이 아닌 거라고 8절에 나와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는데 그런 게 없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그런 어려운 일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다. 그 정도까지 가고 있는 거죠.

 

이게 참 중요한 건데요. 우리는 늘 편하게 살려고만 하는데 이거는 나쁜 마음은 아니에요. 누구나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가기도 하는데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과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나를 더 올바른 뜻에 가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 혹은 가르침이 아니냐. 이런 쪽으로 가야죠. 그런데 그게 좀 위험성도 있긴 한데 그걸 잘 파악해야 되요. 내 삶은 좋다, 불행한 일이 있어도 만족스럽다.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고요. 정말 힘들죠. 그런 거를 책임질 걸 책임지고 자기가 마땅히 감당해야 될 것은 감당하면서 궁극적으로 이것이 내 신앙을 성장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단계까지 가는 게 참 필요합니다. 아주 성실하게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영적인 시각을 얘기하는 거죠. 거기 11절에 보면 그렇게 얘기합니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실재로 그렇잖아요.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니까 어려움들이 사람들을 두 가지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어요. 내 인생이 왜 이래라든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이것이 계속 악순환이 되가지고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분노가 많게 되거든요. 공격적으로 변하고 그렇게 되면 징계라는 것이 나쁘게 영향을 미치는데 오늘 이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이런 쪽의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역경과 징계가 풍요롭게 끌고 가는 거죠. 그거를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신앙을 구도의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데 그걸 핵심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는 겁니다. 그게 토대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인격적으로 된다든지, 마인드 콘트롤을 한다거나, 요즘 힐링 얘기하는데 심리적인 치료, 이런 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은 세상의 방법이에요.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참고사항이에요. 그거는 건강을 위해서 산책을 한다든지 운동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거는 그냥 일반적인 그런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고유한 삶의 태도로 그러한 길을 가는 거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주목하는 것이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이 뭔지를 아는 것이고 그와의 일치를 경험하는 것이 핵심인 거죠. 그런데 이 번역, 2절을 보세요. 우리가 예수를 바라봐야 되는데, 2절 전반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게 번역이 좀 서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믿음의 주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주님 할 때 주란 말이에요. 믿음의 주요하니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주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보통 퀴리오스라고 얘기하는데 이거는 그게 아니라 아르케로 나가는 단어가 있어요.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토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믿음의 초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토대, 믿음의 출발점이요, 그리고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것은 믿음을 완성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이 뭔지를 우리들에게 정말 알게 해준 기초이고 믿음을 완성한 분이다. 그런 뜻입니다. 공동번역이 그걸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을 했어요.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보시면 제가 그걸 그대로 인용을 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 바라보자. 이게 더 잘 들어오죠. 우리 말 번역은 약간 잘못된 거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는 것, 여기서부터 믿음의 길이 열리는 거죠. 제가 신학공부, 꼭 신학이라기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아야 되고 중요하다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일단 알아야 되잖아요. 그게 그냥 세례 받을 때 몇 가지 문답하는 거, 교회 생활하면서 익숙하게 하는 거, 이건 아니잖아요. 교회 생활은 생활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은 다른 거예요. 사실은 교회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몰라도 자기 열심을 가지고 할 수 있고 이런저런 동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신학 공부나 이런 쪽으로 준비가 되어야 되는 거죠. 많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단락, 12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이것도 교독하십시다.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아멘, 여기 12절부터 기독교인다운 삶의 태도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너무 약한데 머물지 말고 반듯하게 신앙생활 좀 해라 그 얘기에요. 12절에 보면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힘을 내고 다리를 절듯이 그렇게 어그러뜨리지 않고 고침을 받고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가야되지 않냐하는 겁니다. 그런 충고를 하면서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얘기를 하네요. 14절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사람들과 더불어서 화평함과, 이걸 이루는 거죠, 그리고 거룩함을 따르라. 이거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주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예요. 하나님과 연결 되는 거죠. 여기서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화평, 평화,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누리는 거죠. 이것도 그렇게 간단한 거는 아닙니다. 단순하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거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잖아요. 제가 자주자주 반복하는 이야기입니다마는 기독교 신앙을 일반 상식적인 차원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걸 넘어서는 거예요. 상식은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거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물론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런저런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건 상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문장을 통해서 어떤 다른 실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라는 말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라기보다, 그거는 상식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 해야 마땅한 것이고요. 이걸 좀 생각 해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날 목사의 설교나 성경공부, 이런 것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셔야 되는 거예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학생들이 대학교가서 교수나 이런 사람들에게서 많이 배우지 않습니다. 몇 년 동안 배우는 양은 굉장히 적어요. 배우는 게 뭐냐면 어떻게 학습하는가,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는가 방법론을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학문의 가장 중요한 관문을 박사학위로 얘기하잖아요.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굉장히 그런 쪽에서 우수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최소한도 이 부분에서 어떤 근거를 갖고 연구할 준비가 되었다는 그러한 자격증정도에요. 그러니까 박사학위를 받아도 꾸준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이건 아무런 업적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론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용섭 목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다 옳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깊이 있는 걸 제가 다 풀어 낼 수도 없고요. 다만 정용섭 목사가 과히 다른 길로 나가지 않고 그래도 비교적 바른 방향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해 주시겠죠? 어쨌든 그런 것을 통해서 성경을 이렇게 접근하는 구나. 그걸 통해 또 여러분들이 접근하는 방법을 익숙하게 하면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화평을 누려라, 평화를 누려라 할 때 이런 것들을 사이좋게 지내라는 구나 이렇게만 생각하면, 나쁜 건 아니지만 깊이로 들어간 건 아닙니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려면 먼저 화평이 뭔지를 알아야 되잖아요. 샬롬, 에이레네라고 하는 헬라어, 그리고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화평이 뭐냐 이런 걸 알아야 이러한 문장들이 점점 넓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정말 이상한 사람하고 무조건 화평을 이루는 건 잘못된 거죠. 싸우지 않는 게 무조건 화평은 아닌 겁니다. 최소한의 문장으로 요약을 한다면, 이웃들과 생명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 이게 화평을 누리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악을 행하는 것, 이건 화평이 아닌 거죠. 생명이 아닌 거니까. 그래서 이런 문장들이 간단한 게 아닙니다. 또 다른 단어는 거룩함을 따르라. 여러분들이 다 아시겠습니다만 그래도 낱말 한마디만 보충하겠습니다. 보통 거룩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을 많이 생각합니다. 저 목사는 목소리부터 거룩해. 신학교 다닐 때 그런 얘기 많이 했습니다. 부흥 강사들이 오면 홀리 보이스라고 해서 목소리를 탁하게 해서 은혜 끼치는 거 있지 않습니까. 홀리 보이스라고 거룩한 목소리, 태도도 근엄한 이런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구별됐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말을 세련되게 잘 한다거나 도덕적인 우월감이 있다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그게 구별된 거죠. 하기오스라는 단어를 쓰거든요. 저 사람이 몇 평 아파트에 사냐, 이걸로 구별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적인 지휘, 이런 게 아니라 기독교에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게 바로 구별된 것, 거룩한 것이죠.

 

여기 에서가 인용이 됐어요. 에서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자기 장자 명분을 팔았다는 이야기요.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장자라는 명분을 소홀하게 생각한 거죠. 그거 동생한테 팔았다고 해서 팔리냐, 배고프니까 먼저 해결하고 그냥 잘하면 되겠지. 너무 그것에 대해 의식이 없었죠. 그래서 결국 그 친구는 장자의 명분을 잃었다. 나중에 돌이켜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안 되더라. 기회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그런 기회가 오기 힘든 거죠. 일반적인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그게 우리가 실수 한 번 하면 다시 용서받지 못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비유와 같을 거예요. 작은 거 충성하는 사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작은 하나하나, 달란트 자체의 액수는 큽니다만, 그런 기회에 성실하고 그거를 진지하게 자기 삶의 무게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대충 되겠지 이렇게 되면 나중에 정말 값진 것에 대한 시각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상에서 그런 하나님의 관계에 정직하고 진지하지 못하면 그게 결국 중요한 것들을 다 놓치게 됩니다. 이제 에서가 그런 사람의 전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음 세 번째 단락, 18절에서 24절까지 마지막절은 같이 읽어야 되겠네요. 교독하겠습니다.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멘, 예 여기도 아주 복잡합니다. 핵심적으로 이 단락에서는 두 개의 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있었던 산이고요. 하나는 역사적인 게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으로 그것과 비교돼서 나오는 산입니다. 앞에 산은 시내산이고 뒤에 산은 시온산이에요. 시내산에서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 경험이었어요. 거기 시내산에서 임했던 하나님 임재의 특징이 일곱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 , 침침함, 흑암, 폭풍, 나팔소리, 말소리, 이런 것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거룩한 두려움으로 경험된 거죠. 루돌프 오토가 쓴 책의 주제도 이거하고 많이 연결돼서 설명되고 있어요. 누미노제의 경험이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시내산만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하늘의 별을 보면서 아득한 역사와 미래의 자기 자손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막막함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표현으로는 현묘, 한자로 하면요. 현묘, 어두운 묘함, 그러한 경험들을 살면서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조금 더 저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런 것들을 더 느껴요. 옛날에도 그랬습니다만, 지금 세상에서 나에게 보이는 것들이 다 형체가 변하잖아요. 고정돼 있는 게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한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저에게 조금 더 절실하게 생각이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과일 모양이었다가 꽃 모양이었다가 배가 되고 계속 변하잖아요. 무심하게 우리가 보긴 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와 같은 거죠. 여기 안경집이 있어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는데 플라스틱의 재료는 석유에서 왔잖아요. 석유에서 모양이 바뀐 거예요. 석유는 아주 옛날에 수백만 년 전에 나무가 땅속에 묻혔다가 변화된 거 아닙니까. 나무였다가 석유 덩어리 원액이었다가 그게 제조돼갖고 이렇게 플라스틱 통이 되고요. 이렇듯 이 세계가, 우리는 너무 천천히 변하니까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걸 짧게 축소시켜서 보게 되면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런 세계에요. 이게 뭔가,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특별히 놀랄 것은 없는데 그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고 큰 변화 속에서 나는 과연 뭔가, 나도 점 하나로 있다가 변하는 큰 흐름 속에 하나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생각하면 현묘, 이 시간, 역사, 그 모든 것을 창조한 하나님을 느끼게 되죠. 말이 좀 옆으로 갔습니다만 시내산에서 고대 모세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그렇게 일곱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것들을 언어로 표현한 겁니다.

 

그것에 반해서 기독교인들은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22절에 보시면 나와요. 구약에서는 시내산이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임재이긴 했으나,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게 아니고요. 22절에 보면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까지 기독교인들이 왔다, 정말 거기에 딱 들어왔다고 얘기합니다. 이것도 우리말 성경이 좀 까다로워서 공동번역으로 제가 인용했습니다. 거기 한 번 보십시오. 강의 요약문,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이며 하나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굉장히 종교적 상징이죠. 그러나 막연한 게 아니라 리얼리티가 있는 거예요.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신학이고 영성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연한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있고, 이런 것들이 정말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시나요, 리얼하게 느껴지시나요. 하늘의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계시고 아벨의 피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 피가 있습니다. 참 놀라운 표현들입니다. 이 의미를 잘 모르면 구약의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 거구나 정도로 들어올 거고 더 깊숙이 들어가면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역동성을 경험할 수 있어요. 어쩌면 이 22절에서 24절만 갖고도 책 한 권을 충분히 쓸 만한 주제가 나올 겁니다. 하나하나가 다 무게가 있는 거거든요.

 

예를 들자면, 천사 문제만하더라도, 천사라고 하고 잔치라고 하고요. 이런 것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계속된 문헌, 전승들, 그들의 어떤 생각들과 연관되어 있는지, 그리고 초기 기독교가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십자가 재림, 이런 것과 연관해서 생각을 했는지 그런 것도 우리가 촘촘히 따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거죠. 이러한 공부들을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많이 해야 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게 아니라 기초적인 것이 안 된 상태에서 졸업을 많이 해요. 성서를 해석할 만한 준비들을 갖추지 못하고 나와서 조금 아쉽습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목회 현장에서 본인들이 열심을 내서 극복을 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고요. 그래도 잘 하는 젊은 친구들을 잘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우리가 약속한데서 5분정도 남았네요. 마지막 단락을 보겠습니다. 25절에서 29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아멘, 여기 진동한다는 표현들이 여러 번 나오죠. 진동, 흔들린다. 기본 토대가 흔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고대 이스라엘의 사도 중에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도의 제자일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익명의 저자가 쓴 건데, 이 사람들이야 현대 물리학을 전혀 몰랐겠죠. 그래도 현대 물리학이 풀어주는 것들을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의 영적 통찰력이 있습니다. 진동한다, 세계가 흔들린다는 게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 지구가 계속 땅이 움직인다는 것 아시죠. 판 운동이라고 하는데 지구가 공처럼 생겼잖아요. 이 껍질이 계속 움직여요.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하고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아니라 지구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전문적인 용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뜨거운 불덩어리들이 쇳물처럼 녹아 있어서 계속 움직이다가 약한 지층이 있으면 뚫고 나오는데 그게 화산입니다. 이걸 조금 더 나가게 되면 지금 우리가 시간과 공간으로 세계를 경험하잖아요. 산이 있고 나무가 있는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질 수도 있어요. 없어지는 게 아니라 변화되는 거죠. 신앙적으로 얘기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죠. 그 세계는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미래입니다. 완전한 그 변화를 가리켜서 진동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자꾸만 미래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우리는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등의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으로 결정할 수 없는 그러한 미래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인 거죠.

 

제 이야기가 좀 비약이 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비약이라도 여러분들이 알아서 들이시길 바라요. 그럼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하고 전혀 상관없다면 거기가 뭐가 좋다는 거냐, 가봐야 별 볼일 없겠네, 사실은 가는 게 아니라 맞이하는 거지만,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잖아요. 그 생각은 신앙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 고 있는 좋은 것을 축소시켜야 돼요. 하나님의 자유에 그 나라를 맡겨야지 내 자유로 하나님을 속박하려고 하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수 없는, 당연히 못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이루시는 자유에 우리가 온전히 신뢰를 해야죠. 그게 가능합니다. 그러면 자유, 평화, 아까 본문에서 얘기한 거룩함,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거기에 삶을 맡기게 되는 거죠.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키워드,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거기에 일치가 돼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모든 것들이 다 저주받은 상태까지 내려가는 거잖아요. 부활은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라는 분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거죠. 거기에 내 삶이 실질적으로 일치가 된다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 걱정을 안 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자유로우심, 하나님의 자유로운 통치에 나를 온전히 의존시키는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늘 여기 마지막 구절에 진동한다는 말만 제가 간단히 설명한 거예요. 그 단락을 강의 요약문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내산에서의 말씀과 시온산에서의 말씀을 비교해서 시온산에서의 말씀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설명한다. 시내산은 땅이고 시온산은 하늘이다. 하늘에서의 말씀은 모든 세상을 진동시킨다. 그러나 진동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영원히 지킨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우리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의 나라이다. 모든 것은 흔들리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나라,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그러한 신앙의 세계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영속적으로 하나님이 지키신다. 27일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시기 위하여 다른 것들을 흔드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히브리서 기자가 우주론적인 거대한 생각을 갖고 기록하고 있네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고난 주간의 가운데 수요일 저녁, 우리 믿음의 식구들, 소수이지만 함께 모여서 이천 년 전 놀라운 신앙의 세계를 문자로 전해준 히브리서 말씀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비밀이 담겨 있어서 읽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꿀송이 보다 더 달다는 그러한 표현처럼 이 말씀이 우리를 근본에서 살리심을 믿습니다. 이제 고난 주간 앞으로 며칠, 잘 주님 안에서 지내고 부활절 아침 기쁨으로 다시 만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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