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29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3장을 공부하겠습니다. 1장, 2장을 우리가 앞에서 잘 검토했습니다. 우리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제가 한, 두 번 그런 것에 대해서 글을 올렸어요. 많은 분들이 굉장히 욥기에 대한 기대를 하고 계셨습니다. 욥기의 이야기, 줄거리는 간단한 거예요. 보통 서사라고 하죠. 서사는 간단합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일컬어지던 사람이 하늘에서 사탄의 요구에 따라서 하나님이 허락하자 욥에게 큰 어려움이 일어났고 그것으로 인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맨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제대로 알아들었고요. 사람들의 나름대로 논리들이 별거 아닌 거로 인정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욥이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욥기를 그렇게 시험 당했지만 거기서 견뎌냈으니 그래서 더 복을 받아서 잘됐다고 읽고 있습니다. 그건 아주 일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서사 이야기 1장, 2장, 그리고 마지막 장인 42장만 나오는 것처럼 욥이 어떻게 되었나는 여기서 핵심이 아닙니다. 그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있었던 지혜라든지 이런저런 것들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고난이 참 많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하고 하나의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 욥기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물론 욥 이야기만 나와요. 그 다음에 4장에 가면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욥이 또 반론하고 몇 번 왔다, 갔다합니다. 이 친구들이 각각 두 번 발언할 기회가 있어요. 각각 욥이 거기에 대한 발론을 하고요. 나중에 소발은 한 번만 하는 건가요. 제가 정확하게 확인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상당히 지속이 됩니다. 오늘 첫 번 욥이 자기에게 임한 저주스러운 운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가 얼마나 당혹스러워 하는지, 그걸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단순히 욥의 이야기만 아니라 고대 유대인들의 생각들, 사상들이 여기 녹아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일단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26절까지 있습니다. 지금 욥의 마음이 어떤가를 감안해서 읽으시길 바라요. 그건 앞에서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아실 겁니다. 그 당시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건 다 하나님의 징벌, 저주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에겐 잘못한 게 없었다고 하는 겁니다. 굉장히 자기 입장이 난처한 거예요. 자칫하면 잘난 척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아닌 걸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주 어려운 처지, 그러나 자기의 삶은 다 망가져버린, 그러한 상황에서의 욥의 심정을 감안하면서 이 본문을 읽겠습니다.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기 3장은 세 문단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강의 요약문에 그렇게 해서 설명을 했어요. 첫 번째 문단은 1절에서 10절이고요. 두 번째 문단은 11절에서 19절, 마지막 세 번째 문단은 20절에서 26절입니다. 3장에서 욥은 자기의 삶을 저주해요. 특별히 자기의 생일,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합니다. 끔찍한 이야기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 감사하고 평화롭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을 자학 비슷하게 하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거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니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 삶을 회의한다는 것,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 이건 뭔가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욥은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거든요. 물론 나중에 가면 하나님께 내가 무식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고백을 합니다만 이 사람은 처음부터 굉장히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는 거예요. 이건 도저히 감사 찬송을 드릴 수 없는 상황, 그리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로되 자기 삶이 도대체 왜 이렇게 엉클어졌는지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입니다. 그게 아주 심해서 저주하는 정도까지 나가게 되요.


예레미야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 둘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 있는 이야기하고 욥의 이야기가 왜 비슷한지 그 두 개를 연구해서 신학적인 글을 써도 될 것 같아요. 그 내용이 비슷비슷해요. 그러니까 이러한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것 같은 글이 옛날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내려 온 게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참고적으로 예레미야 찾아보십시오. 20장 14절입니다. 예레미야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에요. 위대한 선지자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선지자들이 늘 인정받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아두실 필요가 있어요. 예레미야 20장 14절부터 18절까지 내용이 비슷하니까 읽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 눈으로 한 번 보세요. 14절 한 절만 보면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다면' 쭉 이렇게 나가요. 거의 비슷하죠. 마지막 18절 이렇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이러한 하나의 전형적인(우리나라로 치자면 민요나 그와 같은 문서) 기도, 한탄, 시, 그런 것들이 고대 유대사회에 내려왔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이 욥이 그렇게 자기가 태어난 생일마저 저주할 정도로 힘든 상태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외면한 사람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왜 나오냐.' 그렇게 비판은 아니더라도 안타깝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저는 이런 쪽으로 생각이 들어요. 정말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이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게 되는 영적인 상태가 하나님 경험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보통 기독교 신비주의, 그러한 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잖아요. 마에스터 에크하르트라든지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든지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영성, 신비주의의 운동이죠. 거기서 핵심은 무(無)예요. 무(無)를 경험하는 겁니다. 자기가 없어지는 상태까지 이르는 거죠. 그렇게 되면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은 못 견딥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있어야 자기를 확인한다고 생각을 해서, 하나님 안에서 확인한다고는 하지만 그게 약간 미미합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가 거한다고 하는 것, 그건 내가 살아있으면 안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완전히 없어지면서 어떻게 하나님 안에 거하냐는 이런 것들을 말로 간단하게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의 나락과 같은 상태에 들어간 경험이 없으면 하나님 경험은 조금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거나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완전히 없어지는 아득한 경계가 있어요.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 요약문에 저는 백척간두(百尺竿頭)라고 한자 용어를 썼습니다만 백척(百尺)되는 기둥 위에 올라간다는 뜻이거든요. 하나의 메타포예요. 동양의 가르침도 메타포가 많아요. 은유예요. 왜 은유를 이야기 하냐면 절대적인 것인 직접적인 설명을 못하는 거예요. 절대 경험은 직접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칼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입문을 공부했는데 칼 바르트가 한 말 중에 하나가 이런 이야기였어요. 하나님은 절대타자. 그러니까 우리하고 차원이 완전히 다른 타자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그 분을 직접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러한 메타포, 비유들로 설명을 합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라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의지할 데가 전혀 없습니다. 피할 데가 없는 거예요.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 경험이 가능하다고 하는 거죠. 우리는 그런 경험을 잘 못해요. 의지할 데가 너무 많은 거예요. 자기 직장도 있고 돈도 있고 집도 있고 자식도 있고 또는 인간관계, 취미 생활, 온갖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 것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들입니다. 그런 것들도 무시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의지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이라든지 영성가들이 추구하는 게 다른 거 다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을 하려는 거죠.


욥의 이야기를 하다가 왜 그 이야기를 하냐면 이 욥이 모든 것들이 없어진 상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떨어졌는데,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거 아닙니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게 행복한 겁니다. 사람이 보통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이 완전히 다 없어지는 상태까지 도달하는 그럴 때만 하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게 더 절실하게 깨달아져요. 팔복에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게 역설적이잖아요. 어떻게 복이 있습니까. 지금도 그게 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수 믿고 복 받으려면 다 좋아야 돼요. 자식들 잘 되고 돈도 벌고 그런 것들을 복이라고 생각하는데 팔복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 팔복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왜 복이 있느냐. 제가 지금 제가 이야기한 거하고 연관시키면 답이 나오죠. 다른 의지할 게 없을 때만 하나님께 관심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가 빨리 오기를 정말 기대하는 거죠. 너무 다른 게 좋은 것이 많으면 별로 거기에 절박하지가 않습니다. 이게 역설적인 거예요. 일부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패하라는 건 아닌데 너무 의지할 게 많으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다는 이 긴장, 역설을 어떻게 뚫고 나갈까 이게 숙제입니다. 제가 딱 맞는 대답을 드리기는 힘들어요. 각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1절부터 10까지 쭉 나와요. 자기 생일에 대한 저주.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런 겁니다. 굉장히 문학적으로 세련된 표현들이 많이 나오네요.


8절에 보면 재밌는 표현이 나옵니다. 리워야단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와요. 각주에 보면 악어라고 볼 수 있다고 되어있네요. 이 리워야단은 근동지역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것을 거부했다가 쫓겨난 어떤 악한 세력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나안 종교, 바알 등을 섬기던 사람들이 생각한, 어떤 신을 거절했다가 쫓겨난 악한 세력이에요. 성경 기자 포함한 유대인들이 근동에 있었던 주변나라의 이런저런 것들의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어요. 구약성경이 주변 세계와는 문을 닫아 놓고 자기만 특별한 경험에만 매몰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구약성경의 고유한 생각과 경험들이 다 녹아 있습니다만 주변에 여러 가지 것들이 많이 연결되어 있어요. 리워야단 같은 것들도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보면 리워야단 같은 것들은 성서적인 것은 아니에요. 왜 그런지 아시겠죠.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만 모든 것의 주권자이지 리워야단처럼 하나님을 대항하는 존재는 없어요. 리워야단은 그런 악한 세력이에요. 그게 조금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있습니다. 8절 잘 보세요. ‘나를 저주하는 자들,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 그러니까 악한 자들을 격동시킨다. 그걸 잘 하는 기술자라는 거예요. 마술사, 누굴 저주하는 악한 마술 부리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문학적인 방식을 통해서 이 욥이 자기의 출생에 대해서 크게 불안해하고 저주하는 모습들이 담겨있습니다. 10절, 그건 결론이라고 할 수 있네요.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닫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는 거죠. 자기가 공연히 태어나가지고 환란을 보게 됐다고 이야기하네요. 욥의 어머니가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이런 불효도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요. 옛날에는 출산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죠.(지금이야 유사시에 수술 할 수 있지만) 하여튼 자기가 태어난 게 한이다 오히려. 이 환란이 얼마나 심했으면 욥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단락은 11절에서 19절입니다. 앞 단락에서는 자기의 태어난 날, 생일에 대한 저주가 주로 다뤄지고 있다면 두 번째 단락에서는 출산 자체에 대한 저주예요. '자기가 아예 죽어서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어요. 11절에 보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죽어서 나오는 게 나을 텐데' 정말 끔찍한 이야기죠. 물론 옛날에는 이런 일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지금이야 의학적으로 웬만큼 처리가 되는데 옛날에는 훨씬 많았어요.) 끔찍한 표현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사산(死産)에 대한 구절이 16절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16절이 그 자리에 있지 말고 11절 다음에 나오는 게 맞다고합니다. 11절 읽은 다음에 16절로 가야 돼요. 그리고 다시 12절로 돌아와서 읽는 게 전체적인 흐름에서 맞습니다. '어머니 태에서 나오기 전에 죽어버린 아이, 내가 그랬으면 좋았겠다.' 오죽했으면 그런 이야기를 할까요. 대단합니다. 16절 한 번 보십시오. '또는 낙태되어 땅에 뭍인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다.' 11절 다음에 이어서 16절을 읽으면 어떤 내용인지 볼 수 있어요.


그런 아이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존재하지 않았고 빛을 보지 못할 아이들 말입니다. 이것과(11, 16절) 관계되기도 하고 관계되지 않기도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셨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가 보통 천당에 간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이야기하고요. 그 때 우리가 어떤 형태로라도 지금 살아있는 우리의 그 정체성이 보존되는 거예요. 몸의 부활이라는 것이 그 뜻입니다. 사도신경에 나오잖아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런 단백질로 된 몸은 아니겠으되 그 사람의 그 사람 됨. 그게 유지된, 그게 보존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의 세계, 천당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세계에서는 귀신, 혼령처럼 있는 게 아니라 고유한 그 사람의 정체성이 유지된, 인격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인격이 유지된 상태로 거기서의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고 정통 신학의 입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은 게 우리 인격이 뭐냐는 것을 우리가 아직 정확하게 몰라요. 저가 여섯 살 때의 내가 있을 텐데 지금의 나하고 인격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무엇을 인격이라고 할까요? 그 사람의 성격일까요, 지식일까요? 이게 사실 아직 정확하게 인간의 인격이 무엇인지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인격,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으나 비밀한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질 수 있는 바로 고유한 그, 고유한 그 사람, 그게 부활의 세계에서 유지되고, 보존된다고 생각 할 수 있어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사산 문제하고 잠깐 연관시켜서 말씀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 신앙, 영성, 이런 것들은 아직까지 끝난 답은 없어요. 가까이 가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계속 그런 쪽으로 공부한 것들을 넓게 보도록 하는 겁니다. 저도 그렇게 여러분들을 도와드릴 뿐입니다. 제가 정답을 드릴 수는 없고 여태까지 몇 천 년 동안 기독교 신학이 가려고 했었던 그 방향으로 안내하려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가까이 가게 되면 자세하게 보이게 될 겁니다. 제가 다섯 살 때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조금 더 늙은 때도 있고요. 그런데 사산(死産),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 죽은 그 아이의 퍼스널리티, 인격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건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질문들입니다. 그건 종말에 가서야 다 드러나게 될 텐데 그 때 까지 우리가 공부를 해서 알만한 것들은 알고 확실하게 정리를 하는 게 최선이겠죠.


16절 다시 보면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이런 게 좋다는 건가요? 나쁘다는 건가요? 욥의 입장에서는 좋다는 겁니다. 우리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건데요. 지금 이정도 사는 것도 불만스럽고 더 내가 드러나고 확장돼야하는데 아예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지나 않을 때가 오히려 하나님에 더 가까운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거는 지금 욥이 정말 어려운 일을 당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저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는데 여러분들 참고하시라는 뜻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뒤로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17, 18, 19절 쭉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보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과 같은 상태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소용돌이와는 다른 세계라는 것이 거기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죠? 17, 18, 19절 보세요. 


17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이 세상이 얼마나 시끄러워요. 어떻게 보면 이런 세상은 빨리 정리하고 떠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자기가 잘났다는 이야기만 많고 특히 악한 자들, 교만한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많죠. 피곤한 자가 이 땅에서는 쉼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는 쉼을 얻는다. 아예 태어나지 않은 상태. 말을 하다보니까 조금 느껴지는 건데 태어나지 않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원래의 그 상태가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될 안식의 세계, 하나님 나라와 신비한 방식으로 연결됐다고 하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18절에 보면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고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지금은 그걸 계속 들어야 하잖아요.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도 자기 상급자에게 호통소리 계속 듣지 않습니까. 이게 다 피곤한 일인데요. 19절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의 해방,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이 욥기가 욥의 저주스러운 운명이 참 힘들다는 그거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왜곡된 모습들, 한 인간의 실존들, 자기가 헤쳐 나가야될 쉼이 없는 인간의 삶, 그런 것들을 구석구석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가족들이 다 죽고 재산도 잃고 자기 몸은 완전히 병들게 된 욥의 운명만 이 아니라 보통 일반 사람들의 운명도 이와 비슷하게 이런데 살지 않습니까. 쉼이 없잖아요. 소요가 그치지 않고 말이죠. 여기까지 두 번째 문단이었고요.


마지막 세 번째 문단 20절에서 26절입니다. 이 욥의 생각이, 그리고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무엇을 전하려고 했었던 욥기 기자의 글을 쓰는 솜씨도 그렇고 사상도 그렇고요. 굉장히 깊어요. 아주 끝까지 가고 있네요. 인간의 삶에 대해 변죽만 울리는 게 아니라 아주 막다른 골목까지 몰고 들어가는 힘이 여기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이런저런 불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그리고 내가 욕을 먹고 있고, 하나님에게 벌 받았다는 이야기도 듣고, 실질적으로 자기가 힘든 것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은 뭘까요? 혹시 아시겠어요. 죽지 못하는 거예요. 죽고 싶은데 죽을 수 없는 어떠한 상황을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20절 앞부분은 하소연하는 거예요. 그런데 20절에서는 어떤 대상을 향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대상은 하나님이죠.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생명과 빛을 주지 않아서 죽으면 정말 속 시원한데 그게 안 되는 이 상황이 더 견딜 수 없는 상황인거죠. 여기 단어를 다시보세요. 빛과 생명. 빛과 생명을 줬으면 이건 좋은 거잖아요. 이걸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걸 준 게 못마땅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시고 마음 아픈 자에게 생명을 왜 줬냐.’ 이렇게 따지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여튼 이 20절만 본다면 빛과 생명으로 인해서 내가 더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더 고통스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강의 요약문에 제가 질문을 한 번 했습니다. 여전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한 가닥 희망이 남아있다는 뜻인가.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빛과 희망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희망이 있다는 뜻인가. 혹은 인간이 극심한 고통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만(같은 연장선상에서) 이런 희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질문이 조금 명확하지는 않네요. 강의요약문을 집에서 정리할 때는 명확하다고 생각하고 썼는데 여기서 다시 읽어보니까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조금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이 구절에서 '빛과 생명을 줬다는 것은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건데 왜 그걸 줬냐'고 원망하는 것 아니겠어요. '빛과 생명을 줘서 내가 더 힘들다. 죽지도 못해서 내가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23절 보십시오. 20절과 같이 연관해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욥은 지금 진퇴양난에 빠진 거예요. 생일을 저주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서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심정이에요. 어느 정도로 그가 자기의 삶을 부정하는지 아시겠죠. 그러나 빛과 생명이 여전히 있어요. 그래서 죽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죽음이 뭔지, 빛과 생명이 뭔지, 이 욥기가 어떤 뜻으로 설명을 했는지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그것과 연관해서 23절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욥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빛과 생명을 주었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더 힘들어져요. 그게 23절에 그대로 나타난 겁니다.'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이것도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입니다.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이거는 다른 번역에는 없는 표현이에요. 이건 아마 크게 의역을 해서 20절에서 그런 의미가 여기 들어있으려니 생각을 해서 우리말 번역한 사람이 이걸 넣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23절은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빠져나갈 길은 앞뒤로 막히고 하나님께 영락없이 갇힌 몸' 이거예요. 어떻게 꼼짝달싹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빠진 겁니다.


강의 요약문 밑에서 마지막 둘째 줄 그거만 읽고 정리하겠습니다. 욥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지금 그는 이유 없는 고통에 떨어졌다. 현재 그에게는 죽음이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음까지 빛과 생명을 줌으로써 막고 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힌 상황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욥의 영적인 실존이 전달되시는지요.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 이런 경험을 못합니다. 아주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들어가 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게 거리가 먼 이야기, 관념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어요. 조금씩 더 욥기를 공부하다보면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겠죠. 참고적으로 한 말씀 드린다면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서도 시, 소설, 음악, 미술, 그런 것들을 공부하는 게 좋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거는 일상적은 우리의 삶으로는 다 경험하지 못하는 삶의 깊이들, 어떤 골목들, 궁극적인 것들을 문학이나 예술이 표현해주고 있어서 간접적으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성경에서 욥은 대단한 삶의 끝자락에 가있는 어떤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는 죽었다 깨도 경험을 잘 못하는 겁니다. 직접적으로는 경험을 잘 못하죠. 그러나 이러한 공부라든지 여러분들이 집에서 읽으시면서 천천히 이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여러분들의 눈이 확 뜨이는, 인간 삶과 하나님의 세계가 선명하게 들어오게 될 겁니다. 천천히, 천천히, 갑자기 되지는 않습니다. 그 길을 꾸준하게 가는 사람은 점점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나 힘들다, 어렵다, 시간이 없다, 이렇게 하다가 자꾸 물러나게 되면 우리가 이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조금 힘들어도 인내심을 갖고 가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 3장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수천 년 전 고대 유대인들의 삶에서 형성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이천 년 그리스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내려와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깊이들을 우리들이 다 알지는 못하나 거룩한 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욥의 신앙, 욥의 하나님 경험, 그 안에 한발 한발 깊이 들어가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이렇게 한 주의 중간 수요일에 이런저런 바쁜 일 가운데서도 접고 함께 공부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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