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1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공부하겠습니다. 욥기 5장입니다. 엘리바스의 충고 두 번째 장입니다. 4장부터 5장까지 연관되는 건데 성경의 장수가 나누어져 있으니까 우리도 나누어서 봅니다. 지난주에 4장을 보았고 오늘 5장을 봅니다. 4장에서는 처음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점잖았어요. 엘리바스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젠틀하고 합리적이고 자기 삶의 경험이 많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의 충고였어요. 첫 장면이라서 부드럽게 나오는데 5장에는 조금 더 강하게 앞으로 나아가네요. 몇 번 정리를 했습니다만 다시 한 번 정리하는 뜻으로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욥이 있고 주변에 친구들이 있어요. 친구 세 명, 어린 후배 한 명, 그렇게 네 명이 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쁜 거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다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로운 말씀이 많아요. 이 친구들의 말이 얼토당토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유대의 역사에 켜켜이 쌓여있던 그들의 신앙과 지혜가 다 녹아있는 거예요. 이러한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는 오늘날도 목사님들에게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인 거예요. 설교를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나쁜 게 아니에요. 나쁜 건 아니고 일면 좋은데 어떤 경우에는 이게 나쁘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살이도 그렇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런데 오묘해서요. 그리고 아무데나 막 적용시키게 되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을 나쁜 놈들로 보지 말고 건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했었던 사람들(건전한 것뿐만 아니라 열정을 갖고) 그리고 굉장히 존경을 받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걸 전제하고 읽으셔야 돼요. 그런 그들이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지혜로 모든 걸 제단하고 욥을 윽박지르는 거죠. 여기에 대해 욥은 ‘그게 아니다! 그걸로 다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심연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욥기서 자체가 굉장히 깊어요. 말씀을 읽겠습니다. 1절부터 27절까지입니다.


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8.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16.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구약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죠. 신약도 당연하고요. 그런데 그게 한 가지 색깔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서로 충돌해요.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몇 천 년 동안 유대인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차이가 있다고 하는 걸 어렴풋이는 알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연관성 있게 생각을 해요. 옳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 아니라 하나님이 일관성 있게 모든 성서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된 걸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일단 다 모르고요. 그건 당연하죠.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고 창조와 종말 전체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 말 이해하시겠어요? 종말까지 자기를 드러내시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아직까지 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종말에 가서야 확연하게 드러나게 돼요. '이런 것들은 신학적인 개념이고 철학적이다. 그래서 그게 우리의 신앙과 연관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기가 골치 아프면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 더 세밀한 깊이에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종말에 가서야 다 드러난다는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성서 전체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그걸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아직은 부분적으로만 아는 거다.’ 이 문제들은 신학적인 거라서 여러분들이 충분하게 신학적 훈련을 받아야 종말,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심, 계시, 이런 것들을 조금씩 따라갈 수 있는데요. 우리 일반 신자들이 언제 신학공부를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학 공부를 먼저 공부한 사람이 설명할 때 알아들을 필요는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그런 걸 귀찮아해요. 그리고 하루하루 신앙생활 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쫓기기 때문에, 신앙생활만 아니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쫓기기 때문에 다른 건 골치 아프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 때가 돼야 안다고 이야기했고요. 종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거예요. 모든 신앙은 종말론,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에스카톨로지(eschatology)라고 해요. 그 관점을 토대로 놓고 모든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부활 사건도 종말론적인 사건이에요.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외워두세요. 예수 부활은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건 남에게 보이기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세계는 말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래요. 말속에 들어오기도 하고 말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걸 알고 깨닫고 경험한다는 것을 자기가 언어로 다시 표현하지 않으면 그건 진짜 아는 게 아닌 거죠. 그렇게 중요한 건데 그게 차츰차츰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그쪽으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이게 사실은 학부 4년, 신대원 3년, 석사 2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잘 안 들어와요. 그냥 학점 받고 레포트 쓰는 것까지는 가능한데 그게 실질적으로 어떤 건지에 관해서는 약간 따로 나는 거예요. 그래도 그 과정을 잘 거치면서 노력하고 신앙적으로 이야기하면 성령의 도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만나는 순간이 있는 거죠.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실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종말 때까지 하나님은 자기를 계속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에 아직 종말이 다 안 왔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모른다? 모르는 건 아닌 거예요. 알되, 구약을 통해 아는 거고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아는 거죠. 예수를 알면 하나님을 총체적으로 안다고 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요.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우리가 현재 다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종말까지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시고 우리가 기다리면서 가까이 간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해요. 어떤 때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어떤 때는 심판의 하나님이에요. 어떤 게 옳습니까. 그리고 이방인들을 다 때려 죽여야 된다는 말도 있고 이방인까지 하나님께서 다 사랑하시니까 그들에게 하나님 뜻을 잘 전해야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욥 이야기에서도 서로 충돌하고 있는 거예요. 진리 논쟁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누구냐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생각을 하고 논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 목사는 하나님을 저렇게 이야기 하는데 이 목사는 이렇다.’ 그런 것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욥기서 공부를 통해서 그런 충돌의 한 부분을 읽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겁니다.


1절 보세요. 엘리바스가 욥에 대해 냉소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너 부르짖어봐. 네가 열이 나서 잘못한 것 없다고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인데도 생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떠들고 있는데 응답할 자가 누가 있겠냐.’ 욥을 향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거죠. ‘아무도 동의할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1절 후반절에 보면 ‘거룩한 자 중’이라고 나오죠. 이 거룩한 자는 천사와 같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천사와 같은 존재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천사라고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요청에 의해서 그런 천사, 사탄 등을 이야기 하는 거죠. 이걸 이렇게 말하면 조심스러워요. ‘그럼 천사와 사탄이 없다는 말이냐.’, ‘그건 우리의 창작물이라는 거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이 궁극적인 비밀은 종말에 가서야 드러날 텐데 그 때까지는 차츰차츰 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알아가는 과정이 하나님이 자기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계시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나타내심과 우리의 응답, 우리의 인식,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알아가게 되는 거죠. 여기 거룩한 자는 천사 같은 종류를 가리키는데 인간 중에서도 그렇고 천사에 관계된 그러한 존재들 중에서도 너의 말에 기울일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굉장히 강하게 표현하는 거죠. 왜 그럴까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서로 신뢰했던 가까운 친구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욥이 어려운 일에 처했다고 해서 굉장히 멀리서 온 친구들인 거거든요. 북쪽 끝, 동쪽 끝, 남쪽 끝에서 온 지체 높은 선생들인데 지금 욥에게 ‘네가 말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고 네 말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왔었던 유대교의 전통에서 욥이 어긋나 있는 거예요. 욥 스스로도 답답했을 거예요. 사실은 욥도 자기가 배운 것이 친구들의 이야기 안에 있었어요. 같은 부류예요. 경건한 유대인, 성실하게 살았던 전통에 있었는데, 아마 입장을 거꾸로 놓으면 욥도 엘리바스처럼 이야기 했을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당하게 되니까 이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욥의 자기의 반응, 발버둥, 이런 것들은 그 당시에 호응을 얻기가 정말 어려운 거예요.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에 000집사가 욥 그림도 올리고 코멘트를 인상 깊게 달았어요. 이런 거예요. 욥이 한, 두 마디 친구들에게 들었던 게 아니라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가 옳고 대중성을 가지고 있는 올바른 이야기인데도 그걸 용납할 수 없는 이 짐을 지고 가는 욥의 신앙적 실존이 굉장히 깊었겠구나.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그렇게 코멘트 한 걸로 기억해요. 그러니까 욥을 읽으면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런 쪽으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이거는 다른 어떤 삶의 정황 속에서 나오는 몸부림이기도 하고 설득이기도 하고 논쟁이기도 한 겁니다.


1절이 그런 이야기예요. ‘자네가 한 이야기는 미안하지만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참 딱하게 된 거예요. 2절,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네가 화를 내면 되냐.’ 욥이 하나님 앞에서 화내고 있는 거예요. 사실 이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하고 회개하고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유대인의 경건한 사람의 자세고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은 분노하고 있거든요. 자기에게 처한 운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예요. 이걸 나의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그렇다는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고 분노를 하고 있는데 엘리바스가 볼 때는 욥의 태도가 어리석은 일 인거죠. 그래서 그 뒤로 계속 7절까지 말하고 있어요. 욥이 당한 처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4절에 보면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원하는 자가 없다.’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 재판 받는 곳이에요. 억울한 일을 당하면 풀어주기도 하는 곳인데 '성문에서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구해줄 사람이 없다. 욥 네가 행동하는 게 그 꼴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6절도 엘리바스가 충고하는 거예요.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그냥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잘 안 들어오죠. 재난이나 고생은 이유 없이 나오는 게 없다는 이야기예요. ‘티끌에서 저절로 나와서 네가 고난 받는 줄 아느냐. 흙에서 이런 게 나와서 이유 없이 저절로 그런 일을 당했는줄 아냐. 그게 아니다.’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죄, 잘못한 것 때문이라는 거죠. ‘그걸 좀 깨달아라. 네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설득력이 있죠. ‘어려운 일 당했을 때 뻔뻔스럽게 그렇게 하지 말고 분명히 이유가 있으니까 하나님께 회개해라.’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보면 6절되는 항목 보십시오. 그 이야기가 바로 지금 제가 설명한 그겁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많이 벌어지거든요. 목사가 설교할 때도 그렇지만 상담이나 신자들 목회할 때도 조심스러워야 돼요. 너무 답을 주려고하면 문제가 많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게 쉽지가 않은 거예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굉장히 섬세하잖아요. 다르고요. 그런데 그걸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재단하듯이 '뭐해라, 뭐해라' 이렇게 하면 오히려 영혼의 상처가 되기가 아주 쉽습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을 독일어로 제일조르게(seelsorge)라고 표현합니다. 제일레(seele)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소울(soul) 이런 뜻입니다. 조르게(sorge)는 염려, 근심이고 이 두 단어가 합해져서 독일 교회에서 목회라고 할 때는 제일조르게(seelsorge),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도 똑같은 피조물이잖아요. 인간이기 때문에 아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감정적인 면에서도 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신자들의 영혼의 돌볼 수가 없어요. 기본적으로 없습니다. 그건 성령의 일이고 목사는 옆에서 조금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어떠해야 하는지 그런 정도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런데 많은 경우에 목사가 강단이나 다른 자리에서 재단하듯이 말을 해서 신자들의 영혼이 상처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혼하면 안 돼!'하면서 큰소리치는 설교자들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혼해야할 여자와 남자에게는 그 말이 구원이 아니라 저주의 말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이야기하는 대중적인 목사들도 많이 있어요. 그런 것들도 복음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거예요. 제가 이혼, 동성애를 옳다 그르다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것만 알고 있고 몇 사지 신앙적인 명제만 알고 있는 사람이 그걸 기준으로 해서 일반화 시켜서 신자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은 목회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떨어질 경우가 많습니다. 엘리바스의 태도가 그거예요. 굉장히 젊잖고 전통 있는 이야기예요. 그래도 그건 욥에게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8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욥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짚은 거예요. 자기의 경험에 따르면 욥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 엘리바스의 말을 그 당시 유대 사람이 들었다면 당연히 동의하는 거예요. 이제 두 번째 단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굉장히 옳게 상담을 하고 있는 거예요. 8절에 재밌는 표현이 있죠.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이 하나님이라는 한 단어가 원어로 들어가면 다른 단어예요. 앞에 있는 건 ‘엘’이라는 단어고 뒤에 있는 건 ‘엘로힘’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두 가지가 구분 되서 번역이 안 되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으로 했어요. 왜 이렇게 다른 단어를 쓸까요?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뉘앙스가 각각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번역은 완벽하게 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번역이에요. 그래서 고대 히브리 사람들이 쓰던 모음이 없이 자음만 있었던 언어를 가지고 번역을 해야 되니 이게 어려움이 많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번역은 대충 따라가는 거예요. 한 7, 80% 전달이 되면 잘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이라고 하는 단어는 그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쓰던 어떤 명칭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만 하나님을 ‘엘’이라고 부른 게 아니라 고대 근동, 중동 지방의 많은 다른 사람도 ‘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엘로힘’, ‘엘’, ‘바알’, ‘아도나이’, ‘야훼’ 등등 많이 나옵니다. 그러한 이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가운데서 독특한 근동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신에 대한 개념들을 다 부정한 건 아니에요. 상당한 부분에서는 좀 받아들였어요. 굉장히 미묘한 거예요. 우리 공부시간이니까 상식적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종교의 어떤 것이 들어와서 뒤섞이게 되면 혼합주의가 되는 거예요. 이건 본질이 변하는 거예요. 그러나 다른 생각, 사상들이 들어와서 더 새로운 차원으로 하나님의 이해가 고양되면, 혹은 들어 올리게 되면 그건 혼합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발전되는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자쪽으로 많이 발전한 거죠.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은 유목신이에요. 하나님 상(像)이 유목민과 농경민이 좀 달라요. 유목민에게 하나님은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양들을 먹일 푸른 초장으로 안내 해주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농경민에게 중요한 것은 농사짓는 거잖아요. 농사에 필요한 것은 비가 적절한 시간에 내려야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고’하는 구절이 신명기인가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가나안에 정착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확장된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잡하죠? 하지만 복잡하지 않게 들리시죠.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연관되는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한 줄기만 있었던 게 아니라 서로 충돌하면서 깊어졌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엘’과 ‘엘로힘’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15절까지 ‘그 하나님이 누구냐. 그 하나님을 통해서 해결해라. 너 혼자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통해서 해결해야 하지 않냐.’ 그런 굉장히 바람직한 대답을 해주는 거예요. 9절부터 12절 보십시오. 굉장히 은혜롭죠. 9절부터 보세요.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신다.’,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낸다.’, ‘가난한 자를 높이신다.’ 13절에 보면 ‘지혜로운 자가 자기 계략에 빠지게 하고.’ 그리고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손에서 구출해 주신다.’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이고 옳은 이야기잖아요. 이렇게 욥에게 ‘봐라.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이런 분인데 너 죽을 지경이 되지 않았냐.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들어 높일 텐데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도움을 받아서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하지 않냐.’ 좋은 뜻으로 권면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제가 욥이라면 친구가 이런 정도로 권면을 한다면 ‘내가 너무 힘들어서 깜빡 놓친 것 같은데 자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렇게 따라갈 가능성이 많아요. 틀린 이야기가 하나도 안 하잖아요. 16절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을 하네요. 엘리바스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다.’ 가난한 자는 욥의 형편이에요. 완전히 망하고 죽을 지경이니까요. '희망이 있으니까 하나님께 돌아가라.' 이런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참 좋은 이야기인데 지금 욥에게는 이 말이 교언영색인 거예요. 말만 그럴듯하고 실체는 없는 거예요.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엘리바스라면 욥과 같은 친구에게 가서 비슷하게 이야기했을까?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하진 않았겠죠. 어쨌든 엘리바스는 저보다도 더 신앙적인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설교를 한 거죠.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 한 겁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마지막 단락입니다. 17절에서 27절이에요. 이 부분에서도 정말 은혜로운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는 엘리후의 입장이 나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 중에 엘리후의 입장은 ‘이 고난이란 하나님의 훈련이다. 잘 받으면 신앙적인 어른이 된다. 교육적인 차원이니까 잘 받아라.’ 얼마나 이게 은혜로운 겁니까. 오늘날의 대다수 기독교인들도 이런 차원에서 생각을 할 거예요. 구절구절이 참 그렇습니다. 18절 보세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이런 거 아마 여기 말고도 성경에 다른데도 나올 것 같아요. 잠언이라든지 비슷한데 많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어떤 속담 비슷한 걸 빌려서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재앙이 미치지 않게 한다.’ 그러니까 ‘자네가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은 다 하나님이 너를 더 크게 쓰시려고 하는 훈련이다.’ 그런 뜻이죠. 이렇게 쭉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게 유대인의 전통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어려운 말이 뭐가 있을까요? 23절 보십시오.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이것도 번역이기 때문에 약간 다른 건데요. 번역에 따라서 돌이 아니라 천사로 번역된 것도 있던가요. 성경도 여러 가지 번역이 있어요. 그래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돌이 너와 언약을 맺고’ 이게 약간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인데 어쨌든 하나님을 통해서 잘 된다는 이야기죠. 25절 ‘내 자손이 많아지며’ 이런 식으로 쭉 나가요.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욥의 이야기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어려운 일을 당하다가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더 잘 믿어서 나중에 갑절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 말하고 이 부분이 좀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을 그렇게 읽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거는 욥기의 반대 이야기예요. 어떻게 해서 잘됐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절망의 문제는 유대교 신앙 전통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더 깊이 있는 거라고 이 욥기가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27절. 엘리바스가 이제 젊잖게 결론을 내리죠. ‘여보게 봐라. 우리가 연구한바’ 하나의 전통인 거예요. 그러니까 학파죠. 유대교 지혜 학파에서 연구한 바가 ‘내가 지금 설명한 이대로다. 자네도 동의하지?’ 같이 공부 했을테니까요. ‘그러니 이제는 네가 깨달아서 잘 해봐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참 세련된 결론을 내렸어요.


이런 정도로 어떤 권면이나 충고를 주는 것도 참 대단한 거예요. 훌륭한 지혜의 스승입니다. 이렇게만 해도 괜찮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사실은 이런 주장들이 다 설교하고 관계된 거예요. 교회, 신앙에 관계된 문제니까요. 실제 삶에 당하는 문제와 하나님과의 관계, 개인의 영성이 두루두루 다 연결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까지 전통적인 것을 잘 가르치고 ‘이대로 살면 됩니다. 기도합시다.’만 해도 원만하게 해결이 되는 거예요. 해결된다기보다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다는 거죠.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겁니다. 이러한 건전하고 원만한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인간 삶의 깊이가 있는 거죠. 그러면 목사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요? 엘리바스 정도로 도움을 주는 것만 하더라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하나 깊이 있는 것들은 목사가 도움을 줄 수가 없어요. 사람이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목사가 신자들에게 목회, 영적인 안내를 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안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실제로는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엘리바스의 길이 있고, 이건 일반적인 길입니다. 전통을 잘 가르쳐주면서 ‘어떻게 해라.’ 그런 길이 있고요. 그리고 저처럼, 저는 어떻게 하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들어주기만 하고 ‘난 잘 모른다. 알아서 하십시오.’ 이런 건데요. 그래서 설교할 때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되냐.’ 이런 문제는 제가 거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건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건 그 사람만이 어떤 영과의 소통가운데서 결정해서 가야될 그 부분까지 제가 몇 가지 기준으로 딱 재단해서 말을 한다는 것은 엘리바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나쁜 건 아닌데 그게 경우에 따라서는 나쁘게 작용하니까 그런 설교나 목회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데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서 그런 정도로 만족을 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들 욥기 5장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2300년 혹은 2500년 그 전에 고대 유대인들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내려온 이 말씀이 정말 놀랍도록 생생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일반적인 배움의 전통에 묶여서, 그것이 소중하기는 하되, 거기에 경직되어서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그리고 모든 우리들의 삶의 실존들,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될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지 않도록 저희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약함을 주님께 아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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