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0편 강해-‘주의 앞’에서 산다

 

오늘, 시편 140편입니다. 어느 사이에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한 주일에 한 편씩 공부했는데 벌써 140편까지 왔네요. 금년 11월 말이면 다 끝나게 되겠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홀수 구절은 여성분들, 짝수는 남성분들, 마지막 절은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하십시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2.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3.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

4.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5.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셀라)

6.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7.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8.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시며 그의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스스로 높일까 하나이다 (셀라)

9.나를 에워싸는 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들 때에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

10.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11.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12.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13.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아멘! 중간에 셀라라고 하는 그러한 구호가 나오지요? 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아멘하고 비슷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창 할 때 옆에서 ‘얼쑤!’이렇게 부추김을 넣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중요한 시편을 공부한다고 말씀 드렸어요. 지난주에 오시는 분들이 정말 좋은 기회였다, 말씀 드렸습니다. 139편이 어쩌면 시편 전체를 총괄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140편도 그렇네요. 사실은 뭐, 각 편이 다 그렇지요. 우리가 어떤 영적인 포커스를 맞추고 보면 그게 다 정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정점이예요. 지금 우리가 지구위에 살잖아요? 그게 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들이 지구 꼭대기에 사는 겁니다. 이해하시지요? 가장 정점에 사는 거예요. 둥그렇잖아요? 둥그런데 다 위에 서 있으니까 결국은 다 꼭대기에 사는 겁니다. 내가 지구에 가장 높은 자리의 중심에 있다, 생각을 해도 물리적으로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말씀 드린 거예요.

 

영적인 포커스, 초점 이런 것들이 살아 있거나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각각의 성경은 다 가장 중요한 그런 말씀이 되는 겁니다. 오늘 여기 140편도 그래요. 제목을 그렇게 잡았어요. “‘주의 앞’에서 산다” 다른 번역으로는 “주의 앞에서 머문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쨌든 주님 앞에 있는 거예요.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거거든요? 아참, 이게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지 제가 공부를 준비하면서 세삼 더 느꼈습니다. 그걸 우리가 천천히 보겠습니다. 이 140편은 언제 쓰여 진건지 그 흔적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것들은 좀 나오거든요? 여기에는 역사를 추정할 만한 어떤 단서들이 별로 없는 거예요. 주로 단서라고 하는 건 바벨론 포로 전이냐 후냐, 이걸 많이 합니다. 구약 성경을 읽을 때는 그걸 늘 염두에 두시면 되요. 바벨론 포로가 구약성경을 읽는데 뭐라고 해요? 깃점, 깃점 이예요. 그 전에 기록된 게 있고 그 후에 기록된 있고요.

 

그 바벨론 포로기에 기록된 게 있고요. 거의 바벨론 포로 전후기에 구약성경이 다 모여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들이 아시겠습니다마는 구약성경이 차례차례로 연대기적으로 기록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있었던 시대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기록된 게 아니예요. 그건 아주 오래전에 구전되던 이야기예요. 조금씩, 여러 가지 방식으로요. 아브라함 전승이라는 게 있고, 전승 이예요. 전승, 그리고 이삭전승이라고 하는 게 있고, 야곱전승도 있고요. 요셉전승도 있고, 각각 여러 가지 전승들이 많이 쭉 내려 왔습니다. 구전이라고 그래요. 그것들이요.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 문서로 작성이 되고 그리고 또 후대에 오면서 이 구약성경을 쓴 성서기자들, 그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그렇게 되면서 구약성경이 천천히 역사 안에서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이 구약성경을 기록하거나 편집한 사람들이 그냥 한 게 아니라 어떤 관점을 가진 거예요. 신학적인 관점입니다.

 

그런 얘기를 길게 나가면 오늘 본문하기가 시간이 부족하니까 접겠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만 하면 그 신학적 관점은 핵심적으로는 신명기 사관이라고 그래요. 신명기 사관, 그게 신명기를 중심으로 한 어떤 역사관이거든요? 그러니까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창세기를 읽다가도 거기 바벨론 포로 후에 쓸 만한 용어들이 들어 있는 거예요. 창세기 안에, 그러니까 창세기지만 바벨론 후에 쓰여진 거지요. 그런 흔적들이 다 있습니다. 그걸 세밀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 학자들이예요. 신학자들, 신학도 굉장히 분야가 다양합니다. 이건 뭐, 유럽역사에서는 그 학문 중에서 신학이 가장 오래되었으니까요. 각양각색 이예요. 신학자 한 사람이 신학을 다 못합니다. 구약, 이것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구약신학자라고 하는데요, 그 사람들이 일일이 그걸 다 연구합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깊이 있게 연구합니다.

 

아주 탄탄해요. 굉장히 학문적입니다. 고고학에도 밝고요. 언어학이라든지 종교학, 아주 이건 사실 신학대가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사실 신학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대가들이지요. 연구를 많이 합니다. 이 140편에는 이 역사적인 흔적을 잡을 만한 게 거의 없어요. 다만 이 시편을 쓴 사람이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그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영적인 실존, 제가 살고 있는 그 영적인 실존요. 고통스런 실존이 뭔지, 그리고 그 상황을 그가 어떻게 뚫고 나가고 있는지 오늘 이 본문을 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제가 4단락으로 나눴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우선 하나님께 자기의 처지를 호소합니다. 1절과 4절에 나오는데요?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탄원이고 간구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하나님께 아뢰고 도움을 청하는 것, 간구하는 것, 탄원하는 것, 이것은 마땅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됩니다. 시편에는 이런 탄원이 아주 부지기수로 나와요, 뭐, 자기가 알아서 하지 하나님께 일일이 다 구하고 그러냐, 기도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성인들이 주로 그럴텐데 그런 입장일겁니다. 이건 삶이 두렵거나 어떤 도피하는 입장에서 기도하는 게 아니거든요?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해야 됩니다. 그걸 제가 길게 말씀 드릴 것도 없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자기 입장을 하소연했습니다. 주기도에도 보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하잖아요? 예,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필요한 거예요. 저도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는 쪽의 목사라서 말씀 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마는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한다, 그리고 짧게 짧게 기도를 합니다만 몇 시간씩 시간을 정해서 하지는 않고 있어요.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릴 게 많이 있는 건 아닌데요, 하나님께 우리의 일상을 놓고 기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것을 우습게 생각할 건 없어요. 문제는 자기 이기심, 어떤 욕망, 이런 것들로 가득찬 기도, 이런 거죠, 그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이걸 정말 나의 처지를 하나님께 허심탄회하게 정말 하나님에게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인지 나의 이기심, 나의 생각들을 억지로라도 성취하기 위해서 매달리는 건지 이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예민하게 생각해서 구분해야 됩니다. 물론 기도할 때 그걸 딱 딱 구분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마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구분이 될 겁니다. 예를 들자면 이미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준비가 됬는데, 더 많이 달라고 기도한다면 욕심이죠, 그러한 기도를 정직한 기도, 탄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와서 그런 청원을 했다고 그래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내 한 아들은 오른쪽, 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 어떻게 보면 기특한 것 같기도 해요. 자기 아들을 위한 거니까, 이건 욕심이거든요, 예수님이 그 어머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예, 어쨌든 오늘 시편기자의 탄원은 정말 귀한 자세다,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필요하다, 예, 그걸 전제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어려움에 처했어요. 어떤 악, 악한세력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악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참 재미있어요. 재미있기도 하고 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잘 따라하셔야 되요. 마치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보기 위해서 국어 시간에 누구누구의 시를 분석하잖아요, 성경의 시편을 이해하려해도 그런 분석이 필요합니다. 시에는 토시하나 그대로 하지 않잖아요? 다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악, 혹은 악인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2절입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참 적나라한 표현이예요. 그리고 아주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마음속이라고 하는 것은 겉모습은 아니고요, 실제 그 사람을 가리킵니다. 속마음으로 모든 게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주관하는 어떤 힘이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거죠. 악을 꾀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악을 꾀합니다. 악이 본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창세기에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사건이라든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인간의 본질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말한 겁니다. 굉장히 악한 본질에 들어가 있는 거지요. 거긴 예외가 없습니다. 목사도 그렇고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인 자본주의 이것도 악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의 악이 작동하지 않으면 자본주의가 되지 않습니다. 경쟁심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능력 있는 사람에게 더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좀 못하고 이건 바람직한 건 아니잖아요?

 

성서적인 윤리라든지 어떤 그런 질서에서 보면 오히려 능력 없는 사람들을 더 보호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지금 경쟁위주의 이 사회시스템인 자본주의는 인간이 악하다고 하는 걸 전제합니다. 사회주의는요, 공산주의라고도 하죠, 원칙적으로만 말하면 이것하고 반대예요. 사람의 악이 아니라 선하다고 하는 걸 전제하는 정치제도입니다.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의 입장이 이거잖아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하는 것 만큼 가져가는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름답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다 실패했습니다. 이게 우리 딜레마죠. 이상적으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바람직한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러한 이 세계에 그러니까 타락한 세계죠? 피조 되었으며 그러나 악에 물든 이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며 사냐, 하는 거죠, 숙제입니다.

 

이상적인 사회를 포기할 수 는 없어, 그렇지 않습니까, 악한사람들도, 좀 못 배운 사람들도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똑 같이 사는 그러한 세계를 우리가 꿈꾸잖아요? 그러나 그 세계가 지금 요원하다고 하는 것,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어떻게 풀어 나가냐, 숙제입니다. 그러니까 악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기 보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게 아니라 매일 모인다고 되어 있네요. 굉장히 문학적인 표현이죠, 매일 모여요, 그러니까 악한 일을 하는 데는 매우 바빠, 거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거예요. 시편기자가 인간의 중심을 완전히 뚫어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 작동되는 원리도 다 뚫어 보고 하는 이야기예요. 다른 일에는 사람들이 게으른데 이런 점에서는 바쁩니다, 매일 모입니다. 그리고 5절에도 보면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셀라)

 

아, 예 그렇습니다. 이 부분을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어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합니다. 몇 주 전에 설교하면서 어떤 철학자를 한 분 소개했는데요?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여자 철학자인데요? 그가 히틀러 시대에 유대계 독일 여자예요. 히틀러시대, 전쟁이 끝나고 전범재판을 하는 걸 가서 보면서 내린 결론이 그겁니다. 기억하세요? ‘악의 평범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스실로 유대인들을 보내는 한 남자가 아주 평범한 사람이예요. 아주 인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구조에 들어가 보니까, 자기 딸과 같은 어린 아이들이나 심지어는 자기 아내와 같은 유대인 여자들을 가스실로 별로 양심의 가책 없이 보내더라, 예, 그게 때에 따라서는 아주 교묘하게 이렇게 치장이 되기도 하고요. 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도 그래요. 많은 경우에서 검찰들도 그런 일을 많이 합니다. 올무를 놓아요. 빠지게 만듭니다.

 

경찰들도 그렇게 하거든요? 끄나풀을 심어 가지고 거기에 죄를 짓게 만들어서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아주 고대 2500년, 2300년 전에 시편기자지만 어떻게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렇게 정확하게 뚫어 볼까, 놀랍습니다. 예, 세 번째 단계에는 이 시편기자가 악을 잘 묘사한 다음에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노골적으로 이 죄와 악인들을 멸망시켜달라고 간구하죠, 8절에 보면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말고 악한 꾀를 이기지 못하게 해 달라, 그들이 교만해 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표현했고요, 9절에서 11절에도 여기는 조금 더 문학적으로 악의 멸절을 묘사합니다. 몇 가지 단어를 제가 좀 인용했어요. 입술의 재난, 뜨거운 숯불, 깊은 웅덩이 등등입니다. 그러한 단어들을 통해서 악이 더 기승부리지 못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죠. 이런 것들만 보면 우리가 앞의 다른 시편에서도 확인했는데, 시편기자가 왜 그렇게 기도 하냐, 좀 당했다고 하더라도 용서하지,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오른편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야 되는데 시편기자들은 왜 이렇게 원수를 그렇게 갚으려고 하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어떤 데는 더 노골적으로 그런 표현들이 나오잖아요? 그것을 잘 보셔야 됩니다. 물론 그런 마음들이 있는데 시편기자는 나에게, 나를 헤친 사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원수 갚아야 된다,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그런 게 부분적으로 있을 수는 있겠지만 사람이니까 누구나 그렇잖아요, 당하면 꼬박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에게, 이 시편기자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로움이예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 바로 악이 제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매달리면서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악을 멸하게 해 달라는 이런 말은 보통 사람들은 사실은 잘 못해요. 이건 정의에 대한, 의에 대한, 하나님의 옳음에 대한 아주 강렬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냥 대충 삽니다. 세상이 썩었는데 뭐, 대충 그렇게 삽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악한 것, 다 그런건데 우짜노, 내가 혼자 나서서 어떻게 하겠노, 뭐 그런 정도로 지나갑니다.

 

시편 기자들의 영성이 굉장히 날카로워요. 좀 예민해요. 불편해요. 자기가 사는 게, 그래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기가 매진하는 거지요. 영성가들은 그렇게 평생 동안 평화를 물론 안고 있지만 힘들었습니다. 백척간두에 섰다고 할까요? 장대꼭대기에 서서 늘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것에 자기를 성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옳음에 강렬함이 있는 것만큼 악에 대한 분노 이런 것들도 있었습니다. 네 번째 단계, 이게 제가 좀 제목하고 연관해서 드리는, 요구하는 그러한 대목입니다. 140편의 결론이 12절, 13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 앞에 있는 이야기하고 연관되는 겁니다. 악을 제거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악이 제거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시편기자도 압니다. 시편기자가 그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예요. 생각이 나이브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악이 다 없어진다고 한다면 그건 현실세계가 아니거든요?

 

아무리 그렇게 해도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압니다. 이건 마치,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난치병, 불치병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해도 그건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요, 병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바이러스나 그런 걸로 오는데 면역이 거기에 맞는 의학을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바이러스는 또 변형하거든요? 싸움이 끝나지를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악도 비슷한 거예요. 악이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그걸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악과의 직접적인 투쟁에서라기보다도 다른데서 주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혁명가들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예요. 혁명가들은 사람의 힘으로 역사를 완전히 바꾸겠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야 되겠다, 등등 이런 거 얘기하잖습니까, 그게 참 가상한 일이기도 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가 옆에서 도와주어야 될 부분도 있고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계속 변형하는 바이러스하고 싸우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른 데서 힘이 주어진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가 집중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분이냐, 12절에 나와요.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요. 잘 들으세요. 막연한 게 아닙니다. 이게 착각하기 아주 쉽기도 하고 또 찾아가기도 좀 어려운 부분이기도 한데 그냥 하나님, 하나님 계속 부르기만 하잖아요? 그런데 그 머릿속에 하나님이 안 잡혀, 얘기해 보라고 그러면 얘기할 내용도 없어요. 굉장히 추상적인 어렴풋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님 너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되어서 산신령처럼 생각한다 말이지요. 고난당하는 자를 어떤 변호하는 힘을 생각해 보세요. 그게 하나님인 거예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줍니다. 그럴 능력이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는 분, 궁핍한 자에게 왜 정의를 베푸냐, 궁핍한 자에게 돈을 주지,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궁핍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로움입니다. 이 세계가 경제적으로 불의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절대적인 먹을 게 부족해서 굶는 사람이 생기는 게 아니라 분배가 안 되니까 문제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빈익빈 부익부도 마찬가지고요. 이 정의로움이 가난한 자에게 정말 필요한 문제인 거지요. 이건 실질적으로 깨닫고 사는 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변호, 하나님이 변호하신다니 그게 뭔가, 잡히시나요? 하나님의 정의, 이게 뭔가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들 정도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친구에게 배신당해서 힘든데 다른 가까운 친구가 아, 괜찮아 위로하는 것,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에게서는 그런 변호, 위로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 거예요. 알지도 못하면서 말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고 사는 게 났습니다. 서로 말 따뜻하게 말 주고받고 하면서 공동체를 이뤄가는 건 필요한 겁니다. 그걸 자체마저 부정하는 건 아니고요. 그러나 근본적인 변호와 위로는 하나님에게로 부터만 가능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단계에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의 삶이 정말 평화로워지는데요, 정말 영적으로 풍요롭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변호, 하나님의 정의가 아주 실질적으로 내 삶과 일치한다면 그러면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게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간접적인 대답이 13절입니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주의 이름과 주의 앞에 있는다는 것은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약간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예요. 주의 이름에 감사한다. 주의 앞에 산다. 똑 같은 뜻입니다. 주의 앞에서 산다는 말,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걸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머문다, 그 앞에 직면한다, 그 앞에 대면한다. 마치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를 보는 경험과 같은 그런 것들은 직접적으로 설명하기 참 어려운 부분인데요, 그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시편기자가 말입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이 아닌 다른 데서는 변호와 정의를 12절에 얘기한 변호와 정의를 참된 위로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반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그것을 찾아 봤지만 그게 안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부분을 제가 멋지게 설명해 볼까 생각했는데 설명이 잘 안됬습니다. 여러분들이 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라고요.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 앞에 섭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주의 앞에 서는 겁니다. 거기서만 참된 위로, 참된 변호, 참된 생명 이런 것들을 얻게 됩니다. 이런 말을 그냥 그런 말이다, 정도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상투적으로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꼭 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데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거고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사건, 십자가 부활 여기서, 이 앞에서만 우리가 참된 위로, 평화, 생명을 얻는다, 얘기입니다. 오늘 제목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주의 앞에서” 우리는 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40편, 아주 옛날 한 유대인 영적인 시인이 표현한 이 문장들을 읽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이모저모로 채이고 힘들고 시련 받고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 참된 삶이 있음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우리 각자의 형편을 주님께서 붙들어 주실 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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