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17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10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을 읽을 텐데 오늘은 개역개정으로 안 하고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1절부터 22절까지 있습니다.


<공동번역>

1. 쉼쉬는 일이 이다지도 괴로워서 나의 슬픔을 하느님께 아뢰고 아픈 마음을 쏟아놓지 않을 수 없구나.

2. 나 이제 하느님께 아룁니다. 나를 죄인으로 다루지 마소서.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그 까닭이라도 알려주소서.

3. 당신께서 손수 만드신 것을 억압하고 멸시하시는 것이 기쁘십니까? 악인의 꾀가 마음에 드십니까?

4. 당신의 눈은 사람의 눈과 같으시며 사람이 보는 만큼밖에는 보지 못하십니까?

5. 당신의 수명은 사람의 수명과 같으시며 인간이 사는 만큼밖에는 살지 못하십니까?

6.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란 이 몸의 허물이나 들추어내고 이 몸의 죄나 찾아내는 것입니까?

7. 당신께서는 내가 죄인이 아님을 아시고 또 아무도 이 몸을 당신의 손에서 빼낼 수 없음도 아십니다.

8. 당신께서는 나를 손수 빚어 만드시고는 이제 마음을 바꾸시어 나를 없애버리시렵니까?

9. 이 몸을 진흙으로 빚으셨음을 잊지 마소서. 어찌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시려 하십니까?

10. 당신께서는 이 몸을 젖같이 쏟으시어 묵처럼 엉기게 하셨고,

11. 가죽과 살을 입히시고 뼈와 힘줄로 얽어주셨습니다.

12. 나에게 목숨을 주시고 숨쉬는 것까지 보살펴 주셨습니다.

13. 그러시면서도 속생각은 다른 데 있으셨군요. 그러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14. 내가 죄를 짓는가 지켜보시다가 그 죄에서 풀어놓아 주시지도 아니하십니다.

15. 악을 행하였다면 앙화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하여도 머리를 쳐들 수 없는 일, 아, 진저리쳐지도록 당한 이 수모가 지긋지긋하도록 괴롭습니다.

16. 내가 몸을 일으키면,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사자처럼 나에게 달려드십니까? 어찌하여 계속 몰아치십니까?

17. 공격에 공격을 퍼붓고 진노의 불길을 뿜으시며 계속 군대를 풀어 몰아치시니 어찌 된 일이십니까?

18. 어찌하여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습니까? 차라리 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숨져

19. 태어나지도 않았던 듯이 모태에서 무덤으로 바로 갔다면 좋았을 것을.

20. 나의 수명은 이제 다 되었습니다. 좀 내버려두소서. 잠깐만이라도 밝은 날을 보게 하여 주소서.

21. 잠시 후에 나는 갑니다. 영영 돌아올 길 없는 곳, 캄캄한 어둠만이 덮인 곳으로 갑니다.

22. 그믐밤 같은 어둠이 깔리고 깜깜한 가운데 온통 뒤죽박죽이 된 곳, 칠흑 같은 흑암만이 빛의 구실을 하는 곳으로 갑니다.


<개역개정>

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4.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이 공동번역이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좀 낫습니다. 더 가깝게 느껴져요. 이게 번역인데, 개역개정, 공동번역, 새번역 등등 여러 번역이 있습니다. 보통 개역개정은 직역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직역을 한다고 해서 정확하게 번역되는 건 아닙니다. 언어라는 게 고유의 뉘앙스가 있어서 한 나라의 말을 다른 나라 말로 100% 정확하게는 불가능합니다. 어쨌든 개역개정은 문자적으로 직역을 하는 거고요. 공동번역, 이런 것은 문자적으로 하지 않고 뜻을 살려내는 번역입니다. 그래서 의역이라고 하죠. 양쪽 중에 어떤 게 더 좋은 번역인지는 판단할 수 없어요. 보통 ‘의역을 해야 알아듣지 않냐.’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특별히 이런 종교적인 문헌을 의역하다보면 오히려 번역한 사람의 마음이 개입 돼서(느낀 대로 번역하니까) 원래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장단점이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한 번역만 읽어서는 곤란하고요. 몇 가지를 같이 놓고 읽는 게 제일 좋습니다. 우리 대구성서아카데미에 들어오는 어떤 분은 아홉 가지 번역을 놓고 읽으신다고 해요.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는데 아홉 권을 갖다 놓고서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읽는 사이에 의미를 다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하여튼 번역이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 읽을 때 염두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10장을 같이 공부하게 됐는데요. 이 10장은 9장에서 이어지는 겁니다. 욥을 충고하는 사람이 네 사람이에요. 친구 세 명하고 후배 하나예요. 지금 맨 앞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 혹은 경험이 제일 많은 사람이 했어요. 그 사람이 엘리바스입니다. 그 사람이 충고를 하고 욥이 대답을 주고받고 한 단계가 지나갔어요. 그리고 두 번째 친구가 이야기를 하는데 이 친구 이름이 빌닷이에요. 이 빌닷에 대한 욥의 대답이 9장에 나왔고 10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9장에서는 빌닷에게 직접 자기의 뜻을 전한 반면에 10장에서는 빌닷에게 직접 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바꿔요. 그것도 사실은 빌닷을 향한 대답인 거죠. 다만 빌닷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말하는 방식을 조금 바꿔서 하고 있습니다. 이 욥기 10장에는 앞에서 나온 몇몇 비슷한 구절이 있어요. 그건 여러분 강의안에 지적해 놨으니까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닌데 비슷한 게 나오는구나하고 지나가시면 됩니다.


우리가 같이 읽으면서 느꼈습니다만 이 10장은, 다른 장에서도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의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절규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안타까움이 베어 나옵니다. 연민이 느껴지기도 해요. 사실 욥이 이렇게 말하고 싶겠습니까? 가능하면 ‘감사합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잘못한 게 있으면 회개하고 다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럴 텐데, 그런 게 없이 계속 ‘왜 이러냐.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 당신은 이렇게 일을 처리 하냐.’ 이렇게 말하잖아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갔던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좀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속사정들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가야 되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지금 욥과 똑같은 형편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처한 형편을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는 않겠어요. 정말 어려운 거예요. 이런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욥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어요. 실제로 우리가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안 됐다. 어떻게 견딜까.’ 그런 정도지 실질적으로 내 삶의 문제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욥기서 읽기를 싫어합니다. 이게 좀 찜찜해요. 어떤 면에서 보면 짜증나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이런 운명에 처하고 싶지도 않은 거죠. 신앙적인 연대감을 느끼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욥의 진술에서 신앙적인 어떤 공감을 느낄 수 있는데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강의 요약문에 두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 그의 진술에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나 혼자만 괜찮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누군가는 이런 운명에 빠진 사람이 있잖아요. 내 가족일 수도, 내 친척일 수도 있고 조금 멀리는 우리나라 안에 어느 누구일 수도 있고 세계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요. 어쨌든 멀든 가깝든 인류의 운명 속에는 이런 저주스러운 일들이 당연히 일어납니다. 나 하나만, 혹은 내 가족만 용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면 괜찮다는 건 소박한 우리의 심정입니다만 우리의 신앙이 조금 더 깊어지면 그걸 전체로 생각하며 살 수 있는 거죠. 제가 전에 소개드렸던 여성 소설가 박완서씨 있잖아요. 남편 죽고 얼마 후 자기 아들이 수련의를 하다가 죽은 게 용납이 안 됐는데 나중에 이렇게 이해가 된 겁니다. ‘그래, 그런 일들은 많이 있는데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겠냐.’ 그렇게 극복해 나가요. 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치게 됐습니다.


여러분들도 자녀들을 키웁니다만 우리 자녀만은 다 똑똑하고 뭐든지 잘하길 바라잖아요. 뚜렷한 사회인으로서 자리를 잡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 중에 완전히 망나니 같은 자녀도 가능합니다. 백수도 가능하고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내가 교육을 잘못 시켰나?’ 그렇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냐면 세계 모든 고난들이 우리를 빗겨가기를 바라고 있지만(그건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일이 닥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닥친 일이 나의 일이다.’ 그런 정도로 우리의 신앙적인 안목을 넓혀가는 게 기독교인으로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욥기서는 우리의 삶과 직접, 간접적으로 혹은 가깝게, 멀게 연결되는 거죠. 그래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자신이 처한 형편과 별개로(내가 욥과 같은 형편에 처해있는지 아닌지는 불문하고) 욥의 진술은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질문에 맞서게 한다. ‘하나님이 누구냐.’ 그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문제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 신앙적인 화두에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사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잖아요. 그게 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인 거예요. '다 이루었다'든지 '목마르다'든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든지 이게 다 하나님을 직면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호소이고 고백입니다. 이 욥기서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 거죠. 너무 천편일률적인,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등등, 이러한 고정된 하나님 이해에 머무르면 신앙의 강화는 돼도 신앙의 심화는 안 되는 거예요.


이 욥이 끝까지 불안하잖아요. 도대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이건 불신앙이 아닌 겁니다. 정말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영적으로 깨어있다면 그런 질문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영적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많은 경우에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강화에 머물러 있어요. 자기가 알 고 있는 걸 더 단단하게 만드는 거예요. ‘믿습니다!’ 하면서, 사실은 속으로는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믿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떨어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욥기의 처절한 고백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그냥 흘려듣는 천편일률적인 그런 게 아니라 날것으로 직면하는 거죠. 이게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지금까지 서론으로 하고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사실은 이 10장이 앞에서 한 이야기의 반복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문단으로 말씀드리지 않고 여기서 중요한 몇 구절을 발췌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3절입니다. 개역개정으로 다시 한 번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욥은 여기서 창조와(손으로 지으신 것은 창조 행위예요.) 창조가 끝난 다음에,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끌어가시는, 통치하시는 거죠. 그런데 그 사이의 모순을 지금 욥이 짚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고 정의로운 거예요. 창세기 앞부분에 창조 전승을 보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걸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 세계의 창조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 세계에 대한 큰 긍정이에요. 이건 우리 기독교 신앙에도 계속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겁니다.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선한 거예요.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악이라도 비존재보다는 선하다.’ 이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악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악도 비존재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큰 긍정 안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예요. 악한 사람이라도 변하면 선하게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비존재는 아예 그럴 근거가 없으니까 비존재보다는 악이라도 존재하는 것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건 좀 역설적인 표현입니다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큰 긍정이에요. 보통 우리는 ‘세계가 왜 이렇게 악해. 나쁜 사람들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깨끗하게 좀 만들지.’ 그런 마음이 이상한 건 아니되 그 악마저도 오히려 하나님 창조의 선함을 드러낼 수 있는 거예요. 거기까지 우리가 따라가면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칼 바르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심포니 연주를 예로 들면서, 연주 중간에 불협화음이 날 때가 있어요. 보통 화음이 맞아야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데 불협화음이 나와서 찢어지는 상태로 소리가 나온다 하더라도 작곡가의 큰 작품 안에서는 그것마저도 하나의 완성된 음악 세계를 말하고 있다고 바르트가 잘 설명했어요. 이 세상의 악이 불협화음이에요. 그것만 가지고는 나쁜 거지만 그게 큰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는 결국 그것도 선하게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악이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어거스틴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전체 섭리 안에서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거죠. 이게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이걸 놓치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창조 권능을 놓치는 거죠. 어쨌든 창조가 그렇게 선한데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는 거죠. 고통당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것들의 모순들을 3절에서 그가 말하고 있습니다. 3절 후반절에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요.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신다.’ 그러니까 오히려 악인이 잘되는 일까지 벌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4절과 5절이에요.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주께서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이건 사람처럼 세상을 보냐는 뜻이고 5절,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하루하루 날입니다.) 주의 해(해는 태양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연수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날과 해가 사람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욥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 욥을 비판하고 있는 친구들의 주장을 빗대서 방어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의 날, 사람의 해, 사람의 눈이 반복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친구들의 주장인 유대교의 지혜 전통을 가리키는 거예요. 지혜의 전통을 여러 번 이야기했죠. 여러분 머릿속에 꼭 넣어두세요. 이 욥의 친구들은 지혜의 전통에 확실하게 서서 욥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의 전통은 선하고 지혜롭고 그럴듯하고 괜찮은 것들이에요. 그 지혜의 전통에 근거해서 보면 욥의 인생이 망가진 이유는 당연히 죄예요. 그게 지혜인 거예요.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잖아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나 욥은 ‘그게 아니다. 그거는 사람의 관점으로 보는 거고 사람의 논리이지, 하나님이 사람의 눈을 갖고 그렇게 보냐. 그리고 우리가 하루 살고 일 년 사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런 정도로 살아서 세상을 판단하는 분이냐. 그거 아니지 않느냐.’ 이러한 반론을 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섞여 있어서 따라가기가 조금 어려워요. 어떤 때는 직접적인 것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빗대서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게 정말 하나님에게 토로하는 이야기일 때도 있고 아니면 그 형식을 빌려서 친구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수도 있기도 한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습니다.


6절 보면 이렇습니다.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친구들이 하는 행동들이 이런 거예요. ‘네가 문제가 있으니까 그렇다.’라는 입장에 대해 욥은 ‘정말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 아니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7절 보면 자기 입장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죠.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여기에 욥의 마음이 다 담겨있네요. 욥은 계속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계속 공격을 받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건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유대교의 지혜에 따라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은 욥도 그러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말 앞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요. ‘네 인생이 망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어. 그걸 고쳐야 돼.’ 여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일상적인 쉬운 말로 바꾸면, ‘네가 가난한 것은 노력하지 않아서 그래.’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까. 그걸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네가 성실하게 살았으면 네 인생이 왜 그렇게 될 거냐.’하는 거죠. 그런 입장이 많은 경우에 옳기도 하고요. 그리고 지혜라는 것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경험들이 축척 되서 나온 답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욥이 거기서 아니라고 말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거였습니다. 그래도 욥은 계속 붙들고 나오는 거예요. ‘아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게 아니다. 다르다.’라고 하면서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하나님이 아신다.’라고 말합니다. 이건 친구들로써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억측과 같은 거예요. 그러면서 이 생각이 얼마나 확실한 건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가 없나이다.’ 일반적인 지혜의 전통으로 보고 있는 관점이 아니라는 식으로 ‘나의 문제를 친구들이 공격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을 다 아실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포기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가 없나이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15절(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8절 이하부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예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데 여기에 아마 지혜의 전통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의 탄생과 관계된 어떤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들어 지는데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라든지 그 외에 것들에 대한 고대 유대인들의 생각이 거기에 녹아 있어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귀한 방식으로 생명을 지으셨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생명이 지금 처참하게 무너져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반복 드리지만 욥의 인생이 무너진 이유가 죄 때문이라는 핀잔을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딜레마에 빠져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서 일어나는 자기의 운명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잖아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죠? 그건 전제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욥은 하나님을 떠날 수는 없어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정말 어려운데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그거는 자기를 딱 손아귀에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붙들고 있어요. 그 사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운명이 하나님의 일이기는 하되, 그것이 죄의 결과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죠. 그런 논리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걸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욥이 친구들의 충고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9절, 자기의 처한 형편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쭉 이야기를 하면서 그게 어느 정도인지를 19절에서 설명하고 있어요. 이렇습니다.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앞에 18절도 보겠습니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그러고서 바로 19절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아예 세상이 없었으면 나았을 텐데 하는 하소연이에요. 욥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분명하게 있는 건데 자기에게 일어난 운명의 결과, 그 원인, 자기도 여태까지 알고 있었고 친구들이 계속해서 문제 제시하고 있는 그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요. 그리고 현재 빠져있는 삶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인 거죠. 그래서 ‘이럴 바에야 정말 나는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더 복되었을 텐데’ 그런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나왔어요. 3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거기 소제목에 이렇게 붙어 있습니다.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다.’ 거기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러한 하소연은 욥의 특별한 어려움 가운데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아무리 즐겁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자유롭지 않았을까.(태어나지 않으면 자유도 없습니다만 비유적으로 과장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긴 합니다. 그게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닌 거예요. 그리고 사실 우리가 있었고 없었다는 것은 조금만 눈 여겨 보면 이게 별게 아닌 거예요. 지금 우리는 온통 나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100년 전으로 가면 그때 우리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 있다가 온 게 아닙니다. 플라톤, 헬라철학에서는 원래 이데아라는 세계에 있다가 이 세상에 와서 육신을 덧입고 있다가 다시 영혼이 이데아로 돌아간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서적인 신앙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어디서 오는 게 아니라 피조 되는 거예요. 그 전에는 무(無)예요. 없는 거예요. 그리고 100년 후에는 우리도 없어요. 아주 짧은 시간에 존재하고 있을 뿐인데 이 안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이전투구(泥田鬪狗), 이런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욥처럼 처참한 몰골은 안 보되 그 비슷한 것들은 많이 있죠. 이런 것들을 보면서 ‘없어지는 세계는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일단 말은 할 수 있어요. 그게 꼭 신앙적인 것은 아닌데 욥의 말이 이해는 됩니다.


그 다음 22절, 마지막 절입니다. 욥은 이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20절에서는 ‘이제 나에게 그만 집착하시고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길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내가 좀 편안하게 있다가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까지 절규를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서 22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먼저 21절에 보면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이 나오죠. 이건 죽는다는 건데, 고대 유대인들에게 죽음 이후에 삶은 없어요. 그들은 그저 이 땅에서 유복하게 살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유대교 후기에 나왔고 기독교 신앙에서 그게 완성됐죠.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그렇습니다. 이건 조금 복잡한 문제인데 제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그냥 지나갑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말을 듣고 약간 오해하실까봐 염려스러워서 한마디만 보태면, ‘죽음 이후에 생각이 고대 유대인들에게 없었고 나중에 생겼다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들이 진리가 아니고 나중에 만들어 진거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미처 성경에 있던 사람들도 다 몰랐던 것을 역사가 진행되면서 더 깊이 알아가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알던 것을 점점 많이 알아가는 그러한 역사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완전한 앎은 종말에 완성될 겁니다.


22절 마지막에 삶에 대한 묘사가 절절하죠.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굉장히 사실적인 묘사예요. 그 당시에 사람이 죽으면 거의 다 땅속에 들어갔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그렇죠. 다 썩어 버리니까 이게 사람인지 관인지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다 썩으니까요.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빛도 없고 모든 것들이 어두움에 빠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적인 묘사네요. 블랙홀처럼 모든 것들을 다 흑암으로 만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여기서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물리학적으로 봐도 사실이죠. 여러분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여기서 욥이 이야기하는 것은 부활 같은 세계와는 관계없는 거예요. 아직 그것에 대한 어떤 계시, 영적 깨달음이 없던 시대입니다. 아주 까마득한 그 때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이런 것이 어떤 부분에서는 사실 인거예요. 그래서 우리 육체가 땅속의 흑암 속에 파묻힌다는 사실은 명백한 거니까 어떤 것으로도 치장할 수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신약의 관점에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는지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보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지요.


오늘 10장을 쭉 훑어보았는데 전체 흐름은 여태까지 욥이 주장하는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고 있어요. 이거는 변함없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자기에게 일어난 운명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다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죄 때문이라는 그 당시의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지혜의 전통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 욥이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가 처한 삶의 처절함, 견딜 수 없는 망막함을 하나님께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듯이 토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아주 까마득한 옛날 2300년, 2400년, 2500년 전, 고대 유대인들이 오랜 역사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준 욥기서의 일부, 10장을 오늘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소상하게, 아주 깊이 있게 다 알지는 못하나 전체 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주님, 이 욥의 영적인 딜레마, 두려움, 불안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호소,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다시 들으며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서, 오늘 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할지 그 길을 잘 찾아가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요즘 메르스로 인해서 이 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님, 적절한 긍휼과 은혜를 허락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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