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10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우리 오늘 욥기 공부 9장이 되겠습니다. 빌닷의 충고와 문제 제기에 대한 욥의 대답이에요. 이 욥기가 사실 좀 까다롭기도 하고 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하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진실한 믿음도 있고 회의도 있고요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한 형태가 지혜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거고 그 말씀에 어긋나서 살게 되면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게 이스라엘 신앙의 큰 흐름이에요. 메인 스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격언이나 시편의 어떤 신앙들이 종합적으로 잘 다루어지고 문학적인 면도 상당히 세련된 성경이 욥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적으로는 방금 이야기한 지혜의 전통에 대한(이게 중심이라고 했잖아요.) 도전이 욥기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기서에 근거해서 보면 하나님이 온전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을 지키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지키지 않는다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힘든 거예요. 우리가 욥의 삶에서 확인했듯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재앙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지혜의 전통에 대한 하나의 반론이 제기된 겁니다. 이게 딱 끊어서 말하기 힘든데 지혜의 전통이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키신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에요. 여러분이 그런 걸 잘 따라가셔야 되는데, 잘못된 건 아닌데 그걸로 모든 사람들의 삶을 재단해 버리고 결정해 버리려고 하면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의 전통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러한 삶의 문제들을 들고 이제 이러한 상황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조금 더 간단하게 말을 하면 욥의 주장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의롭지 않다는 거예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은 잘 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욥이 계속 반복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이 이 욥기서에 있습니다. 이게 동양사상에서도 약간 비슷한 게 있어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도덕경 5장에 나와요. 도덕경은 노자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그렇게 길지 않아요. 거기에 한자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 5장에 보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나와요. 하늘과 땅이 생각보다 인자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죠. 여러 가지로 불안하기도 하고 더러 서로 싸우기도 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일어납니다.


제가 어제 독일 방송에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어요. 제 서재에 TV는 없고요. 독일 방송을 인터넷으로 가끔 시청을 하는데 ARD(독일 제1공영방송연합)라고 우리나라로 치면 KBS1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방송에 들어가서 다큐멘터리를 시청 했는데 제목이 위버레븐(überleben), 생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고 부제는 '위험한 동물의 새끼들’입니다. 동물하고 곤충들이 태어나서 얼마동안 생존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세계 여러 곳곳에 있는 동물과 곤충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걸 여러 번 봤을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요. 저쪽 북아일랜드인가 북구라파인가 해변가인데, 깎아지른 절벽들입니다. 거기 120미터 꼭대기에 보금자리를 만들어서 알을 낳아 부화시키는 새가 나와요. 조금 큰 새예요. 여기 부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들이 다섯 마리가 있어요. 솜털도 다 빠지지 않은 주먹만 한 새끼들인데 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새끼 새입니다. 그런데 어미가 저 120미터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뛰어 내리는 거예요. 어미야 당연히 어렵지 않게 날아서 적당한 자리에 착지를 합니다. 그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될지 예상이 되시죠? 꼬마들이 어미새를 따라가는 거예요. 다섯 마리인데 각자 날아가는 모습들이 다 달라요. 어떻게 됐을까요? 정말 불쌍할 정도입니다. 가장 잘 날아가는 녀석은 한 100미터쯤 내려갈까? 대개는 중간쯤 돼서 바위에 다 부딪칩니다. 툭 부딪쳤다가 저기 툭 부딪치면서 굴러 떨어져요. 그래서 저는 다 죽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밑에 보니까 안 죽었어요. 얼마 있다가 꼼지락 거리더니 다시 살아나서 어미를 따라 물가로 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마 그중에 죽는 놈들도 있겠죠. 그러니까 동물 새끼들이 생존하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천지불인, 하늘과 땅이 별로 인자하지 않다는 도덕경에 나온 이야기가 틀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욥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지혜의 전통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들의 삶을 다 규정하려고 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정의롭게 모든 것을 처리하시는 분이 아니다.' 자기가 당한 삶의 모습을 보고 욥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욥의 주장이 맞나요? 사실은 욥의 주장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 번 봤듯이 강력하게 주장을 하는데 나중에 가면 하나님께서 욥도 책망하는 거예요.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이 많으냐.' 친구들은 더 욕을 먹고요. 욥보다도 친구들이 더 문제가 있는 거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작은 걸로 욥에게 회개하라고 윽박질렀기 때문에 잘못이 크고요. 욥도 자기 나름대로 변명하느라고 '하나님이 정의롭지 못하다. 이럴 바에 죽는 게 낫다.' 이런 것도 옳은 게 아니에요. 어떤 게 옳은 걸까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옳은 것을 모릅니다. 무엇이 옳은 지를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요. 아까 말한 곤충이나 동물들, 모든 이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이유, 근거 등을 우리가 몰라요. 어떻게 해야지 이게 정말 바른 건지를 정확하게 뚫고 나가는 게 힘듭니다. '그럼 하나님을 뭐 하러 믿겠냐.' 이런 질문도 가능한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거죠.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이 아닌,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는 방식이 최선이라고 하는 그 입장이죠. 그게 신앙입니다. 그 하나님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뜻이 뭔지를 차근차근 알아가는 게 신앙 공부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가 성경 공부도 하고 예배 때 설교도 듣는 거죠. 오늘 욥기 9장입니다. 이것을 네 단락으로 제가 좀 나눠서 봤어요. 한꺼번에 다 읽지 말고 첫 번째 단락만 읽어봅시다. 욥기 9장 1절에서 10절입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2절 보세요.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이게 누가하는 이야기예요? 욥이 하는 이야기죠? 그러나 실제로 욥이 아니라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끌어다가 하는 겁니다. 앞에서 엘리바스나 빌닷의 주장이 이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누가 의롭냐. 그러니까 너 잘못한 거 있지 않냐.'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욥이 지금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앞사람 빌닷의 말을 약간 빗대서 하는 거예요. '그래, 네가 한 말이 맞다.' 그러면서 자기가 처한 입장을 변호, 변호라기보다도 사실은 이 욥기서는 자기가 옳다 그르다 변호하는 게 아니라 발버둥치는 거예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빌닷이 하는 이야기에 '너 뻔한 이야기 하고 있어.' 그 이야기입니다. '누가 몰라서 나한테 가르치려고 하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없지. 나는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호소, 절규하듯이 말하는 거죠.


2절을 제가 강의 요약문에 약간 의역을 해서 풀어 놓았어요. ‘빌닷, 자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내가 잘 알고 있네.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울 수 없다는 거 아닌가. 자네 말을 인정하네.’ 친구의 말을 냉소적으로(동의하는 뜻이 아니라) '네가 하는 이야기는 상투적인 이야기야.' 그런 뜻으로 친구의 말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뒤로 3절부터 그게 어떤 뜻인가를 해명하고 있어요. 3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네가 한마디도 답변하지 못한다.' 4절, '지혜롭고 힘이 강하셔서 아무도 그를 거스를 수 없다.' 5절에 보면 '산을 무너뜨리신다.' 그리고 6절에서는 '모든 것들이 다 흔들린다.' 지진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겠어요. 7절에 보면 '해를 명령하고 뜨지 못하게 하고 별들을 가두신다.' 우주의 어떤 큰 소용돌이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네요. 그 당시에는 우주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틀린 것은 아니죠. 모든 별들은 다 없어져요. 시간이 되면 다 타서 없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붉은 거성이 돼요. 큰 태양도 얼마 있지 않으면 그렇게 붉은 거성, 지금보다 수십 배가 커져서 근처에 있는 행성들을 다 잡아먹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앞으로 45억년 정도 있어야하니까 까마득한 세월이긴 한데 어쨌든 그것도 무한한 시간은 아니니까요. 그렇듯 별들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현대 물리학에 근거한다고 하더라도 별들마저 하나님이 처리를 하신다는 이 착상, 통찰이 고대인들에게 있었다는 게 참 놀랍죠.


옛날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전혀 그게 뭔지를 모르는 상태인데요. 낮에는 없다가 밤에만 나타나고요. 똑같은 별자리가 있고요. 별똥별 같은 것도 있고요. 까마득한 어떤 세계를 보면서 굉장히 두려웠겠지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점성술로 별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하고요. 그게 그 당시에는 과학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우습지만 그 당시에는 그걸 통해서 이 세계를 이해해보려고 했습니다. 아주 까마득한 어떤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을 생각해 보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여러분, 제가 다른 때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고대인들은 무식해서 그래. 지금 우리는 그런 거 다 알아.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걸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 이건 우리가 다 정복하고 말거야.’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건 뭘 모르는 사람의 소리입니다. 우주나 작은 미지의 세계도 마찬가지인데 가까이가면 점점 멀어질 뿐이에요. 근원적인 것은 우리에게 다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고대인들이 별을 보고 느꼈을 까마득한 경험들을 오늘의 현대인들이 짤막한 과학지식으로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불행한 거죠. 여기 지금 욥은 하나님이 위대하셔서 ‘정말 우리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다.’ 그러한 지혜의 전통을 동의 하는듯한 포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거잖아요. 유대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 이걸 생각한 거예요. 빌닷과 엘리바스가 욥을 공격하는 그 중에 하나인 이러한 부분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네가 옳다는 주장을 하면 안 돼.’라는 주장에 대해 욥은 ‘나도 알고 있다.’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 알고 있지만 그게 해결이 안 되는 거거든요. 11절에서 24절입니다.


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9.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리라

21.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절망적인 모습도 조금 느껴져요. ‘이 세상이 도대체 이따위냐.’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멸망시키는 하나님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거예요. 23절에 보면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네팔에서 큰 지진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이런 일들이 끊임없고요. 거기에 갓난아이도 있을 거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는 장애인도 일을 거고요. 정말 무죄한 자의 죽음도 많이 있을 텐데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나는 지, 하나님이 정말 정의롭다면 왜 그러냐는 문제 제기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지혜의 전통에서는 끝까지 뭐라고 우겨요. ‘그건 죄가 있기 때문에 그래.’ 지금도 그렇게 설교하시는 분도 계시잖아요. 네팔의 지진, 심지어는 이번에 메르쓰를 보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징벌, 재앙 이런 것들에 대해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딱 일치시키는 게 몸에 젖은 거예요. 그런 일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말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냐.’ 그렇게 말하면 또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뭐냐.’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이 말이죠. 그러니까 최선은 뭐예요? 욥기의 결론으로 미리 가서 대답을 하면, 이렇게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혜의 전통처럼 ‘너 잘못했으니까 회개해.’ 이러한 말은 안 되는 거고요. 그렇다고 욥처럼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아.’ 이렇게 반항하고 절규하는 것도 옳은 게 아니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입을 다물고 기다리는 거예요. 뒷부분에 가면 욥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많이 떠들었다.’라고 이야기해요. 이게 답이 됐나요? 이걸 좀 더 설명해야 하는데, 우리가 자꾸 모든 시시비비를 따져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믿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전부 다 해명을 못합니다. 이 세계와 인간의 삶에서 유기적으로 연관된 것들을 해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인데 이게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으라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기다리면서 입을 다문다는 게 쉽지가 않은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노력도 있어야 되고 때론 투쟁할 때는 투쟁해야 되고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다리는 거예요. 이걸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에서 모든 것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숙제와 문제들을 갖고 투쟁하고 해결하되 근본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통해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는 그 때까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참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으라는 게 아니라 투쟁을 하되 기도하며 때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따지되 근본 밑바탕에서는 그 분이 일을 하신다. 그 분의 손길이 임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게 있어야 됩니다.


13절에 보면 라합이 나와요. 많이 들었던 이름인데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침공할 때 있었던 기생 라합이 아니라 이거는 그 당시 바다의 어떤 괴물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라합이라는 히브리어에 해당되는 게 여기만이 아니라 욥기서 26장 12절, 시편 89편 10절, 이사야 51절 9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바다의 괴물이면서 괴물을 지켜주는 영들, 악한 신들을 총칭할 때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악한 힘마저도 하나님이 굴복 시키신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냐.’ 지금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래, 맞다. 내가 뭘 어떻게 하겠냐. 네가 그렇게 내가 잘못했다고 말을 하면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전능하신 분이시고 그분이 묻는 말에 내가 뭐라고 대답 하겠냐. 아무것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뭘까요? 욥은 왜 이렇게 계속 친구들의 말에 맞대응해서 이야기를 할까요? ‘내가 지금 이렇게 받고 있는 재난과 불행에 대한 이유를 자기가 알 수 없다.’는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를 합리화하고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가 깨끗해서 그렇다는 것도 아니라 이거는 보통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죄 때문에 그런 일이 있다.’ 이런 말로는 용납이 안 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 들어가 있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개인적 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로 보면 아까 말씀드린 인도네시아나 네팔 같은 나라의 자연재해, 아니면 전염병, 중세기 때는 유럽에 흑사병이 돌아서 유럽사람 3분의 2가 죽었어요. 이러한 바이러스를 통해서 인류가 멸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박테리아는 우리가 처리하기 쉬운데 바이러스는 잘 못하잖아요. 감기나 독감의 균인데 이게 너무 작아요. 그리고 계속 변합니다. 변종이라고 하잖아요. 백신을 만들어 놓으면 이게 또 변해서 컨트롤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세균 학자들은 결국 지구는 인간과 세균하고 싸우게 될 텐데 세균이 이길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그러한 여러 가지 자연 재해 등등에서 일어나는 불행들이 죄 때문이라는 지혜의 전통으로 말하는 것을 욥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죠. 똑같은 이야기가 지금 계속 반복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욥이 그걸 가지고 줄기차게 저항을 했는지 옆에서 보면 애처로울 정도예요. 웬만하면 친구들의 말에 휩쓸려 갈 수 있어요.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참 믿음이 있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대단한 결기를 보여주고 있어요. 참고적으로 한 말씀드리면 욥은 실제 인물이 아닙니다. 실제 인물이 꼭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실제 인물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고요.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 한 인물입니다. 이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지혜 전통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더 깊은 부분들을 지금 욥기서 기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10절에서 24절, 거기에 라합에 관해 나온 그 다음을 봅시다. ‘라합과 그 영들을 굴복시키는 하나님이 자기의 변론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욥은 절망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17,18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파괴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 다음, ‘아무도 하나님을 소환해서’ 정말 억울한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거예요. 이걸 풀 수가 없어요. 그래서 19절에 그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소환해서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다.’ 19절에 그렇게 나오잖아요. ‘누가 어떻게 하나님을 소환하겠냐.’는 거죠. 20절에 ‘내가 의롭다고 하더라도 나를 정죄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절대전능 앞에서 나의 의로움을 증명할 길이 없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21절이 조금 더 그 상황을 심각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욥은 지금 굉장히 갈등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면 그런 갈등도 없을 텐데 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끝까지 자기의 온전함을 붙들고 있어요. ‘나는 온전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긴다.’ 이게 개역개정이라서 의미가 잘 안 들어오는데요. 이런 뜻입니다. ‘네가 의롭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갈 길을 찾을래. 아니면 네가 온전하다는 것을 지키고 죽을래.’ 이런 갈림길에서 욥은 후자를 택하는 거예요. 이게 쉽지 않은 거예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런 재앙과 고난과 처절한 삶에 떨어진 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 이러한 데까지 나가고 있습니다. 이건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류에 벌어지는 모든 불행들 앞에서 하는 하나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 신앙은 이런 것까지 담아내야 됩니다. 아주 간편하게 ‘죄 때문이야!’ 이런 식으로 세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그건 생각 없는 사람들이나 열광주의자들이나 해당되지 정말 깊이 있게 삶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다음, 세 번째 단락과 네 번째 단락을 같이 읽겠습니다. 25절에서 35절까지예요.


25.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26.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27.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28.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29.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25절에서 31절 사이에서 욥은 자기가 수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토로해요. 이러한 문장만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 27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어렵지만 불평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모든 걸 다 은혜로 할 거야.’ 이렇게 즐거운 모양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위선을 하지 않겠다는 거죠. 기독교인들은 자기에게 용납이 안 되도 그렇게 많이 하잖아요. 위선도 때에 따라서 필요합니다만 욥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봤자 내 상황이 고쳐지는 것도 아닌데.’ 이런 입장으로 어떻게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어요.


29절에, ‘결국은 내가 이렇게 큰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듯 정죄를 받은 건데, 내가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거니까 웃는 낯으로 아닌 것처럼 하지 않겠다.’ 그렇게 해봤자 29절에 따르면 ‘헛된 수고다.’ 굉장히 냉철한 지성적인 사람이라고 할까? 니체 같은 사람들이라고 할까? 아니면 도스프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삼형제 중에 둘째처럼(둘째는 인텔리로써 당시 러시아 정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인데) 그러한 모습들을 연상할 수 있는 표현들이네요. 31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개천이라는 단어는 지옥으로도 번역된다고 합니다. 죽는다는 이야기예요.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그렇게까지 저 깊은 수렁에 빠진 자기 모습을 적나라하게 피하지 않고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게 실감이 잘 나지 않으실 거예요. 우리들은 그렇게 살지 않으니까요. 이런 운명에 빠진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러나 기독교인이 나만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고 세계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하고 본다면 내가 아니라 우리 동료들, 이웃들, 아프리카나 다른 데까지, (우리의 신경이 거기까지 못 미쳐서 그렇지)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산다면 거기까지 마음이 가야죠. 그렇다면 욥과 같은 운명에 빠진 사람들이나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어요. 세계 모든 불행들을 우리가 다 안고서 살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외면해서도 안돼요. 그런 긴장 가운데 우리가 있겠죠. 그리고 이러한 욥기서 공부를 통해서 그런 쪽으로 눈이 넓어지는 거예요. ‘지금도 인류 곳곳에 욥과 같은 사람이 있구나.’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건 사실적인 거고 실제입니다.


마지막 32절에서 35절이에요. 여기서는 욥이 한걸음 더 나아가요. ‘하나님과는 맞서서 무엇을 할 수 없다. 해봤자 내가 당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누가 좀 나타나서 판결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죠. 하나님은 너무 전능하시고 절대적인 분이라서 입 벙긋하기도 힘들어요. 이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다른 제 삼자,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판단해줄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33절에 그 이야기를 하잖아요. ‘우리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필요한데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욥이 바라는 바는 3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막대기가 나에게서 떠났으면 좋겠다.’ 시편 23편에 ‘주의 막대기가 나를 지키시나이다.’라고 나오는데 막대기는 뭘 치기도 하는 거지만 지키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를 교정하기도 하고요. ‘아예 하나님의 막대기와 위엄이 나에게서 떠나서 내가 좀 마음대로 했으면 좋겠다.’ 욥이 굉장히 숨 막히는 상황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고 그렇다고 따지고 들면서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안 되는 그런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뭐라고 하는 거예요. ‘너 잘못한 거 있어서 그런 거니까 회개하고 다시 은혜 받고 새 출발 해야지.’ 이런 정도로 이야기하니까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요약문 마지막 단락을 읽고 오늘 공부 마치겠습니다. 급기야 욥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재판관을 원한다.(33절)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서 누가 옳은지를 정확하게 판단해줄 이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이가 없다는 사실을 욥은 안다. 절망적이다. 이제 욥의 선택은 한 가지다. 하나님의 ‘막대기’와 위엄이 자기를 떠나서 할 말을 실컷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막대기와 위엄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으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숨이 막히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 9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욥이 처한 상황이 앞부분에서 어렴풋하다가 똑같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장이 거듭할수록 더 생생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너무 시간적으로 오래전 일이라서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있었지만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지금 여기서 당면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이 욥의 심정을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으로 공감하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갈 길을 때에 따라서 이를 때마다 바른 길을 찾아나가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시오. 이렇게 귀한 시간 함께 말씀 공부에 참여한 우리 모든 믿음의 동지들 모두에게도 한결같은 은혜 허락하시기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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