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27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는 욥기 7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이 욥기가 굉장히 오래 전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건 아실 겁니다. 일단 구약이니까 먼 거죠. 신약만 해도 굉장히 오래 전 말씀이에요. 2000년 아니면 1900년 전 정도니까요. 우리가 500년 전만 하더라도 굉장히 먼 이야기로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1000년도 아니고 1500년도 아니고 더 오래된 시대의 문자로 된 어떤 것을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하나의 고전 문학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거죠. 그런데 욥기는 더 오래된 거예요.(구약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아닌데) 욥기, 잠언, 시편, 이런 것들은 구약 중에서 조금 후대에 됐어요. 바벨론 포로 갔다 와서 그 뒤에 된 겁니다. 굉장히 오래된 거죠. 저는 이런 것을 읽을 때마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인데 어떻게 하나하나 살아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기록될 때부터 지금까지 200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2000년 세월이 흘러간다는 것은 분명하죠. 2000년 후대에 우리 후손 기독교인들이 아마 이 시대 ‘2010년대에 한국에 이런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었더라.’ 그런 것들을 옛날이야기처럼 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대부분이 다 잊혀져요. 유명한 책 등을 써서 이름을 남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다 지나갑니다. 2300년 내지 2500년 전, 욥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을 염두 해두면서 오늘 말씀을 촘촘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 1절부터 21절까지 있어요. 지난주에 이어서 욥의 대답 두 번째입니다. 엘리바스의 충고에 대한 대답을 6장부터 했고요. 7장까지 이어지는 건데 사실 대답이라기보다는 대부분 하나님께 하는 기도예요. 엘리바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동의하지 못해.’ 그렇게 하다가 이제 더 이상 엘리바스하고는 이야기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드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굉장히 과격해요. 불평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텐데 왜 이럴까.’ 그런 생각이 들을 정도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 내가 뭔가 알지 못하는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기회를 허락해 주시고 회개하니까 받아 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에게는 그런 게 안 보여요.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져서 죽고 싶다. 그런데 죽게도 하지 않으시고 정말 미치겠다.’ 속된 표현으로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기도가 자기를 신앙적으로 합리화해서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다른 사람이 그 기도를 들어도 ‘아 믿음이 있구나.’하는데 머물지 않고 자기를 적나라하게 그대로 표현하는 것, 아마 이게 더 건강한 기도가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저는 오늘 집에서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목사로 산다는 게 그런 점에서 굉장히 좋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설교를 정기적으로 해야 하고 설교 하려면 다른 책도 봐야하고 계속해서 신앙적으로 생각을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수요일이나 다른 때에 이런저런 강의 등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하는데 자기의 업무로써 공부를 하니까 목사는 행복한 직업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목사를 직업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니까 얼마나 좋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잘 전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여러 가지 생각 중에서 하나만 잠깐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 욥의 이야기는 단순히 욥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처절한 운명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다는 어떤 무신론자의 외침, 그런 느낌들을 중간 중간에 받았어요. 니체가 ‘신은 죽었다.’ 이건 신이 없다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신을 죽였다’고 이야기하는 건데요. 그러한 외침들을 조금 느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굉장히 처절한 기도네요. 지금 우리가 이런 사람의 입장에 처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류의 역사죠. 실제로 내 운명과 똑같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의 것처럼 생각해서 이런 말씀을 읽어야겠습니다. 네 문단으로 나눴어요. 1절에서 6절, 7절에서 10절, 11절에서 16절, 마지막으로 17절에서 21절, 네 문단입니다. 먼저 1절에서 6절, 여기서 욥은 보편 인간에게 나타나는 삶의 고통, 그리고 자기가 실제 당하고 있는 문제들을 섞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인간 보편에게 나타나는 거고 뒷부분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같이 연결되는 거예요. 1절에 보면 노동의 문제가 나와요. ‘노동이 있지 아니하냐.’ 일용직 노동자쯤으로 볼 수 있어요. 이 사람들은 하루 품삯을 받아야만 먹고 사니까요. 참 인생이 얼마나 처절하겠어요. 고대인들의 상황은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이야 건강하기만 하면 벌어먹고 사는 것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긴 하지만 옛날 2300년, 2500년 사람들에게는 정말 절실한 문제였어요. 그리고 사실은 인류의 먹는 문제가 해결된 게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농경사회에서 발전을 못했어요. 똑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지니까 땅에서 소출되는 게 많지 않고 퇴비로 합니다만 한계가 있고 산업화 이후 발전했는데 하여튼 먹고사는 문제가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지금도 사실은 다르긴 하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그런 문제가 여전할 수 있어요. 가난한 나라들을 지금 제가 짚을 필요도 없고요. 우리나라도 세계 경제 수준이 굉장히 올라갔지만 일부에서는 정말 어려운 상태라고 해요. 일전에 뉴스에서 세 자매가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실직을 오랫동안 해서 자기들의 인생이 필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또 노인들의 가난 문제도 점점 심각해진다고 하고요. 이런저런 먹고사는 문제, 노동 때문에 벌어지는 고통은 모든 인류에게 있는 일이고 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더 심각했습니다. 잠깐 여기서 짚고 있네요. 그러니까 욥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에게 있는 삶의 고통들을 여기서 잠깐 짚었습니다.


4절부터 6절 사이에 이제 욥이 자기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네요. 이 사람이 제일 힘든 게 뭐죠? 불면증이네요. 몸이 아프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받고 그런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불면증 있는 사람 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도 불면증 있는 사람이 제법 있는 것 같은데요. 나이가 들면 새벽잠들이 없어진다고 하잖아요. 잠이 전체적으로 준다고 하는데 저는 왜 잠이 안 줄죠? 조금 늦게 자는 편인데 그래도 잠 못 자서 불편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 욥은 불면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다가 5절에 보면 구더기가 피부에 들끓고요. 6절에 보면 ‘아무 의미 없이 빠르게 세월만 지나간다.’ 정말 죽음 직전의 상태입니다.


우리와는 먼 이야기죠. 우리는 별로 실감을 못 해요.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그 순간이 오거든요.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더라도 구더기가 피부를 먹죠. 언젠가는 우리가 죽어서 땅에 뭍이면 결국 구더기가 먹는 거예요. 세균들이 우리 몸을 먹는 것을 썩는다고 이야기하는데 결국 그 순간이 와요. 아까 제가 2300년, 2500년 이야기 했는데 4, 50년만 지나도 우리는 다 그렇게 되는데, 우리는 그 순간이 오는데도 아닌 것처럼 굉장히 편안하게 살고 있어요. 살아 있을 때 늘 그런 거 신경 쓰면서 힘들게 사는 것은 안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직면해야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늘 생각하면서 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여자 집사님 두 분이 호스피스 활동을 열심히 하시네요. 000집사님하고 000집사님이 훈련도 받고 일주일에 한 번씩 호스피스 나가서 봉사한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지만 모든 사람들과 정드는 것은 아니지만 서너 명씩 늘 죽어서 나가고 없고 안 보이고 그렇다고 합니다. 마지막 죽음을 준비하는 곳에 가서 준비하는 거예요. 결국 우리가 다 그런 길을 가죠. 지금 이게 욥 자기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은 욥만이 아니라 인류 보편에게 해당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7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이제 여기서 더 이상 욥은 엘리바스에게 이야기를 안 해요. 친구들하고 논의는 끝난 거예요. 그 다음 빌닷이 나옵니다만 일단 엘리바스와는 정리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뭐냐? ‘하나님, 난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스올에 들어가게 될 텐데 그럼 하나님이 나를 보고 싶어도 못 본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런 거예요. 배짱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고요. ‘자기는 마지막이다.’ 이게 불신앙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여기서 지킨다는 말이 몇 번 나오는데 잘 보호한다는 게 아니라 연결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계속 의식하고 있어요. 그게 괴로운 거죠.


9절에 보면 ‘스올’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입니다. ‘게헨나’라고도 하고요. 저 지하에 있는 아주 참혹한 어떤 곳을 ‘스올’이라고 합니다. 9절에 보세요. ‘스올에 내려간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10절,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그를 알지 못할 것이다.’ 구약에는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어요. 부활 신앙이 구약에는 없다고 봐야 됩니다. 죽음 이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나와요. 바벨론 포로 사건과 비슷한 시대에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어떤 것들이 조금씩 유대교 안에 자리를 잡지, 그 전까지는 살아 있을 때 만이에요. 죽음 이후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다 안 것은 아니죠. 어쨌든 ‘스올’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전,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선이었어요. 욥의 현재 심정이 굉장히 절박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락 욥은 11절에서 16절입니다. 욥은 11절에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 하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한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네요. ‘내가 불평 좀 하겠다.’ 그렇게 하나님께 터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욥이 지금까지 살아온 신앙의 행태와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사실은 이렇게 하면 안돼요. 초연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고 ‘어려움이 왔어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겠지.’하면서 잘 받아내는 것이 욥이 지금까지 배워온 유대교의 지혜 신앙입니다. 오늘도 다 그렇잖아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온다고 하더라도 잘 받아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옆에 사람들이 ‘집사님 믿음이 좋아. 그러니까 그렇게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는데도 하나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해.’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오늘 여기 욥기서에 의하면(저도 동의하는 바인데)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기 쉽지 않아요. 억지로 자기를 위선적으로 잘 보이게 하기위한 것은 옳은 신앙이 아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에 어떤 목사님의 설교문을 읽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11살인가 12살짜리 아이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삼풍백화점 무너질 때 죽었어요. 그래서 장례를 치르는데 거기 목사가 조문을 갔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슬프지만 나는 울지 않겠어요. 우리 부모님이 하나님 나라에 갔으니까 예수님 품에 안겨 있을 텐데 내가 슬퍼하겠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목사님이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그건 정상적인 게 아니다. 누가 시켜서 했던가, 아니면 교육을 오랫동안 받아서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옳은 신앙은 아니지 않나 잠깐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오늘 욥이 그러한 거예요. ‘나는 불평하겠다. 도저히 내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요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세 번째 단락의 세 번째 줄 보십시오. 제가 불평하는 요지가 뭐냐를 거기에 정리를 했어요. ‘왜 하나님이 자기를 마치 경찰이 범인을 지키고 있듯이 꼼짝 못하게 지키고 있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지키고 있으니까 내가 죽을 수도 없다.’ 그렇게 불평을 하는 거죠. 12절 보십시오. ‘내가 바다냐 바다 괴물이냐.’ 그 당시 바다라든지 바다 괴물은 악한 세력을 가리켜요. ‘왜 나를 꼼짝 못하게 지키고 있냐.’하는 본인 말대로 불평이고 호소입니다. 13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요. 앞에서 엘리바스가 한 어떤 이야기를 빗대서 하는 거예요. 욥기 4장 13절 보십시오. 거기 엘리바스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번거로울 때에(꿈을 꿨다는 거예요.)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다.’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존엄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쭉 그렇게 하면서 17절 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어찌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욥을 향한 충고죠. 자기는 ‘밤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대단한 존엄의 존재이시다. 그런데 욥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냐.’ 핀잔을 주는 거예요.


이제 그것을 빗대서 13절부터 욥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절,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여기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15절,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엘리바스의 경우에는 꿈, 환상, 계시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존엄을 높이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수 없다고 깨달은 반면에 욥은 같은 꿈과 환상을 보면서 ‘나는 죽는 게 낫다. 숨이 막히는 게 낫다.’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제가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욥은 지금 못 견디는 거예요. 그럴듯하게 신앙적으로 잘 해서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나중에 다시 복을 주신다. 지금은 징계지만 나중에 더 좋아질 거다.’ 이런 말이 듣기 싫은 겁니다. 용납을 못하는 거예요. 똑같이 꿈과 계시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엘리바스와 욥의 주장이 반대잖아요. 이러한 주장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에게도 그렇고요. 주변 다른 믿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하면 돼.’라든지 ‘이건 어떤 뜻이야.’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지혜롭지 않습니다. 그거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삶의 심연들이 있어서 성령과의 관계에서 본인이 잘 풀어나가야 하는 거고 우리는 옆에서 지켜봐 주면서 필요할 경우에 도움을 준다고 할까요? 그런 정도여야지 이렇게 가르치듯이 하는 것은(가르치는 게 필요할 때도 있어요.)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 엘리바스도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인데 욥하고 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결국 욥은 16절에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참 믿음 없는 이야기라고 들릴만해요. ‘나를 놓으소서.’ 이건 앞에서 지키신다는 뜻과 반대의 뜻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이 날 딱 붙들고 있어서 도저히 이 상황을 버텨낼 수 없다. 나를 좀 놓아 달라.’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 사람은 자살해서 죽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존엄, 하나님의 존재는 너무나도 뚜렷하기 때문에 그런 길은 선택할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있는 겁니다. 16절 후반절에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대단히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입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 있네요. 저는 이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 17절부터 21절까지예요. 이 부분도 사실은 앞에 있는 것을 조금 더 이야기하는 거예요. 17절이 재밌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많이 들은 이야기죠. 여기 말고 시편에 나오는 구절이에요. 시편 8편 4절을 보실까요. 이게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많이 알려졌던 하나의 신앙적인 명제, 혹은 속담 비슷한 거였다고 볼 수 있어요. 8장 4절 이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 구절을 욥이 지금 인용을 하고 있는데,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한 거예요. 욥기 17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마음을 두셨다.’ 참 사람이 특별하죠. 동물들과 비교가 안 됩니다. 마음을 주셨어요. 그것 때문에 사실은 힘들긴 한데 특별한 인간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한 대단한 그런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걸로 되어 있는데 똑같은 구절을 욥은 오히려 인간 운명에 대한 냉소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재미있죠. 똑같은 구절인데 하나는 찬양인데 하나는 냉소예요. 그렇게 이해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만 해도 그래요. 마음을 갖다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마음이 통하는 점에서는 동물이 행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잖아요. 그런데 마음 때문에 인간이 병들잖아요. 마음의 병에 의해서 트라우마가 되고요. 그래서 정상적으로 생활이 안 되는 경우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은 특별히 신경성 병들이 많은데 동물들에게 신경성 위장 장애 같은 게 있을까요?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게 특별한 능력이기는 한데 욥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 때문에 죽겠는 거예요. 냉소적으로 똑같은 구절을 욥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왜 나를 지키냐. 당신 때문에 내가 죽겠다.’를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표현을 여기 19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자기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거예요.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이게 어떤 영적인 상태일까요. 대충 우리가 이해는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심한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떨어진 운명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간 사람에게 있어야 될 상황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어요. ‘침을 삼킬 동안’ 잠시 동안도 놓지 않는 그런 하나님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다.’ 그런 겁니다.


20절에서 그러한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네요. 이렇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이건 친구들의 입장에서 자꾸 하는 이야기, ‘네 죄 때문에 그렇다.’ 이 입장이요. 여기에 대한 욥의 입장은 그겁니다. ‘나는 죄가 없는 사람이지만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정말 하나님께 적대적인 것은 아닌데 그것 때문에 내가 이런 운명에 빠질 만큼의 잘못이 되겠냐.’ 그런 이야기죠. 어떻게 보면 좀 뻔뻔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러나 확신 있는 사람의 자기 고백,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1절 후반절,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아까 9절에서 스올에 내려가면 오지 못한다는 말과 연관되는 이야기예요. 그 구절을 읽으면서 서론적으로 말씀드린 무신론자의 항변, 이런 것들이 읽혀지네요. 어떤 뜻인지 전달됐죠? ‘스올, 나를 찾아도 나를 볼 수 없다.’ 어떤 영역에는 신이 없는 거예요. 거기는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 아주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바닥으로 내려가 버리는 그것을 욥이 말하고 있네요. 어떻게 보면 욥의 현재 위치가 불쌍하기도 하고요. 오죽했으면 저렇게 이야기를 할까? 그리고 저거는 정말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었던 사람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진술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어영부영 믿었으면 이런 이야기 못해요. 적당히 넘어가려고 합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해가지고 용서받으려고 하지, 이렇게 끝까지 하나님과 단절을 감수하면서 ‘당신 나 찾지 못합니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데까지 자기를 밀고 들어가지는 못하는 거거든요. 어쩌면 하나님을 너무나 신뢰하기 때문에 자기를 던져 버려야 어떤 해결책이 있을 거라고 욥이 생각을 한 것일까요? 이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욥이 영적인 깊이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냥 대충 다른 사람 눈치보고 혹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지 않고 치열하게 신앙 속에서 살았던 사람의 어떤 고백과 진술을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예쁜 말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믿는 것처럼 시늉을 내는 어떤 표현들 있잖아요. 그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가는 게 중요한 거죠. 일단 욥은 그런 사람이에요. 표현은 어떻게 했든지, 굉장히 망발 비슷하게 불평도 많이 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과의 결속이 단단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침을 삼키는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으로 투명한, 그런 사람의 고백들을 우리가 읽어낼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2300년 혹은 2400년 전, 혹은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욥 이야기를,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의 그러한 하나님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에게 선포되는 이 놀라운 것을 저희들이 경험합니다. 또다시 2000년 지나가 버리고 말텐데 우리는 이러한 손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그 어떤 것으로 우리 존재의 토대를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와 만나시니 우리가 한 평생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그 이외에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신앙의 자세로 욥기 7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신앙과 그 외침을 듣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비밀스러운 그 관계, 깊이, 경험 속으로 들어가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각자의 모든 삶들을 주님께서 형편대로 선하게 인도하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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