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24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이 전반기 수요 공부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까지 하고 7,8월은 쉬었다가 9월 첫 번 수요일에 다시 후반기 공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욥기 11장인데요. 제법 많이 왔어요. 4분의 1정도 한 셈입니다. 본문을 일단 읽어볼까요. 11장 1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길지 않죠? 구절은 좀 되는데 각 절이 생각보다 좀 짧네요. 전체 분량은 길지 않습니다. 이 욥기가 기본적으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잖아요. 이런 것들은 오늘날도 이웃이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구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 세 명이 나타나서 욥에게 좋은 뜻으로 충고 혹은 비난, 비평을 하고 있어요. 그것에 대해 욥이 반론을 펼치고요. 결국 논란의 결론이 나올 수 있을까요?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있다는 사람과 없다는 사람의 논쟁은 끝이 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욥과 친구들과의,(대화라기보다는 강한 논란, 논쟁인데) 여기에 결론이 나지 못하고 나중에 하나님이 등장해서 평정하게 되죠. 그렇게 하나님이 나중에 나타나서 모든 것이 일단락이 되는데 욥과 친구들이 서로 격론을 벌였던 것에서 하나님이 어느 쪽 입장을 지지할까요? 양쪽 다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욥도 무조건 옳은 건 아닌 거예요. 욥의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차이가 있다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거고 욥의 친구들은 솔직하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욥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논리가 친구들에 비해서 부족하거나 낫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욥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정당성이 유지되기 힘든 거예요. 그래서 욥기를 읽기가 좀 까다롭습니다.


이 욥과 친구들의 논란의 핵심이 뭔지는 우리가 여태까지 10장에 걸쳐서 확보했죠.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충고, 비난의 핵심은 ‘너 왜 우리들 이야기 안 듣느냐. 우리가 좋은 이야기 하는데 왜 듣지 않느냐. 고집불통이냐.’ 그거 하고 ‘네가 문제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게 분명한데 너도 인정하지 않냐.(이건 욥도 인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지 않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욥은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는 결백하다.’ 그것을 욥의 친구들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거예요. 그게 계속 부딪히고 있는 거예요.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욥의 주장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닙니다. 자기가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도대체 이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 모르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좋겠군요. 아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것을 인정받은 건데, 욥의 친구들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재앙, 징벌이요.) 그것에 대한 대답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어요. ‘네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다.’ 여기에 머물러 있었는데 욥은 모르겠다는 거죠. ‘이 재앙이 왜 임했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게 더 솔직한 거죠. 이게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우리 욥기 공부한 것을 올리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또다른세계’ 닉네임을 가진 친구가 댓글을 올렸더라고요. 욥의 이러한 문제들, 고통이나 당혹스러움 등이 천천히 들어온다고 하면서 하나의 뉴스를 말하더라고요. 며칠 전에 만취한 트럭 운전수가 자기 트럭을 몰고 가다가 승용차를 부딪쳐서 승용차에 있던 세 식구 중에 아내와 딸은 죽고 운전자인 남편은 위중한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침 출근길에 그 아내가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던가 해서 같이 옆에 탔다가 이런 참변을 당했다고 하네요. 이러한 일들이 주변에 많이 일어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재앙과 불행들을 죄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인간의 삶의 깊이들을 다 들여다보지 못한 너무 뻔하고 상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기독교 인터넷 신문에서 본 것인데 메르스가 창궐하게 된 것이 동성애자들의 퀴어 축제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들의 마음이 나쁘거나 인격이 나쁜 건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거죠. 이게 참 어렵습니다.


지금 욥기를 4분의 1정도 하고 있는데 욥과 욥의 친구들의 논란은 서로 누가 옳다, 그르다 하는 걸로 나가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예요. 욥의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그리고 개인이나 공동체에 벌어지는 재앙들이 죄 탓이라고 하는 쪽의 하나님이 옳은가? 아니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는 하되 그 일이 인간의 죄 때문만이 아닌, 그래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욥과 같은 입장의 하나님이 옳은가? 하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우리가 아직까지 다 모르는 거예요. 계속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곧 생명에 대한 질문인 거예요.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 생명을 모르는 겁니다. 그게 다 드러나면 그게 이제 하나님이 다 드러나는 거죠. 이해가 되시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리얼리티를 붙들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막연하게 옥황상제 같은 그림들에 묶여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누구인가와 왜 믿는가에 대한 질문들은 생명의 완성이 어떤 것이고 언제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강의 요약문에 서론적으로 썼습니다만 이것과 연관 되서 생각해 보세요. 제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조금 졸리더라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님을 승천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리고 재림하신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왜 승천했을까요? 승천하지 말고 여기 계시면서 생명의 부활체니까 거기 계셨으면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좋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머물지 않고 승천했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재림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뭘 왜 그러냐.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을 할 뿐이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중요하긴 한데 조금 복잡해요. 그리고 소화가 안 될 수도 있어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긴 합니다. 핵심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 등이 아직 생명 완성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은 생명의 완성인 겁니다. 생명이 완성이 되면 그게 예수님이 재림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구름타고 온다고 생각하시면 틀린 건 아니지만 이건 주일학교 아이들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소박하기는 하지만 아주 옳은 건 아닌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은 생명의 완성이에요. 그 때가 어느 때일지 우리가 다는 모르고 기다리고 있고요. 종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나갔지만 욥과 욥의 친구들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있는 겁니다. 그것을 염두 해두고 오늘 말씀을 읽겠습니다. 1절에서 20절까지 보겠습니다.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3.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4.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6.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15.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8.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19.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20.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세 명의 친구 중에서 마지막 타자가 나섰습니다. 소발이라는 친구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우리가 이 11장을 읽어보니까 은혜롭지 않습니까? 말 자체만 보면 굉장히 은혜롭고 그럴듯한 거예요. 우리에게 익숙한 신앙의 교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고 조금 까다로운 것은, 겉으로 드러난 어떤 문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도 그게 어떤 목적으로 언급 됐는지, 누가 말을 했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잘 구분해서 성서 읽기를 해야 합니다. 지금 소발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전통에 사로잡혀서 나쁜 의도로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게 참 어려워요. 요즘도 성경 읽기나 설교를 들을 때도 그러한데, 의도는 좋을 수 있어요. 인격적인 상태에서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상당한 경우에 잘못 전해질 수 있는 거죠. 지금 소발이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나쁜 의도를 갖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에게 선입견이 있는 거예요. 자기가 알고 있는 지혜의 전통에 따르면 욥에게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건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여러 가지 말로 공격도 하고 닦달도 하는 겁니다.


특별히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소발이 욥의 어떤 상황을 진지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보통 상대방의 어려운 마음에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을 가리켜서 공감능력이라고 하잖아요. 이 공감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거기서 문제가 많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소발이 욥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충분하게 공감하지 못한 채 자기가 알고 있는 지혜 전통에 따라서 친구 욥을 계몽하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가르치려고 하는 거죠. 이걸 계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까다롭기도 해요. 저도 목사로서 신자들을 가르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잖아요. 사실은 이게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가르쳐서 잘 해보려는 생각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목사가 신자들을 가르칠 수는 없어요. 조금 흉내를 내거나 조금 깨닫게 해주는 정도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아주 실질적인 변화는 목사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하신다고 보통 이야기를 하는데 맞는 이야기예요. 저도 가능하면 신자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설교할 때 설교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늘 저 자신을 향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다. 내가 신자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신학을 전공해서 그 정보를 좀 알고 있을 뿐이라서 그것을 소개할 뿐이지 실제로 신자들을 가르치는 입장은 아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게 꼭 잘했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니에요. 하여튼 이 경우에 보면 이 친구들이 너무 자기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지식을 갖고 욥을 계몽하려고, 깨우치게 하려고, 너무 애를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소발이 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째는 욥이 친구들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그러니까 ‘친구들이 하는 말을 비웃는다. 너는 우리들을 비웃고 있지 않냐.’ 이런 것을 소발이 지적하고 있어요. 비웃는 것까지는 아니겠지요. 욥이 동의를 못하는 거죠. 친구들의 말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말을 동의할 수 없는 거죠. 어쨌든 소발은 욥의 그것이 못마땅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결백을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4절 보겠습니다.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이런 것들이 소발의 욥을 향한 비판입니다. 그 장면이 여러분들 머릿속에 그려지죠? 제가 충분하게 설명은 못 합니다만 이 욥과 소발 사이에 굉장히 미묘한 긴장도 있고요. 서로 자기의 논리로 주장하고 있어요.


소발이 욥의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 다음에 욥의 잘못들을 하나님에게 있는 지혜의 오묘함으로 대답을 합니다. 말하자면 욥의 불평인 거죠.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거요. 하나님에게 순종했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욥의 불평을 소발이 하나님 지혜의 오묘함으로 답변하는 거예요. 그 욥의 불평이 앞장에 나오는 욥기 10장 3절에서 7절에 있어요. 욥이 빌닷에게 대답한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억지스러운 표현으로 나와 있어요. 일단 3절만 보십시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 비슷하게 하는 거죠. ‘왜 세상을 이렇게 하시냐. 못마땅하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한 뜻으로 욥이 빌닷에게 대답한 거예요. 그 지적을 소발이 하면서 욥을 향해 ‘네가 똑똑하게 말을 잘 하는데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따라갈 수 있냐.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불평불만을 하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게 참 재밌어요. 여기 11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정말 오묘해서 그리고 그 지식이 광대해서(어디까지 나가냐면 6절 후반절에)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주셨음을 알라’ 굉장히 역설적인 표현이죠? 지금 욥은 자신은 죄를 안 지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오묘한 지혜가 있어서 네가 기억 못하게 하는 거야. 주제 파악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런 거 보면 욥보다 이 소발의 신앙이 깊은 것처럼 일단 보입니다.


다음 두 번째 단락은 7절에서 11절까지예요. 소제목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라고 잡았습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소발이 하나님 지혜의 오묘함으로 욥의 잘난척하는 것을 찍어 누르는 거죠. 사실 말로 하는 것은 끝이 안 나는 문제예요. 근원적인 문제를 서로 말을 통해서 극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가 본대로 소발의 말이 얼마나 깊어 보여요. 제 삼자가 중간에 있었다면 ‘욥보다도 소발이 낫지 않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를 네가 알면 입 다물고 있어라.’ 그렇게 윽박지르고 있는 겁니다.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7절부터 11절에 보면 소발이 정말 세련되게 이야기해요. 하나님의 전지전능이에요. 지혜의 오묘하심이 전지전능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대목을 제가 읽으면서, (여러분들 집에서 한 번 읽어 보셨나요? 성경 공부하러 오시기 전에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성경을 읽어 보는 것하고 안 읽어 보는 것하고 차이가 있어요. 일단 이게 성경 정보 차원에서라도 익숙해야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갈 수 있지 이게 낯설어 버리면 들어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집에서 몇 번 읽으면서 느낀 점은 ‘소발이 정말 대단하다.’입니다. 이건 마치 욥기서 후반절에 가면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데 그 때 하신 말씀하고 거의 비슷해요. 욥을 향해서 ‘네가 리워야단을 낚시로 낚을 수 있느냐.’ 하면서 이 창조 세계의 신비로움을 장엄한 필치로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표현하거든요. 그런데 이 대목이 그걸 줄여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그 웅장함, 광대함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 앞에서 욥이 ‘아이고 네가 쓸데없이 말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항복을 하는 거예요. ‘여태까지는 하나님을 듣기만 했는데 이제 비로소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경험이 더 깊어지는 걸로 후반부에 가면 나오는데 그 내용이 바로 여기 7절에서 11절에 나와 있는 것 하고 상당히 유사한 것 같았어요.


7절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알겠냐.’ 얼마나 그럴듯한 이야기입니까. 사실은 이게 욥기서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전능자를 표현하고 있어요. 이게 신, 구약 통틀어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능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거요. 사도신경도(요즘 새롭게 번역된 사도신경은 ‘나는’ 이렇게 시작하지만 옛날 사도신경은 ‘나’가 아니라 ‘전능하사’로 시작하죠. 어순이 좀 달라진 건데 ‘나는’으로 시작하는 것이 외국말의 어순인데 우리말로는 조금 어색합니다. 옛날 번역이 우리의 일반적인 말 표현으로는 맞는 것 같아요. 그건 보기에 따라 좀 차이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사도신경은 개신교 신앙의 핵심이잖아요.) 처음 출발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을 전능자로 이야기해요. 그런데 ‘전능하다’라고 이야기하면 보통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만 하나님을 전능자로 고백하는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큰 능력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거예요. 출애굽기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예상하지 못한 걸로 나와요. 다 놀라워합니다. 물론 거기에 위대하고 큰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자기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역사가 흘러가는 것에서 놀라워하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증거로 봤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데요. 십자가는 겉으로 드러난 큰 능력이 아니죠. 오히려 그건 실패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막강한 독재자처럼, 어떤 큰 거인이 모든 것을 때려 부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기력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펼쳐나가시는 그 어떤 사태를 가리켜서 전능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이 소발도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하고 한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옳고 정확한 표현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8절, 9절에 쭉 설명하는 거예요. ‘하늘보다 높으신데 네가 뭐할 거며 스올보다 더 깊은데 네가 어찌 알겠냐.’ 그렇게 쭉 나가요. 그러면서 11절에서 어떤 것을 딱 짚어서 말합니다.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여기서 소발이 말하려는 것은 ‘욥, 네가 자꾸 불평하는데 그러지 마라. 네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다 꾀고 있다.’ 이 말이에요. 욥의 불평이 그거잖아요. ‘왜 무죄한 자가 고난 받고 악한 자가 잘 되는 일들이 세상에 벌어지냐.’ 아까 10장 3절에서 인용한대로 말이죠. ‘왜 학대하고 멸시하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고’ 이런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욥이 불평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소발은 ‘그렇게 보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라고 굉장히 신앙적으로 깊이 있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거듭해서 말씀드리지만 제 삼자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소발의 주장에 손을 들어줄 겁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를 계속 말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7절에서 11절까지 이 두 번째 단락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에 대한 소발의 변증이며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일리가 있고 깊이 있게 바라보고 있고 이것은 성서 전체 흐름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친구들은 대부분 옳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서 삐끗하는 겁니다. 대개 이단들의 성격이 그겁니다. 단어에 드러나듯이 이단(異端)은 비슷하다가 끝만 다른 거예요. 어떤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에 이단(異端)이 되는 거거든요. 소발이나 다른 친구들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고 말도 잘 하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하지만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서 문제가 있는 거죠. 우리가 이런 것들을 분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교회 목사님 설교나 기독교 방송을 자주 들으실 텐데 분간하기 힘드실 겁니다. 다 좋은 이야기를 하니까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물론 성경에 있는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최소한의 준비가 된 분들은 성경을 이야기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말하기 때문에 옳은지 그른지를 분간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하여튼 소발과 친구들이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이제 그런 것을 다 말한 다음에 소발이 마지막으로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충고하는 거죠. 12절에서 20절입니다. 결국 ‘넌 문제가 있어. 문제가 있으니까 돌아서야 돼.’ 이 이야기를 하는 싶은 거예요. 만약에 그것을 이야기 안하고(소발과 다른 친구들이) ‘자네가 어려운 일을 당해서 얼마나 힘드냐.’ 여기까지만 했으면 제가 보기에는 괜찮았을 겁니다. 이 친구들에게는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어떤 사람들의 운명을 재단해 버리는 것이 결정적인 잘못인 거죠. 여기서 소발이 마지막으로 하는 충고, 비난은 ‘우리말을 좀 들어.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그 이야기와 그리고 핵심적으로 ‘하나님께 네가 순종하고 굴복해야 돼.’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을 잘 듣고 돌아서면 어떻게 된다고 설득하나요? 하나의 당근을 주는 거예요.(재밌으라고 드린 표현이에요.) 매력적인 말을 해주는 거예요. 17절에 ‘네가 정말 대낮처럼 밝아진다. 어둠이 있어도 아침같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야기하면서 18절에 ‘너에게 희망이 있다. 그래서 안전하다. 그리고 평안히 네가 쉬게 될 거다.’ 이건 누구나 바라는 삶이잖아요. ‘네가 굉장히 힘든 상태에 있지만 돌아서기만 하면 네가 희망을 갖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다.’고 충고와 설득을 하고 위로를 해주고 격려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고 어디 피할 데도 없고 막다른 골목에 떨어져서 결국 20절에 표현대로 ‘비참하게 죽을 뿐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 없이 죽는다는 이야기죠. 

여기까지가 11장을 우리가 같이 본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이 11장이 욥기서가 아니라 잠언 같은 데로 본다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틀린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거예요. 이 소발만이 아니라 빌닷이나 엘리바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답게 포장이 되어 있으나 두 가지 점에서 이 소발의 이야기는 오류입니다. 이게 참 조심스러운 거예요.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고요. 그럴듯하지만 어느 한 부분이 삐끗해서 다른 것까지 다 헝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겁니다. 사실은 우리 인생살이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두 가지로 강의안에 정리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욥의 고통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 이야기한데로 공감능력의 부재, 결여예요. 이게 인격이 나쁘거나 마음이 거칠어서가 아니에요. 공감능력의 결여라는 것은 맨탈리티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잘못된 교육 때문에 벌어지기도 하고요. 대개 전문적인 종교인들에게 그런 일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요. 자기가 너무 옳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잘못한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공감능력이 떨어지게 되는 거죠. 마음이 강하고 약한 차원이 아니라 너무 자기 의에 묶여 있는 거예요. 종교인들에게 그런 것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퀴어 축제,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을 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정도는 괜찮아요. 그런데 그걸 반대하고 시위하고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정죄하는 것은 제가 볼 때는 크게 잘못된 겁니다. 최근에 여러 교파들이 연합으로 해서 그 문제를 대중 집회를 통해서 막아보려고 하시네요. 그건 어딘가 방향이 잘못된 건데, 제가 <뉴스앤조이> 이런데 글을 한 번 쓸까하고 생각을 했다가 시간도 잘 안 돼서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하여튼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 자기 의가 너무 강해서 자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능력의 결여가 오늘 한국 개신교의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이것도 이미 한 번 말씀 드린 거예요. 하나님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견해에 제한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들이 하나님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거예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공격하게 됩니다. 저도 옛날부터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자유주의자가 아닌데 자유주의라는 말을 들어요. 예를 들자면,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때가 많이 있었거든요. 그게 못마땅한 거죠. 어떻게 타종교에 구원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냐고 하는 거죠. 그런 것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 다른 것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것과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이건 완전히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이게 자신들의 전통적 견해에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잘못이 이 소발과 비슷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목사로 평생 동안 살고 있습니다만 설교할 때마다 지금 제가 바르게 전하고 있는가에 대한 불안함이 있어요.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분적인 것만 알고 설교를 해야 하고 다른 수가 없잖아요. 그 아는 것만이라도 정직하고 바르게 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제가 하나님을 저의 설교로 제한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우리 여기까지 공부하고 두 달 쉰 다음에 12장을 공부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을 향한 소발의 이 충고, 앞에 나왔던 여러 친구들의 말과 비슷한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인간 삶의 아주 복잡함, 그리고 인간 인식의 제한들, 이런 속에서 지난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했겠습니까. 오늘 이 욥기도 그러한 연장선 속에서 오늘 우리들에게 새로운 빛을 비춰줍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고통과 고난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공감능력의 결여, 피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가 알고 있는 작은 하나님 경험으로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어리석음, 이것도 벗어나도록 주님, 성령이여, 우리를 붙들어 주십시오. 한 여름철 건강하게 잘 지나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을에 욥기서를 대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형편들을 주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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