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9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우리가 전반기 마치고 두 달 동안 쉬었습니다. 쉬는 시간이 좀 길었어요. 내년부터는 한 달만 쉬도록 하겠습니다. 욥기를 지난 1월부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욥기는 접근하기가 좀 찜찜했다. 다른 성경은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없었는데 욥기는 왠지 좀 불편했다.’는 거예요. 그래도 우리가 몇 달을 하니까 욥기의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면서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몇 가지만 개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욥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약 성경에는 여러 가지 장르의 글들이 있어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경구들, 그리고 실제적인 역사도 있고요.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글들이 있습니다. 그걸 구분해서 봐야지 이것을 모두다 역사적인 사실이다, 아니다 이런 차원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문자라는 것은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걸 가리키고 있는 거예요. 제가 늘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듯이 ‘손가락’이 있는데 손가락이 길고 짧고 예쁜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리키는 방향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 것을 염두 해두셔야겠습니다.


욥이라는 인물은 성경에만 나오지는 않습니다. 근동에 이름을 달리해서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어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만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바빌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등 얼마나 쟁쟁한 석학들과 사상가들, 영성가들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동양에도 그렇잖아요. 장자, 노자 아주 뛰어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생각을 했고요. 그리고 역사적 전통으로 그러한 지혜들이 쭉 내려왔어요. 성경에 나와 있는 것도 그런 것하고 직간접적으로 많이 연결이 됩니다. 특별히 구약성경 중에서 문학서라고 분류되는 부분, 성문서라고 보통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문학 작품입니다. 예를 들자면 욥기가 그런 거고 시편이나 잠언이 다 그런 거예요. 그러한 이야기들은 근동에 있던 여러 가지 다른 문명의 지혜로운 이야기들하고 연결이 됐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이 독보적으로 다른데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로만 되어 있어야지 의미가 있는 거지, 이렇게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었다면 권위가 좀 떨어지는 건 아닌가.’하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건 오해인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변의 다른 역사와 연관돼서 역사 안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하는 겁니다. 이 욥기가 완성될 때가 언제쯤이냐면(제가 구약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말씀드렸는데 기억하세요? 바벨론 포로 사건이 구약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이스라엘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된 거예요.) 바벨론 포로가 있었던 기원전 587년에 시작해서,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기원전 597년에 1차 포로로 잡혀가고 몇 차례에 걸쳐 잡혀갔는데 전체적으로 587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때가 우리나라로 하면 무슨 시대일까요? 거기서 7, 80년 포로로 있다가 고국으로 귀환을 하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모아졌는데, 그 때 구약성경이 많이 기록됐어요. 이 욥기도 그 시대의 작품입니다.


서론 이야기가 길었네요. 우리가 두 달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바람에 여러분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뜸을 좀 들이시라고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12장을 공부하겠습니다. 1절부터 25절까지 있습니다. 이게 욥의 대답이에요. 소발이라는 친구가 욥을 비난한 것에 대해서 욥이 반응합니다. 본문을 읽겠습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3.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5.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1.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13.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14.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15.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16.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17.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18.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19.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20.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21.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22.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23.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24.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25.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이 욥기가 전체적으로 42장이에요. 그 중에 1장, 2장, 42장만 하나의 서사, 산문 구조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다 시 형식이에요. 이 시 형식에 나온 것들이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에요. 제가 언젠가 설교에서 성서이야기는 다 논쟁이고 신학적 투쟁이라고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그걸 바탕에 두고 성경이 기록되는 거지 그냥 나이브하게 뭐가 생각나서 기록되는 게 아닙니다.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기록되는 거예요. 교회 안에, 공동체 안에, 유대 민족 안에,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하고 상황이 달라지니까 그걸 논쟁을 하면서 풀어 나가는 게 성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욥의 대부분의 이야기인 서사 구조는 아주 간단한 거예요. 이거는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도 있을만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어떤 사람이 망했다가 잘 해서 다시 갑절로 복 받았더라.’ 그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간혹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봐라. 욥이 나중에 갑절로 복을 받더라.’ 그런 쪽으로 이야기하면 성경을 완전히 싸구려로 만드는 거예요. 다른 어떠한 신학적인 바탕이 있는 거예요. 그 시각으로 따라가야 되는 겁니다. 그 바탕이 바로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지혜의 전통이에요. 욥의 친구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움입니다. 그리고 친구들만이 아니라 욥도 그 전통 안에 원래부터 있었고요. 유대인들은 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지혜입니다. 하나님 말씀 잘 듣고 잘 따르게 되면 복 받고 잘된다고 구약 성경 대부분이 그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신명기 신학이라고 하는, 구약을 전체 끌고 있는 신학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 받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유대인들은 지혜의 전통으로 이 세계를 해석했어요.


여러분들은 다 이해 하실 줄 알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혹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듣고 그게 뭔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을 해야 성서에 가까이 가고 신앙이 깊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어떤 답이 아니라(답일 수도 있는데 꼭 답만이 아니라) 질문인 거예요. 이게 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지혜라는 것이 세상을 사는데 유대인들의 정답이었어요. 그런데 포로기 이후(포로기는 바벨론 포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바벨론 사건을 꼭 머릿속에 넣어 두셔야 합니다. 사실은 구약 전체는 바벨론 포로 사건을 중심에 놓고 해석해도 가능합니다. 왜 창세기가 기록됐는지, 창세기도 사실은 바벨론 포로 사건 때문에 기록된 거예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보니까 자기들이 여태까지 살아왔던 신앙과 삶이 다 망가진 거예요. ‘우리가 믿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도대체 능력이 있는 분이냐.’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를 지켜준다는 하나님인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으니까 말이죠.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창세기 같은 것이 기록된 겁니다. ‘하나님은 창조자다. 비록 우리가 바벨론의 포로로 있을지라도 느부갓네살이라든지 이런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왕이다. 세계를 통치한다.’ 그런 신앙이 창세기에 있는 거예요.


이 지혜 전통이 이스라엘에 아주 중요했어요. 지금도 역시 중요하고요. 여러분들이 지난 학기에 공부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말들이 굉장히 지혜로운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냥 읽게 되면 욥의 말과 친구들의 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어요.(그건 전문적으로 속사정을 따져가야 하는 건데 아무튼 여러분들이 읽을 때 어떤 방향을 가지라는 뜻으로 배경 설명을 드리는 겁니다.) 지혜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정말 중요한 거였는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다른 문제의식이 나온 거예요. ‘고난이라는 게 이유 없이도 오냐.’하는 거죠. 지혜의 전통에 의하면 이유 없는 고난은 가능하지 않는 거예요.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거예요. 이 세 명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 그거예요.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런 운명에 떨어졌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실 거야.’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듣는 그러한 논리예요. 세 명의 친구가 펼친 논리가 바로 그것이고 인과가 있는 거예요. ‘고난은 원인이 있다. 그걸 풀어야 한다. 그게 바로 죄다.’ 이러한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갑자기 등장하는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가 있어요. 조금 더 전문적인 말씀을 드린다면 이 욥기가 처음부터 그렇게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점점 편집이 되고 전승이 되면서 들어오고 빠지는 과정이 있었어요. 엘리후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온 겁니다. 들어옴으로써 그 이야기가 더 풍성해 지는 거예요. 이 엘리후의 논리는 앞의 세 명의 친구들과는 좀 다르게 이 고난의 이유를 단련, 훈련으로 본 거예요. ‘비록 고난이지만 너를 단련시켜서 더 믿음 있는 사람이 되게 하기위한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이런 식으로 엘리후가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그럴듯하죠. 그런 이야기는 지금도 교회에서 많이 듣고 있죠. 그러나 욥은 그것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세 명의 친구들의 주장은 죄 때문에 동의하지 않고 그리고 단련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라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욥의 입장은 '모른다'는 거예요. '지혜의 전통에서 나온 그 답을 가지고는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요. 하여튼 그러한 바탕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논쟁이 계속되는 거예요. 앞에서 엘리바스와 빌닷에 대한 대답을 욥이 각각 했고 이제 11장에서 세 번째로 등장한 소발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에 대한 대답을 이 12장에서 한 거예요. 이 이야기의 배경이 머리에 들어오죠? 이게 굉장히 격한 신학적 논쟁, 인간의 운명, 그 외 많은 것들을 바탕에 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세 문단으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1절에서 6절까지가 친구들을 향한 욥의 냉소적인 공격이에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로 ‘시크하다.’는 말입니다. 냉소적인 표현으로 이 욥이 친구들의 비판에 대해서 반응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7절부터 12절까지예요.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지혜를 가리켜서 ‘너희들 뭘 그걸 가지고 떠드느냐. 지혜라는 것은 새나 물고기나 짐승이나 이 세계를 보면 다 알 수 있는 거고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것을 가지고 떠드느냐.’라고 반론을 펴는 거죠. ‘자연을 통해서 그런 지혜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지혜로 인간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반론입니다. 세 번째는 13절부터 25절까지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잘 파악해 보려는 노력을 지혜라고 하는데 그것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거다. 그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세 문단을 조금씩 더 자세하게 천천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부터 6절까지 욥의 냉소라는 소제목이 붙은 강의 요약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을 나이브하게 처리하지 않고 아주 격하게 감정적으로 보일정도로 그렇게 대처해요. 만약에 저 같으면 ‘그렇게까지 할 거 있나. 저 친구들은 모르니까 말대꾸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상대하지 않을 텐데 욥은 계속 밀고나갑니다. 이 욥이 신학적인 논쟁이라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겁니다. 굳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하고 말해봐야 입만 아픈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거는 꼭 필요한 논쟁이라서 욥기를 기록한 사람이 욥의 태도를 아주 강하게 표현해 주고 있어요. 친구들을 좀 비아냥거리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제가 몇 번 말씀드린 대로 신학적인 거고 문학적인 입장으로 읽어야지, ‘하나님의 사람이 비판한다고 해서 똑같이 맞대응을 하냐. 차원이 똑같네.’ 이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문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절을 보면 이래요.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너희들이 지혜를 다 독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제가 강의 요약문에 사자성어를 적었는데 교언영색(巧言令色)이에요.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자기들이 모든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잘 따라갈 수도 없는 현학적인 것에 떨어지고 말았다라고 하는 거죠. 지금 욥이 친구들의 지혜 전통에 대한 반론을 펴고 있는 겁니다.


12장은 11장에서 나오는 소발의 비판에 대한 반응이에요. 11장에서 소발이 욥을 향해서 하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좀 돌아서.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주신다.’ 그러한 논리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 건데 욥은 그런 이야기는 다 알고 있는 거니까 그런 뻔한 말로 설득하지 말라고 대꾸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여러분 강의안을 좀 보십시오. 소발의 공격과 욥의 반론에서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영성, 영적인 통찰, 신학적인 마인드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 삶의 관계에서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은 남겨두는 것이 좋은 거예요. 자꾸 설명하려고 하면 어떤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고난을 설명하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는 거예요. ‘잘못한 게 있으니까 돌이켜, 단련 기간이니까 참고 잘 견뎌봐.’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사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런 걸로 다 해결이 되지 않잖아요. 여러분들이 욥기서 마지막 부분에 가면 알게 될 텐데요. 하나님이 나타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 때 욥이 확실한 결론을 얻었을까요? 얻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욥은 지혜의 전통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신의 모든 논리나 인식으로 해명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버리지 않는 단계가 지혜의 전통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신앙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경험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까지 열려있는 거예요. 지혜의 전통은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려고 하는 거예요. 율법,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을 그 안에 담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규범 안에 담는 것, 규범이라는 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하면 범주예요.(카테고리예요.) ‘이런 것은 옳은 것, 이런 것은 잘못된 것.’ 이렇게 범주화하잖아요. 인간의 문명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윤리, 도덕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들이 다 그러한데, 이게 나쁘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아실 거예요.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의 삶은 그런 걸로 범주화하고 개념화하고 규범 안에 담아내야만 비빌 언덕이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거기에 근거해서 살아가야지 그거마저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겁니다. 그걸 전제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안에 갇힐 수 없다는 거죠. 이 말을 쉽게 이야기면 아직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아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 이걸 좀 더 신학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계시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 하나님은 생명의 궁극적인 토대니까 우리가 생명의 궁극적인 토대를 다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런 말에 대해 ‘하나님이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면 불확실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뜻은 아닌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6절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원한다.’는 표현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기계시라고 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안다, 보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비밀들을 우리가 다 아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것이지, 부활의 실체가 무엇인지,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그리고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죽으면 잠을 자는 건데 마지막 때 천사장의 호령, 나팔 소리와 더불어서 다시 깬다는 이 신비로운 메타포 등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거예요. 이런 긴장 가운데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온전한 절대 계시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운명에 나타났다고 하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약속으로 받고 희망 가운데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실체로 드러난 때는 아직 안 온 거예요. 신학적인 용어로 이미 구원이 예수에게 일어났지만 아직은 아닌, 종말에 드러나게 될 긴장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확신을 해도 좋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고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가까이 가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식과 믿음은 다 종말론적인 거예요. 그 때에 가서야 다 드러난다는 이런 긴장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있습니다. 이런 걸 놓치면 독단에 빠지게 되는 거죠. 사실은 이런 긴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요. 사람은 뭔가 확실하게 잡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잡히질 않으니까 점점 외골수로 빠지게 되는 거죠.


그 다음 두 번째 단락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지금 온갖 지혜를 다 풀어놓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잘난척하는 거죠.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대개 잘난 척을 많이 합니다. 이게 지식인들이나 목사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고 이러한 선생들은 어디서든지 가르치려고 해요. 이게 습관이 돼 버린 욥의 친구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죠. 말하자면 평생 동안 연구한 게 있을 거고 박사학위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겠어요. 거기에 근거해서 ‘욥, 너의 운명이 이 안에서 설명이 된다.’라고 말하는 거죠. 욥의 주장은 ‘그 지혜가 별거 아니다.’ 이건 욥의 주장만이 아니라 지혜 전통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써 나온 그 당시 유대 민족의 하나의 새로운 세계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에 평생을 걸었지만 그건 자연을 보면 다 아는 거니까 그것으로 내 운명을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죠. 여기 그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7절, 8절을 보면 ‘짐승에게 물어봐라, 새들에게 물어봐라, 땅에게 말해봐라, 다 가르쳐준다.’(이런데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이런데 열린 눈을 가진 사람들은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대학 아니라 대학 할아버지라도) 훨씬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이 자연이 우리들에게 말해주니까요. 그런데 왜 배우지 못할까요? 어떠한 선입견들이 우리 안에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있는 것 그대로 직관하지 못하게 하는 이 세계의 학습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점점 왜곡되어 있어서 그런 것들을 바로 못 보게 되는 거죠.


이 자연 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사는 원당이야기를 (강의안에) 잠깐 했습니다. 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리고 여러분들도 늘 그런 것을 보고 계십니다만, 제 서재 2층에 앉아있으면 창문 밖에 대나무가 늘 보여요. 제 컴퓨터가 있고 바깥으로 창문이 있는데 복도 2층 올라오는 층계 너머 창문이 있어서 그쪽으로 바로 붙어있는 산에 대나무가 많이 보입니다. 다른 나무보다 대나무는 바람에 더 민감해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아무리 센 바람에도 꺾어지지 않아요. 이 바람에 자기의 온 몸을 맡겨두고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대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이 바람이라는 것이 구약의 루아흐, 영이라는 단어하고 똑같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에게 내 삶을 온전하게 맡김으로써 생명의 깊이와 자유의 토대를 비로소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닐까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꾸 힘을 주게 되면 성령에게 맡기지 못해요. 이 성령에게 맡기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것도 ‘기도했더니 가슴이 뜨거워지더라.’ 이런 차원이 아니라, 이건 다른 것하고 연관되는 건데, 어쨌든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한마디만 보태야 되겠네요. 보통 사람들은 성령하면 ‘불을 받아라.’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진리의 영을 경험하는 거예요. 생명의 영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때 자유와 해방의 영을 경험하는 거죠. 우리 기독교 신앙으로 연관되는 것으로 말씀드리면 부활을 실질로 이해하고 거기에 자기의 삶을 맡길 수 있다면 자유로워지는 거죠. 대나무가 작은 바람이나 강한 바람에도 거기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서 꺾이지 않는 것처럼 부활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면(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생명의 영이니까)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 게 되죠.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맡기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좀 봅니다. 자연을 보면 누구나 다 느끼는 것들입니다. 이 욥이 하는 이야기는 ‘너희들이 떠드는 거 별거 아니다. 자연을 통해서 다 아는 것들이다. 그런데 세상에 자연을 통해 배우는 지혜만 가지고 해결이 되더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라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을 욥이 자기를 비판하고 있는 소발을 향해서 반론으로 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 만능주의에 떨어지지 않고,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지혜가 뭔지를 분별하겠다. 이제 좀 따져봐야겠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게 11절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이런 거요. ‘너희들이 말하는 지혜가 옳은 건지 따져보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단락입니다. 13절에서 25절이에요. 여러분 강의안을 보십시오. ‘이 대목에서 욥은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을 구구절절하게 논한다.’ 이 배타적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세요. 저희들 예배드릴 때 공동기도에도 가끔 나와요. 이런 것들은 교회에서 별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무소불위하신 하나님 등등은 많이 야야기하지만 배타적인 능력의 하나님 같은 것들은 별로 표현하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 신자들에게 낯설지만 이런 단어를 자꾸 들어야지만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단어들의 핵심을 따라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라도 이런 단어를 쓰는데요. 사실은 공부라는 것은 단어 공부예요. 특별히 인문학이나 철학이나 신학,(우리 신앙 공부는 신학이니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거예요. 이 단어를 따라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죠? 그러니까 배타적 능력이라는 것을 처음 들으면 멀리 느껴지다가 점점 또렷하게 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거하고 자기가 일치되는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 확 달라지게 됩니다.


(요약문에) ‘이 배타적 능력을 구구절절하게 논한다. 이런 방식은 욥의 친구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지혜를 말하는 사람들의 방식이에요. 13절부터 보면 그런 게 계속 나와요. ‘하나님이 권력 있는 자를 내치고’ 등등 그런 게 계속 나와요. 이 욥이 말하는 방식은 욥의 친구들과 비슷합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의 기초가 지혜의 전통이니까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에서는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이게 참 어떤 사람의 세계 인식을 따라가는데 중요하면서도 분간하기 어려운 거예요. 교회 안에서도 그렇잖아요. 누구나 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이 어떤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의미가 달라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복 받는다.’ 그걸 구원으로 생각하고 아니면, ‘죽은 다음에 공중 어딘가로 휴거 되서 간다.’ 이런 식으로 구원을 이해하는 사람이 이런 단어를 쓰면 거기에 한정되는 거죠. 그렇지 않고 다른 차원에서 구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쓰는 구원이라는 단어는 달라지는 거죠.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미래에 참여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구원이 다른 차원에 있는 거죠.


이걸 어떻게 더 설명을 해야 할까요? 이런 것들이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 하는데 중요한 겁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것과 직접 연관되지는 않지만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보충하겠습니다. 한 가족이 있다고 합시다. 그 중에 철없는 아이라면 ‘집에서 맛있는 것 먹고 용돈이나 많이 타서 실컷 놀자.’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에게서 나오는 가족의 의미가 있을 거고요. 또 어떤 자식은 ‘가족 관계, 부모와 자식, 형제들끼리 관계를 친밀하게 나누는 것’에서 가족의 의미를 찾는 자식이 있겠고요. 또 어쩌면 더 나아가서 ‘우리 가족이 이 사회 공동체를 위해서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그런 쪽으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구원을 어떤 차원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이 단어도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구원,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 예수의 재림,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하고 우리가 성찬을 통해서 세례가 다시 한 번 확인되고 마지막 때 완성될 그 절대적인 생명이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예식 속에 신비한 방식으로 이미 들어와 있다고 하는 그러한 영적인 시각을 가져야하는 거예요. 이게 전달되나요? 어렴풋하게는 어떤 걸 야이기 하려는지 들어오죠? 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이건 마치 교향악을 누가 지휘하고 음악을 해설하는데 그게 당장은 안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걸 사이비로 공부하지 말고 정상적으로 잘 공부하게 되면 초보자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음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이 좀 어렵다고 생각해도 자꾸만 근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시간이 걸려도 그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강의안을 보십시오. 이제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폭군처럼 마음대로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중요한 거 배우네요.)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세상의 우연성이다.’ 예상하지 못하는 것들이 이 역사 안에(물리학이나 생물학도 마찬가지고요. 전문적인 용어로 우연성이라고 해요.) 개입 되는데 그렇게 이 세계가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 우리가 어떻게 손댈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하는 거죠. 이런 게 눈에 보이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으로서 자유와 해방,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 이런 차원으로 가는 거죠. (요약문에)예수의 십자가의 부활이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예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원인과 결과, 인과관계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그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어요.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세상이 움직인다면 이건 정말 지루한 세상이고 기대할 것도 없는데요.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예상을 넘어서 이 세계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니까 정말 기대해볼만하고요. 그런 분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만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서 공부 후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12장을 오늘 공부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인간 역사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여러 가지 충돌하는 과정을 저희들이 조금씩 따라가고 있습니다. 단순한 지혜의 전통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통치에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운명을 맡기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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