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7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16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10.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3.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14.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22.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오늘 우리 공부 욥기 16장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같이 읽었어요. 제가 여러 번 욥기의 주제를 말씀드렸기 때문에 여러분들 머릿속에 잘 정리가 되어있을 겁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과 욥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말싸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학적인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따라가기 힘들거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이 성경이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바탕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조금 알더라도 전문적인 지식을 통해 따라갈 수 있는 것이라서 거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욥기는 신학적인 논쟁인데 정확하게 두 생각이 충돌한다기보다도 어떤 하나의 전통 신앙이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인간 삶의 차원 앞에 당도한 사람들의 영적인 번민들, 숙제, 질문들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몇 번 봐서 경험을 했습니다만 욥의 친구들의 말이 상당히 그럴듯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설교를 듣고 있는 것들과 거의 비슷한 거예요. 우리도 문제가 있으면 보통 ‘기도가 부족했다. 시험에 들렸다. 단련하는 기간이니까 참아라.’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욥의 친구들은 다 그런 논리로 하는 거예요. ‘잘못한 거 있으니까 회개하고 다시 한 번 힘내서 하면 된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것들을 용납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심층에 있는 거죠. 우리가 앞으로 읽으면서, 여기 16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욥보다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우리가 욥이 대단한 신앙의 인물로써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당시는 안 그랬습니다. 사실은 이 욥기만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되거나 그 배경에서는 선지자들도 별로 인정받지 못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러한 맥락들을 잘 살펴서 오늘 이 시간에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성찰과 판단이 필요한 거죠.


여기 욥의 친구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엘리바스가 두 번째 나서서 욥에게 충고를 한 이야기가 앞장에 나왔어요. 한 바퀴 돌고 두 번째로 또 나온 거예요. 이 엘리바스가 제일 연장자이고요. 그래서 욥에게 ‘우리들은 세상 경험도 많고 (요즘 식으로 이야기해서)교회 경험도 많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고 지혜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욥 네 아버지뻘 되는 사람도 있는데 왜 말을 듣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윽박질렀어요. 논리적인 부분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권위를 갖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친구들이 욥에게 가장 큰 아픔을 준 거죠. 사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반대를 하더라도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요. 요즘도 비슷합니다. 대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가깝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있어요. 가족이나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여기 욥과 친구들 사이에 대화가 안 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거든요. 그런 상태에서 자기주장이 강하게 되면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거죠. 욥을 둘러싼 세 명의 친구들이 계속해서 욥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다시 한 번 나와서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해 욥이 어떤 대답을 하는지 16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세 문단으로 보면 돼요. 1절에서 6절이 한 문단, 7절에서 17절이 한 문단, 18절에서 22절까지가 마지막 문단입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이 내용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어요. 다 알만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같이 따라가 보겠습니다. 욥은 이 엘리바스의 말을 상투적으로 보는 거예요. ‘다 아는 이야기 내가 많이 들었다.’는 거죠. 상투적인 말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닌데 너무 뻔한 이야기인거예요. 그리고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본 바탕에 자기 자랑이 있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안다.’는 것을 나타내는 거죠. 이러한 상투적인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닌데 (제가 다른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일반적으로 옳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아닐 수도 있는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면 잘못되는 거죠. 이게 조심스러운 거예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모든 경우에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윽박지르는 방식으로 적용시키려고 하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경우가 많이 일어납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행한 말들이 다 그런 거예요.


2절에 보니까 그렇게 말하네요. ‘(이것은 엘리바스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참 표현이 멋지네요. 위로를 하려고 하긴 하는데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재난을 주는 위로라는 겁니다. 그런 말들은 3절에 보면 ‘헛된 말’이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그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거짓말 하지 마라.’ 이건 일반적인 말이거든요. 그런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닌데 구체적인 어떤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게 헛된 말도 되는 겁니다. 그러한 헛된 말은 진부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가게 되는 거죠. 강의안에도 있습니다만 보통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저 사람 설교하고 있네.’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다 아는 이야기를 갖다가 충고와 계몽하듯이 하는 것들을 ‘설교하고 있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목사나 선생들에게 많이 나타날 수 있는 위험성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한 경우도 많이 있죠. 지금 욥이 볼 때 엘리바스가 한 말들은 다 이런 범주에 들어있는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저도 평생 목사로 살았고 딸들도 키웠고 학교에서 선생 역할도 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위치에서 살았어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상당히 노력을 했습니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들릴만한 말들을 많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여튼 엘리바스에 대해서 욥이 그렇게 평가하고 있어요.


4절부터 보면 이제 욥이 입장을 바꿔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다.’ ‘말만 가지고 한다면 너희들 못지않게 말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쭉 이야기합니다. 재미있네요. 4절 중반에 보면 이렇습니다. ‘나도 그럴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충고하고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머리를 흔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냉소와 조롱하는 겁니다. ‘저 사람 틀렸다.’면서 머리를 흔드는 태도를 가리키는데 그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태도, 그런 말들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거죠. 5절,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그러니까 말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말로 ‘힘을 내라!’라고 하는 거겠죠.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그럴듯한 말로 근심하는 것을 조금은 풀어줄 수는 있다는 거예요. ‘엘리바스, 나도 말로는 너 못지않게 얼마든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전체 흐름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툭 튀어나와요. 이 욥기서가 누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면서 말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 그러한 과정들이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 문장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돼요. 이 6절이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는 적당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충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말을 해도 별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말을 안 하고 잠잠해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네요. 어떤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제 입장에서 보면 결국 언어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누구에게 말을 쏟아 놓으면 일단 마음의 해소는 됩니다. 심리적으로 카타르시스 비슷하게 해서 조금은 해소가 되는 것 같는데, 그렇게 해도 사실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반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도 마찬가지라서 자신의 입장이 참 난감하다는 생각을 여기에 담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6절까지가 구체적으로 엘리바스에 대한 반론이었어요. 핵심은 이해하시겠죠? ‘엘리바스 네가 한 말은 다 헛된 말이다.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이런 말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을 이야기했습니다. 7절부터는 두 번째 문단인데, 이제 방향을 바꿔서 엘리바스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탄식하는 거예요. 이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아요. 7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해서 탄식을 털어놓습니다. 굉장히 신랄해요. 노골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향해서 투정하듯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7절 보면 이렇습니다.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하신다.)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다.’ 그리고 8절에 ‘나를 시들게 하셨다.’등등으로 쭉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만 자기 신세를 보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게 틀림없다고 한탄을 하고 있어요. 9절에 그것을 조금 더 노골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진노, 찢고, 적대시,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 등의 가장 불편하게 생각되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말을 하고 있네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 생각하고는 정반대예요. 하나님의 사랑, 자비, 긍휼, 인내, 끝까지 참으시는 분인데 정반대로 표현이 되고 있어요. 지금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겪게 되는 당혹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편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들은 좀 있어요. 이런 것들은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는 별로 없는 것들입니다. 다른 데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표현이 강해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시편이나 욥기는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한 신뢰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거기서 버림받은 거와 같은 상황을 정반대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걸 역설적으로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진노하고 찢고 그랬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욥기나 시편 말고 다른 데서도 비슷한 표현들이 간혹 나오긴 하는데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문학적으로 읽으셔야 됩니다. 욥 자신의 신세가 어떤지를 잘 표현했어요.


그런데 10절에 보면 자신의 입장을(앞부분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하고요.) 10절부터 실제로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건 굉장히 사실적인 표현인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변사람들에게 당했던 모욕들이요. 10절이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무리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입을 크게 벌렸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면서 ‘욥이 망했다더라. 분명히 죄를 지었을 거다. 어떻게 저렇게 불쌍하게 됐나.’ 이런 식으로 소문에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떠드는 것처럼 느껴졌겠죠. 그리고 모욕을 하고 뺨을 치고 대적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정말 뺨까지 쳤을까요? 그러니까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원로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통 신앙인 지혜에 따른 회개하라는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욕 하는듯한 표현들을 곳곳해서 했기 때문에 아마 공개적으로 인민재판식으로 정죄 받아서 공식적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실제로 뺨을 맞는 그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욥을 우리는 지혜의 신앙을 뛰어넘는 원초적인 신앙의 경지로 들어간 위대한 인물로써 알지만 당시에는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이야!’ 이런 정도로 매도를 당한 거예요.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것, 이건 참 참기 힘든 겁니다. 종교재판을 받아서 이단으로 떨어진 사람들 그리고 국가적으로 ‘저 사람 매국노야!’라고 해서 완전히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상태로 떨어진 거거든요. 이 욥의 상황이 어떤지 실감이 나네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까지 떨어졌어요. 그런데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하셨다고 말을 해요.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하면서 그 이하로 쭉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면 됩니다. 15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피부를 덮고’ 피부를 좀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겠죠. 그리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다.’ 뿔이라는 건 명예를 말하는데 그런 것들도 다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욥의 운명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보통 사람이 이런 정도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자포자기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신세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으니까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 이런 자학에 떨어질 만한데 욥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요. 17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이런 이야기를 당시 사람들이 들었을 때 욥을 행해서 뭐라고 했을까요? 당연히 뻔뻔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겠죠. 믿음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이렇게 보통 사람은 취할 수 없는 태도를 지금 욥이 하고 있습니다. 욥이 잘한 걸까요? 그렇게 코너로 몰려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로 떨어졌고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모욕당하는 그런 상태, 지난 주 설교에서 나왔는데 완전히 쓰레기장, 재 가운데 떨어져 있고 격리돼 있는 사람이 ‘나는 잘못 없다. 내 기도는 깨끗하다.’ 이렇게 말했다면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기 곤란했을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욥의 탈출구는 뭘까요? 아무도 자기가 깨끗하다는 걸 인정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런 사람의 위치까지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향해서 심판을 요구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발 정확하게 좀 판단해 주십시오.’ 그렇게 매달리는 거예요. 제가 말은 이렇게 해도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람은 다 영향을 받기 때문에 주위에서 ‘넌 나쁜 사람이야. 넌 믿음 없어. 너는 죄를 지은 게 분명한 거야.’라고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상태에서, 자기가 정결하다는 것을 굳게 붙들고 어떤 사람에게도 하소연할 곳 없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끝까지 ‘나의 옳음을 좀 봐주십시오.’라고 매달리기는 쉽지 않은 겁니다. 지난 설교 결론 부분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예수님에게나 있을 수 있는 고도의 경지에 있는 신앙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욥기 처음 시작할 때 무죄한 사람의 고난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나, 어떻게 이야기를 하나,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도 무죄한 자의 고난이니까 그런 정도로 어렴풋하게 연결하고 시작을 했는데요. 점점 읽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미리 이야기하고 있는 그러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욥이 13장 3절 이하에서 이미 한 번 하나님에게 직접 송사를 했어요. 13장 3절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사람들과는 시시비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변론하겠다. 하나님에게 따지겠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미 앞에서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께서 아직 답변을 하지 않으세요.(욥기 후반부에 가서야 말씀을 주십니다. 그 때 가서 어떤 말씀을 주시는지 보도록 하고요.) 13장에서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지 못해요. 그래서 마음이 급하고 자기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도 있고 정말 답답한 거예요. 이 욥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급하게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16장 18절부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8절,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억울한 사람이 해를 당한 것을 피를 흘렸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상소한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맞아 죽으면 피가 땅에 있고 그게 하나님을 향한 울부짖음으로 전달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 피를 감추지 마라.' 그러니까 그걸 감추기 위해서 흙으로 덮어버리잖아요. 그런데 '흙으로 덮지 마라. 내 피를 그대로 둬라. 내가 고난당하고 모욕당하는 것 그대로 둬라. 내 아픔과 시련을 그냥 안고 있겠다.'고 하는 겁니다.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는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처리하지 마라. 내 아픔을 그대로 나타나도록 하라.'고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송사하고 변론하겠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조금 혼란스러운 게 나와요. 19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여기서 증인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죠. 그런데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망하게 하시고 진노하게 하시고 억울하게 나를 치신 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모든 걸 다 아시는 하나님이라서 자신을 지켜주시고 억울한 것을 풀어주신다는 생각도 있어요. 하나님을 이렇게 저렇게 다르게 표현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른 하나님은 아니죠. 그렇게 표현만 하고 있는 겁니다. 19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참 대단한 신앙이죠. 이런 정도의 신앙이 있다면 우리 삶에서 주눅이 들것도 없고 비굴해 질것도 없고 교만해 질것도 없고 하나님이 증인이라는 사실을 아니까 떳떳한 거죠.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다.' 나의 어려운 일들을 들어주시고 해결해주시는 분이 바로 높은데 계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말들을 우리가 제법 들었어요. 이게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당장 풀어야 되고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급해요. 하늘에 나의 증인이 있고 중보자가 계시다는 영적인 시각이 필요하죠.


20절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이건 욥이 계속해서 당했던 어려움입니다.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그렇게 자신의 영적인 실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0절이 중요합니다. 이게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죠. 우리도 기도를 그렇게 하긴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사람을 많이 보거든요. 사람의 조롱을 받을까 안 받을까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해요. 우리는 어쩌면 평생 동안 그것으로 살 걸요. 좀 칭찬받으면 좋고 조롱받으면 못 견디는 게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걸 극복해야 돼요. 억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게 되고요.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인간이라서 조금 영향은 받겠으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만을 향하는 그러한 태도를 틀림없이 갖추게 됩니다. 21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중재하시는 분인데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한다고 말하니까 약간 혼란스러운데 이건 하나님이 두 분이 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격을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 했던 욥을 찢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보시는 것 같은 성격의 하나님과 이 모든 것을 알고 증인이 되시고 중보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성격, 거기에 기대서 이러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됐습니다. 엘리바스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해서 자기의 신세 한탄을 풀어놓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하나님과의 변론, 송사 이런 쪽으로 가고 있어요.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의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욥기 전체 흐름과도 맞는 거예요. 결국엔 문제 해결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에서 오게 됩니다. 오늘의 특별한 교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여태까지 본 것을 다시 한 번 요약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실망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얼마나 집중을 하느냐가 신앙의 핵심이 되는 거예요. 그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오늘 여기 16장에서도 욥이 하나님을 향해서 변론하는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 욥기서 16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욥이 떨어진 운명, 우리가 그런 운명에 떨어질까 두려울 정도의 운명인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아무도 희망을 걸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욥 스스로도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나 결국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해 변론하는 마지막 이 절망적인 순간에서 한 가닥의 희망의 줄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이 욥의 신앙적인 태도를 다시 한 번 저희들이 읽고 배웠습니다.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하다한들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할 것이며 욥의 운명이 우리가 두려우나 또 우리에게 그러한 운명이 찾아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가 세상살이에 마음이 너무 치우쳐서 생명,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우리가 곧 돌아가야 될 죽음을 통과하는 모든 이 과정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이웃, 교회 공동체, 모든 이들의 삶의 어려움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잘 헤아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이렇게 한 주일 가운데 수요일에 시간을 쪼개서 나와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늘 적절한 은혜를 허락하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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