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22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두 번째 공부입니다. 본문 공부하기 전에 지난 번 공부하고 질문했던 것을 잠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욥을 충고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의 입장, 엘리후 말입니다. 엘리후의 논리는 어려운 시험은 그걸 통해서 훈련받고 결국 좋아진다. 고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단련의 기간이다. 그런 입장이라고 개론적으로 설명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000집사님이 욥의 이야기가 똑같은 거냐고 질문을 하시면서 23장 10절을 인용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욥의 이야기거든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과 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 구절이 앞서 제가 설명한 엘리후의 입장하고 비슷하죠. 단련돼 갖고 순금처럼 된다는 겁니다. 제가 그 때 질문을 받고 그거는 욥의 입장이 아니라 엘리후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딱 구절이 나오니까 헷갈렸어요. 그래서 집에 가서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번역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이렇게 되는데 이 뜻이 ‘내가 하나님께 시험받아서 단련돼갖고 순금처럼 멋진 신앙의 사람이 된다.’라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시험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난 잘못한 게 없다’는 뜻입니다. ‘순금처럼 나는 잘못된 게 없다.’ 자기의 의로움을 이야기하려는 거지 훈련을 통해서 좋아진다는 뜻은 아니죠. 그러니까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는 거죠. 이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어가 원래 모음이 없어서 어떻게 번역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합니다. 혹시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을 가지고 계신 분 있나요. 이 구절을 다른 번역으로 읽어 보시겠어요? 개정개역은 오해하기가 쉬워요. 이 말은 나와 있는 그대로 ‘잘 단련 받아서 내가 순금처럼 믿음이 좋아진다.’ 그런 것처럼 이해하기에 딱 안성맞춤입니다. 그런데 그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욥기 23장 10절에 나와 있는 욥의 말은 엘리후 말하고는 반대예요. ‘아무리 내가 시험을 받고 단련하고 신앙이 옳은지 그른지 시험을 받는다 해도 잘못한 게 없다.’ 그러한 뜻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문제는 해결 됐어요. 2장,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1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1장하고 2장의 내용이 비슷해요. 욥에게 시험이 내린다. 어려운 일이 내렸다. 그 이야기입니다. 1장에서는 욥이 자기의 소유물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 많던 재산, 지금처럼 대기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대 유대사회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잘 사는 쪽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다 잃고 자식들도 다 잃게 되었어요. 아들 일곱에 딸 셋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자식들도 소유물이었으니까 그것도 소유물 잃은 거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셋에다가 딸 세 명, 이게 고대 근동 지방에서 가장 적합한 자녀들의 숫자라는 것을 지난주에 말씀드렸어요. 이 욥의 이야기에 약간 시비 걸듯이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어요. ‘욥은 자기가 시험 받고 잘 이겨나가고 좋겠는데 욥의 자식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런 거예요. 그럴만하지 않습니까. 이 친구들은 이름도 잘 안 나와요. 그런데 욥이 시험 받기 위해서 그 자식들이 몽땅 다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 질문은 여기서 무의미한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 성경 기자가 어떤 것을 말하려고 했는지 그거 한 가지를 쫓아가는 게 핵심인거지 여기저기 이런저런 많은 것들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하면 조금 다른 데로 빠지기 쉽습니다. 2장에는 1장과는 달리 욥 자체가 어려움을 당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고 지금도 읽어본 대로 자기 몸이 완전히 망가지는 그러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강의 요약문에도 썼습니다만 재산이 없어지고 자식이 없어지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되는 거거든요. 이 성서 기자가 왜 그렇게 기록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부모라고 한다면 자기 몸이 망가지는 것보다 자식 죽는 게 더 아픈 거죠. 그게 사실 더 힘든 건데 여기서는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서 자식이 죽는 거는 그럴 수 있는 거로 받아들이게 하고 자기 몸이 망가지는 데까지 밀고 들어가는 그런 일들이 2장에 나오게 돼요.


어떻습니까. 자식이 죽는 거, 끔찍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자기 몸이 위태로워지는 것, 이건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마음만은 내가 죽더라도 자식은 살리고 싶잖아요. 그게 우리 모두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인데 조금 예민하게 생각하면 사실은 자기가 중요할 수 있어요. 자식이 죽거나 하더라도 조금 지나면 배고파지잖아요. 그리고 즐거운 거 보면 웃기도 하고요. 아무리 자식이 죽었어도 재미있게 일상을 살아가게 돼요. 그런 이야기가 기억나네요. 가톨릭 신자였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남편하고 자식이 몇 개월 사이에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에세이에 기록한 것 같아요. 남편이 죽은 거는 병이 들어서 그런대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아들이 과로로 죽었나 봐요. 졸지에 젊은 아들이 수련의 하다가 죽었는데 그래서 모든 게 뒤집어지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배가 고파서 뭘 먹고 하는 자기를 보면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지.’ 하고 말이죠. 하여튼 그러한 게 사람이죠.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욥기서를 쓴 사람도 자식이 죽은 거보다도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욥에게 임하는 큰 위기를 또 하나의 가중되는 시험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6절, 이거는 1장 6절에서 12절에 나오는 이야기의 거의 똑같은 반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늘에서 회의가 열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실제적인 걸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왔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서 있었고 사탄도 와서 회의를 하는 것처럼 묘사가 되어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겠어요.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그렇게 기록을 하는 거죠.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운데, ‘하나님의 말씀인데 무슨 문학적인 상상이냐.’ 그렇게 따지고 들면 제가 여기서 설명하기가 너무 길어요. 여러분들은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해하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근원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문학적인 장치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도대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근원을 해명하려고 하는 하나의 문학적인 수사, 레토릭(Rhetoric)이라든지 비유, 상징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1장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게 회의가 나와요. 하나님이 사탄에게 물어봐요. ‘어디 갔다 왔냐.’ 만화 같은 이야기죠. ‘여기저기 두루두루 다녀왔습니다.’ 지난 번 공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톨스토이나 다른 동화에 나올만하게 이 구성 자체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저기 다녀왔습니다.’ 했더니 여호와가 사탄에게 또 욥을 칭찬하는 거예요. 1장에 이어서 2장에도 칭찬해요. ‘너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이 허락해서 내 종 욥이 큰 어려움을 당했는데, 봐라! 그래도 시험에 떨어져서 하나님을 욕하지 않고 신앙을 잘 지킨 거 보지 않냐. 그가 여전히 온전하다.’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그 다음 사탄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은 아무리 자기 소유, 자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 가지고는 막다른 골목이 아닙니다. 그 사람 자체를 쳐보십시오. 그럼 욥이 결국은 하나님을 부정할 겁니다.’ 사탄이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을 한 거예요.


거기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4절 보십시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이건 속담일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어요.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지불한다는 뜻을 가진 속담인 것 같습니다. 여기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뒤에 설명한 것을 보면 맞죠?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그러한 뜻이에요. 그런 이야기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사탄의 요구를 허락하지요. ‘그래, 가서 욥을 네가 마음대로 하는데 다만 목숨만은 건들지 말라.’는 단서를 걸고 사탄에게 허락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가 진행되어지죠. 7절에 보면, 사탄이 자기의 계획을 실행합니다.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했다고 하네요. 종기라고 표현하니까 간단한 병 같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종기가 많이 났는데요. 저도 아직까지 종기 흉터가 남아서 안 지워집니다. 중학교 때인가 목덜미 있는 데를 적절하게 빨리 짜 줘야하는데 안 했던가 봐요. 아직도 남아 있네요. 옛날에는 고약이 굉장히 유행했었는데 가정의 필수 약품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악성 피부질환을 말합니다. 피부병이 옛날부터 많이 있었습니다. 나병도 피부병의 하나인데 옛날에는 나병과 피부병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거 있으면 거의 다 나병으로 취급을 했어요. 레위기 같은데 보면 악성 피부병에 대한 처리 규정도 나오죠. 기억나실 거예요. 그렇게 나병과 같은 병에 욥이 걸린 거예요.


이 상황을 8절이 그렇게 설명하죠.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 재라는 것은 재이기도 하지만 똥, 쓰레기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돼요. 그러니까 욥이 자기 집에 앉아서 재를 뒤집어 쓴 게 아니라 나병이라든지 심한 피부병이 걸린 사람은 격리돼야 됩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멀찍이 쓰레기를 모아 놓은 곳 비슷한 데에 격리돼서 거기서 자기 몸을 기왓장 비슷한 걸로 긁고 있었다고 표현이 되어 있어요. 이 욥의 상태가 몸도 크게 망가졌지만 사회로부터 격리됐으니까 마음도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진 그런 상태입니다.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 없을 정도의 그 밑으로 떨어진 욥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상태가 어떤지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거고 그런 상태로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죠. 완전히 격리되어 있고 몸도 망가져 있고 나중에 친구들이 와서 볼 때 욥인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니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데 3장에 가서 보면 ‘내가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 그렇게까지 고백하는 걸 보면 아주 실제적으로 산 거 보다는 죽은 게 낫다는 그런 생각에 떨어진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자기의 몸을, 자기의 생명을 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냥 그렇게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상태, 참 어렵죠. 이 사람이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결벽증 환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주 의롭게 살았던 사람이에요. 제가 왜 결벽증이라고 표현 하냐면 1장에 나오죠. 자식들이 행사하고 나면 데려다가 정결 의식 시키고 혹시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싶어서 굉장히 엄격하게 가족과 식구들을 끌어가고 자기도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고 그리고 사람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억울한 일을 당해서 어떻게 하냐. 그래도 힘내라.‘ 이런 차원이 아니잖아요. 완전히 저주 받은 거거든요. 그 다음에 나오지 않습니까. 부인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9절에 보면, 충돌하는 거예요. 부인도 사실은 친구들하고 입장과 비슷한 거예요. 이 부인이 볼 때 남편이 맘에 안 드는 거예요. 욥 본인은 의롭다고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집안 모든 게 망하게 됐으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것을 좀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기를 좀 낮추고 해야 하는데 그냥 계속해서 자기를 의롭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남편이 말이 안 되는 거죠. 이거는 신앙적으로도 이 사람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내가 볼 때 자기 남편의 신앙이 잘못된 거예요. 자기를 계속 의롭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래서 아내가 욥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죠. ‘당신, 그런 마당에 누가 봐도 명명백백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건데, 죄의 징벌을 받은 건데, 그런데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주장 하냐. 뻔뻔스럽다.’는 표현이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십시오.’ 이렇게 남편을 위해서 오히려 그렇게 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욥의 아내가 굉장히 못된 여자처럼 보여요. 욥이 그렇게 비판하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여자다.’ 이렇게요. 우리가 성경 읽을 때 ‘역시 욥의 믿음으로 보니까 어리석은 거와 아닌 거가 딱 구분이 되는 구나.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하지만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거꾸로 사람들은 욥이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 여자, 이 분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데 많이 나와요. 랍비들의 글들에도 나오고요. 심지어는 이슬람 문헌에도 나오고 외경에도 나옵니다. 칼빈은 이 여자를 사탄의 도구라고 이야기했어요. 비판적으로 말하는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비판한다는 건 본문이 이야기하니까 옳은 거예요. 그러나 그렇지 않게 말하는 문헌들도 제법 있습니다.


어느 문헌에는 이 욥의 아내가 야곱의 외동딸 디나였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야곱이 아들이 열두 명이고 딸이 하나 있어요. 딸이 더 많은데 이 여자만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딸의 이름이 디나 하나만 나와요. 이 여자가 세겜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오빠들이 그 나라를 완전히 쑥대밭을 만든 사건에 얽힌 주인공입니다. 혹은 욥의 두 번째 부인이 디나였다는 두루두루 여러 가지 설들이 있습니다. 이 욥의 아내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성경 기자는 배경 같은 것은 쓰지 않습니다만 잠깐만 우리가 생각해 보더라도 그 여자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거듭해서 제가 말씀드리지만 유대인들은 어떤 어려움을 당한 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자기 남편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아니라고 자꾸 고집을 피우니까 신앙적으로 충돌하게 되는 거고요. 아주 실질적으로 자기 자식들도 다 잃었죠. 그리고 남편은 병들어서 저러고 있죠. 먹고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어쩌면 이 여자가 노동한다거나 아니면 여기저기 손 벌려서 먹고 사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자기 남편이 정신 차리고 ‘아, 하나님의 심판이다.’ 받아들이고 ‘회개하면서 기도하면서 힘 있게 뚫고 나가봅시다.’ 그렇게 하면 좋은데 ‘나는 잘못한 게 없다.’라고 남편이 이야기하니까 이 여자가 못 견디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욕하고 죽는 게 당신한테도 좋고 다 좋을 거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이 욥이 이 여자에게 그렇게 대꾸하네요. 10절에 보면, ‘그대 말이 어리석은 여자 말 같도다.’ 하면서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각 장마다 중요한 요절을 하나씩 찾는다면 오늘은 아내에게 준 욥의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이게 아내를 설득시킬 수 있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욥의 관점인 거예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어리석은 이야기다. 하나님께 우리가 복도 받았으니 화도 받는 거 아니냐.’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자기에게 화가 임한 게 ‘죄 때문이 아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그건 그냥 우리에게 일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일반적인 생각에 따르면, 욥보다도 친구들이나 욥의 아내의 말이 더 신앙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욥의 말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이게 왜 이러냐.’에 대한 문제 제기예요.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욥기는 대답이 있는 게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이 이거다.’ 딱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내려왔던 신앙의 관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있더라. 이걸 어떻게 해야 되냐.’ 그런 문제 제기예요. 지금까지 내려왔던 유대인들의 신앙의 관점은 두 가지였어요. 욥의 세 친구들의 입장과 엘리후였어요. 하나는 ‘잘못한 게 있어서 그렇다. 잘 하면 복 받는다.’ 또 하나는 ‘이거는 훈련기간이다. 잘 극복해서 더 좋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이런 걸로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첫 번째 친구들이 한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아주 쉽게 드러나죠. 죄가 없는데도 어려운 일을 당하고 뻔뻔스럽게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도 잘 살고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신앙으로 세계가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반면에 엘리후의 입장은(우리가 그 이야기를 앞으로 계속 바탕에 두고 욥기를 읽어 가야합니다.) 굉장히 그럴듯한 거예요. ‘이거는 시련이다. 이걸 잘 견디게 되면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더 좋은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되니까 그렇게 준비를 하라.’ 굉장히 그럴듯한 거고요. 신약에도 그러한 입장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것도 아니라는 거죠. 시험을 받아서 더 좋게 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고난들이 세계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옆에서 쉽게 ‘시험을 받아서 더 믿음이 좋아져.’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관점들이 욥기서의 기초에 깔려 있습니다.


그 다음, 11절부터 친구들이 오네요. 11절부터 13절까지 욥의 친구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굉장히 경건하죠. 그리고 욥을 골탕 먹이거나 비판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게 분명하죠. 정말 진정성을 갖고 온 거예요.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최선으로 노력하던 사람들이에요. 이 세 사람, 엘리바스, 빌닷, 소발. 지역이 각각 다르다고 해요. 강의 요약문에 썼습니다만 엘리바스는 남쪽에서 왔고 빌닷은 동쪽, 소발은 북쪽에서 왔습니다. 이걸 어떻게 아냐면 어디 사람, 어디 사람 나오잖아요. 그 어원을 따져가다 보면 어느 지역에서 왔다는 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또 어떤 문헌 혹은 어떤 전승, 이런 데는 이 세 사람이 일반 사람이 아니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왕이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쨌든 이 세 사람이 욥을 위로하려고 비슷한 시기에 욥이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욥을 처음 멀리서 봤는데 욥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상태가 나쁘게 됐어요. 그래서 소리 질러 울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리면서 자기 머리에 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건 하나의 의식이에요. 유대의 경건한 사람들이 이러한 아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행하던 의식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참 지혜로운 사람의 표시가 나요. 이렇게 하기 힘든데 그렇게 합니다. 밤낮 칠일 동안 욥과 함께 땅에 앉아 있으면서 욥의 고통이 심한 걸 보고요. 말 한마디도 않고, 못 한 거죠. 말문이 막히는 거죠. 그러고 있었다고 하네요. 참 좋은 친구들이네요. 이런 친구들을 찾아보기 힘들죠. 우리는 ‘욥을 비판했다. 논쟁을 했다.’해서 세 친구를 이상하게 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경건하고 우정이 깊고 인간적이고 더 다른 말을 보태기 힘들 정도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욥기서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3장부터는 욥과 세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신학적인 논쟁이 시작됩니다. 각 장마다 중요한 요절을 하나씩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2장에서는 아까 말씀드린, 2장 10절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까 화도 받지 않겠냐. 화와 복을 자꾸만 하나님께 상 받고 벌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기 삶을 살아내면 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산다고 해서 꼭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꼭 못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아무 상관없이 우리 삶은 그렇게 묻혀갑니다. 그런 것하고 하나님 신앙하고는 직접 관계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1장에서의 요절을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아서 거꾸로 돌아가지만 다시 말씀드릴게요. 1장 21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런 말씀을 읽은 때는 동의가 돼요. 그러나 실제로 세상에 나와 살다보면 이런 건 금방 잊어버리게 돼요. 이게 남지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상황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보통 신자유주의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것저것 경쟁해서 생산력을 높이고 경쟁력을 크게 높이고 그래야만 되는 걸로 그게 굳어져 버렸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낙오된 사람으로 떨어지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무의식적으로 그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이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실제로 그렇게 안 살면 안 되잖아요. 늘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가는 건 명백한 사실인데 이걸 놓치지만 않게 된다면 더군다나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의로움과 그 분의 재림과 부활에 대한 약속과 우리에게 극치의 생명에 대한 그리움들, 설렘을 가득 가지고 있는데도 이런 것들이 실제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목사인 저 스스로 그걸 극복해보자. 그래서 자식들을 키우는데 조금 경쟁력이 없어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 있으면 충분하다. 억지로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욥기 1장, 2장을 우리가 함께 봤어요. 우리는 이런 상태에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경우는 많이 있어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풀어 가냐.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고 어떻게 대응을 해야 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 이런 것들을 앞으로 계속 읽어가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욥의 이야기 두 번째 공부를 했습니다. 몸까지 망가지고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격리되고 그 똥덩이와 같은 곳에서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던 욥,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놓치지 않았던 욥, 그의 마음을 우리가 다 헤아리지는 못하나 우리의 삶의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저희들이 배웁니다. 이런저런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조건들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리가 집중하며 살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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