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06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공부 욥기 4장입니다. 전체가 42장까지 있어요. 진행을 해 가다가 한장 한장 다 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 있으면 한 데 묶어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초반이니까 한 장씩 가도록 하겠어요. 왜 중간에 몇 장을 묶어서 하냐면 친구들의 충고가 몇 장에 걸쳐서 계속되기도 하거든요. 그런 것들은 내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주제라고 볼 때 문단으로 나눈다면 같이 되어 있어서 몇 장을 한데 묶어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42장까지 있지만 전체가 42주가 걸리진 않고요. 대략 35회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까지는 한 장씩 보겠어요. 이 욥기서가 조금 더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와야 될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 4장이에요. 본격적으로 친구들이 욥을 충고하는 이야기입니다. 엘리바스인데 4장과 5장이 겹쳐서 있어요. 이것도 같이 해볼까 생각을 했는데 아직까지는 우리가 욥기에 익숙해야 될 때라서 4장만 따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길지 않죠. 1절부터 21절까지 있고요. 절수로만 보면 긴데 전체 양은 길지 않습니다.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12.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21.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


어떻습니까. 이 내용이 욥을 충고하고 있는 엘리바스의 말이라는 걸 모르고 그냥 이거 자체만 읽었다고 한다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이죠. 하나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서 영적으로 지혜롭게 살려고 하는 삶의 태도가 여기 잘 나타나있어요. 엘리바스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나오는 친구들, 빌닷과 소발의 말들도 그렇고요. 맨 나중에 갑자기 등장하는 엘리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이게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거 자체로만 보면 옳은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아요. 그러나 문맥적으로 볼 때 잘못된 거죠. 이걸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건 욥기만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그래요. 보통 교회에서 하는 말들은 대게 하나님, 성령, 은혜, 이런 거니까 그 낱말들로만 본다면 다 옳은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게 어떤 뜻으로 전달되느냐에 따라서 문제가 적지 않을 수 있어요. 그게 구분하기가 참 어려워서 일반 신자들에게는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이 세 명의 친구와 한 명의 후배가 나오잖아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친구들이에요. 여기저기에서 모였어요. 이것은 앞부분에 서사가 나올 때 확인한 바입니다. 북쪽과 남쪽과 동쪽에서 각각 온 친구들이고 또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왕(옛날에는 조그만 마을을 다스려도 왕의 직책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쨌든 세 사람은 욥과 같은 연배에 속하고 친구로 지낸 사람들입니다. 맨 나중에 엘리후가 등장을 하는데 엘리후는 친구는 아니고 그냥 옆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걸 보다가 화가 나서 못 참고 나서서 욥을 충고하는 젊은 친구입니다. 이 친구들이 욥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을 무조건 나쁘게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다 선의로 하는 거예요. 이게 참 어렵죠. 선의로 하는 건데 옳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속에는 나쁜 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좋게 하는 경우가 있고 속에도 좋은 마음이 있고 선의로 하는데 뭘 몰라서 상투적으로 말을 하다 보니 그 사람의 영혼을 상처 내는 경우들이 많이 있어요. 산 다는 게, 인간관계라는 게(친구관계,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인데) 쉽지 않습니다. 저도 집에서 그런 실수를 많이 해요. 아무리 내가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야기인데 자꾸 말을 할 때가 있어요. 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야 되는 거고 우리가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말이나 생각에서 완전히 실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니까 내려놓고요. 그래도 공부를 하면서(마음공부도 그렇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잘 공부하면서) 그게 분간이 되는 거죠. 신앙적으로 어른이 되면 하나님 말씀에 좀 가까이 가서 반응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게 됩니다.


여기 이 친구들, 차례대로 이야기를 하는데 순서는 성경에서 말은 하지 않아요. 순서를 정한 건 아닌데 나이순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엘리바스가 제일 어른이고 그 다음 빌닷이고 소발이고 엘리후는 완전히 젊은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만 아니라 충고하는 내용을 보면 점점 강해져요. 처음엔 부드러워요. 그러니까 엘리바스가 제일 원만한 충고를 합니다. 그리고 욥을 가능한대로 이해하려하고 설득력 있게 주장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이잖아요. 그렇게 접근을 해요. 그러다 점점 가면서 욥을 더 공격하는 친구들이 나오는 거죠. 뒤로 갈수록 그렇습니다. 그래서 엘리후에 이르게 되면 완전히 '넌 나쁜놈!' 이렇게 되죠. 엘리바스가 4장과 5장에 걸쳐서 욥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논란을 벌이는 거예요. 어떤 주제를 갖고 옳다, 그르다 논쟁을 하는 거죠. 이런 것들이 옛날부터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혜 학교에서 그런 일들을 훈련으로 한 거예요. 학생들끼리 훈련을 하기 위해서 어떤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겁니다. 요즘으로 하면 대담이나 세미나라고 할까요? 그런 식으로 자기의 논리를 펼침으로써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공부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 왕궁에서도 이런 일들이 제법 벌어졌다고 합니다. 제가 요약문에 성경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왕상 10장 1절 이하에 따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당신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테스트해 봐야겠다.' 그렇게 하면서 이야기 했다는 게 왕상 10장 1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리고 헬라 철학자나 논객들도 이런 논쟁을 자주 했고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공부 중에 하나가 웅변술이에요. 그것도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여기 욥기는 그걸 바탕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임하는 고난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가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것을 이 친구들의 입장과 욥의 대답을 통해서 설명하는 거죠.


오늘 여기 1절부터 21절까지 있는데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문단은 1절부터 6절까지, 두 번째 문단은 7절부터 11절, 세 번째는 12절에서 21절까지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문단은 제가 전체적으로 보기도 했고 주로 제가 언젠가 소개를 해드린 성경인데 독일성서공회의 관주가 달린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온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문단을 나누어놓고 독일 성서학자들이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 성경책이 참 좋습니다. 주석이 좋아요. 성경 내용은 개역개정 똑같고요. 주석을 여러분들이 들어 보셨겠습니다만 대단히 많아요. 교부시대 때부터 주석을 썼으니까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유럽에서 성경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느냐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특별히 이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을 하고부터 성서 주석이 확 늘어났어요. 그 전까지는 성경을 역사비평하지 않고 본문비평만 했어요. '이 말씀이 구약과 어떻게 연관된다. 숫자가 틀리는데 이래서 저렇다.' 그런 정도로. 이 자체 내에 이것만 갖고 연구를 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 정도만 찾아 나갔다면 18세기 그 정도쯤 17세기로 조금 더 올라가게 되면 그 때부터 이 성경을 역사적으로 비평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성경의 신앙적인 눈으로만 보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문헌하고 같은 차원에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논란이 많이 벌어지게 되죠. 그 때부터 주석에 대한 연구가 더 많아졌습니다. 충분하게 말씀은 못 드렸는데 그냥 지나가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충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독일성서공회에서 펴낸 관주가 있는 그것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같이 번역을 해서 낸 그 성경에 따라서 세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1절에서 6절이에요. 엘리바스가 등장하지요. 나이도 많고 가장 원만한 입장을 보입니다. 굉장히 말을 세련되게 시작해요. '너 잘못했어!' 이렇게 시작하지 않고 '내가 친구인 자네한테 말을 좀 해야 하는데 참고 들어봐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 그런 입장입니다. 지금 욥의 상태가 어떤지는 우리가 잘 알고요. 가장 친한 친구가 완전히 망하고 몹쓸 피부병까지 걸리고 동네에서 떨어져 있어야 되고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죽는 거죠. 친구들이 돌봐주고 있습니다. 완전히 죽기 일보 직전까지 떨어진 친구 앞에 가서 논쟁을 한다는 게 사실은 젊잖은 사람으로서는, 선생이라는 입장에서는(지혜의 교사들이니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엘리바스가 자기 입장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도 친구의 불행 앞에서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할 수 없이한다. 할 수 없이 하는 이유는, 욥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안타까워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행에 빠졌으면 여태까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신앙과 삶의 지혜에 따르면 재를 뿌리고 회개해야 하는 거예요. 어쨌든지 간에 내가 모르는 잘못이 있어서 벌을 받는 건데 용서해 달라는 흉내라도 내야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3장에서 욥이 하는 행동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 신세한탄을 하는 것, '내 생일날 저주 받지 않은 게 한이다.' 이렇게까지 한 거예요. 그러니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욥이 하니까 엘리바스가 '할 수 없다. 도저히 친구 불행 앞에서 말을 하는 건 안 됐지만 그래도 해야 되겠네.'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 여기서도 엘리바스의 굉장히 세련된 연설 기법이 나와요. 일단 상대방을 인정하는 거예요. 욥을 인정하잖아요. ‘자네가 사람들을 훈계 했고.’ 여기 ‘손이 늘어난 자를 강하게 했다’는 것은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했다는 것인지, 어쨌든 교훈을 주는 선생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고요. 4절에 보면 ‘넘어지는 자를 붙들어 주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의 스승이고 원로로서 정말 잘했다고 인정을 했어요. 처음부터 부정하지 않고 인정을 하니까 굉장히 세련된 연설 기법입니다. 그렇게 멋지게 살던 자네가 5절, 6절에 보면 ‘오히려 그런 일을 당하니까 힘들어 하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헤쳐 나가도록 충고를 하더니만 직접 본인이 당하니까 왜 이렇게 제정신 못 차리고 야단법석이냐. 왜 중심을 못 잡느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겠죠. 엘리바스의 말이 그럴듯한 거예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충고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당하면 정신 못 차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목사들이 병에 걸려 힘든 분들한테 '이렇게 하십시오!' 이야기하고 설교도 그렇게 하잖아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데 어느 유명한 신학자가 암에 걸려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어요. 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 하나님을 부인할 정도로 하고 죽었다는 소문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가능성도 사실은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지만 직접 당했을 때는 감당하지 못하는 게 인간인데, 지금 엘리바스가 욥에게 그러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평생도록 목사로 사는 사람인데 이러한 실수는 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갑작스럽게 내가 암에 걸린다거나 큰 불행을 당할 수도 있는데 신앙이 흔들리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지 않겠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건 억지로 되는 건 아니고 목사 본인이 설교할 때 정말 자기에게 소화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삶과 말이 일치되는 것을 꾸준하게 수행하듯이 하지 않으면 잘못될 수가 있죠. 1절에서 6절까지 엘리바스가 욥에게 좋은 뜻으로 말문을 여는 장면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락, 7절에서 11절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충고를 하는 거예요. 일반적인 세태를 예로 들면서 충고하는 거예요. 7절에 보면 ‘생각해봐라. 죄 없는 자가 누가 망하냐. 정직한 자가 끊어지는 게 있냐.’ 그 이야기예요. 8절은 일종의 속담인데 ‘내가 보건데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 그러니까 권선징악과 같은 논조예요.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착한 사람은 결국 망하지 않게 한다. 그러나 악하고 독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그대로 거둔다.’ 그러한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의 세계관이었어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많은 민족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겁니다. 또 재밌게 9절 보면 이렇습니다.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대단히 힘 있는 표현이에요. 이거 하나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굉장히 의미 있는 표현합니다. 굉장히 시적이고 문학적인 수사죠. 우리가 사는 게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엘리바스가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분명히 드러나는 거죠. ‘네가 망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살아온 경험으로 알고 있고 서로 공유하고 있는데 죄 없는 자가 망하는 게 어디 있냐. 죄 없이 자네처럼 불행하다는 게 세상에 없지 않느냐.’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당시 그들이 볼 때 이건 틀린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그러면서 사자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면 이런 것들도 다 하신다는 이야기예요. 사자가 얼마나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젊은 사자의 이를 부러뜨려서 사냥도 못하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 한다. 그러니까 악한 자는 잘될 수가 없다. 그리고 정직한 자는 망할 수 없다. 정의로운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 그걸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엘리바스의 주장은 유대교 지혜 전통의 모범입니다. 이건 여기만이 아니라 잠언 같은데 보면 비슷한 이야기 많이 있어요. 고대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고 해서 틀린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틀린 이야기 아닌데 왜 욥하고 충돌 하냐.’ 그렇게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욥기는 친구들의 말을 완전히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말, 친구들의 말이요. ‘문제가 있으니까 회개해야 된다. 교육적인 차원이다.’ 그런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행에 대한 문제제기예요. 그러니까(지금 엘리바스가 처음 시작하고 있는데) 이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는 옳은 게 아닌 거죠. 이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제가 설교 때도 그렇고 성경 공부 때도 간혹 말씀드렸는데 좋기는 한 것이되 꼭 기독교적은 아닌 것, 이걸 구분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 이 엘리바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되 이 욥기서의 전체 문맥에서 보면 옳은 게 아닌 거죠. 오히려 ‘내가 이러한 불행을 당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욥이 더 옳은 거죠. 더 깊은 거죠. 인간과 세계와 불행과 죄와 허무와 모든 것들을 더 깊이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호소, 토로, 고백, 외침, 이게 욥의 입장인 거죠.


세 번째 단락은 12절에서 21절입니다. 이제 엘리바스가 앞부분에서는 세상의 원리와 경험, 유대인들의 세계관에 근거해서 말을 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자기의 특별한 영적 계시를 근거로 해서 말을 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표현입니다. ‘내가 환상을 봤다. 계시를 들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세계 경험으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신적 계시를 통해서 자네에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압박을 해가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는 엘리바스가 굉장히 지혜롭기도 하고 영적인 카리스마, 권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12절부터 16절까지, 자기가 본 신비로운 소리, 말, 계시, 영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게 굉장히 권위가 있기는 한데 자칫하면 위험하기도 한 겁니다. 요즘도 가끔 그런 사람들 있죠. 어떤 자기주장을 할 때 ‘나 계시 받았어.’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정말 신비한 경험을 했을 가능성도 있고 거짓말, 자기 환상, 착각, 자기 암시에 빠져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좀 더 그 말에 대해서 분석이 되어야 되죠. 12절부터 16절까지 엘리바스가 어떤 것을 본 경험들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경험은 정직한 것 같아요. 헛것을 보거나 환청, 환각에 빠진 게 아니고 굉장히 영적인 깊이에 들어가서 어떤 것을 경험한 것은 분명해 보여요. 그게 14절, 15절에서 약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렀다. 뼈마디가 흔들렸다. 내 몸의 털이 주뼛했다.’ 큰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경험을 말하고 있어요. 이걸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누미노제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미노제’의 뜻은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어떤 건지는 작년에 루돌프 오토의 거룩함 공부할 때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그것을 어느 정도는 느끼시겠지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어제 ‘인터스텔라’ 영화를 봤어요. 성간을 오가는 웜홀이라는 게 있는데 은하계에서 또 다른 은하계로 가는 지름길인 거예요. 광속으로 몇 백만 년 가야하는 거리를 비행기 타고는 못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웜홀을 통과해야 하는데 영화에서 설명하는 개념은 우주의 양 끝을 접어서 한 번에 갈 수 있는 구멍이 웜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 것까지 우리에게 확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주 먼 그런 세계, 지구가 점으로도 표현되지 않을 정도로 우주는 크고 넓지 않습니까. 막막한 거죠. 현묘하다고 할까요. 어떤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에 이야기하는 것이 그런 걸 이야기 하는 건 아니고 제가 우리의 어떠한 지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아득한 충격을 예로 들어서 말한 겁니다.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이 여기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말을 붙일 때 그런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거죠. 여기 엘리바스가 욥을 충고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 옳다.’ 그걸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받은 계시의 내용을 17절에서 21절 사이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일관성이 있는 거예요. ‘의로운 사람은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천사들도 다 미련한 정도에 불과하다.’ 19절, 20절가면서 ‘인간은 티끌과 같다. 하루살이와 같다.’ 20절에 ‘허무하다. 아무도 기억되는 것이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의롭지 않은데 너는 왜 자꾸만 자기의 불행을 죄와 연관시키지 않고 자기를 합리화하느냐.’ 그런 비판과 충고를 하는 거죠.


여기까지 4장에 나온 이야기를 검토해봤습니다. 전체 내용을 다 파악하고 각 구절을 세밀하게 살펴봤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굉장히 세련됐죠.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의 설득력 있는 연설로 전달이 되죠. 그러나 이러한 진정성이 있으면서도 내용이 충실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와 닿지 않게 될 때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떨어지게 되는 거죠.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진리의 중심을 붙잡지 못하는 말장난에 떨어질 수 있는 거죠.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런 면에서는 조심해야 되기도 하고 각성하고 자기 성찰을 꾸준히 해야 됩니다. 사실 우리는 엘리바스 수준에도 못갈 때가 많이 있어요.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인데 기독교적 용어를 내뱉으면서 누구를 재단한다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제 2의 엘리바스의 위험성이 있다. 그런 반성을 하면서 욥기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가려고 했었던 기본이 무엇인지를 천천히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강의 요약문에 설명을 안 한 부분이 있어서 그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세 번째에 해당하는 12절에서 21절이요. 큰 두려움 경험한 거, 거기에 횔덜린의 시에 대해서 하이데거가 설명하는 어느 글에 나온 이야기를 잠깐 썼어요. 어떤 거룩한 두려움, 천사, 이런 것들과 연관해서 제가 읽은 글에서 생각이 나서 기록을 했습니다. 횔덜린이라는 시인의 시에 반신(半神)에 대해서 많이 나와요. 반쯤 신인 거예요. 그런 존재가 활동하는 것처럼 횔덜린이 시를 썼어요. 그리고 하이데거가 정확하게 파악해서 설명을 해요. 저는 처음에 하이데거가 설명하는 글을 읽으면서 ‘이게 도대체 뭔가. 따라가기 힘들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탁 와 닿더라고요. 성경에도 비슷한 개념들이 있죠. 천사 있지 않습니까. 천사는 하나님은 아니잖아요. 반쯤 신인 거예요. 사탄이라든지 말이죠.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신은 아닌 어떤 존재들에 대해 이런 횔덜린이나 하이데거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헬라 로마 신화에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따지고 보니까 성경 안에도 그런 존재를 전제하고서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이잖아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유령 같은 것들이 많이 나오는 게 다 반신에 속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야 될 것이, 철학자나 시인들이 봤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해명될 수 없는 이 세계의 어떤 것들이 비밀스럽게 있다는 것을 본 거예요. 그러니까 세계의 비밀 속으로 자꾸만 들어가서 설명을 하려다보니까 반신과 같은 존재를 전제화 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성경에 나오는 천사도 마찬가지 인거예요.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인간으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메신저와 같은 어떤 존재를 설정했는데 그게 바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와서 어떤 이야기하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어떤 이야기하고 그런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거룩한 두려움, 하나님 앞에서의 충격, 시인들의 반신과 같은 표현들, 이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비밀, 그것 앞에서 느끼는 절망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기운, 새로운 생명,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을 염두 해두시면서 성경을 읽으시면 조금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5월 첫 번째 수요일에 같이 모여서 욥기 4장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의 온갖 것들, 행복한 일이나 불행한 일들,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시간의 모든 신비들. 주님, 우리가 알고 있는 짤막한 지식으로 모든 것을 단정하며 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오늘의 이 세상만이 아니라, 종말까지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 때에 이 모든 비밀들을 환히 밝혀주실 그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부활의 신비를 안고 그 하나님을 향해서 아니,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의 문을 열고 매일매일 새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각자 처한 형편 가운데서 다 주님의 귀한 제자로 성장 하도록 도와주시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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