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2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은 욥기 14장입니다. 이게 전체적으로 42장까지 있는데 중간에는 서로 간에 논쟁들이 많아서 뛰어넘어도 될 것 같긴 했어요. 그래도 이왕 욥기서를 공부하기로 했으니까 한 장, 한 장 중간에 건너뛰지 말고 전체를 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14장입니다. 12장부터 계속 이어지는 욥의 대답입니다. 욥의 친구 세 명이 차례차례 나와서 욥을 비판했어요. 마지막 타자가 소발입니다. 이 친구들은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에요. 스승, 선생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어요. 욥도 물론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이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세 번째 친구 소발이 나와서 말한 것에 대한 욥의 대답이 12장부터 14장까지 이어집니다. 다음 15장은 다시 첫 번째로 돌아가요. 엘리바스로 돌아갑니다. 우선 성경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5.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6.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7.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16.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7.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18.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19.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20.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21.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22.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


소발이라는 친구의 비판에 대한 욥의 대답으로써 12장부터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로 이 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이 끝납니다. 오늘 제목을 욥의 절규라고 했어요. 욥 하면 대단한 인물이지요. 구약성경에도 그러한 신앙의 위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도 이 욥은 굉장히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사람들은 늘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유지하겠거니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어떻습니까. 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 신앙이 설교할 때처럼 늘 하나님 말씀에 가까이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까?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꼭 신앙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같은 사람들도 당연히 흔들렸습니다. 성경에는 그 흔들린 이야기들이 때에 따라서 조금은 비추기도 하지만 그런 건 잘 다루지 않는 거예요. 좋은 것만 다루는 거예요. 신앙에서 승리한 것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보통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늘 그렇게 신앙이 괜찮았겠지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토로하셨잖아요. 이건 사실은 신앙적인 말이 아니에요. 이런걸 볼 때 성경기자들이 굉장히 솔직한 거예요. 예수님을 억지로 미화해서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꾸며서라도 완벽한 분으로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런 것들은 신앙적인 고백이 아니기 때문에 빼는 게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어쨌든 사람의 신앙이 대개는 빨리 올라가지 않습니다. 늘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가 올라갔다가 요동을 칩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예요. 다만 하향곡선과 상향곡선, 그런 것을 따라서 신앙의 위인들은(비록 오르락내리락 하더라도) 결국은 올라가는 거예요. 천천히요. 사실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올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까먹는다는 말을 할 수 있는데 까먹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신앙생활이 재미없기도 하고 다른 것에 흥미를 붙이려고 하는 거예요. 이 14장의 제목을 욥의 절규라고 붙였기 때문에 서론적으로 말씀을 드린 거예요. 욥이 감당할 이 상황이 정말 힘든 거예요. 그래서 어떤 때는 신앙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없는 것 같기도 한 욥의 모습이 14장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좋은 부분만 읽고, 또 일반 교회에서 종종 간증 같은 것을 듣는데 대개 그거는 잘 한 것만 간증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저렇게 해야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염두 해두고 현실로써의 삶, 인간을 이해하면서 방향을 잡고 나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전체적으로 세 문단이 되겠습니다. 1절에서 6절, 7절에서 17절, 18절에서 22절입니다. 제가 1절에서 6절의 소제목으로 '홀로'라고 했어요. 이 안에서 욥이 말하고 싶은 건 그겁니다. '하나님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두시라. 혼자 있게 해 달라.' 오죽하면 이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더 이상 나를 간섭하지 마시고 혼자 있게 해달라는 절규를 욥이 하고 있어요. 굉장히 절실하네요. 그런 걸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조금씩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1절부터 2절까지, 인생이 얼마나 우스운가를 이야기해요. 1절,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생애가 짧은데 걱정만 많아요. 이런 것은 잠언에 나올만한 구절이네요.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시편, 잠언, 욥기를 가리켜서 구약의 문학적인 장르로 이야기 하기를 거룩한 문서, 성문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편, 잠언, 욥기는 서로 다 같이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비슷한 표현들이 반복돼서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 1절 같은 것들은 잠언에 나올만하죠.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다.' 아주 정확하게 우리의 삶을 뚫어보는 것 같습니다. 생애가 짧다고 하는 것을 정말 우리의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한 순간이라는 것을 정말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면 어떤 것에 미련을 두지 않을 거예요. 다 지나가니까 둘 수가 없죠.


그 시구가 생각이 나네요. 일본에 열일곱 자로 된 정형시가 있어요. 하이쿠라고 하는 거예요. 열일곱 자의 글자로 삶의 어떤 순간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본 사람 특유의 문학 형식입니다. 나중에 인터넷 찾아보십시오. 굉장히 좋은 글들이 많아요. 그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다다토모’ 숯은 나무하고 불의 중간쯤 된 것인데 언젠가는 나무의 시절이 있었잖아요. 거기에 새들이 와서 앉기도 하고 흰 눈이 얹히기도 했던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는, 그러한데서 인간의 삶이 어떤지를 뚫어보는 지혜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오늘 말씀드리려는 것이 이 시예요.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바쇼’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번갯불과 같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많이 들어도 실감이 잘 안 납니다. 그래서 문제인거죠.


2절, ‘꽃과 같이 자라서 시들며 그림자처럼 지나가며’ 이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죠. ‘그림자처럼 지나간다,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보통 여기에 책이 있다고 하면 정말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분명하게 있긴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게 지금 우리가 있는 이러한 공간에서만 있는 방식이지 불에 태우면 금방 없어지는 거고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있는 것을 불교용어로 색(色)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교에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이 있어요. ‘색(色), 보이는 것은 공(空)이다. 비어있다. 붙잡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저도 옛날에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옳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만 나이가 들면서 더 절실하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 예배드리는 건물, 제가 좋아하는 테니스 치는 것과 같은 모든 것들이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말들은 현실적인 게 아니라 도사들이나 하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걸 제가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어요. 우리가 지금은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세계가 공(空), 비어있음, 딱 붙들 수 없는 어떤 궁극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건 물리학적으로도 분명한 사실이에요. 별 조차도 있다가 없어지는 거 다 아시죠? 별도 그러한데 별에 붙어 있는 행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주의 많은 별들이 지금 있다가 없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태양도 그 중에 하나니까 태양에 붙어 있는 이 지구,(지구 안에 문명이 발달해 있지만) 이것도 결국은 세월이 지나면(지구가 앞으로 45억년 더 간다고 합니다만) 해체가 돼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지금 그걸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여기 욥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짧고 하찮은지를 이야기하는데 저는 여기에 동의합니다. 욥이 말하려는 것은 그것을 전제하면서, 이건 욥의 말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지혜 있다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거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욥이 정말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렇게 가소로운 사람에 불과한데 왜 나를 재판하려고 하나.’ 이런 거예요. 좀 어린이 투정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짧고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한데 이렇게 나를 꼭 집어서 힘들게 하시고 재판을 하시냐.’ 그렇게 하나님께 따지는 거예요. 지금 욥이 정말 답답한 상황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다른 말로 자기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어서 그렇게 투정부리듯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욥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오늘 소제목에 있는 대로 홀로 있게 내버려 달라는 겁니다. 그게 6절에 나옵니다.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그’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은 하나님께 더 바라는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금 죽을 지경인데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그냥 홀로 있게 내버려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 드리는 동시에 친구들에게 하는 거예요. 친구들이 자꾸만 ‘넌 잘못한 것이 있어, 하나님이 단련 하시려고 그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욥으로써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어쭙잖은 충고, 어쭙잖은 위로 같은 것들은 사람에게 필요가 없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많이 하죠. 특별히 목사들이 그렇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쉽게 그것을 대처해야만 하는 신앙적인 상투적인 말을 자꾸만 하는 거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를 위해서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는 것과 그냥 같이 옆에 있어 주는 정도로 있는 것이 정말 어려운 사람에게는 최선일 겁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신앙적인 상식으로 이런저런 충고를 하는 것은 때에 따라 필요하긴 하겠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필요 없는 말이 됩니다. 욥이 정확한 것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홀로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설교적인 차원에서, 아니면 큐티의 차원에서 하나의 교훈을 삼는다면, 정말 깊이 있는 신앙은 혼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도움마저 애타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이게 무조건 옳은 건 아니에요. 하나님에게 온전한 희망을 걸고 도움을 바라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라는 게 한 가지 색깔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 욥의 신앙이 어떤 건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약간 극단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없어도 된다고까지 이르는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라는 사람이 한 용어 중에서 이런 말이 있어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고 했어요. 일반적인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의 하나님 없이, 그러니까 우는 아이 뭐 주는 식이나 달라고 떼쓰는 그런 것 없이요. 하나님 앞에 서는 그러한 자세를 이야기하는 건데 지금 욥이 말하는 홀로 있게 해달라는 말과 연결이 되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말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겁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방식으로요.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고, ‘내가 지옥 갈까, 심판 받을까.’ 걱정하지 마시고, 누구한테 아무 도움이 없어도, 심지어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겠다는 그러한 자세가 오늘 홀로 있게 해달라는 욥의 말에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만한 관점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 두 번째 단락, 7절에서 17절입니다. 여기서 욥이 다시 인생의 허무를 언급해요. 보통 허무주의라고 하는데 삶의 허무를 깊이 느끼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기 힘듭니다. 허무주의가 좋은 것은 아니되 그 실체를 뚫어봐야 되는 거예요. 이런 생각 해보셨겠죠? 자기가 완전히 없어지는 경험을 미리 생각해 보셨나요? 사람들은 그걸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대개 산다는 것을 경험하는 근거를 나의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여러 가지 업적들이나 내가 무엇을 먹을 수 있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로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것이 다 없어지고 해체되고 없어지는, 그러니까 내 이름도 남게 되지 않는(죽음 이후에 우리가 그렇게 될 텐데요.) 그러한 차원에 일단 들어가 봐야 됩니다. 절대적인 고독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누구와도 연관이 되지 않는 상태인 거예요. 그런 경험들이 밑바탕에 있어야 하나님 경험이 가능합니다. 왜 그러냐면, 이걸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허무주의 자체가 옳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게 어떤 건지 알아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려면 다른 게 없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주위 사람들이나 여러 가지 관계들, 흥미롭게 느끼는 모든 것들에 붙잡혀 있으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지장을 받는 거죠. 그런 점에서 무(無)의 세계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첩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갖고도 제가 많은 이야기를 드릴 수 있어요. 성경에도 하나님 경험을 한 사람들은 다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친구들도 많고 인생살이가 재밌는 상태에서는 하나님 경험하기가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다른 데에 관심이 많이 가있기 때문에, 사람은 어쩔 수 없어요. 그런 것이 재미있는데 다른 게 들어오겠습니까. 여기 삶의 허무에 대해서 두 번째 단락에서도 다시 한 번 욥이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연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네요. 나무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죽으면 끝이라는 거죠. 10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이 때가지는 아직까지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예요. 성경의 세계가 처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내세에 대한 거요. 우리는 죽으면 천국 간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는 내세가 없었어요. 조금씩 유대인들에게 생각이 싹이 트다가,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묵시문학이라는 사상에 의해서 내세에 대한 생각이 유대인들에게 점점 확대되고요. 거기에 하나님의 심판도 깊이 들어오게 돼요. 그 이전까지는 죽으면 끝이에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살아있을 때 즐겁게 살자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내세에 대한 생각이 유대인들에게 조금씩 싹이 트다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로 완전히 기독교 안에서 죽음 이후에 천국이라고 하는 사상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거죠.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물어 볼게요. 보통 죽으면 천당 간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확실하게 감이 오시나요? 막연하죠. 어떤 사람들은 거기 가서 좋은 집에 산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좋은 집 가서 사는 건 아닙니다. 자꾸만 우리들의 생각은 현재에 경험하고 있는 것을 확장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거 보다 더 좋아진 어떤 세상 말이죠. 그런데 아까 제가 무(無)를 이야기 했듯이 이게 다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좋다고 생각되는 것이 연장 돼서 절대적으로 좋아지는 세계를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우리가 아까 찬송가를 부르면서 강조한 가사 기억나요? ‘주님을 뵈오리라.’ 이야기 했잖아요. 그거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인데 그러한 세계는 절대적인 것이라서 메타포로 밖에 설명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은유예요. 그런데 그런 찬란한 집이 있다는 이런 것을 사실적인 언어로 생각하시면 오해가 되는 겁니다.


이걸 조금 더 설명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왜 쉽지 않느냐면 여러분들이 평소에 이런 쪽으로 준비가 되어 있으면 와 닿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그래도 한마디만 하고 넘어 가겠어요. 그 세계는 절대적인 세계잖아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거예요. 착한 사람이 있으면 악한 사람도 있는 것, 이게 상대적인 겁니다. 전부 이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배부른 게 좋잖아요? 배고픈 게 있기 때문에 배부른 게 있는 거고요. 절대적인 세계는 그렇게 상대적인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 상대적인 세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이건 분명한 건데, 누가 옳다, 그르다를 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한 겁니다. 상대적인 방식으로 경험했던 삶의 생각들로써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가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인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천국, 하나님 나라를 자기가 그림을 확실하게 그려서 아주 분명하게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자기 확신이 들어서 좋을지는 모르지만 바른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고 있어요. 지금 이건 간단히 지혜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욥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지혜 있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인데 (앞 단락도 그렇지만) 그런 일반적인 지혜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데에 있는 거예요. 13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앞에서)‘우리 인생이 가엽다.’ 그렇게 하면서 13절에,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가두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해서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소서.’ 이게 앞 단락에서 나온 이야기하고 연결되는 거예요. ‘나를 홀로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그러한 호소, 그것이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하고 연관되는 겁니다. 이 스올은 보통 음부, 지옥, 게헨나, 이런 것들처럼 여러 가지로 불려요. 구약에 보면 사람이 죽으면 가야될 자리에 대한 용어가 여러 가지입니다. 그거는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나왔어요. 그리고 유대인만 아니라 근동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사람이 죽은 걸 보잖아요. 때에 따라서는 썩은 시체를 볼 수도 있거나 묻었는데 동물들이 파헤쳐 놓은 장면을 볼 수도 있고 그리고 잘못한 사람을 사형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을 동물들이 뜯어먹게 내버려두기도 하는 그런 끔찍한 장면들을 많이 보잖아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도대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하게 된 겁니다. 죽으면 굉장히 끔찍한 거잖아요. 모든 게 썩어버리고 벌레들이 있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그곳을 스올, 게헨나 등의 여러 가지 다른 말들로 부른 겁니다. 그런데 이 욥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스올에 감춰달라, 그래서 나머지 인생길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강의안 두 번째 단락의 2번에 두 번째 패러그래프 보십시오. ‘욥에게 어려운 것은 자신이 왜 고통당해야만 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통을 당할 정도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니되 그것은 젊은 시절의 혈기로 인해서 행한 것에 불과하다.(지금은 최선으로 자식들이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지을지 모른다는 염려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정도로 반듯하게 살던 사람이라서, 죄 때문에 자기가 엄청난 불행을 당했다고 하는 친구들의 말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알 수 없이 임한 고통이 자기의 영혼까지 파괴할 정도다.(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욥은 앞 단락에서 홀로 있게 해달라는 호소와 마찬가지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마지막으로) 스올로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욥이 얼마나 자기의 삶을 견디기 힘들어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그냥 욥에게만 일어났던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시면 곤란하고요. 그리고 불행을 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요. 사실은 인간 삶 자체가 행복하든 아니든 간에 욥의 상황과 크게 다른 건 아닙니다. 우리가 병에 걸려 죽든, 늙어 죽든, 사고를 당해 죽든지, 그러한 순간이 욥에게 조금 빨리 온 거죠. 욥이 온통 악성 피부병에 걸렸는데 우리도 죽기 직전에는 그러한 상태가 됩니다. 죽으면 모든 게 다 해체되니까 사실은 곰곰이 따지고 보면 욥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다 잠재적인 욥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직은 아니라서 지금은 생생한 것 같은데 결국엔 욥의 운명으로 다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스올의 자리로 나를 옮겨주십시오.’라고 할 정도의 절망감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우리가 이해하기 힘들지만) 길인 거예요.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고 홀로 있게 해달라는 그러한 이 사람의 영적인 태도가 우리가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고 하는 데에서 결정적인 분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굉장히 소중한 길로 성경이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욥과 같은 영적인 태도, 실존과의 투쟁, 이런 것들이 창조주, 생명의 완성자인 그 분과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소중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락입니다. 절망, 다시 또 절망하네요. 18절에서 22절입니다. 14장은 전체적으로 좀 어두워요. 욥이 절규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8절부터는 자연마저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이 언급돼요. 7절 이하부터는 ‘나무들은 다시 살아난다. 사람보다 괜찮다.’ 이런 게 이야기 되고 있는데 18절부터는 자연마저도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결국 19절 후반절에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결국 이것도 옳은 이야기죠. 희망은 잠시 있을 뿐이고 죽음과 더불어서 모든 게 다 끊어진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있습니다. 19절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20절에서 ‘얼굴빛이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신다.’ 얼굴빛이 변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을 화나게 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늙어서 사색이 되고 썩어가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이쪽이든지 저쪽이든지 사람이 세월과 더불어서, 그리고 여러 상황에 따라서, 얼굴빛이 변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떨어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21절에는 조금 더 리얼한 이야기네요. ‘자녀들이 아무리 잘 되도 죽은 다음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이야기죠. 그리고 ‘자식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죽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14장 가운데서는 욥의 이야기가 굉장히 불안한 모습들, 처절한 것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네요. 그만큼 욥의 영혼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 왜 이런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여기에 많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상황에서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000, 000 두 집사님께서 호스피스를 출근하세요. 거기가서 죽기 직전의 사람들을 조금 도와주는 일을 하는데요. 거기서 보면 인간의 삶이 어떤지가 확 눈에 들어오게 되는 거죠.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삼성을 대표하셨던 이건희 회장도 식물인간이라네요. 다들 그런 길로 가게 되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하면 '뭘 이렇게 애쓰고 사나'하는 생각도 좀 듭니다. 이게 인간의 실존인 것은 분명한데 기독교인이 이런 가운데서도 부활을 희망하면서 삶을 환희와 기쁨 속에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데요. 이겁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부활, 희망, 생명만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 거예요. 제가 앞에서 이야기했죠. 허무, 무(無), 이런 것을 정말 분명하게 들여다 봐야합니다. 그때서야 기독교 신앙이 자기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허무한 삶을 정확하게 뚫어 보아야지, 그런 것 없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좋은 대로, 원하는 대로 부활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고통, 허무, 좌절, 이런 우리 인생의 실존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이 삶을 풍요롭게 살아낼 수 있는가하는 거죠.


결론은 허무, 좌절, 인간의 참혹한 실존, 아무도 피할 수 없고 외면하면 안 돼요. 십자가를 외면하면 안 됩니다. 처참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들어와서 어떻게 풍요롭게 꽃을 피워내는지가 기독교인이 풀어내야하고 붙들어야 될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셔야 되는데, 그게 잘 보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다 흐릿해져 버려요. 그리고 한 걸음 나가다가 또다시 삐끗합니다. 이건 신앙만이 아니라 음악이나 시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되는 게 아니에요.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수행, 점진적으로 쭉 가야되는 구도적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금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하여튼 이런 수요 공부도 수행, 구도의 한 단계이고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다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축척되면서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영적인 양식이 돼서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훨씬 깊이 들어가게 될 겁니다. 제가 평생 동안 신학 전공하고 공부하고 교회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데 때에 따라서 흐릿해진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마시고요. 괜찮습니다. 천천히 가기만 하면 됩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한국의 큰 명절을 앞에 두고 수요일 저녁 같이 모여서 욥기 14장을 공부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2400~2500년 전, 그 욥기를 기록한 사람들의 생생한 신앙의 눈들, 그리고 절망과 좌절과 참혹한 실존을 분명하게 보면서도 초월적으로 그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영적인 시각을 열었던 그들을 또한 우리가 같이 신앙을 공유합니다. 우리에게 한 번 뿐인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풍요로워 지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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