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30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15장>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3.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7.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8.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9.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11.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14.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17.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8.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9.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

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21.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22.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23.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24.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25.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26. 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27. 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28. 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하였음이니라

29.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30.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

31.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32.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33.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34.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35.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


오늘 욥기 공부 15장입니다. 방금 우리가 성경은 다 읽었어요. 보통 성경 봉독한 다음에 아멘 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읽고 아멘 했고 여러분들도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맥락에서 여기가 아멘을 할 대목일까요? 사실은 아니에요. 아멘 한다고 해서 큰일 나는 건 아니지만 맞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엘리바스가 욥을 공격하는 거예요. 겉으로는 굉장히 점잖게 말하지만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아멘 하면 엘리바스를 칭찬하는 거예요. 이 아멘이라는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말인데 이게 그대로 되면 좀 곤란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읽은 데서 알 수 있지만 그냥 전체적인 내용만 보면 수긍이 되죠. 은혜로운 말로 이해가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다른 때도 마찬가지지만) 일반론에 떨어지면 곤란한 거예요. 일반론이라는 것은 옳은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는 늘 옳은 것이 아니에요. 이걸 구분해야 됩니다. 신앙 자체도 그런 거예요. 보통 '기도 안 해서 그래.' 그 말이 옳습니까, 틀립니까? 일반적으로 옳은 거예요. 그러나 그게 늘 옳은 게 아닙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다르게 될 수 있어요.


지금 엘리바스가 자기들 유대인의 전통인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옳은 겁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들은 것들이 다 지혜예요. 그러니까 교회 생활과 관련된 것들은 다 지혜입니다. 무엇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들과 도덕, 윤리도 다 지혜입니다. 지혜롭게 사는 건 필요한 거예요. 지혜라는 것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에 민족 간에서 숙고되고 성찰 되서 나온 삶의 엑기스들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거예요. 그게 엘리바스의 입을 통해서 쭉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읽어가면서 어느 하나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없을 정도로 세련된 말씀인 거예요.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많은 거예요. 그런데 그걸 구분하기 힘들어서, 사실은 욥기 이 부분만이 아니라 다른데 많은 부분이 그렇고 또한 욥기만이 아니라 성서에 많은 부분이 그렇습니다. 저자가 무언가를 이야기했을 때 옳긴 하지만 그걸 뚝 떼어다가 오늘의 삶에 적용 시켜버리면 문제가 많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많아요. 그래서 성경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 거예요. 일단 그 당시에 이게 어떤 뜻이었는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풀어내야 되는 거예요. 그걸 해석이라고 하는데 그런 작업 없이 그대로 문자를 끌어다가 뭘 하고 뭘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오해되는 거고 상당한 경우에 폭력적으로 사람의 삶을 파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거 많잖아요. '봐라, 성경에 있는데 이렇게 해야지.' 이런 것들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주로 헌금에 관련된 것하고 몇 가지가 있잖아요. 성경에 있으니까 해야 된다는 그게 일반론적으로 옳은 거지만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는 달라질 수도 있는 거예요.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상황에서 그 시대에 어떠한 헌금이 옳은지를 늘 성찰하고 답을 찾아가야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제가 드린 말씀이에요.


저도 집에서 이 엘리바스의 글을 읽으면서 ‘참 좋은 이야기 많이 하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잘못된 거예요. 목사가 하는 설교도 다 좋은 이야기인데 잘못된 경우도 많이 있어서 설교자가 그 짐을 지고 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들이잖아요.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은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지금은 판단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마지막 어떤 순간에 판단된다고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저도 설교자로 살면서 제 설교에 신자들이 동의하고 은혜 받는다고 해서 꼭 진리로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에 서야 하니까 조심스러운 거죠. 과연 어떤 것이 일반론적인 거고 그걸 우리 구체적인 삶에서 어떻게 해야 진리가 되는가를 설교자가 붙들고 씨름해야 되는데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론이 좀 길었네요. 여기 엘리바스가 이미 앞에서 한 번 욥에게 충고했습니다. 제일 먼저 했어요. 욥의 친구가 세 명이라고 했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입니다. 차례차례로 욥에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엘리바스가 연장자라서 제일 먼저 등장해서 4, 5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서는 굉장히 젊잖게 했어요. 그런데 욥이 계속해서 자기들이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하니까 이제는 엘리바스가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생각해서 좋은 말로 하지 않고 완전히 깔아뭉개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욥을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입장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이 15장은 우리가 쉽게 아멘으로 받을 말이 아니라는 걸 짚었습니다.


엘리바스가 볼 때(앞에서 다른 친구들이 이야기한 것에 대한 욥의 반론을 보고) 전부 자기변명으로 들린 거예요. 이게 참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도 일리가 있고, 사실은 욥의 말은 일리가 있는 건 아니에요. 아주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빠져있어서 일리가 있는 말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서 몸부림치는 욥의 실존이 여기 나타나있는 겁니다. 어쨌든 엘리바스가 지금 아주 강한 어조로 충고합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듯이 세 단락으로 간단하게 나눠서 보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6절까지는 '욥 너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완전히 무시하는 이야기예요. 왜 그러냐면 욥이 잘난 척하거든요. 우리가 2주 전에 보았듯이 13장 2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리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자기논리를 전개해요. 이런 걸 엘리바스가 보기에는 욥이 자꾸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욥의 모든 말들은 오늘 본문 2절에 나와 있듯이 ‘헛된 지식이고 허풍이다.’라고 합니다. 여기 ‘동풍을 그 복부에 채우겠느냐.’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히브리어 번역이라서 정확하게 안 들어옵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바뀌게 돼요.


그리고 구약성경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히브리어 성경이에요. 원래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히브리 성경이 있고요. 또 하나 구약성경이 있는데 칠십인역이라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집트나 근동에 살던 사람들이 헬라어를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거기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가리켜서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나그네처럼 흩어져서 많이 살았어요. 사실은 처음 유대민족이 형성될 때도 나그네였죠. 아브라함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그랬고 이집트에서도 소수민족으로 살았고 출애굽 한 다음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도 유목생활을 했으니까 나그네고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여러 가지 핍박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디아스포라라고 이야기하면 다 유대인들을 가리켜요.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다음에는 20세기 중반까지, 2차 세계대전 끝날 때까지 나라 없이 디아스포라로 살았어요. 70년경에 그 사람들이 쓰던 언어가 헬라어예요. 그래서 유대인 학자들 70명이 헬라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위해서 구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게 칠십인역이에요. 이것도 정말 유명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구약이 히브리 성경을 번역했느냐, 칠십인역을 번역했느냐에 따라서 순서와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원래 히브리어로 되어 있지만 칠십인역으로 번역한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어요. 그건 학자들이 전문적으로 연구를 합니다. 그래서 여기 ‘동풍을 그 복부에 채우겠느냐.’ 이것은(우리말 성경은 히브리어를 번역했어요.) 허풍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하는 이야기를 그렇게 깔아뭉개는 거죠. 3절에 보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말이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사실 이건 욥이 할 만한 이야기예요. 지금 서로 상대방 말은 무익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누가 옳은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욥이 옳다고 판단하는데 사실은 욥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에요. 그 맥락을 잘 이해하셔야 하는데 이겁니다. 욥은 ‘여태까지 알고 있는 지혜의 전통으로는 내가 지금 당한 실존, 삶을 도저히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고 투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그래도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은 당연히 욥의 친구들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욥기가 형성됐냐? 이렇게 하나님 말씀으로 자리 잡아서 욥이 칭찬받게 됐냐?’ 그건 시대가 흘러오면서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욥의 신앙이 친구들보다 훨씬 옳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지금까지 왔었던 지혜 전통으로 다 해명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심연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지금 제가 한 말이 전달 됐어요?


보통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거나 신앙생활에서 너무 확실한 걸 붙들려고 해요. 확신을 하려고 해요. 확신이 나쁜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그렇게 확실한 것으로 붙들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이게 무슨 뜻인지요? 내 삶의 문제, 이 세계의 무죄한 자의 고난들, 내 죽음과 이후의 모든 문제 등등 여태껏 하나님 뜻대로 신앙생활을 했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이게 더 정직한 신앙이고 그게 더 열린 신앙이고 그래야만 점점 더 하나님 말씀이 잘 들어올 수 있어요. 이걸 다시 정리하면 신앙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신비와 하나님 통치의 엄청난 다이내믹에 눈을 뜨는 겁니다. 서로 상대방의 말을 향해 무익하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여기 엘리바스의 말을 들으니까 이건 욥이 할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겁니다. ‘쓸데없는 이야기, 무익한 말을 가지고 변론하고 있구나.’ 이런 것 말이죠. 그러니까 엘리바스 입장에서 볼 때 욥의 운명을 보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죄인이에요. 그 당시에는 그게 지혜이고 확신이에요. 완전히 쫄딱 망했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죄에 의한 결과인데 그걸 자꾸만 변명 비슷하게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니까 용납을 못 하는 거죠. 그리고 욥을 위로하고 충고하는 친구들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하나님을 향해 따지고 있거든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욥이 하고 있으니 이 나이 많고 세계 경험이 많은 엘리바스가 볼 때에 철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는(첫 번 충고했을 때는 지나갔지만 두 번째에서는) 당신과 상대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고 있다.’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이건 공포로써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을 이야기합니다. 가끔 느끼시죠? 거룩한 두려움, 그것은 생명을 생각하더라도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고요. 시간을 생각하면, 백년 전에 우리는 없었고 백년 후에도 없어지고요. 지금 우리가 볼 때 수십억 년을 내려왔는데 그 긴 시간 속에서 찰나처럼 살고 있는 우리의 덧없음, 이런 걸 보면 거룩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그런 것들을 피합니다. 그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거니까 일상적인 삶으로 들어가 버려요. 소꿉장난 하듯이 살림살이 늘여가고 취미생활 하는데 몰두해 버립니다. 그게 나쁘다는 뜻으로 드린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써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기 힘들어요. 어쨌든 지금 엘리바스가 욥을 비판하고 있어요. ‘경외하는 일을 하지 않고요. 그리고 묵도하는 일을 그치게 한다. 반성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 두려워 할 줄도 모르고 반성도 하지 않는 욥은 이제 구제불능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6절에 욥이 하고 있는 말 자체가 스스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을 입증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변론했는데(앞에서 여러 번 반복된 겁니다.) 그 행위자체가 욥이 믿음 없는 사람임을 증명한다고 딱 끊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 대중들이 들었다면 이 엘리바스의 말에 훨씬 더 동의를 했을 겁니다.


두 번째 단락, 7절에서 16절입니다. 엘리바스가 앞에서 굉장히 단호하게 욥을 책망했어요.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욥과 말로써 논쟁하는 걸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았겠죠. 그리고 자기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니까 욥이 하는 말을 완전히 모르는 것도 아닐 거예요. 사람은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자기주장을 말하면서도 설득력이 약하다는 걸 알게 돼요. 아마 이 엘리바스를 비롯해서 지혜의 전통에 있던 사람들이 욥을 공격하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배우고 있는 것이 그 한계 안에 있으니까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약간 방향을 틀어서 욥을 굴복시키려고 ‘욥 너보다는 우리가 더 낫지 않냐. 우리가 더 권위 있지 않냐.’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사람들이 서로 옥신각신 하다가 ‘너 몇 살이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10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이 백발, 머리가 흰 거면 굉장히 권위가 있는 거잖아요.) 네 아버지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다.’ 굉장히 권위주의예요. 이런 것들이 사회에서는 잘 통합니다. 강의 요약문에 썼습니다만 목사니까 교회 안에서는 일단 권위가 있는 걸로 전제가 되고,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옳은지 아닌지는 두 번째로 치고 일단 권위 자체가 앞도하고 있는 거예요. 또 검사와 판사를 향해서 '저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옳은 것들을 잘 판단하겠지' 생각을 해요. 교수와 선생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배운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기 때문에, 욥 너보다는 세상 이치에 대해서 잘 아는데 너 왜 자꾸 말이 많으냐.’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재밌게 표현합니다. 첫 번째는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 경험이 많다는 이야기로 자기들의 권위를 표현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하나님의 위로라고 했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하는 걸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데 감동하지 못하고 말이 많으냐.’ 이런 거예요. 우리 일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식으로 접근 하면 기가 죽는 거죠. ‘하나님 말씀에 있다고 해서 이야기하는데 내가 다른 말하면 믿음이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금 그걸 짚고 있어요. ‘위로하는 것이고 은밀하게 하신다.’ 굉장히 자제력과 진정성을 가지고 잘 하고 있다는 이야기죠. 이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이 그렇게 잘 했을 겁니다. 이런 선생들, 지식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게 몸에 배어 있어서 태도 자체가 괜찮아 보여요. 굉장히 세련되고 점잖으니까 그가 하고 있는 말이나 행동도 옳으려니 보통 그렇게 많이 생각을 합니다. 지금 엘리바스가 그 부분을 강조하고 있어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2절부터 재밌게 표현하네요. ‘네 맘에 불만스러워서, 네 눈을 번뜩거리고, 하나님께 분노를 터트리고, 입을 놀린다.’ 그렇게 말하고 있네요. 그 그림이 그려지죠?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은 점잖고 세련되고 나이도 많아서 존경을 받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욥은 철부지처럼 대들고 하니까 문제가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 다음 14절부터 16절까지 이 엘리바스는 다시 한 번 일반론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욥을 공격합니다. 이런 건 우리 가정교육에서도 조금 신경을 써야 될 것 같아요. 아이들과 문제가 있어서 서로 말이 왔다 갔다 할 때 그 문제만 가지고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조금 가다가 ‘아빠한테 그럴 수 있어? 엄마한테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어?’ 이쪽으로 나가거든요. 이건 논리적으로 밀린다는 증거예요. 지금 엘리바스가 그런 겁니다. ‘왜 이렇게 불만스러워해. 왜 눈을 부라리고 있어.’ 이런 식으로 핵심을 붙들지 않고 우회적으로 윽박지르고 있는 거죠. 참 재미있어요. 다시 한 번 14절에서 16절에 아주 일반론적인 걸 갖고 욥을 공격합니다. ‘네가 옳다고 하는데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옳은 사람이 어디 있냐. 다 죄인 아니냐.’ 이렇게 일반론적으로 물고 들어가는 거죠. 이건 정말 좋지 않은 태도인데, 그 뒤에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15절, 16절 다 그래요. ‘인간은 다 죄인인데 넌 왜 죄인 아니라고 그러냐.’ 그런 논리입니다. 그런데 욥이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말했나요? 그걸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고난당할 만큼의 죄를 지은 건 아닌 그런 점에서 나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일반론적인 관점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죠. 그래서 앞부분에서도 ‘내가 젊었을 때 혈기로 인한 나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까? 이건 내가 인정하지 못합니다.’ 여기까지 가게 되는 거예요.


마지막 단락입니다. 17절에서 35절, 긴 구절이에요.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겁니다. 17절에서 마지막 35절까지 굉장히 긴 구절을 통해서 악인의 운명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욥에게 구체적으로 해당되는 부분도 있고 전혀 해당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요. 여기서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악인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만 간추리겠습니다. 20절,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져있으므로.’ 일반적인 이야기죠. 24절,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번역이 좀 이상하죠. 그러니까 환난과 역경을 당하게 되고 그리고 아주 커다란 힘,(싸움을 준비한 왕이라고 하니까) 전쟁에 큰 힘을 가진 사람이 혹은 그 세력이 덮치게 되니까 감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악인에게 임하게 될 불행을 이야기합니다. 이건 간접적으로 욥을 말하죠. ‘네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는데 바로 악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니냐.’라고 그 당시 잠언풍의 지혜 격언들, 경구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 오늘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당하고 고민되는 부분들입니다. 특별히 어려움을 당한 신자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해요.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내가 뭘 잘못했나. 기도를 게을리 했나.’라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새벽기도 안 나간 신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내가 새벽기도를 안 나가서 그런 것 아닌가.’하고 불안해합니다. 이건 심리적으로 병적인 현상입니다. 사람이라는 게 이상해서 이런 이야기를 자꾸만 듣게 되면 세뇌가 될 수 있어요. 처음엔 말이 안 된다고 했다가 자꾸 듣다보면 그렇게 돼버려요. 파블로프의 개라는 실험이 있어요. 파블로프가 개에게 먹이를 주면서 종을 쳤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먹이를 안 주고 종을 쳐도 침을 흘리더라는 이야기죠. 교회 안에서도 신자들의 신앙이 자칫하면 그러한 조건반사적인 심리적으로 병든 상태가 될 수 있어요. 지금 욥을 비판하고 있는 엘리바스가 그 부분을 짚고 있는 겁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로 악인에게 임하는 환난과 역경이 너에게 일어난 건데 왜 죄인이 아니라고 하느냐.’ 그러한 공격입니다. 그 다음 29절, 계속해서 나쁜 일들입니다. ‘부유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한다.’ 이건 복을 말하죠. 악인들은 세속적인 물질도 다 놓친다는 건데 세상은 꼭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반대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건 아니고 고대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 34절,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등등 그렇게 이야기하네요. 앞에서는 재산이 없어진다고 하고 고대인들에게 또 중요한, 후손을 번식하는 것도 안 된다는 거고요. 그 다음, 35절,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한다.’ 재난, 죄악, 속임 이런 것들이 악인들에게 함께 하는 거라고 하면서 욥을 향해서 ‘네가 바로 그렇다. 쓸데없이 공격하고 자기 변명하는 것은 헛된 건데 네가 지금 그러고 있다.’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강의 요약문에 있는 마지막 두 문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엘리바스의 이 말은 일반적으로 볼 때는 옳아요. 틀린 게 없어요. 문제는 그것으로 다 해명될 수 없는 인간 삶의 심층까지 재단하고 결정해 버리는 것, 이게 잘못된 거죠. ‘그럼 우리가 어디까지 일반적인 지혜를 따라야 되고 또 어느 부분에서는 자기의 특수한 실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이해해야 되느냐?’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같이 가야돼요. 조금 학문적인 용어로 두 가지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긴장을 하면서 더 좋은 삶의 차원들을 밝혀가야 하는 거죠. 이해하시겠죠? 오늘 우리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공부한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일반적인 지혜들(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요.)을 무시하면 안 돼요.


교회 질서나 교회를 운영하는 점에서도 그래요. 목사가 있고 없고가 교회에서 절대적이겠습니까. 그러나 제도로써 자리를 잡은 이런 것들이 지혜인 거예요. 그런 것들이 소중하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지는 않는 긴장을 잘 유지해 나갈 때 그 교회가 건강하게 나갈 수 있는 것처럼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신앙의 훈련들을 꾸준하게 하시되 그러나 우리 개개인의 각자가 처한 삶은 각양각색으로 다 다르므로 우리가 배운 신앙의 기준들을, 신앙의 지혜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그 지혜가 말하려고 하는 그 근본 뜻을 잘 파악해서 각자가 구체적인 자기의 삶에서 스스로 해석하고 투쟁하거나 고민하고 욥처럼 분노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 뜻에 가까이 가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걸 혼자서 하기는 힘드실 거예요. 그럴 때는 교회의 도움이 필요할 거고요. 또 이런 점에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목사의 도움도 필요하겠죠. 아니면 좋은 책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 15장, 엘리바스의 두 번째 충고에 해당하는 말씀을 함께 읽고 배웠습니다. 엘리바스의 굉장히 세련된 신앙적 지혜가 자체로써는 틀린 것은 아니되 그것으로는 다 담아 낼 수 없는 욥의 삶을 자신들의 생각으로 결정하고 비판함으로 그 지혜가 진리를 드러나는 데에 무익한 것임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봅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그 지혜와 우리 삶에 나타나는 모든 어려움들, 이 관계에서 우리들이 깨어있는 영성으로 잘 판단하여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로 성장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명절 연휴가 끝나고 첫 수요일 같이 공부하게 하신 것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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