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16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13장>

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5.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6.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7.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8.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0.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11.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12.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6.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17.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18.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19.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20.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22.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23.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24.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25.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26.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27.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28.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오늘 욥기 13장입니다. 우리가 같이 본문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전체적인 내용이 눈에 들어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슷한 것들을 앞에서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 똑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흐름이야 똑같긴 한데 내용은 차이가 있어요. 어떤 변론을 하는데 좀 새로운 시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13장은 욥이 세 번째로 나온 친구, 소발의 비판에 대해 반론을 펴는 거예요. 앞에서 12장에서도 했고 여기 13장에 다시 한 번 반복되고 14장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제목을 신앙의 절정이라고 했어요. 오늘 정말 중요한 대목을 공부하는 겁니다. 신앙의 절정, 성서가 이야기하는 최고의 신앙이에요. 신앙도 천차만별이잖아요. 완전히 우상숭배 하듯이 하는 사람도 있고 이 신앙이 여러 가지 색깔이 있어서 같은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가지각색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셨겠습니다만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하고 욥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좀 달라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역사를 지나 쭉 오면서 발전, 변화된 겁니다. 하나님 자체가 변했다는 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꺼번에 다 알 수가 없어요.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절대적이라고 하는 말,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건 옳은 이야기인데 그거는 어떤 틀 안에 넣고 이러니까 절대적이라고 하는 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그 분을 다 규정할 수 없을 때 그런 말을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을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에요. 믿음의 확신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깊어질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너무 어마어마하니까 그 앞에서 내가 어린아이고 모르겠다는 절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욥기도 기본적으로 그런 게 바탕에 깔려있는 거예요. 이 욥기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누구냐에 대한 질문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혹시 여러분들은 ‘그건 너무 철학적인 것 같고 이미 하나님이 어떻다는 걸 경험해서 이야기한 것 아니냐. 질문하는 게 아니고 대답이 있는 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질문과 대답이 연결되면서 끝난 게 아니고 지금까지 쭉 지내온 거예요. 이런 상황이 어떤 건지를 여러분들이 조금 더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것으로 예를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도 자주 이야기하는데 생명,(이 생명이라는 것은 성경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세계에서도 많이 이야기하는 거니까요.) 이게 뭔지가 드러났을까요? 생명이 뭔지 아세요? 철학자들, 물리학자들이 생명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데 다 드러났을까요? 혹은 세상이 무엇인지 다 드러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강의 요약문에도 나옵니다만 제가 책을 하나 소개하려고 가져왔어요. 이게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그친 게 아니라는 것과 연관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제가 서울에서 뉴스앤조이가 주관하는 설교 멘토링 강의를 했어요. 거기 목사님들이 6, 70명 오셨는데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이 책도 소개를 했고 오늘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과 닿을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안도현이 쓴 ‘연어’는 아주 유명하잖아요. 그 분이 수 년 전에 한겨레신문에 한 6, 7개월에 걸쳐서 연재한 글이 있어요. 그걸 모아서 엮어놓은 책입니다. 시에 관한 이야기예요. 제목이 재밌어요.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시는 글씨로 쓰는 게 아니라 모든 온 전체 영혼으로 쓰는 거라는 뜻입니다. 여기 있는 내용 중에 여러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지만 오늘 공부하는데 전체가 필요한 건 아니라서 한 군데만 이야기하겠어요. 머리말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시에 미혹되어 살아온 지 30년이다. 여전히 시는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으므로 다만 시적인 것을 탐색하는 것으로 소임의 일부를 다하고자 한다.’ 그런 이야기들로 머리말을 쓰고 있습니다. 시인의 아주 솔직한 고백이에요.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평생 동안 매달려 살아왔지만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시가 무엇이다.’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적인 것, 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이 뭔지를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우리 기독교인들의 자세와 닿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다.’를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저도 평생 동안 신학하고 교회 안에서 설교하면서 살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깊은, 안도현의 표현을 빌리면 허공, 이런 것이라서 직접적으로 어떤 거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어떤 것이라고 말할 뿐이고요. 안도현 시인이 ‘시적인 것’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하나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시인들의 경험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거예요. 언어와 세계와 숨어있는 것들을 살며시 들여다보고 거기서 놀라고 그리고 더 깊이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 때문에 당황스러워 한 것들을 자기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겁니다. 우리 구약에 나오는 시편도 그렇고 모든 성서기자들도 그런 경험을 한 겁니다. 오늘 우리도 욥기를 그런 차원에서 읽고 있습니다. 욥과 친구들이 계속 싸우는 거예요. 싸움의 핵심은 아시겠죠? 욥의 친구들은 욥을 향해서, ‘네가 잘못하고 있으니까 회개해.’ 이것과 ‘네가 고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연단해서 더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거니까 견뎌봐.’입니다. 굉장히 그럴듯한 거예요. 이게 유대인의 지혜의 전통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아요. ‘도저히 나는 용납할 수 없다.’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죠. 다른 두 가지의 생각이 충돌하는 거죠. 그런데 일반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욥의 친구들의 말이 더 믿음 있는 사람의 말처럼 들려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맥락이 이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욥기서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고 많은 신자들이 욥기서를 잘 읽지 않습니다. 좀 낯설고 찜찜하게 느껴지고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지혜의 전통과 이질적인(완전히 이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욥의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거죠. 그래도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이러한 욥의 신앙마저 유대인들의 하나님 신앙의 정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서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오늘 본문을 세 단락으로 나눠서 같이 보겠습니다. ‘욥의 신앙이 왜 절정인가. 유대교 신앙에서 왜 절정인가.’라는 것은 사실은 예수님과도 와 닿아요. 이걸 시간이 남으면 짚겠습니다. 세 단락이에요. 첫 번째는 1절부터 13절, 두 번째는 14절부터 19절, 마지막은 20절에서 28절입니다. 1절에서 13절은 욥이 직접적으로 친구들을 향해 반론을 펴는 거예요. 그 친구들을 가리켜서 4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그러니까 돌팔이 의사라는 거예요. 말은 그럴듯한데 정말 환자가 누군지 모르고 병도 모르고 목표가 다른데 있는 거예요. 그렇게 욥이 친구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하는 말은 쓸모가 없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이 여러 가지로 그럴듯하게 이야기하고 친구를 위하는 척하는데, 진정성이 있긴 있었을 거예요.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겉으로는 친구를 위하는 것 같아도 사람은 이중적인 게 있어서 자기가 잘난 척하고 싶은 게 많이 있어요. 그리고 신앙적으로 괜찮게 보이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지금 욥은 친구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확정지을 수 없지만 13장, 그리고 욥기 전체 흐름으로 놓고 볼 때는 옳은 이야기입니다.


쓸모없는 이유가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미 욥도 다 알고 있는 겁니다. 알고 있는 것을 자꾸 이야기하면 잔소리가 되는 거예요. 욥도 지혜의 전통 안에서 살았으니까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들은 다 쓸데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둘째는 친구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점이 있는 거예요. 인간 삶에는 지혜의 전통으로는 해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것을 감안하고 지혜를 이야기하면 괜찮은 거예요. 신앙적으로 여러 가지 많이 있잖아요.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걸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삶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어떤 한 가지만 밀고 나가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이게 정확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혼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것 외에는 이혼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일부일처의 가부장적인 제도권 안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제도인데 어쨌든 그건 옳아요. 그렇지만 인간 삶의 영역에서는 이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분명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차단해 놓고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지마라.’라고 이야기하면 경솔한 거죠.


그래서 욥이 볼 때 이 친구들은 돌팔이 의사와 같습니다. 이 돌팔이들은 성경 표현으로 따지면 쓸모없는 의원인데,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주로 돈 버는 것에 관심이 있는 거죠. 그리고 인간과 병의 근본에 대한 지식이 온전하게 없어요.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고 그리고 조금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나 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를 돌팔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돌팔이가 병을 못 고치는 것은 아니에요. 많은 경우에 상식적인 처방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고 돌팔이들도 들은 풍월이 있어서 웬만한 거는 다 고칠 수 있는데 인간과 병의 근본에 대해서 정확하게 꿰뚫고 있지 못하니까 다른 상황이 닥치면 오진을 할 수 있고 자기가 알고 있는 작은 상식과 들은 풍월로 치료하려다보니까 병이 더 깊어지게 되는 거죠.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목사를 뭐라고 하는 게 부끄럽기는 합니다만 목사들에게도 돌팔이의 위험성이 있어요. 목사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승려나 사제들에게도 있을 겁니다.


욥은 이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어요. 이미 처음부터 알긴 했습니다만 친구들이 계속해서 공격을 하니까, ‘친구들이 전부 돌팔이 의사 같은데’라고 해요.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지혜 전통으로는 풀지 못하는 삶의 깊은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밀어붙이는 저 친구들과(겉으로는 교양 있어 보이지만) 대화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사실을 알고 욥은 3절에서, ‘나는 이제 하나님에게 따지겠다. 너희들과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따지겠다.’라고 말합니다. 욥은 사실은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어필을 하는 거예요. 20절부터 보면 욥의 기도라고 나오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에게 따지는 내용입니다. 1절에서 13절, 후반부를 조금 더 보겠습니다. 욥의 친구들에 대한 비판이죠. 그들이 돌팔이 의사와 같고 아는 이야기만 계속 반복해서 지루하고 겉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욥이 볼 때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예요. 오히려 9절에 보면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하나님을 속이려한다.’라고 합니다.


그걸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의 언행만 가지고 그 사람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당대의 석학이고 랍비이고 지혜의 스승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고, 우리를 단련 시켜서 어떻게 하고’와 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적인 덕담들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과 충돌했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제사장들도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러나 어느 한계 안에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을 절대화하는데요. 이게 참 이상한 것이요. 종교적인 매너리즘이라는 게 있어요. 이건 삶에서도 상투성에 떨어지면 삶의 깊이들을 놓치고 정신없이 사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신앙도 그래요. 어느 정도 교회 오래 다니면 시스템에 적응하고 직분을 받기도 하면서 거기에 취해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게 됩니다. 이건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근본에 대한 구도적인 자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다른데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그렇습니다.


저도 목사로서 꾸준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공부를 하는 등의 이런저런 훈련들을 하지 않고, 그냥 옛날에 알고 있었던 것만 가지고 목사생활을 하게 된다면 거기로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관심은 성경이나 하나님이 아니라 ‘교인들 어떻게 부흥 시킬까.’ 여기로 갈 수밖에 없어요. 이건 사람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궁극적인 관심이 없을 때는 다른 곳으로 자기의 에너지를 쏟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걸 구분하기가 정말 힘든 거예요. 목사도 그렇고 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일 설교 첫 부분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모든 신앙의 핵심라고 하는데 이게 당연한 말 같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관심이 없고 막연한 종교성, 교회의 시스템, 다른 어떠한 호기심들만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쪽으로 떨어질 우려가 많이 있어요. 이 욥이 친구들을 향해 그렇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마저 너희들이 속이려고 하냐. 사람은 속일 수 있는데 하나님마저 속이려 하느냐.’라고 하는데, 정말 준엄한 책망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서 12절에 보니까 ‘그들의 격언은(종교적인 격언이죠.)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돌아다니는 말들, 그게 격언인데 이 말들의 영적인 깊이를 놓치게 되면 재와 같다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자칫하면 열광주의에 떨어져서 이것저것 분간 못하게 되고 자칫하면 냉소적으로 떨어져서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또는 위선적으로 빠질 수도 있고요. 참 이게 쉽지가 않아요. 꾸준하게 자기의 영성의 훈련을 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이 친구들하고의 대화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이 욥이 과감하게 13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제발 나를 가만둬라. 내가 불행에 빠졌다고 연민을 갖고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싫다. 내가 당한 불행은 내가 지고 가겠으니 더 이상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라.’고 말할 정도로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대목을 너무 길게 했네요. 두 번째 대목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단락 14절에서 19절입니다. 지금 욥의 상황은 정말 누가 보더라도 불쌍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태예요. 사면초가(四面楚歌), 고사에 나오는 거죠. 옛날에 중국에서 있던 이야기인데 초나라의 노래가 사면에서 들리니까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는 항우를 이야기합니다. 욥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앞에서 했기 때문에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제정신 차리기 힘들거든요. 웬만하면 주변에서 충고를 하면 절충을 하게 됩니다. ‘그래, 자네들이 이야기하는 것 알았다.’는 정도로 하고 더 이상 자기 앞가림하기 힘든 상태에서 논쟁을 하기 힘든 거예요.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죽겠다는 절망에 빠지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무조건 매달리면서 ‘살려주십시오. 해결해주십시오.’ 이렇게 나가겠죠. 물론 이게 신학적인 문학이라서 실제로 이 사람이 그렇게 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건 너무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이 욥과 비슷한 이야기는 성경 말고 다른 나라에도 있어요. 이러한 운명들이 옛날 사람들 눈에도 ‘신이 살아있다면 한 인간의 삶이 저렇게 저주받을 수 있나.’ 이건 누구나 생각할만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물론 실제로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도 있고요. 어쨌든 욥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강하게 논쟁을 하는 거예요. 친구들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고 자기가 떨어진 신세를 한탄하지 않으면서 ‘너희들이 돌팔이 의사다.’ 이렇게 이야기하고요.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고분고분하지 않아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따지고요. 그리고 자기의 숙명 앞에서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내가 감당해야 한다. 내가 죽는 것, 할 수 없다.’ 이런 정도로 가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이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어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정말 이런 상태에 빠진 거예요.) 그러나 아뢰리라.’ 이게 히브리어라서 학자들에 따라서 번역을 여러 가지로 합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다고 해요. 그래서 모음을 어떻게 붙이냐에 따라서 뜻이 조금씩 달라진다고 합니다. 어떤 전통에서는 15절을 이렇게 번역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죽여도 나는 그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를 항상 바랄 것이다.’ 이러한 의미라고 합니다. 여기에 정말 많은 의미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죽여도’ 죽을 만한 잘못이 없다는 게 분명한 데도 억울하게 죽는데, 이걸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무죄한 자의 고난이에요. 죄가 없는 자의 고난, 이거는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 이어진 영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세상에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지니까요. 일전에 시리아 난민 중에 세 살짜리 아이가 터키 해변가에서 발견됐다고 하네요. '그 아이의 운명이 하나님이 정의롭고 사랑이 많은 분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라고 조금 생각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해볼 만한 질문인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죽여도’ 그러니까 ‘자기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당해도 나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인데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실망하면 다 떠나게 돼요.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경험되지 않으면 떠나게 되는 거죠. 이건 교회를 꼭 나오고 안 나오고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다른 이름을 붙여도 좋아요.) 우리의 삶과 역사와 세계를 절대적으로 끌어가는 어떤 분, 그러한 분을 포기하는 거죠. 대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욥은 ‘그래도 떠나지 않고 희망한다. 하나님을 향해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걸 왜 절정인 신앙이라고 이야기 하냐면 가장 낮은 차원의 신앙은 기복주의인 거예요. 복을 받으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예요. 그걸 목표로 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믿는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이건 조금 낫지만 마음의 평화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인 것은 아닌 거예요. 그런 차원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면 인격적인 변화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각각 차이가 있는데 이 욥의 신앙은 그걸 다 넘어서는 거죠. ‘복을 주든지 마음의 평화와 전혀 상관없이 나를 죽이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떠나지 않고 희망한다.’는 거예요. 놀랍죠? 이게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이에 있는 거예요. 여기에 우리가 도달을 해야 되겠죠.


시편에는 그러한 표현들이 많이 나와요. 대표적으로 73편 25절, 26절이에요. 이러한 신앙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왜 그것이 가능할까요? 제가 조금 설명을 했습니다. 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는데 제 나름으로 해석을 했어요. 이 욥의 절정의 신앙, 하나님이 나를 죽여도 떠나지 않고 희망한다는 그 놀라운 경지가 왜 가능한가, 그리고 그게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다 변화무쌍하죠. 그래서 근거가 약한 거예요. 잘돼도 고만하고 가난하거나 불행하게 살아도 사실은 다 변화무쌍한 거예요. 거기에 자기 삶의 무게를 두는 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게 삶의 토대를 둘 때 이런 신앙이 가능합니다. 쉽지는 않은 문제예요. 실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은 구체적인 삶이니까요. 직장, 가족, 친구, 만남, 이런 것들이요. 대개 거기에 영향을 받아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신자들끼리 그러한 것들로 시험을 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의 경우에는, 그리고 성서가 말하고 있는 옳은 신앙의 차원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모든 나의 운명과 미래를 온전히 토대 삼는 거예요. 이게 전달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때만 죽음까지도 극복이 되는 거예요. 욥은 죽음이 정말 억울한 거예요. 그러나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죽음마저도 작게 경험되는 것, 그게 바로 절정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제가 강의안에 썼습니다. 두 번째 단락 끝부분에 나오네요. ‘십자가에서 예수는 하나님 손에 자기 운명, 미래를 맡긴다고 기도했다.’ 이게 욥의 신앙의 모습과 예수에게 일어난 신앙적인 태도가 맞닿는 부분입니다. 신학적으로도 그렇게 다 이야기가 되고 있어요. 구약에서 무죄한 자의 고난과 불행의 대표자가 욥이고 신학에서는 그것까지 다 포함한 인류 전체의 무죄한 자의 고난을 대표하는 분이 예수라고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조로 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마저 무죄하게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받는 고난은 그것에 비하면 작은 거죠. 작은 것 때문에 모든 것들을 걸어놓고 아등바등 살고 있어요. 소시민들이니까(저를 포함해서)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이러한 신앙의 깊이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 손에 자기 운명과 미래를 아주 온전하게 맡기는 신앙의 경지, 이게 신앙의 절정이다.’ 그렇죠. 그런데 이게 억지로는 안 돼요. 그게 왜 그런지에 대한 것을 알아야 우리가 그쪽으로 갈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부활, 이런 것들을 잘 알아야 됩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의 세계가 어떤가를 정말 실질적으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죽음이 작게 느껴지는 거지, 그런 것도 없이 무조건 힘내서 극복하고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겨야한다는 식으로 자꾸 믿기만 하라고 강요하면 열광주의, 광신에 빠지게 돼요. 그런 점에서 신앙공부, 신학공부는 우리를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드는데 첩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락은 짧게 하지요. 오늘 강의 요약문을 읽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20절에서 28절을 보십시오. 이건 욥의 기도 형식으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을 향해서 따지고 드는 겁니다. ‘욥은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으니(참 대단하네요.)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길만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 욥이 알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손을 데지 말아주십시오. 숨만 붙어 있게 해주십시오.(그래야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으니까요.) 두 번째, 나를 불러 달라.(22절입니다. 부르심이 있어야 하나님에게 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이 처참한 운명의 이유를 모른다면서 하나님께 따집니다. ‘자신은 낙엽이고 검불이다.’ 이건 ‘정말 초라한 낙엽과 검불인데 왜 이렇게 못 살게 하십니까.’ 이 이야기예요. ‘그래서 하나님 기분이 좋아 지십니까.’ 이렇게 따지는 거죠. 이 욥이 자신이 당한 불행의 이유를 찾아보다, 찾아보다 보니까 젊었을 때 지은 죄밖에는 말할 것이 없어요. 그래서 ‘젊었을 때, 철이 없을 때, 혈기왕성할 때, 지은 죄로 하나님이 나의 발에 차꼬를 채운 것이 아니냐.’ 끝까지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따질 때 따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 신뢰를 놓치고 있지 않습니다. 양면적인 거예요. ‘믿음이 좋으면 무조건 아멘하고 순종하지. 뭘 따지긴 따지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욥은 끝까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하면서 따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상태를 제가 요약문에 단어로 써놨어요. '불가해한 하나님', 자기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투정을 부린다고 할까요? 그 상태인 거죠. ‘정말 답답해서 죽겠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예민하게 작동시키고 있는 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신앙의 절정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공부했습니다. 우리에게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위대한 고수의 신앙처럼 생각이 드는데 우리도 그쪽으로 한발 한발 갈 수 있습니다. 또 당연히 가야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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