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15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부터 욥기를 공부하겠습니다. 구약에 나와 있는 거예요. 욥의 이야기, 욥의 기록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욥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니까 여러분들 잘 아실 거예요. 당연히 읽어 보셨죠? 그런데 이게 앞부분과 뒷부분만 하나의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중간에는 신학적인 논란이 나와 있어서 그런 것까지 꼼꼼히 다 읽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읽더라도 그냥 지나가는 거지 일일이 다 확인하고 좀 더 충분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요. 굉장히 까다로운 건데 우리가 이것을 앞으로 공부하겠습니다. 욥기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족장들의 믿음, 특별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쳐야한다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취했던 믿음이 여기 비슷하게 있어요. 그리고 시편의 비통에 찬 탄원, 감사 찬양 등이 두루두루 있는데 그런 것들도 이 욥기에 있고요. 전도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허무한 삶, 욥이 자기 삶을 저주하는 부분도 많이 나와요. ‘내가 왜 이렇게 태어나가지고 볼 것, 못 볼 것 겪고 이 따위로 내 인생이 이렇게 됐나’ 하는 자조보다 더 심하게 절망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전도서의 허무한 그런 것들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성경 전체의 어떤 사상들이 이 욥기서에 총 망라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욥기서만 잘 공부하면 구약성경의 근본을 따라가는 거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42장까지 있어요. 좀 깁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공부해야 되나 좀 생각해봤습니다. 그냥 대충 줄거리를 껑충껑충 뛰면서 길게 끌지 말고 빨리 끝내볼까 생각도 했는데, 그래도 기왕 우리가 시작했으니까 꼼꼼하게 다 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42장을 일주일에 한 장씩 볼까합니다. 여기에는 인내심이 좀 필요해요. 앞하고 마지막은 흘러가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재밌어요. 그러나 중간은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돼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데, 저야 지루한 걸 잘 참으니까 아무 걱정 없습니다. 시편을 3년 이상, 거의 4년 가까이 계속했잖습니까. 진양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몇 년에 걸쳐서 공부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이 욥기는 간단하게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일단 욥기 1장을 함께 읽겠습니다.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이 욥기는 신구약을 전체 다 통틀어서 가장 문학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닌 거예요. 아브라함과 같은 이야기는 아닌 겁니다. 이거는 문학작품이라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거를 거룩한 문학, 성문서라고 분류를 합니다. 구약성경을 분류할 때, 모세오경이 있고 예언서가 있고 성문서가 있어요. 우리가 베스터만의 성서입문, 신구약 성서 개론 공부할 때 그런 분류를 짚은 적이 있습니다. 이 욥기는 문학적인 면이 아주 강해요. 이걸 읽어 보시면 괴테의 파우스트하고 시작이 비슷합니다. 거기서도 파우스트에게 가서 마귀가 흥정을 하는 거예요. ‘너에게 젊음을 주는 대신 너의 영혼을 팔아라.’ 이런 식으로 비슷한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여러 나라에 많아요. 우리 성경에만 있는 게 아니라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이 똑같은 건 아니지만 제법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여러 가지 주변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어떤 때에 욥기를 기록한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독특한 생각이 아니라 주변의 근동, 여러 나라의 사상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성경이 원래 그래요. 성경 기자들이 고립 돼서,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서, 하나님과의 직통 계시를 통해서, 어떤 것을 쓴 게 아니라 굉장히 개방적이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문명권과 소통을 했어요. 이집트, 바벨로니아, 등등 그 당시 고대 여러 나라들의 생각들을 서로 공유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그렇다고 동화되지는 않고 고유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이 점점 커지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에 대한 명칭 있잖아요. 엘이라고 합니다. 그게 성경에도 영향을 많이 받은 거예요. 엘이라고 하는 것이 중동 지방의 신의 명칭이에요. 구약 말고 다른 나라 중동 지방의 다른 문헌에도 엘이라고 하는 신명이 나옵니다. 그렇게 서로 주고받는 그런 영향이 있어요. 그런 게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전문적으로 신약, 구약,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밝혀 주는 건데 일반적인 신자들, 그리고 목사라고 하더라도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기도 하고 신앙생활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하죠.


이 욥기가 그렇게 영향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교적인 냄새도 조금 납니다. 여기 보면, 하늘나라에서 어떤 회의를 여는 모습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있고 사탄이 등장해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너 어디 갔다 왔냐.’ 하니까 사탄이 ‘세상을 두루두루 보고 왔습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은 톨스토이 동화 같은데도 나올 겁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뭐냐.’ 하니까 ‘아기 젖을 먹는 엄마다.‘ 이런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욥기가 시작되는 장면이 그와 비슷한 거예요. 그러한 이야기들이 구약 성경 다른데도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서가 아주 강하죠. 그래서 우리가 욥기서를 읽을 때 잘 생각하셔야 되는 거예요. 여기 있는 것들을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이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는 게 아니라 문학적인 수사를 통해서 하나님 신앙이 뭐냐를 논쟁하고 변증해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문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탄이 나타나서 어떻게 했다는 것에 관심을 갖지 마시고 말 하려고 하는 핵심이 뭔가를 찾아야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읽기에 좀 어려운 게 이교적인 부분에 영향을 받기도 했고요. (그런 것들이 앞으로 많이 나옵니다) 또 하나는, (이게 사실 더 어려운 건데) 논쟁을 하는데 다 그럴듯한 이야기예요. 나중에 여러분들이 읽다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욥의 친구들과 논쟁을 하며 싸우는데 욥의 친구들의 말들이 상당히 그럴듯합니다. 더 그럴듯합니다. 욥기 8장 7절 같은 구절도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거든요.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거 말고도 많아요. 그러니까 이 친구들이 하는 말들은 엉뚱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의 전통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에 대한 전통 위에 두 발을 딱 딛고서 정확하게 어떤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욥을 공격하는 친구들의 입장이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 자체로는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욥기가 이야기하려는 신앙의 근본은 아닌 거예요. 이걸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다른 공부할 때도 말씀 드렸는데, 좋기는 하지만 기독교는 아니라고 하는 것, 신앙에서 그런 거 많이 있잖아요. 그걸 구분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늘 신학적으로 선명하게 구분하면서 신앙생활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런 것들을 공부하면서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분별력들 저절로 생깁니다. 한꺼번에 안 되지만 천천히 가다보면 그게 들어오게 되죠.


이 욥기서는 욥이라고 하는 사람의 운명을 통해서 참된 신앙이 뭐냐를 밝혀 보려는 책이에요. 이 욥에 대한 드라마, 서사는 간단하죠. 굉장히 부자로 살았는데, 옛날에는 이렇게 부자에 다복하고 자녀가 아들 일곱에 딸 셋을 두는, 이게 가장 행복한 가정의 자녀 숫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에도 이런 숫자가 많이 나와요. 아들 일곱에 딸 셋 둔 가정이 가장 행복한 가정으로 나옵니다. 아들 일곱에 딸 셋 뒀는데 다 죽은 다음에 나중에 하나님이 또 자녀를 주시잖아요. 그 때도 숫자가 똑같습니다. 아들 일곱에 딸 셋이에요. (오늘 본문에는 안 나오고 2장에 나오는데) 욥에게 아내가 얘기하잖아요. ‘당신, 하나님 저주하고 죽어라’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나중에 얻은 자녀들은 이 아내를 통해 낳았나요. 아니면 새로 장가를 갔나요. 욥기가 그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추정해보면 본 아내가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욥기서 자체는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추정이 되는 이유가,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고 하는 게 나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것도 욥을 비판한 친구들의 (좋은 뜻으로 비판한 거예요. 나쁜 친구들이 아닙니다. 정말 동료들인데) 관점과 똑같은 거예요. 논리는 간단한 겁니다. ‘징벌을 받았다면 분명히 네가 잘못한 게 있는데 왜 잘못한 게 없다고 하냐. 그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다. 그렇게 하지 말고 당신이 하나님에게 벌을 받은 게 분명하니까 아예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다.’ 그러한 입장인거죠. 그러니까 이 아내나 친구들이나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어긋나는 것은 아닌 거예요. 그리고 뒷부분에 가서 친구들하고 나중에 화해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걸 보면 친구들이나 아내나 악의로 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 걸 놓고 볼 때, 나중에 아들 일곱, 딸 셋 얻을 때도 원래 부인과의 관계에서 얻은 게 아닌가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1장에서 보면, 다 없어져요. 굉장히 부자로 살았는데. 그러니까 옛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부자로 살아야 돼요. 하나님이 축복을 해준다는 그러한 생각입니다. 그게 오늘날에도 많잖아요. 기복신앙이라고 하나님 믿으면 다 잘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는 건데 욥기서는 그것에 대한 반론을 하는 거예요. ‘과연 그러냐. 이 세계는 그렇지 않다.’하는 거죠. 이러한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서 더 확연하게 드러나게 돼요. 구약신앙이 하나의 색깔만 있는 건 아니에요. 굉장히 여러 가지가 다채롭게 있습니다. 그러다가 잘못된 건 빠져나가고 선지자들의 이야기도 굉장히 많았었는데(지금 구약성경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남은 게 있고 없어진 게 있는 거처럼 구약성경에도 여러 가지 많은 하나님의 대한 생각들이 있는데 그게 좀 약화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은 떨어져 나가면서 점점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구약신앙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게 아닙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이해하실 거예요. 예를 한두 가지 들면 이런 거예요. 구약에는 고대로 올라가게 되면, 죽은 다음에 이후의 세계는 없어요. 그들에게 그건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나중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성경이 정확한 게 아니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천천히 진리가 살아 움직이듯이 그러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이, 그리고 유대교가 성장했습니다.

욥에 대한 이야기, 이건 간단한 거예요. 부자로 살고 괜찮았어요. 그런 것들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전부 부자여야 돼요.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고대 유대인들에게 있었어요. 다윗도 솔로몬도 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기는 특이한 거예요. ‘정말 그러냐.’ 그런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로 살던 이 욥이 졸지에 망하죠. 그게 천상 회의에서 하나님과 사탄과의 거래를 통해서 개입된 거예요. 사탄의 논리는 이겁니다. 이건 동화 같은 이야기예요. 어떻게 사탄과 하나님이 이야기하겠습니까. 문학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 많이 돌다가 왔다고 하는데 욥을 봤냐. 대단하지 않냐‘ 그랬더니 사탄의 반론이 ‘당신이 그에게 축복해주고 그만큼 했으니까 하나님을 따르는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도 하나님을 부정했을 거다’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면서 사탄이 시험해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허락을 받고 사탄이 욥의 삶에 네 번에 걸쳐서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나게 돼요. 어떤 종이 와서 ‘사고가 났습니다.’, ‘재산을 잃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네 번에 걸쳐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어려움에 빠진 거예요. 그리고 오늘 1장에는 안 나오지만 2장에 욥이 더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과 또 하나의 거래를 통해서 욥의 운명에 더 깊이 들어가요. 그래서 생명만은 건드리지 않되 몸을 상하게 하는 그런 데까지 가게 돼서 굉장히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구조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욥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고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축복을 받고 어른으로써 의롭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는데 완전히 모든 것들이 무너지게 된 겁니다.


이제 그 문제를 놓고 신학적인 논쟁을 하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는 거죠. 그래서 세 부류의 입장이 갈립니다. 욥의 이 갑작스러운(갑작스러운 게 아니라고 해도) 완전히 허물어진 삶, 고난이요. 이걸 신학적인 용어로 하면 신정론이라고 해요. 무죄한 사람의 고난에 대한 겁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걸 다시 반복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무죄한 자가 고난 받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뭔가 잘못 했기 때문에 고난 받는 거예요. 인과응보의 개념이 유대인들에게도 초창기에 있었습니다.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예요. 그 문제를 갖고 세 부류의 사람들이 논쟁을 합니다. 그게 욥기 전체라고 할 수 있어요.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보십시오. 욥의 드라마는 간단한 거예요. 복 받아서 잘 살던 사람이 완전히 망했는데 이걸 놓고 세 부류의 사람들이 논쟁을 한 거다. 첫 번째는 세 명의 친구들이에요. 그건 본격적으로 4장부터 나옵니다.


세 부류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욥기서 전체 구조를 좀 더 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강의 요약문을 보시면 되겠어요. 거기 두 번째 패러그래프의 중간 바로 밑을 보시면 됩니다. 욥기 전체가 42장이에요. 그 중에 욥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세 장에 불과해요. 십분의 일도 안 돼요. 1장, 2장, 42장입니다. 거기에서만 욥이 어떤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것만 보더라도 욥기의 주제가 ‘욥이 어떻게 됐다’ 이런 게 아니라는 걸아시겠죠. 이걸 엉뚱하게 이해를 해서 ‘봐라. 욥처럼 고난 받아도 믿음 잃지 않으니까 축복 받았지 않냐.’ 이렇게 가게 되면 오해하게 되는 겁니다. 이 욥기서가 그걸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분량만 보더라도 세 장에 불과한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 중간에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그 내용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지 않습니까. 논쟁은 주로 세 친구하고 욥이 벌여요. 마치 법정에서(민사법이랄까. 형사법이라고 해도 좋고요) 서로 공격하고 반론하고 변호하고 그런 것하고 비슷합니다. 세 명의 친구 이름을 외워두십시오. 엘리바스, 빌닷, 소발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예요. 친구들이 하나하나 나타나서 욥에게 ‘너 문제가 있어’ 얘기하면 ‘난 문제 없어’ 그렇게 전개합니다. 그게 3장에서 27장까지입니다.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죠. 3장에서 27장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엘리후라고 하는 친구도 나중에 나타나요. 이 엘리후는 친구는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젊은 논객인데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이 부분은 나중에 추가된 거라고 이야기도 합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어요. 왜냐하면, 보통은 친구들이 공격하면 욥이 방어하는데 이 엘리후의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어요. 그래서 이것은 나중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이 있는데 그래도 이스라엘 신앙에 굉장히 중요한 전통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세 명의 친구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들이에요. 지혜의 전통이에요. 잠언 같은 것들을 다 지혜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전통 가운데 하나가 지혜예요. 지혜 문학, 신앙적으로 지혜롭게 사는 게 뭐냐가 중심을 둔겁니다. 이 친구들의 지혜로운 전통이 있고요. 나중에 들어온 이 엘리후는 조금 다른, 그러나 이 친구도 굉장히 중요한 이스라엘 신앙의 전통을 갖고 있어요. 욥이 소수예요. 욥의 생각이 오히려 유대교 전통에서 보면 약간 변방이에요. 나중에 유대 신학자들이 아마 욥기를 충분하게 연구를 하면서 구약성경 안에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엘리후의 논박이 이 친구들과의 대화가 끝나고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32장에서 37장까지요. 혼자서 막 떠들어요. 굉장히 젊은 친구입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세상에는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다 지혜로운 게 아니다. 젊었다고 해서 지혜롭지 않은 게 아니다. 당신들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까 나이만 들었지 뭘 모른다. 내가 젊지만 못 참고 한마디 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엘리후가 아주 긴 연설을 합니다.


그 연설이 끝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거예요. 일종의 재판 판사 역할이죠.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는 검사라고 한다면 욥은 피고, 혹은 피고를 변호하는 변호사, 하나님은 재판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정이 38장에서 41장까지 나오고요. 그럼 이제 나머지 한 장 남았잖아요. (42장) 그건 욥이 다시 축복받아서 잘 살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에게 ‘자네들, 그럴듯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욥만 못하다. 그러니까 욥하고 화해하고 욥을 대신해서 제사도 드리고 잘못한 것 인정해라‘ 그런 이야기들이 마지막 42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핵심주제가 무죄한 자의 고난이에요. 그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무고한 자의 고난이라고 해도 좋아요. 이건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이게 핵심이에요. 이게 왜 핵심이냐면 무고한 자, 죄가 없는 자, 세상에 죄가 없는 자는 없죠. 그러나 그가 받은 징벌에 대한 책임으로 말할 수는 없는 어떤 상태인 거예요. 그래서 무죄한 자라고 하는 거죠. 기독교의 죄론, 이런 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이 부패했다고 하니까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욥도 사실은 내가 무죄하다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기도 죄인라고 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기 모든 것이 이렇게 허물어지는 것들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붙들고 있는 거죠. 이 관계, 굉장히 예민할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다 죄인이기는 하되, 그러나 그 안에서도 하나님이 용납할 수 있는 차원과 그렇지 못한 차원이라고 할까요. 그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닌 것 같고, 하여튼 그건 숙제로 놔두고 저도 정리가 되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의 입장은 분명한 거예요.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건 부정하지는 않되, ‘네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벌을 받은 게 아니냐.’라고 하는 친구들의 말에는 강력하게 반대하는 거죠. 내일이면 세월호 참사 일 주년인데요. 만약에 어떤 목사가 강단에서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징벌을 내린다.‘ 비슷하게 이야기하면 망발입니다. 물론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그걸 갖다가 일반화 시켜서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고 다 죄인이니까 옳다 그르다 말하지 말고 지나가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무고한 자의 고난이에요. 구약시대 때도 욥을 통해서 중요한 신학의 주제로 올라왔잖아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핵심인 거예요. 왜 그런지 아실 거예요. 무고한 자의 고난 혹은 죽음의 대표자가 예수이기 때문이에요. 기독교 신앙이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무죄한 자가 왜 죽고 고난 받나하는 문제의식에서부터 기독교가 시작된 거죠. 십자가 사건에서 출발한 거니까요. 그게 어떻게 극복 되냐는 것은 부활과 연관해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주제에 대한 입장이 세 가지로 나뉘어요.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보시면 제가 간단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입장들을 머릿속에 넣어놓고 이것을 읽어 가면 됩니다. 세 명의 친구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친구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이에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정의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그리고 끌어가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징벌을 내리는 겁니다. 사실은 이것이 구약성경의 전체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 역사, 신명기 사관, 신명기 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모든 계명들도 핵심은 그거예요. ‘너희들 이 말씀대로 살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아야 되는 거죠. 이게 기본적으로 있는 지혜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그렇게 돌아가질 않잖아요. 아무리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더라도 잘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다고 해서 늘 잘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욥기서가 언제 나왔는지에 대한 입장이 약간씩 다르기는 한데 요즘은 대개 바벨론 포로 이후로 봅니다. 바벨론 포로가 6세기에 있었잖아요. 포로에서 귀환될 때는 5세기, 기원전 4백년 그 정도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고난 받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신학적 문제의식이 그 때는 굉장히 팽배하게 있었습니다. 욥기서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를 잡은 걸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부류, 첫 번째 말씀드린 지혜로운 친구들의 입장,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했던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은 계속해서 욥에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네가 이렇게 저주 받을 운명에 떨어지게 된 것은, 네가 모르는 중이라도 죄를 지은 게 있다. 그러니까 그걸 회개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중간 녹음 끊김) 요즘도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 게 있나?’ 그런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좀 심각하게 되면 정신병적인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게 구약에서부터 쭉 내려왔던 그러한 겁니다. 욥의 세 명의 친구들의 입장이 바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다그칩니다. ‘여보게, 제발 잘못한 것 인정하고 회개해. 그럼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실 거야’ 이런 논리예요. 굉장히 그럴듯한 거죠. 그걸 욥은 받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다른 사람이 보면 누구의 말이 더 일리가 있었겠어요. 세 명의 친구들의 논리가 더 일리가 있는 겁니다. 욥이 뻔뻔스런 사람인 거예요. 자기는 이런 벌을 받을만한 잘못한 게 없다 그런 입장이니까 말이죠. 두 번째 부류가 엘리후입니다. 이 전통도 유대교 안에 있고 지금도 기독교 안에 있고 신약성경에도 이러한 입장이 많이 있어요. 징벌, 고난,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연단하기 위해서 준거다. 연단의 기회다. 그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은혜롭죠. 그러니까 엘리후 입장에서 보면 욥이 ‘나는 그런 벌을 받을만한 잘못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게 굉장히 불신앙적인 겁니다. ‘좀 그러지 마십시오.’ 계속 엘리후가 설득하는 거죠. 세 번째는 욥입니다. 저주의 운명에 떨어진 장본인이에요. 이 사람은 친구들의 말 하나, ‘너 분명히 잘못한 게 있을 거야. 그것 좀 기억해 내서 회개해.’ 그 말을 받아 드릴 수 없었고요. ‘연단의 기회니까 정신 차리고 회개해서 다시 믿음 좋은 사람이 되라’는 엘리후의 입장도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욥의 대답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놓치지 않는 거예요. ‘알 수 없이 내가 이런 운명에 처하긴 했지만 더 이상 내가 할 말은 없고 그래도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놓치지 않은, 그 어떤 틈바구니를 뚫고 나가는 욥의 신앙, 그걸 욥기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사실은 그건 합리적인 게 아니에요. 앞의 친구들하고 엘리후가 이야기한 게 훨씬 합리적인 겁니다.


이들의 논란이 결론은 없었어요. 욥도 확신을 갖고 어떤 것을 한 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게 후반부에 38장에서 41장까지 나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확실한 대답을 주실까요? 왜 이런 일이 벌어 졌는지 하나님께서 말을 하셨을까요? 그건 할 수가 없습니다. '천상회의에서 사탄이 제안해서 시험해 본거다' 그런 것도 아닐 거고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정확한 답은 주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곧 아직까지도 그걸 다 모른다는 겁니다. 비밀인 거예요. 이걸 억지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게 친구들하고 엘리후의 입장인데 아직까지 현대 신학자들도 이 문제를 다 풀지 못했습니다. 그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두 가지예요. '너희들 다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뭘 인식한다는 거잖아요. 뭘 알기 때문에 주장하는 건데, 친구들이나 엘리후나, 또 욥도 포함해서 같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욥아 네가 뭘 아냐.' 하나님께서 욥까지 같이 묶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짖고 까부느냐.' 예를 들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41장 1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시적이에요.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악어 같은 동물이에요. '낚시로 네가 악어를 낚을 수 있겠냐, 노끈으로 혀를 맬 수 있겠냐.' 하면서 '전혀 무능력하고 서계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면서 무죄한 자의 고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되겠냐.' 그런 식으로 욥기서를 기록한 사람이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답은 없는 거예요. 또 한 가지 말씀하신 것은 욥을 포함해서 '너희들이 뭘 알면서 떠드느냐.' 그렇게 책망하시면서 그래도 '욥, 그가 최고다.' 친구들이나 엘리후의 입장이 아니라 욥이 그 중에서는 가장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 결론인거죠. 여러분 강의안 마지막 패러그래프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제가 설명한 걸 그렇게 정리한 거예요. 이들의 논란이 결론 없이 끝난 뒤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을 보이신다. 1)세상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고난의 의미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2)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욥의 태도가 최선이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것을 억지로 내 이성으로 일일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놓지 않는 욥의 태도가 최선이다. 그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걸 바탕에 깔고 앞으로 쭉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2장에서는 조금 더 서사들이 나와요. 본격적으로 3장부터 나오겠습니다.


오늘 첫 날인데 어떻습니까. 욥기 읽고 공부할만하게 느끼셨나요. 아니면 지루하게 느끼셨나요. 하여튼 저도 공부한다는 자세로 해보겠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현란한 사색, 그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오늘 우리의 삶의 문제, 무죄한 자의 고난의 문제, 좋은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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