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20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가 공부해야 될 차례가 욥기 제 6장입니다. 벌써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첫째 시간에 다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윤곽은 알지만 한 장, 한 장 세밀하게 공부하는 것으로 더 깊이 있게 알게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전체의 윤곽을 잡았다면 이제는 부분적인 것들을 다져가는 겁니다. 이러한 부분적인 것을 다져가지 않으면 전체적으로 알았던 것도 희미해질 수 있고요. 그게 확실한 토대를 이룰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세밀한 공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건 일반 공부도 마찬가지고 신학도 그렇고요. 꾸준하게 하나하나, 때에 따라서는 지루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하고 거치치 않은 사람이 길게 보면 큰 차이가 있어요.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건 조금 아쉬운 겁니다. 그냥 마음이 뜨겁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어요. 그것도 아름다운 겁니다. 그러나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정말 치열하게 투쟁하다시피 하면서 밑바닥을 다져온 신앙의 컨텐츠가 있거든요. 그것을 아는 사람하고 모르는 사람하고는, 처음 당장은 이런 거 몰라도 열심을 내서 은혜 받았다고 해서 교회 생활 잘할 수 있어요. 또 인격이 되어 있으면 교회 안에서 존경받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거로는 길게 신앙생활로 가기가 힘든 거예요. 채워지지가 않는 거죠. 다른 길이 없어요. 신학 공부 내실을 기하는 게 최선입니다. 지금 우리가 욥기를 공부하고 있는데 기본 구도는 간단한 겁니다. 그건 앞에서도 몇 번 말씀드린 거예요. 그래도 우리가 한 장, 한 장 짚어가면서 전체 구도의 내용을 채워 가면 욥기 정말 내 것이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차곡차곡 쌓이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은 아니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종의 수행으로써의 공부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십시오. 첫 번 패러그래프요. 간단하게 다시 한 번 요약을 한 겁니다. 이 욥기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임하는 재앙이 뭐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혹은 ‘이런 일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임한 이 대재앙이 뭐냐.’ 이런 것들을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성경입니다. 이건 신학적인 논쟁인 거예요. 여러분들이 느끼셨죠? 욥의 친구들이 하는 논리와 욥의 대답 그리고 지금 초기 단계예요. 우리가 오늘 볼 것은 욥의 처음 대답인데 이게 반복됩니다. 쭉 나가면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입장이 서술되죠. 그 때가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 세 명,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새까만 후배 엘리후 그리고 욥처럼 서로 말을 주고받듯이 하시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이 사람처럼 하시는 건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고유한 자기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이 있어요. 그걸 계시라고 이야기하는데 사람을 통해서도 하고 이런저런 것들입니다. 그건 그런 정도로 접어두고요. 어쨌든 하나님께서 맨 나중에 어떤 결론을 내리시는 겁니다. 신학적인 논쟁인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욥기를 끝까지 읽어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이런 재앙이 왜 내리냐에 대한 대답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대답이 없어요. 그걸 모릅니다. 그리고 속 시원하게 하나님께서도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욥도 대답을 얻지 못해요. 못 하지만 답을 얻어요. 그걸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 단계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모든 삶의 요령들을 성경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성경이 일일이 대답해주지 않아요. 부분적으로 대답해 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모든 대답이 주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그 역설이 성경에 있는 겁니다. 그게 옳은 길이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욥기가 대표적이에요. 우리가 마지막까지 다 읽어도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지만 욥의 문제가 해결 돼요. 구체적인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근본 문제가 해결 되어 버립니다.


지금 친구들하고 논쟁을 시작하는 건데 ‘왜 그러냐.’는 것이 자꾸 나오잖아요. 욥의 친구들은 자꾸 이유를 대려고 하죠. ‘이런 재앙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를 알고서 회개할 건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에게 교육적으로 징계하는 거니까 정신 차리고 잘해서 참고 기다리면 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런 게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 모든 인간의 삶을 다 해결할 수 없는 건데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절대적인 기준을 갖고서 이 욥의문제를 해결해 보려니까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그 정도만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그건 틀린 건 아니에요. 유대인의 지혜니까. 그런데 그 잣대로 욥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된 겁니다. 이 대답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결국 하나님의 어떤 선, 정의, 통치 등이 부정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다. 이것이 욥기가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런 정도까지의 신앙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로 현실성이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이 욥기는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깊은 차원의 신앙을 이야기하는 성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가장 깊다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고 거기에 닿아있는 거죠. 아브라함의 믿음도 정말 깊은 거죠. 오늘 우리는 엘리바스의 두 장에 걸친 욥에 대한 충고에 이어서 욥의 대답인 6장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1절에서 30절까지 있어요. 재밌습니다. 혹시 집에서 읽어보신 분계신가요? 공부의 첫 걸음은 읽기예요. 뭐든지 읽기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가면 쓰기예요. 읽기, 쓰기, 이게 모든 공부의 핵심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서 읽기, 쓰기 하잖아요. 정말 좋은 공부입니다. 신학 책도 많이 읽어야 되고 써야 되고, 신학책을 그대로 받아쓰는 것도 좋고요. 그리고 자기가 이해를 하면 논리적으로 글쓰기 하는 것도 좋고요. 그러면 점점 더 신앙과 신학의 영성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용 생각하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전체로 네 문단으로 나눌 수 있어요. 친절하게도 성경이 그렇게 문단을 나눠주네요. 동그라미로 표시 해서 끊어주죠. 거기로 끊어서 보면 구도가 잡히게 됩니다. 1절에서 7절이 한 문단이에요. 그리고 8절에서 13절, 14절에서 23절, 24에서 30절까지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문단에서 엘리바스의 충고를 받고 욥의 마음은 사실 굉장히 답답한 거예요. 어떻게 자기의 입장을 설명할 길이 없고요. 아무도 자기를 이해해줄만한 상황이 아니에요. 그 당시의 유대인들 사고방식, 하나님 신앙에 의하면 욥은 정말 저주 받은 거고 뭔가 문제가 있어서 크게 돌이켜야 되는데 자기는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자기 입장을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정말 어렵다는 것을 1절에서 7절까지 토로한 겁니다. ‘무겁다. 무겁다.’ 그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3절에 보면 그렇게 표현해요.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이게 문맥이 좀 안 맞죠. ‘경솔하다’는 번역은 조금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을 찾아봤더니 조금 잘 되어있어요. 쭉 이야기하다가 그 부분에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의 말이 거칠었다면 그 때문이리라.’ 앞에서 욥이 굉장히 거칠었던 것 기억하시죠. ‘내 생일이 저주 받았어야 되는데.’, ‘나를 임신한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정말 말해서는 안 되는 그런 정도로 거칠게 이야기 한 것은 ‘정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 파멸과 고통 때문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힘든 거예요.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내가 뭐 잘못한 게 있겠지.’ 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넘기거나할 텐데 욥은 어떻게 보더라도 자기에게 임한 재앙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4절에서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화살이 나에게 박혔다.’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전능자의 화살이 박혔다.’ 여기서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전능자라고 이야기했어요. 특별한 히브리어 단어가 있는데 제가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전능자의 화살’이라고 하는 이유는 어떻게 피해볼 도리가 없는 그 상황을 이야기하는 거죠. 고양이 앞에 쥐라고 할까요. ‘전능자의 화살이 자기의 몸을 뚫고 들어왔다.’ 그렇게 지금 자기의 입장을 토로합니다. 5절에서 7절까지는 그것을 좀 문학적으로 표현하네요. ‘내가 쓸데없이 투덜거리는지 아느냐. 먹을 게 있으면 소가 울겠냐. 정말 상황이 이래서 말하는 거 아니냐.’ 그런 뜻입니다. 7절에서는 ‘자기의 모든 음식이 매스꺼울 정도로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게 아주 거칠게 자기의 처한 입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욥 옆에 누가 있었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좀 불편했을 거예요. ‘왜 그러냐. 그렇더라도 좀 겸손하게 잘못했다고 하고 회개하고 다시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왜 뻗대고 있냐.’ 옆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욥이 어쨌든 지금 그런 상황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락 8절에서 13절입니다. 자기의 입장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자기가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정도입니다. 9절 보십시오. ‘내 소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정말 혼자뿐이다.’ 그렇게 8절에서 이야기하면서 9절에서 ‘나를 멸하시면 좋겠다. 나를 죽여주셨으면 좋겠다.’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자기에게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욥이 그만큼 고통스러워서 그랬을까요. 보통 우리도 너무 힘들면 ‘죽는 게 낫지.’ 하잖아요. 자살하는 사람도 대개 그런 심정 아니겠습니까. 욥도 너무 힘드니까 ‘이럴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런 생각이었을까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게 설령 있었다고 해도 작은 부분이고 욥은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10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죽여주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내가 위로를 받고 기뻐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10절 후반절에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을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욥이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듯이 ‘나는 재앙이 원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한 죄 때문에 재앙을 받는 게 아니라고 하는 점, 그런 점에서 떳떳하다.’ 그걸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기뻐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조금 더 나아가서 해석할 수 있어요. ‘내가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게 좋겠는데 그래도 내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계속 자기의 의를 밀고 나가고 있어요. 대단한 확신이네요.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떳떳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욥은 자기가 재앙을 받을 정도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붙들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 할 겁니다. 그게 두 번째 단락 이야기예요.


세 번째, 14절에서 23절까지 단락입니다. 이제 자기 입장을 이야기한 다음에 당연히 친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한 다음에 자신에게 충고하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서 이야기하죠. 세 번째 단락과 네 번째 단락이 다 그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반쯤은 자기가 처한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후반부에서는 친구들에게 반론을 피는 겁니다. 욥이 볼 때 친구들은 자기에게 별로 도움이 안돼요. 가르치려고만 하고 이유를 설명하려고만 해요. 친구에게 욥이 기대하는 것은 이해해주는 거거든요. 정말 친구라고 한다면 ‘넌 뭐가 문제니까 고쳐서 하지 말도록 해.’ 이렇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그러잖아요. 부부사이에서도 많이 그래요. 일이 잘못됐을 때 ‘왜 그랬냐.’ 그렇게 시작해서 부부싸움도 하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상태 그대로 이해해주는 거죠.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을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충고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였다는 것을 지금 욥이 이 세 번째 단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문학적으로 설명하네요.


15절에 보면 ‘개울물처럼 변덕스럽다.’, ‘요동치는 개울물과 같다.’ 그리고 17절에(거기는 건조한 지역이 많으니까) ‘물이 있다가도 빨리 없어지는 그런 거다.’ 18절에 보면 ‘대상들’ 대상들은 사막지역에서 낙타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그 대상들이 목이 마르니까 길로 가지 않고 물을 찾아 광야로 갔다가 길을 잃고 행방불명되는 것처럼 근거가 없다고 그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친구들의 이러한 입장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이 나타나요. 우리들에게는 어떤 전이해가 있어요. 어떤 틀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렇게 저렇게 평가를 많이 합니다. 이게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영혼에 상처를 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종교 전문가들, 목사들이 제일 많이 그럴 것 같아요. 자신이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종교적 지혜예요. ‘지혜자다. 선생이다.’ 그런 생각으로 신자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이면(상담을 했든 안 했든)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재단하고 평가하고 어떤 방향을 제시하려고 많이 합니다. 신자들은 그런데 길이 들어서 그런 말을 듣고 위로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툭하면 ‘기도 안 해서 그래.’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방식, 어떤 종교적인 처방을 일반화 시켜서 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 이거는 그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죽이 것에 가깝습니다. 방금 말씀대로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이게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걸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심지어는 ‘네가 헌금 떼어먹어서 그래.’ 이런 식으로까지 나가지 않습니까. 그런 거 따지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습니까. 대부분의 교회 생활이 그런 것으로 계속 연결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우리 영혼이 사는 길이 아닌 거죠.


이런 점에서는 저도 설교자로서(설교도 일종의 욥기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학 논쟁인데) 이렇게 저렇게 처방을 하는 것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하면 무책임하게 기독교 신앙, 교리들만 이야기하고 삶의 구체적인 처방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좀 하전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게 좀 긴장이 있는데 그러나 저는 처방은 각자가 해야 한다. 자기가 처해있는 삶의 자리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목사가 하나님도 아닌데 다 어떻게 처방을 하겠냐.’ 이런 입장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독교 신앙, 하나님, 하나님의 미래, 부활, 십자가, 하나님 나라, 칭의, 그런 문제들을 성경에 직면하게 하는 거죠. ‘같이 보자. 어떤 세계가, 빛이 우리들에게 오는 것을 봐라.’ 그렇게 되면 구체적인 삶에서 자기가 찾아야할 것은 본인이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14절에서 23절까지 욥의 문제 제기는 그겁니다. ‘자네들은 나의 친구가 아니다. 자꾸 나에게 충고하고 처방하고 이유를 분석하려고 하는데 난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거죠.


마지막 24절에서 30절입니다. 결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욥이 친구들에게 자기의 입장을 조금 더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24절 보세요. ‘자네들 나에게 좀 말해 달라.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을 깨닫게 해서 내 입을 다물게 좀 해봐라. 자네들이 하는 이야기는 죄가 있기 때문이라든지, 교육적인 의미로 하나님이 징계를 내렸다고 하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말을 좀 해봐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25절이 참 재밌는 표현이죠.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말 자체만 놓고 보면 굉장히 세련되고 옳아요. 선한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고통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고통스러워 진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건 아니고 그 문제를 정말 깨닫고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게 필요하겠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그게 아니라 정말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그러한 고통입니다. 말은 이 친구들이 그럴듯하게 지혜자로서 뭔가를 이야기하는데, 그리고 욥기서가 계속 바탕에 깔고 있듯이 인간에게 임하는 재앙은 분명히 죄 아니면 교육적인 차원이라는 이 그럴듯한 말이 ‘나에게 고통스럽다. 정말 힘들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몇 가지 더 친구들의 행태를 말해요. 28절에 보면 이 친구들이 욥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제 원하건데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친구들이 외면한 거예요. 왜 외면했을까요. 자기들의 말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욥이라는 저 친구 상대할 수 없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유대교의 전통을 인정하지 않는 저런 친구(욥을 향해서)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냐. 그만 두자.’하고 외면한 것 같습니다. 아마 욥이 고통으로 인해서 판단력이 흐려져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면서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들을 향해서 욥이 ‘나를 봐라. 얼굴 돌리지 말고 나를 즉시해라. 나도 자네들 얼굴보고 내가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 그렇게 정색을 하고 친구들에게 자기 입장을 말합니다. 말하는 핵심은 29절입니다.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 일은 악하고 잘못된 거다.’ 왜냐하면 ‘나의 의가 건재하다.’ 이게 참 욥이 대단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요. 좀 두려울 정도예요.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정말 욥이라는 사람이 과연 실존 인물인 건지 신학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 성서 기자가 소설의 한 인물로써, 비유로써 내세운 건지 그것을 말하기 힘들 정도로 자기의 의를 딱 붙들고 있어요. 그렇게만 보면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내가 의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이건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욥 자체가 ‘나는 정말 손톱만치도 잘못한 거 없어.’ 이런 입장일까요? 그건 아닌 거예요. 그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실수나 이런저런 일로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지금 이것은 이걸 전제해야 돼요. 신학적인 논쟁이라는 것을 생각하셔야 됩니다. 논쟁을 하려면 그 주제가 첨예해야 하는 거예요. 두루뭉술 해갖고 ‘너도 잘못했고 나도 잘못했는데 비슷비슷하니까 대충 넘어가자.’ 이러면 논쟁이 되지 않습니다. 양쪽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은 정말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재앙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입장에 대립하는 것으로써 그런 관점이라면 ‘나는 정말 의롭다. 의가 살아있다.’ 그런 걸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감안하고 읽으셔야 돼요. 정말 신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누가 이야기하겠습니까. 그건 아닌 거예요. 어쨌든 욥은 자기 의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의가 어떤 건지 한 번 더 이야기해야겠네요. 그러니까 조금도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재앙을 받을 만큼의 죄가 없다. 그리고 교육적인 차원에서 재앙이 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거죠. 앞에서 했던 이야기와 반복되는 겁니다. 이런저런 상황으로 설명해 가고 있어요. 저도 이 욥기를 다 깊이 있게 파악을 하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것만큼, 공부한 것만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저도 공부를 하면서 깨닫는 게 많아지면 그걸 전해드릴 겁니다. 아직까지는 이 단계에 머물러 있어요. 몇 번 반복된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그것을 정리하겠어요. 재앙, 재난, 참사, 이런 것들을 인간의 죄, 혹은 인간을 교육적으로 단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입장에 대한 강력한 거부가 욥의 자기 의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끔 교회에서도 그런 실수를 범할 때가 많이 있어요.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은 정말 심판대에 서있다는 자세로 설교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툭하면 ‘하나님이 심판했다!’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있을 때 ‘봐라, 거기는 불교 국가라 그렇다.’라든지 일본에 재앙이 일어났을 때도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건 참 경솔한 겁니다. 그리고 일반 목회에서 신자들이 정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해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더 승리할 수 있게 하시는 시험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은 정확한 건 아니에요. 그렇게들 많이 하잖아요. 그러면 신자들이 위로를 받으니까 그렇게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런 말도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그냥 이해하면 되는 거예요. ‘아, 고난이 임했다.’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돼요. 자꾸 이유를 따지면 별로 위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나갈 길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 강의 요약문 마지막에 질문을 달았습니다. ‘욥의 자기 의에 대한 확신이 정말 옳은 건가.’ 혹시 우리가 유대교, 그들의 율법주의에 대한 하나의 비판으로써 이야기하는 ‘자기 의’ 바울이 로마서에서 많이 이야기했잖아요. 자기가 어떤 행함을 통해 의를 성취하려 했었던 그런 것은 아닌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건 아닌 게 분명한 거예요. 욥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만한 일을 했으니까 의롭다.’ 그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논쟁이라는 것, 인간의 재앙에 대한 기존에 내려왔던 관점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써 신앙에 새로운 영역을 연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 오늘 욥기 6장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점점 더 이 욥의 운명, 그리고 욥을 둘러싼 친구들의 충고와 욥의 대응, 그 세계 속으로 한발 한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주님, 이것이 고대 유대인의 한 문학작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그대로 살아 숨 쉬어서 우리에게까지 문자로 내려온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줄 저희들 믿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 살며 끊임없는 크고 작은 재앙, 재난, 어려운 시련, 그리고 주변에 여러 가지 재난, 불행들을 겪습니다. 하나님 허투루, 작은 생각으로 사람들과 혹은 불행을 재단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 뜻 안에서 순종하며 주님의 알려주시는 시간들, 그 뜻을 저희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이렇게 수요일 저녁 시간을 내서 함께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신앙의 길을 신앙의 친구처럼 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의 큰 은혜를 늘 넉넉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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