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편 강해-여호와는 누군가?

 

시편 139편, 1절에서 24절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읽겠습니다. 여자분들이 먼저 한 절 읽고 짝수는 남자들이 읽고,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9.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21.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23.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 이번 추석 연휴 때,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우리 교회 한 집사님이 영화 <시>를 다운 로드 받아 주셨거든요? 이창동의 <시>예요. 보신 분 있어요? 두 시간 조금 더 되데요? 주제는 한 인간의 삶이 시 한 편과 같다, 그러한 얘기입니다. 예, 다 각각이 고유한 삶이죠, 참 놀랍습니다. 우리가 보통 판단 할 때 저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으니까 잘 살고, 또 못 살고 차이가 있는데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다 똑 같습니다. 속 된 표현으로 합니다. 시골에서 무지랭이로 살았든, 고급스러운 대학교수나 돈 잘 버는 사람으로 살았든 하나하나는 정말 우주와 같은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냥 사는 겁니다. 그 안에, 조금 그걸 옆으로 확대하면 우리 인간처럼 사는 것도 사는 거고요, 햇빛 보고 살고 지렁이도 그렇게 삽니다. 다 지구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거든요? 그러한 눈을 뜨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는, 가난한 할머니가 나오는데 배우 윤정희씨죠?

 

그 분이 한창 잘 나가던 여배우 하다가 백건우 씨와 결혼해서, 연하의 남자를 만나서 떠나고 프랑스인가에 가서 오랫동안 살았던 분입니다. 연기도 잘 하시고 좋았습니다. 거기에 김용택이라고 하는 시인이 엑스트라인데, 조금 역할을 해요, 직접 나옵니다. 섬진강의 시인, 교사라고 알려졌죠? 수필도 많이 쓰셨고요, 시를 좀 쓰셨고요, 그 분이 에세이를 참 잘 써요. 시 보다도, 에세이 중에서 “돼지 잡는 날”이라고 하는 게 정말, 자기 어렸을 때 경험 이예요. 시골에서 돼지 잡는 날은 동네잔치거든요? 거기서 얌체같이 말만 하고 그런 사람도 나오고 욕지거리도 하고 돼지를 잡는데 그게 한 바탕 전체가 다 어우러져서 얄미운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고생하는 사람 모두가 다 한 판의 삶이 되더라 그런 에세이입니다. 참, 좋았어요. 김용택 시인이 거기 등장합니다.

 

읍 지역 같은데서 시 강좌 같은데서 강사를 하는데 두 가지 이야기를 해요, 평소에 제가 생각하던 것을 말하기에 딱 기억에 남았습니다. 두 가지예요. 청중들에게 강의 하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시가 말을 걸 때를 기다려라, 억지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말을 건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종이 한 장 놓고 연필 하나 깎아서 딱 놓고 기다리면 시가 온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시가 오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다 시인의 영감이 나오는 어떤 순간을 이야기 합니다. 또 하나는 그러한 영감을 받으려면 사물과 어떤 사건들을 보아야 된다, ‘본다고 하는 것’을 경험해야 된다고 합니다. 사과 하나 가지고 나와서 설명을 해요. 제가 자주 하는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과를 맨 날 깎아 먹기만 하지 사과를 좀 보시라, 정말 본다, 헬라어로도 본다고 하는 의미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좀 아는 거고 좀 형식적으로 정보를 아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는 세계거든요?

 

요한복음에 나왔을 겁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들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나는 보았다 이야기하거든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요8:38) 사과, 이 사과가 지난여름에 햇빛을 어떻게 받았을 것이며 달밤에 달과 어떤 대화를 했을 것이며 하여튼 문학적인 상상력일 수도 있고, 영성적인 통찰력일수도 있습니다. 그건 이걸 정확하게 뚫어 보는 경험, 그런 게 있어야 이제 시가 온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좋았어요. 시편의 시인들도 제가 보기엔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필요한 게 아니라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억지로 이 성경을 쓰지 않습니다. 억지로 쓰는 건 없어요. 그건 표시가 납니다. 일반 문학도 그렇잖아요, 짜깁기 해 갖고 막 쥐어짜내는 것, 이것하고 일필휘지(一筆揮之)라고 할까요? 쭉 흐름을 가지고 나가는 것 하고 그건 문학가의 경지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건데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기자 이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억지로 끌어 낸 게 아니라 받은 거예요. 그걸 갖다가 신탁이라고 얘기합니다. 신탁(神託), 오라클(Oracle)이라고 하거든요? 구약기자들은 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뭐뭐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차원이었습니다. 그런 시인들의 경험이 그냥 주어진 거냐, 그게 아니라 이들은 사물, 사태 이런 것들을 정말 보았습니다. 이건 아주 깊이 통찰 한 거예요. 가만히 앉아 있어서 기도만 하고 있다거나 책상 앞에서 책만 읽고 있다거나, 그게 아니라 이 역사, 세계, 인간의 고통들, 이 모든 사태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았다는 얘기 아닙니다. 책을 읽지 않았다는 이야기 아닙니다. 그걸 다 같이 하는 거지요. 그리고 어떤 것들을 정말 보는 거예요. 이게 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대게 우리는 다른 것에 정신이 너무 팔려 있어요. 사실은, 내가 이루어야 될 것, 내가 성취해야 될 것, 쫓기는 문제 이런 것에 너무 우리가 쫓기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길들여지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것을 보는 것이 뭔지를 잘 경험 못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계속 쫓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다 하나님경험은 아니거든요? 교회일은 인간적으로도 얼마든지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시인도 그런 걸 전제하는 거죠, 139편도 그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공부에 오신 분들은 정말 잘 했어요. 이 139편이 정말 중요합니다. 좀 익숙한 부분들도 있을 거예요. 읽다 보니까, 아, 이건 우리가 여태 시편 공부하면서 그 때 그 때 마다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영성을 자극하는 걸 많이 경험했지만 오늘은 유독히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여호와는 누구인가”이렇게 정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건 적당한 표현이 아니고요, 하나님에 대한 경험, 이런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천히 그 내용을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6절까지가 한 단락입니다. 1절부터 6절 이예요. 하나님의 전지성입니다. 보통 전지전능 이야기하잖아요? 모든 걸 안다고 하는 겁니다.

 

이 시인이 6절에서 그걸 이야기합니다. 신학공동체도 이 139편을 친근하게 생각했어요.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로 인용했습니다. 모든 걸 그분은 아시는 분이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나를 아시나이다 반복 되요. 1절, 2절, 3절, 사실은 다 그렇습니다. 계속 되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다, 참 놀라운 고백이죠,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게 말로만 되는 문제는 아니예요. 우리가 또 그렇게 기도도 하고 그러려니 하긴 하는데 이 시인은 어떤 관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생각하셔야 됩니다. 시도 해석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이 표현, 이 고백은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그게 증명되는 문제는 아닌 거예요. 실증적인 증명은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실증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는 분도 아니고요, 그건 어떻게 보면 느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느낌, 아까 사과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사과 맛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달콤하고 새콤하고 그리고 사과의 즙이 어떤 느낌이다, 좀 할 수 있긴 있지만 100% 사과 맛을 말로 표현 못합니다. 그냥 느낄 뿐 이예요. 사과 맛을 설명하기 보다도 사과를 주는 게 더 좋습니다. 먹어봐라, 그래야 되거든요, 언어라고 하는 건 늘 한계가 있고요. 두 가지가 연결되는군요. 하여튼 절대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게, 이건 절대적인 경험입니다. 하나님 경험이니까요.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신다고 하는 경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을 자꾸 불을 보듯이 그런 쪽으로 가지 마시고요, 그건 하나의 표현들이야, 성경에 그런 표현들이 있는데 뭐를 봤다, 어떻게 됬다, 그런 것들은요, 더 근원적인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인 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시편기자의 이런 이야기, 나를 아신다, 이 단계에 들어가는 거지요. 절대적인 경험이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설명하기 힘들고 또 어렵고 절대적인 것은 말로 안 되는 거예요.

 

동양의 가르침으로 不立文字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不立, 세우지 못한다, 文字로는 세우지 못한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혹은 하나님 경험,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고 하는 것, 이건 낭만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건 아주 실질적인 것, 실체를 이야기 하는 건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안 되는 거지요. 아주 어린아이들에게 어른의 세계가 어떻다, 설명이 안 되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되지 않는 거죠, 사춘기를 지나고 철이 들어야 저절로 이해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시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그러니까 하나님의 속성이 나에게 전달되는 그 순간이 있는 거예요. 이 부분은 좀 이런 쪽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뭐, 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신다, 그런 표현은 바꿔서 사람은 사람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어떠한 이 세상의 존재들도, 아는 게 늘, 그걸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인식론’이라고 하거든요?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어떤 사건인거지요. 점쟁이라든지, 사이비교주들이 아는 척 하거든요? 다 아는 것처럼, 정말 웃기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포즈를 취하긴 합니다만 그렇게 떠벌리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일수록 뭘 모르는 거예요. 사실은요,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가 뭔지 모르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얼마나 깊고 얼마나 넓고 얼마나 새로운지를 정말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것을 알고서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하고 똑 같은 거예요. 나름대로 진정성을 있어요. 우물 안에서 바깥을 보세요. 그러면 하늘이 동그랗게만 보입니다. 동전처럼 보여요,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어, 그것만 보이니까 다른 건 못하잖아요? 그런데 바깥으로 나오면 세계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인식, 우리의 세계 이해, 하나님의 경험이 우물 안에서 동전처럼 하늘을 보고 있는지 바깥에 나와서 바람 불고 구름이 떠돌아다니고 매미와 민들레가 있고 여러 가지 정말 다양한 세계를 다는 우리가 모르지만 보이는 건 생각을 해 봐야 되겠지요. 시편기자는 6절에서 그래서 그걸 이렇게 정리합니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너무 기이해서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그게 너무 기이해서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입니다. 예,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어요? 여러분들이 마음을 놓고 사셔도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잖아요? 성령은, 이미 성경에 나오지요? 우리보다 더 우리를 깊이 통찰하고 꿰뚫어 보신다고 말이지요. 그 분 앞에서는 속일 수 있는 게 없고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그 만큼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건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준비하실 거고요, 그런 하나님이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불안할 게 없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실제적으로 어려움 당할 때 초연해 갖고 늘 그렇게 산다는 건 아닙니다. 힘 들 때는 힘들어도 중심을 잡아야 되는 거지요. 두 번째 단락은 7절에서 12절입니다. 하나님의 편재성(偏在性)이예요. 앞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걸 아시는 분이다, 얘기를 했는데, 그것은 곧 모든 곳에 존재하는 분이다 하는 것하고 맞물리고 또 존재하는 분입니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분이기 때문에 없는 곳이 없는 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것을 아는 거죠. 사람은 그게 불가능해요. 한국에 있으면 미국의 일을 몰라요. 그 정도만이 아니라 이 방안에 우리가 있는데 문 밖에 무슨 일이 있는지, 누가 어떤 어려운 일이 있는지 누가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지 누가 자살하러 가는지 이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다, 이게 정말 늘 들었던 그런 상투적인 걸로 생각하지 마시고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7절에 보면 주의 영이라고 표현하죠?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인 거예요. 영, 피할 수가 없어, 어느 곳에나 있으니까, 영이예요. 루아흐라고 하는 단어, 제가 몇 번 이야기했죠? 영이예요. 바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호흡과 같아요. 늘 숨을 쉬어야 되잖아요? 그런 것처럼 내가 있는 어디나 그 분은 계시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들의 표상, 하나님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을 아주 어렸을 때는 산신령처럼 보거든요? 조금 더 지나면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이라고 사람이 자기를 투사해 갖고 나의 어떤 절대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서 떠나야 되는 거예요. 이건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다 규정하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없는 그런 것, 모든 곳에 편재하시는 존재가 이 세계 피조물에겐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어떤 사건입니다. 놀라운 거죠. 그것을 그 뒷절에 쭉 설명합니다. 스올 8절에 나오죠?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스올, 지하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죽은 자들이 가는 곳 이예요. 구약에는 천당개념은 없습니다. 약해요. 있어도, 죽으면 다 땅 속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 당시 우주에 대한 생각이 우주, 땅, 지하로 딱 지정되어 있어서, 물리학적인 지식이 그 정도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서 땅에 무덤에 들어가면 흙이 되잖아요? 그 세계, 어두운 곳, 그런 곳을 스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 떨어져도 거기도 하나님이 계시다, 놀랍지요? 표현이, 9절에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굉장히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고대 근동사람들은 새벽이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날아가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바다 끝을 상상을 못합니다. 바다 끝이 뭘까? 낭떠러지로 생각했을까요? 하여튼 그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끝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지금 우리들하고는 다른 생각입니다. 어쨌든 그 당시 나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끝, 우주의 끝, 바다의 끝, 하늘이나 스올이나 그러네요. 하늘, 스올, 그리고 땅 끝은 바다 넘어, 거기도 나를 붙든다, 거기도 계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표현에 따르면 지금 우주물리학이 발달해서 지금 우주가 어떻게 된지 어느 정도는 알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우주가 135억년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계속 팽창하고 있고요, 수십억 광년 떨어져 있는 곳도 있고요, 그곳에도, 태양의 빛이 비치지도 않는 곳입니다. 그렇게 먼 곳에서도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계시는 하나님이 누구냐, 어떤 분이냐, 산신령 차원이 아니죠?

 

근원적인 존재, 근원적인 생명의 근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토대, 이렇게 말할 수 밖 에 없습니다. 철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건 철학을 뛰어 넘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참, 우리는 성경에서 놀라운 하나님 이해, 하나님 경험 그런 것들을 알게 되고요, 이건 오늘의 첨단 과학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을 만한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때도 제가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안티기독교나, 그러한 책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걸로 겁먹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성서기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미 그러한 것들을 다 맞닥뜨렸고요, 다 이미 극복한 문제들입니다. 그 다음에도 여기 정말 재미있게 말을 쓰고 있어요. 11절에 보면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흑암, 그건 정말 절망적인 것이지 않습니까? 흑암이 숨기지 못한다, 그리고 11절 후 반절에 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다, 흑암은 비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흑암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비존재, 빛은 존재예요. 비존재나 존재나 그걸 뛰어 넘는 거예요, 하나님은. 엄청나죠? 지난 번 수련회 때 주제이기도 하군요. 無로부터의 창조가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無로부터 창조할 수 있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인거예요. 그러니까 그 분에게는 뭐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 없다, 그런 차원을 뛰어 넘는 더 근원적인 그 모든 것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분이 아니면 어떻게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다 죽은 다음에 이 몸뚱아리가 다 해체가 되는데 가루가 되는데 어떻게 우리 미래를 맡길 수 있겠어요?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참 멋진 문장이예요. 그래서 제가 세익스피어 어떤 희곡에도 이런 비슷한 문장들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소설가나 시인들은 성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을 겁니다.

 

시편은 특별히 더 그렇고요, 세익스피어 희곡들은 다 시와 같습니다. 참 놀라와요. 세 번째 단락은 13절에서 16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중요한 것을 많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직접적으로 말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하나님의 전지, 편재, 세 번째가 하나님의 창조성 이예요. 이 세 가지만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왜곡되지는 않을 겁니다. 대단히 성서의 세계를 잘 하나의 엑기스처럼 모아놓은 그런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성 이예요. 그러니까 이 세 가지가 연관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지성과 편재성은 창조성을 전제합니다. 창조했다고 하는 사실이요. 창조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있는 것을 어떻게 바꿔나가는, 모양을 바꾸는, 무늬를 어떻게 하는 쓸모 있게 개량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아날로기아(Analogia), 수련회 때 한 단어지요. 아날로기아, 유비(類比)가 불가능한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것으로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사건, 그렇게 일어난 사건, 그게 참 창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 앞에서는 머리를 굴리면 안 됩니다. 어떤 걸 상상 할 것도 없어요. 상상해봤자 그게 별개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이라는 것도 창조사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부활도 여러분이 상상하지 마세요. 자꾸만 우리 생각에 좋을 것들로 치장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꾸려 가면 안 됩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예뻐지고 건강해지고 이런 차원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에 그 어떤 것으로도 아날로기아, 유비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사건을 창조라고 얘기하고 부활도 그런 것이고요. 그걸 우리가 약속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시인은 13절에서 시인의 입장을 멋지게 표현했는데요, 창조행위의 깊이를 아는 사람이예요. 창조신앙이 한국교회는 좀 더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기독일원론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영접, 이것만 이야기하지 창조와 예수사건하고 잘 연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창조영성이 좀 더 많이 강조되어야 되는데 현재는 약해요. 여기 멋지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4절에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행위를 기묘하다, 기이하다 그렇게 표현하죠, 그건 우리가 신비롭다는 얘기입니다. 신비롭다, 그냥 마냥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롭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신비롭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비라는 말이요. 그건 막연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요. 우리가 어떻게 해도 다 증명하거나 해명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행위, 이걸 가리켜서 신비하다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실증하거나 완전하게 해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리얼한 거예요. 리얼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사건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건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기묘하다, 기이하다, 그런 뜻입니다.

 

15절에도 보면 그런 걸 좀 부연 설명하는 거예요.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그렇잖아요? 땅의 깊은 곳, 깊은 곳이라고 그래요,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물리학적으로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몸이 어디서 왔어요? 땅에서 왔잖아요? 아주 물리적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몸을 통해서 내가 오기는 했는데, 아버지 어머니 몸도 사실은 땅에 있는 것을 먹고요, 땅에서 나온 소산물로 살았고요, 모든 것들이 거기에 근거했습니다. 땅은 깊은 곳이지요? 그런데서 지음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 정도로 그 부분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여기 16절 끝 부분에 보면 주의 책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생명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건 주변 다른 바벨론문화의 영향을 받은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 이것이 아득하다, 우리가 도저히 파헤칠 수 없는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창조하셨고, 그렇게 기억하시고 그러시다 그런 표현입니다. 다 됬습니다. 세 가지였어요. 전지성, 편재성, 창조성입니다. 이걸로 핵심은 다 끝났는데요? 오늘 본문이 그 뒤로도 당분간 더 이어집니다. 17절에서 24절까지요. 이것은 앞에 나와 있는 그 세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깨달은 자가 취해야 될 영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찬양, 하나님의 생각을 찬양하는 거죠, 그게 17절, 18절에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주님의 생각이 왜 그렇게 놀랍냐, 그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찬양하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전지, 편재, 창조를 본 사람이 이렇게 찬양하지 않을 수 없죠?

 

두 번째는 악에 대한 고민입니다. 19절에서 22절 이예요. 오늘 이 본문을 같이 읽으면서 그 대목에서 아, 이상하네,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아마 세심하게 잘 읽은 겁니다. 이게 조금 어색해요. 하나님의 전지, 편재, 창조 이런 걸 이야기하다가 원수 이 놈들 완전히 묵사발 내야 된다, 말하자면 그런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19절에도 보면 그렇잖아요? 19.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이게, 왜 이렇게 표현할까요?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 하는 사람에게 딜레마는 이 세계에 악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악, 신정론에 관계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그런 분인데 왜 여기 악이 있냐, 악을 하나님이 창조했냐, 그건 아니잖아요? 왜 있냐, 하나님을 유일한 창조자로 이야기 하면서 악이 또 있다고 하는 현실 앞에서 이걸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건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뭐, 큰 문제는 없는 거예요.

 

여기 이 시편기자는 기본적으로 제의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제의공동체요, 시편에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의식적인 어떤 것, 찬송 안에 들어와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여기에는 유대인들의 어떤 세계관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은 징벌해야 된다, 악은 파괴해야 된다, 악은 완전히 우리가 상대하지 말아야 된다, 그건 선악이원론적인 생각이 강하게 여기 자리 잡은 겁니다. 시편기자가 그 당시로서는 마땅히, 그럴 수 밖 에 없었어요. 여러분들이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 원수 갚는 일에 너무 지나치다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잖습니까, 이방인들을 가서 죽이고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라, 하나님이 명령을 내린 것처럼 하고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 당시는 그들의 한계에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인정을 해야 되요. 그러니까 하나의 제의,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유배되는 악, 이것에 징벌을 내려서 악을 멸하는 것, 이렇게 하소서라고 하는 그러한 예배의식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옳은 건 아니예요. 그러나 그들의 한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거지요.

 

신약공동체 와서는 원수 갚는 것 하고는 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통치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수 갚기가 아니라 오히려 당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는 사실에서 구원이 시작된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구약으로부터 신약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세 번째는 이 시편기자가 모든 걸 종결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간구를 드립니다. 간구하는 거지요. 도움을 바라는 간구입니다. 이게 참 당연한 기도고 마땅히 우리가 그래야 됩니다. 우리는 몰라요, 너무 모르는 게 많아요. 판단도 미숙할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절대자 하나님에게 도움을 바라야하겠지요. 바래야겠지요. 우리 신앙의 바른 자세예요. 바라기만 하고 입 딱 다물고 손도 가만히 있고, 그냥 맹목적으로 하라는 말이냐, 그게 아니라고 하는 걸 여러분들이 아시겠고요, 투쟁할 때는 투쟁하고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하는 기도, 바르게 판단해 달라고 하는 기도, 그게 필요하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의 노래였던 시편 139편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 편재, 창조라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찬양하고 그리고 도움을 간구하는 2300년내지 2500년 전 이스라엘 한 영적시인의 호소와 신앙고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이 말씀이 좋은 영의 양식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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