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0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는 욥기 8장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이제 새로운 인물이 나와서 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충고합니다. 두 번째 인물이요. 첫 번째 사람은 엘리바스, 두 번째는 빌닷, 세 번째는 소발, 그리고 이 친구들과 끝난 다음에 나중에 끼어든 청년이 있는데 그 이름이 엘리후입니다. 먼저 본문을 읽겠어요. 22절까지인데 각 절이 짧아요. 전체적으로 한 쪽도 채 되지 않을 정도의 분량입니다. 1절부터 22절까지 읽겠습니다.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보통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성경, 종이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따로 있고 말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동일한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이에요. 그게 구분이 되세요?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있고 말씀이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자꾸만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고정된 실체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따라가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지난 주 설교 본문에서도 이사야가 성전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익숙하게 읽어서 자꾸만 하나님이 실체로 계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실체, 보통 섭스턴스(substance)라고 하거든요. 실체가 뭐냐를 연구하는 철학을 실체론적 형이상학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실체처럼 성경이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실체로서는 아니에요. 하나님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생각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어이고 말씀이고 통치이고 힘이고 미래이고 존재 근원이라는 이런 쪽으로 여러분들이 생각을 넓혀 가셔야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분으로 딱 끊어서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걸 넘어서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있고 말을 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 말이 곧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이건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죠.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그러잖아요. 로고스라는 건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신 거니까 그 로고스가 하나님인 겁니다. 이렇게 짧게 말씀드려가지고 공연히 여러분들 생각이 혼란스럽기만 할 것 같아요. 약간 염려스럽기는 한데 시간이 조금 지나가야됩니다. 지금 당장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가끔 들어두는 것은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천천히 기다리시면 되겠어요.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잖아요. 문자가 하나님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문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 내냐가 성경 읽기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내가 성경을 일독했다, 십독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자로 된 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 말씀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냐가 중요하고 핵심인 거죠.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성경을 바르고 성숙하게 이해하고 성서의 세계에 깊이 있게 들어가려면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돼요. 기본적으로 성서의 읽기를 바르게 해야 돼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 바둑아 바둑아, 개나리’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읽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텍스트를 읽는 게 필요합니다. 그것도 쉬운 건 아니죠. 우리가 앞 시간에 욥기 23장 10절에 보듯이 번역이기 때문에 오해되는 부분도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번역이 잘못된 것도 짚으면서 그 말씀 자체를 바르게 읽는 작업 필요합니다. 이게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주석이에요. 이 텍스트 자체가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다른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런 것들을 두루두루 살피는 작업을 주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학자들이 그러한 것들을 작업하고 우리는 그 책들을 읽음으로써 성서 텍스트의 깊은 의미를 찾아갈 수 있어요. 세 번째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가 됐죠? 첫 번째는 말씀 자체를 바르게 읽는 거예요. 두 번째는 그것의 상황, 성서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어떤 상황, 세계를 이해하는 것. 그게 주석이고요. 세 번째는 그러한 말씀들이 전체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의 공부도 필요합니다. 그건 주로 조직신학이 해요. 그러니까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흐름을 잘 알고 있어야, 이 성경 텍스트 부분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잘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게요. 보통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진술을 토대로 ‘창조의 원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남자, 여자 만드시고 그래서 부부가 되게 했고, 그런 걸 ‘창조의 원리’라고 딱 붙들고 이것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창조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물론 맞기는 한데 이 창조라고 하는 게(제가 언젠가 한 번 이야기 했겠습니다만) 첫 번째는 태초에 창조가 있고 두 번째는 보전(保全)이에요. 창조가 보전되는 것도 창조예요. 세 번째는 완성이에요. 태초의 창조도 창조고 진행되는 것도 보전인데(아까 진화론을 이야기했는데) 진화가 창조가 보전되는 거예요. 창조가 쭉 나아가는 겁니다. 그것도 창조예요. 조직신학에서 창조론을 이야기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점점 완성되는 단계까지 가게 돼요. 그런 점에서 보게 된다면 우리가 쉽게 ‘저 사람들은 창조의 원리에 어긋났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걸 두루두루 충분하게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따라가야 오해하거나 왜곡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굉장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중에서 대표적으로 오해되는 한 구절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어떤 구절일까요? 8장 7절 보십시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은혜롭지요? 기독교인들이 하는 사업장에 많이 걸려 있잖아요. 그런데 이 말은 빌닷의 이야기입니다. 빌닷이 욥을 충고하고 비판하기 위해서하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잘못된 거죠. 이것은 남을 공격하고 욥을 시험에 빠지게 하려는 거니까 잘못된 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대로 나타나는 거잖아요. 빌닷과 욥의 신학적인 논쟁 가운데서 나온 이 이야기가 그 자체만 은혜롭다고 해서 그것을 좋은 성경 구절로 삼아서 각 가정마다 걸어놓는 것은 좀 어리석은 거예요. 사실은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여기만이 아니라 다른데도 많이 있어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건데 맥락에서 놓고 보면 잘못된 것, 이걸 구분해야 하는데 여기에 신학적인 바탕이 필요한 거죠.


이 7절은 딱 드러나니까 어렵지는 않아요. 빌닷이 한 이야기로 나오니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데, 제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창조의 원리,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 앞부분에서 성적인 마이너리티들을 책망하는 것, 이런 것들을 들고서 창조의 원리에 위배됐다고 공격하는데(신학적으로 좀 예민한 문제이긴한데) 잘못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잘 드러나지 않는 거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성경에 있으니까 그냥 옳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사실은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예배드릴 때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됩니다. 바울이 쓰라고 그랬잖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니까 그냥 생머리로 오면 잘못된 거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그냥 그런대로 지나가면서 다른 것들은 그것으로 사람들을 매도하고 비판하는 것은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런 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목사나 선생이나 사회적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이 벌이기 쉬운 잘못들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도그마화 해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켜서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빌닷이라는 사람이 내세우는 논조는 분명합니다. 이것은 엘리바스에게서도 나온 것이고 앞으로도 반복되는 거예요. 핵심적으로 욥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거예요. 욥이 자기의 의로움을 끝까지 붙들고 있잖아요.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재앙을 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붙들고 있는데 그것을 붙들고 있는 한 하나님의 정의를 네가 무시하는 것이다.’ 이게 빌닷의 주장입니다. 7장 21절 보세요. 여기에서 욥의 태도가 어떤 가를 지난 수요일에 본 겁니다. 다시 한 번 보겠어요.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건 친구들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짚은 거예요. 결국 자기가 불행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계속 나는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죄 속에 있는 거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자기가 놓여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요. 그 다음, ‘이제 흙에 누우리니’ 이건 죽는 다는 뜻이에요.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그런 뜻이죠. ‘죽으면 나를 찾을 수 없다. 내가 남아 있지 않을 거다.’ 이렇게 불평일 수도 있고 배짱처럼 보입니다. 지금 욥은 그동안 배워왔던 전통적인 지혜에 근거한 신앙이 전부 헝클어져 버렸어요. 자기가 그대로 배우기는 했는데, 지혜의 전통이라는 것은 분명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뜻대로 잘 한 사람들은 지켜주고 잘못하고 죄지은 사람들은 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벌 받았으면 뭔가를 잘못한 거니까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도록 구해야 된다.’ 이게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혜의 전통으로는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몸부림 치고 있는 거예요.


여기 빌닷이(욥을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나친 이야기까지 하네요. 3절부터 볼까요.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그러니까 ‘네가 잘했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벌을 주겠냐.’ 그 뜻입니다. ‘네가 그렇게 고집 피우는 것은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다고 말하는 건데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다.’라는 말을 하는 거죠. 4절,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자녀들이 같은 날에 죽잖아요.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하시겠냐는 좀 잔인한 이야기를 이 빌닷이 하네요. 그렇다고 해서 빌닷이 나쁜 뜻으로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안타까워서 욥이 제정신 차리기를 바라면서 하는 이야기예요.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예요.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그 선의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힘든 거예요. 지금 빌닷과 몇몇 친구들의 입장이 욥을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그들은 좋은 뜻으로 ‘인정하고 새롭게 잘해보자.’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데 욥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점점 더 마음이 아픈 거죠. 그러면서 아까 인용한 구절, 7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 다음 8절 이하에서 빌닷은 조상들의 지혜를 거론합니다. 제가 여러 번 지혜의 전통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걸로 돌아가자는 말이에요. 이건 굉장히 좋은 거예요. 조상들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오랫동안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고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온 답이라서 따를 만한 것이죠. 속담들도 다 조상들의 지혜잖아요. 그런 것만 아니라 농사일도 그렇고요.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전문적인 학문도 사실은 과거의 지혜가 축척돼서 발전된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닷이 말하는 조상들이 터득한 지혜로 돌아가서 귀를 기울이고 정신 차리라는 말은 잘못된 말은 아닌 거예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 조상들의 지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왜 그러냐는 것을 9절에서 개인의 문제와 연관해서 설명합니다.


9절,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이걸 괄호로 묶어 놨네요. 어떤 사본에 번역에 따라서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면 보충한 거라고도 볼 수 있어요. 어쨌든 이 9절은 8절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역사적인 거잖아요.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인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에 기울이고 살 이유가 뭐냐에 대한 대답이 바로 9절인 거예요. 그러니까 한 개인, 욥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은(뛰어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한 순간만 사는 거죠. 여기 보니까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그렇게 이야기하네요. 그러니까 하루살이와 같은 거죠. 기껏 알아봐야 그 정도밖에 모르죠. 여기 참 재밌는 표현이네요.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휙 지나가 버리고 마는 그런 건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 거냐. 주제파악 좀 해라.’ 그런 뜻입니다. 그렇죠. 이건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도 없어요. 빌닷이 말한 이 이야기는 아마 욥도 들으면서 ‘아 그렇지. 내가 조상들의 지혜를 조금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뜨끔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이제 11절 이하에서 비유와 속담들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요. 여러 가지 속담들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물처럼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면 뭐가 되겠냐는 굉장히 신앙적인 표현들이에요. 13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진다.’ 지금 빌닷이 욥을 향해서 책망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 네가 지금 하는 태도는 이와 같다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의 정의로우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건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길이다.’ 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에서 볼 때 딱 맞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겁니다.


빌닷은 아직 욥의 영적인 실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알고 있는 한계 안에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욥이 하나님을 떠난 다거나 의심한다거나 신뢰하지 않는다거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철저하게 그거는,(속된 표현으로) 지겨울 정도로 하나님이 옆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그렇게 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속편해요. 그런데 그럴 수도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욥은 들어가 버려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재앙들이 왜 닥치게 됐는지에 대한 자기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욥의 상황을 지혜의 전통에 서 있는 친구들은 ‘네가 잘못해서 그래. 네가 모르는 잘못이라도 있을 거야. 회개해.’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하는데 욥이 자기는 털끝만큼도 잘못이 없다고 말을 하겠습니까. 지난 두 주 전에 말씀을 드렸듯이 그건 당연히 밑바탕에 두고 말을 하고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저 나락으로 떨어진 거와 같은 재앙을 받을 만큼 자기에게 닥친 죄의 무게가 너무 크다는 갈등, 모순 가운데 놓여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욥을 향해서 ‘정말 손톱만큼의 죄가 없어?’ 이렇게 따지면 안 되는 거예요.


이러한 욥의 태도가 빌닷이 보기에는 불신앙이었습니다. 이제 빌닷은 욥의 불신앙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20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 지를 정확하게 규정해서 말합니다. 20절이요.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순전한 사람과 악한 자예요. 그러한 신앙 전통에서 빌닷이 욥으로 하여금 어떤 걸 깨우치게 하는 거죠. 이게 바로 유대인의 지혜 전통이었습니다. 이것에 근거해서 이제 마지막 21절과 22절에서 욥을 격려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웃음을 네 입에(앞에서 말한 하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네가 순전한 사람으로 되기만 하면 그렇게 될 텐데) 그리고 더 나아가서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이런 것들이 다 이스라엘 지혜의 전통에 나온 겁니다. 구약 중에서 지혜 전통을 가장 많이 담은 책이 어딘지 아세요? 잠언이죠. 거기 이런 똑같은 이야기 많이 있을 거예요. 이 빌닷과 엘리바스가 하는 이야기는 잠언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되 어떤 문맥에서 잘못된 경우에는 나쁜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설교자들에게는 더 막중한 건데) 잘못 설교하게 되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신자들의 영혼이 파괴되는 거죠. 그런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성경에 있으니까 맞는 말이겠지, 그리고 틀린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런 정도로 받아들이는데 이게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 21절과 22절에서 빌닷이 낙심하고 있는 욥을 위로한답시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서 너를 앞으로 이렇게 할 거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논리가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많이 있어요. 한 예를 든다면, ‘예수 성공, 불신 실패’ 구호입니다.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죠?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믿지 않으면 실패할 거야.’ 이런 식으로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 자체의 말은 틀린 건 아니에요. 성경에도 하나님을 믿어서 부자가 된 이야기도 있고 간증집 같은데도 많이 나와요. 그런데 이러한 구호는 잘못된 거죠. ‘예수 성공, 불신 실패’ 구도가 신자들에게 무분별하게 막 적용되는 거예요. 이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의 신앙이 좋은 줄 압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렇구나.’ 생각을 해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신자들은 ‘내가 믿음이 없나. 잘못해서 그런가.’ 불안감이 들게 돼요. 이건 신앙의 본질이 아닌 거죠. 신앙은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교만해 지거나 낙심하는 그런 게 아니라,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부한 데나 가난한 데나 다 처하고 족한 줄로 알고 기쁨과 평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이런 거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예수 성공, 불신 실패’ 구호에 매달리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관계보다는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냐’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오늘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도 사실은 비슷한 논리예요. 경쟁력 있고 좀 뛰어난 사람은 잘 돼야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만한 불이익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확고하지 않습니까. 아마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속에서 이 욥의 운명은 완전히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 되겠죠.


하여튼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빌닷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이야기거나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에요. 또 한편으로 보면 이 빌닷이 욥에 대해서 상당한 연민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욥이었다면, 그래서 빌닷의 충고를 들었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어요. 아마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라.’ 이러기보다도 ‘내가 부족한 게 많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하나님을 믿고 회복해서 다시금 새롭게 해보겠다.’ 그러한 태도를 취했을지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이 많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유 없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들을 많이 주입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까지 깊숙이 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어려운 상태에 있을 때 친구들이 와서 덕담으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체면으로 ‘그래, 알았다. 내가 그렇게 하지.’ 이런 정도는 반응을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욥은 완전히 저항합니다. ‘자네들의 말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 욥의 처지가 굉장히 어려워요.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버텨낼 수 있어요. 극한의 질병이기 때문에 동네로부터 격리되어 있을 거예요. 먹을 것을 누가 갖다 줘야 해요. 정말 죽음보다 어려운 상태에 있는데 친구들이 멀리서 와서 도와주고 있을 겁니다.(성경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먹을 것 공급해 주고 씻겨 주고 하지 않았겠어요? 옆에 있어주는 친구들이 정말 좋은 건데 이런 신앙적인 문제에서는 냉정하게 욥이 끊어내고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저항하고 있는데 과연 누가 옳을까요? 그리고 이 욥기는 누가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일 까요?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조금 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 8장에 나오는 욥을 향한 빌닷의 충고와 권면을 들었습니다. 아주 그럴듯한, 그리고 우리가 많이 들었음직한, 그리고 굉장히 건전하고 지혜로울 것 같은 그러한 충고와 권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욥의 실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욥의 영혼을 혼란하게 만드는 말들이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옆에서 보면서, 정말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분별력이 우리들에게 참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주님, 말을 조심하며 우리의 신앙을 주입시켜서 독단적으로 남을 재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며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이신줄 믿습니다. 우리의 각자 처한 형편을 주님께서 돌아보시며 매일매일 매순간마다 주님에게 가까이 가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