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1편 강해-유혹 앞에서

 

시편 141편입니다. 성경을 지난 주간에 제가 새로 하나 샀습니다. 이건 성경만 따로 있는데요, 우리나라 신자들은 성경과 찬송이 붙은 걸 좋아해요. 저는 그게 오히려 불편하더라고요. 같이 있으면 일단 무거워서요. 찬송가도 하나 샀습니다. 큰 글씨예요. 잘 보이는, 가죽으로 됬고요. 그렇습니다. 이것을 샀는데 여러 판이 있거든요? 우리나라 성경 다양하게 나와요. 가지각색 정말 많습니다. 취향이 달라서 그런지 성경을 모으는 취미들이 있어서 그런지 정말 여러 가지 종류입니다. 제가 이번에 산 성경은 <관주해설성경전서>라고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안에 해설이 달려 있더라구요. 주석이죠, 말하자면, 짧은 주석들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괜찮아요. 주석은 독일성서공회에서 나온 성경에 붙어있는 주석이라고 그래요. 권위가 있습니다. 짧게 짧게 박스 안에 들어 있는데도 너무 충실합니다. 이걸 읽으며 혼자 공부하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거요, <관주해설성경전서>라고 되어 있네요. 대한 성서공회서 나온 거지요. 그렇게 되어 있지요? 독일성서공회해설 이게 붙어있습니다.

 

우리 일반 신자들에게 전문적인 주석서 읽지 않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맞춤한 성경입니다. 그리고 부록이 여러개 달려 있어요. 그리고 용어해설도 여러 쪽이 작은 글씨로 있네요. 작은 신학사전 이예요. Concordence 처럼요. 이게 있는 줄 몰랐거든요? 지난주에 영남신학대학에 갔다가 책방에 있어서 내 책 잘 팔리나 가 봤다가 그러다가 이 성경이 보여서 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구용어해설에 ‘가나안’ 혹은 가나안 사람, 가나안 족속들.. 쭉 가나다순으로 쭉 몇 백 개 있는 것 같아요. 성경의 중요한 것들이 되어있고, 그러한 성경사전도 있고 성경역사연대표, 쭉 나와 있고요. 역시 신학, 이것은 독일입니다. 특별히 개신교 신학은 그렇습니다. 가톨릭 신학은 프랑스라고 할 수 있고요. 예, 성서신학이나 조직신학 이건 뭐, 미국, 영국 여기도 독일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 성서도 참 잘 만들었어요. 본문주석을 하면서 여기 <주>까지 여기 다 달려있고 괜찮습니다. 141편, 1절에서 10절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나누어서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1절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1.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2.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3.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4.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5.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6.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7.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

8.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9.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10.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아멘! 이 141편은 탄원시 입니다. 탄원시예요. 개인탄원 이예요. 이 시편도 그 유형이 여러 가지입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에 오면서 부르는 노래도 있고요. 또 하나님께 개인적인 요구사항을 아뢰는 간구, 이런 것도 있고요. 또 제사 드릴 때 사용하는 의식문, 제사의식문도 있고요. 찬양시도 있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거요. 다 종류가 다른 겁니다. 탄원은 자기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그런 시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특별하죠.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 그러니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거예요. 억울한 일 당했습니다. 깊은 수렁이예요. 그런데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힘든 겁니다. 하나님께 탄원 할 수 밖 에 없는 그런 상황에 들어 있는 거죠. 탄원을 드리는 거예요. 억울합니다. 내가 이렇게 완전히 올무에 걸린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탄원하는 거예요. 이 탄원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대개 어려워요. 그냥 어려운 게 아니라 덫에 걸린 것처럼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빠진 것을 우리는 불행이라고 얘기 합니다. 저 사람 참 불행하다, 인생이 왜 저렇게 됬노? 불쌍해서 어떻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불행이죠. 늪에 빠진 것 같으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불행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역설입니다. 모든 게 다 잘되면 사람은 얍삽하다고 그러나? 간사하다고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잘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힘이 좋은데요, 뭐, 자기가 다 할 수 있는데 아쉬운 게 하나도 없는데, 뭐 그럽니까? 아,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이 나에게 잘 해 주셔서 만사가 형통하고 정말 감사 찬양 한다 얘기합니다마는 정말 그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느냐, 그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좋은 어떤 형편, 인생살이에 들어가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그런 것이 왜 그러냐에 대해서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복음서에도 많이 나오고요. 성경 전체가 어쩌면 거기를 들어가는 거예요. 그 정도로만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오늘 이 시편141편의 성서기자는 하나님에게 탄원을 드릴 수 밖 에 없을 정도로 아주 큰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영혼을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고요. 사실은 그게 영혼이 투명해지는 순전해지는 유일한 길이예요. 강의안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음악에 가까이 가야 하는 것 처럼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영혼이 순수하고 조금 다른 표현으로 영적인 경지가 깊어지려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수 밖 에 없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지요. 우리가 가능하면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고 살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만 어려운 일 와도 괜찮아요. 오히려 그게 우리에게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됩니다. 틀림없어요.

 

오늘 이 141편을 세 단락으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는 사람의 이 기도문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 거예요. 첫 번째는 기도의 본질을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본질 이예요. 1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표현이 재미있지요? 아주 아름답지요? 이해가 되나요? 이해는 되겠지만 그게 느껴지시나요?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우리가 부르면 하나님이 들으시나요? 그리고 그 분이 오신다고 하는데 어떤 게 오시는 걸까요? 이런 건 우리가 절실하게 느껴야 되고요. 그게 안 되니까 자기 열광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어서 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게 점층법이라고 하나요? 더 강해지죠? 첫 번째는 주를 불렀사오니 두 번째는 주께 부르짖을 때에 얘기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소리를 막 지른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일단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주를 부른다고 하는 것, 주께 부르짖는다고 하는 게 뭐냐를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두 가지를 좀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첫째, 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것도 모른 체 부를 수는 없습니다. 모르면서 막 부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우스운 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통일교 신자들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겠어요? 부르짖지 않겠어요? 문선명에게 기도할까요? 누구에게 기도할까요? 하나님에게 기도 할 텐데 문선명이는 거의 그리스도, 재림 주처럼 그들이 생각할 테니까 거의 문선명이 이름으로 간구할 겁니다. 그들이 간구하는 열정만 보면 대단한 거예요. 신천지도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 번 여러 번 반복합니다마는 사이비 이단으로 갈수록 더 열광적인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요란을 떨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침묵이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오시지 않으시거든요? 아주 은밀하게, 태풍 이런 게 아니라 아주 은밀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말 이예요. 전형적인 예를 갈멜산의 사건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나와요. 엘리아와 대적하는 바알숭배 이런 선지자들하고 갈멜산에서 속된 말로 맞짱 뜨는 사건이거든요? 바알선지자들은 정말 하루 종일 울부짖었습니다. 자기 신에게 울부짖었어요. 자해하고 아주 자극적으로 하고요. 사이비 이단에 가까울수록 자극적입니다. 그래야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대 근동의 종교들을 보면요, 그런 차이가 있어요. 근동이라고 하면 팔레스틴을 얘기합니다. 여러 종교들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유대교만 독특했습니다. 근동에 있는 다른 종교들은 이렇게 대변할 수 있어요. 시각적인 종교였습니다. 굉장히 그럴듯하게 보여 주는 것,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를 뿌린다거나 자해한다거나 심지어는 인신제사 그런 것까지 하고요, 그러나 유대교 신앙의 특징은 그러한 시각적인 게 아니라 청각적인 겁니다. 말씀 이예요. 보이는 게 아니라 언어예요. 언어, 그래서 신명기에 나와 있듯이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명기의 핵심 이예요. 쉐마예요. 들으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그러니까 대단히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러니까 시각으로 여러 가지 요란스럽게 되는 것은 은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기를 드러 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겁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있는 거지요. 가끔 요즘 대형 프로젝터 이런 걸로 예배도 실황중계도 하고 보여주고 하는데 제가 한 번 말씀 드렸지요? 그런 건 예배학적인 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설교할 때 목사 얼굴 크게 대형화면으로 비춰갖고 신자들에게 이게 쇄뇌 되는 거거든요? 자꾸만 머릿속에 목사 얼굴만 떠오르고 어떤 시각적인 걸로만 남게 된다면 이건 문제가 많은 거예요.

 

이 갈멜산에서 이 바알을 따르던 선지자들은 그냥 자학적이고 열광적이고 그런 방식으로 사람은 엑스타시를 경험합니다. 아시죠? 엑스타시, 자기초월이요. 어떤 경험을 해요. 그건 기독교다 아니다 상관없이 모든 종교에서 가능합니다. 무당들에게서도 가능합니다. 신들림이 가능한 거예요. 대나무가 흔들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똑 같은 박자에 의해서 계속 떨림을 받게 되면 그건 종교심리학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거거든요. 하나님이 어떤지 모르고 우리가 기도해야 될 대상이 누군지 모르고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는 없다, 알아야 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된다, 그거죠. 두 번째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하는 것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첫 번째는 주님을 알아야 우리가 정확하게 기도할 수 있는 거고, 두 번째는 도대체 이 부르짖는다, 하나님께 주를 불렀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겁니다. 아, 그래 소리를 내서 기도하라는 말 아니냐, 틀린 얘기는 아닌데요?

 

의미가 뭔지 알라는 말이지요? 그냥 기도시간만 많이 채우는 것, 이게 뭐, 부르짖는 거겠습니까, 기본적으로 다음 사실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것에 대한 기대를 접는 것, 그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자기가 할 일을, 자기의 욕심이라든가, 자기욕망이라든지 그런 걸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른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성이 어떤 가를 알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할까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기도를 하느냐를 보면 아는 거죠, 예, 그렇게 1절이 이야기하고요, 거기서 우리는 기도가 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기도가 분향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네요.

 

그리고 저녁 제사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분향과 제사로 설명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에는 분향순서가 있어요. 향을 피우는 거지요. 러시아 정교회나 가톨릭 미사 이런데 가면 향을 피웁니다. 이렇게 돌리면서 흔들지 않습니까, 그게 다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보면 형식적이다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마는 다 상징 이예요. 거기서 나는 향이 위로 올라가잖아요? 위에 계신 하나님께 우리를 불살라 드린다고 하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괜찮은 종교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분향과 제사와 같기를 바란다는 기도잖아요? 그런 아룀이잖습니까, 예,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어요. 기도는 예배다, 예배 자체는 아니예요. 예배는 기도로만 된 게 아니기 때문예요. 그러나 예배의 차원에 속한 겁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죠? 예배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이거예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그 차원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현대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는 것을 잘 이해를 안 합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접어두고 교회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잘 와 닿지 않아요. 와 닿지 않습니다. 자기하고 연관된 것만 아주 열정적입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 받고 그런 것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엄격하게 얘기해서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 행위예요. 나에게 어떤 것이 이루어지든지 안 이루어지든지 상관없어요.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나에게 어떤 것이 이루어져봤자 그게 사실은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거든요? 아시지요? 우리의 생명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건 당분간 재미에만 불과한 거지, 그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는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다 기도의 제목이잖아요?

 

그런데 좋은 대학에 가거나 직장, 건강 다 그렇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 봤자, 처음 들어갈 때만 그렇지 그 다음은 똑 같습니다. 들어가서 거기서 또 시행착오하고 괴로워하고 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과정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거기서 거기인 그것에 우리가 목매달고 기도를 한다면 우스운 거지요.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게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면 그럼 그걸로 만족하는 영적인 자세가 필요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1절과 2절에서 기도가 뭔지에 대해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참 귀한 구절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3절에서 7절입니다. 소제목을 “유혹 앞에서”라고 정했어요. 이것이 오늘 공부 전체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유혹 앞에서” 이 시편기자는 어려움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는 거예요. 그 어려움이 유혹입니다. 이제 빠져 나가기 정말 어려운 일들입니다.

 

그 유혹은 4절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옵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이게 유혹으로 느껴진 거예요. 악을 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그런 유혹입니다. 이게 사실 잘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나쁜 건지 아닌지 잘 안 보여요. 완전히 나쁜 거, 이건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쉬워, 그건 그냥 아예 상대하지 않으면 되요. 그러나 그걸 구분하기가 어려운 유혹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그게 힘든 거예요.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파렴치한 것, 이것 피하는 것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지요.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그럴 듯하게 보이는 거예요. 진수성찬이예요. 이게 악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좀 힘듭니다. 아주 먹음직스럽지 않습니까, 마치 창세기 앞부분에 나와 있는 대로 뱀이 아담과 이브에게 유혹할 때 사용한 어떤 과일나무와 같습니다.

 

보니까 그럴 듯 했거든요, 거기도 공부 앞부분에 나와 있는 대로 시각적인 유혹이네요. 유혹은 대게 평소에 시각적인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시는데 아담과 이브도 보니까 지혜 있음직하기도 하고 참 그럴 듯 하더라 해서, 그래서 먹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수성찬 이예요. 그러니까 겉으로 보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 유혹은 꼼수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 일상에도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것들일까요? 제가 일일이 다 설명을 해 드려야 될까요? 그럴 필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요즘 우리 사회에 부산에서도 큰 사건이 났고, 서울에서도 난 사건을 예로 들면 저축은행 사건 같은 것들입니다. 서민들의 돈을 이자 조금 더 준다고 해서 많이 모았잖아요? 그걸 갖다가 불법으로 대출을 하고 저축은행이 어디 관리에 들어가서 몇 천 만원 이상 되는 사람들은 주지 못하고 몇 가지 그러한 일이 있어서 서민들이 정말 힘들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관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또 빽이 있는 사람들은 다 찾아가고 말이지요.

 

이 비슷한 일들은 정말 많습니다. 그런 걸 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 받지 않습니다. 법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감옥에 가지 않을 정도로만 해서 그걸 경제나 정치나 이런 점에서 교묘하게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겁니다. 진수성찬이죠, 시편기자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린 겁니다. 양심이 그리 예민하지 않으면 아예 탄원기도 드리지 않습니다. 오늘 4절에도 나왔지만, 탄원할 때 원수 갚아 주십시오. 올무 내가 안 빠지고 저 원수 빠지게 하는 걸 보면 기도 하는 사람이 저렇게 완악한가, 원수 갚아 달라고 하는가, 그렇게 들릴 텐데 그 차원이 아닙니다. 탄원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예요. 다른 사람들은 별로 의식하지 않을 만한 그러한 유혹, 그러한 불의, 그런 것들을 더 절실하게 깨닫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외침이죠, 부르짖음, 그런 차원에서가 정말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영성가의 영성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시편은 다 죽은 말이 됩니다.

 

이건 완전히 그냥 종교적인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고 하나요? 말만 그럴 듯하게 하는 그런 것으로 떨어 질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지켜달라고 하는 것이 입을 지켜달라고 그러네요.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그렇게 하잖아요? 문학적으로도 참 뛰어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탁 우리들에게 와 닿아요. 그러니까 어떤 유혹이 말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말을 뱉으면 말은 자기 삶이 담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주워 담기가 힘들거든요? 결국 진수성찬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의안에 쓴 대로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악의 시작, 우리가 악에 동조하는 것은, 말 입술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한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는 절절한 외침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5절은 약간 상황이 달라요. 4절은 악인으로부터 오는 유혹인데, 5절은 의인으로부터 오는 비난, 혹은 시련 혹은 유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거예요. 조금 이해하기가 까다로운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5.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 짧은 설명에 보니까 ‘머리의 기름같이 여긴다’고 하는 말은 머리를 시원하게 한다는 뜻이네요. 그 당시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 시원해졌는가 봐요. 그러니까 의인이 나를 친다고 하는 말은 충고입니다. 의인의 따끔한 질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받아 드린다, 그 얘기죠, 어쨌든 의인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람에게 유혹은 유혹입니다. 사람은 다 아무리 나의 잘못을 잘 짚는다 하더라도 기분 나쁜 거거든요, 자기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걸 구분하기가 사실은 쉽지 않아요. 정말 의인으로부터 오는 책망 질책인지 아니면 악인의 유혹인지 잘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 그 부분은 그렇게 넘어가면 됩니다. 6절과 7절은 이 전체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 들어왔어요. 이건 굳이 설명하려면 하겠습니다마는 별로 그렇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예, 3절에서 7절까지는 전체적으로 악인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의인으로부터 오는 질책을 어떻게 자기가 대처한다,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락은 8절에서 10절입니다. 앞부분을 다시 한 번 정리하십시오. 1절에서 2절은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가 나와요.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자세요, 거기서 우리는 기도의 본질을 확인했습니다. 이 사람이 드리는 기도는 탄원 이예요. 큰 유혹 앞에서 그가 어떻게 해야 되나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 번째 단락에서 유혹을 극복하는 길이 뭔가,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8절에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 피한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용을 써 가지고 이 문제를 잘 해결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일단 두 번째예요. 그것도 해야 되겠지요. 사람이 할 일을 안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선은 주님께 피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눈에 보이나요? 아니면 교회당에 들어와서 무릎 꿇고 엎드려야 된다는 얘기일까요? 무슨 뜻인가요? 이건 앞에 1절을 볼 때 말씀 드렸듯이 주께 부르짖는다는 말하고 비슷합니다. 이게 자칫하면 막연한 게 되요. 그러니까 상투적인 말로 떨어져요. 주님께 피한다, 피한다, 그렇게 되는데, 일단 1절에서 설명할 때 말씀 드렸듯이 주가 누군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호와가 누군지를 알아야, 그 분에게 피한다고 하는 말이 의미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이 주를 조폭 두목정도로 생각한다면 아니면 옥황상제 비슷하게 생각한다면 이 사람의 신앙은 그 방식으로 늘 떨어지게 될 겁니다. 예, 이건 단 시일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예요. 여호와께 피한다는 말, 이거 그냥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해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생각과 그 경험이 깊어지는 만큼 들어오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 그 분의 종말론적 약속, 이런 게 일단 좀 정리가 되어야, 그 분에게 피한다는 말이 되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뭐예요.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는 똑 같은데요? 하나님 나라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냐 알아야, 아는 만큼 그 분에게 피한다는 말이 의미가 있다는 말이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든 겁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 이것은 그건 다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그건 어떤 개념의 세계예요. 그것은 아직까지도 다 드러난 게 아니고요, 그건 점점점점 그가 들어가는 것만큼 열리는 세계인데요?

 

신학자들이 그걸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개념을 말씀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왔다, 이미 왔으나 아직은 오지 않은 그 성격이다, 이게 개념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닌 건 아시지요? 그러나 개념적으로는 이해 할 수 있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게 어디있나, 아, 그렇게 되면 이제 실증적인 것으로만 세계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 돼서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약간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지만 영성은 바른 공부를 전제합니다. 필수적으로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지를 아는 공부지요. 그겁니다. 예,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여호와께 피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8절 후 반절이 답을 주지요. 거기서만 영혼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영혼이요,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작용하는 그리고 반응하는 힘을 가리켜서 우리는 영혼이라고 얘기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에게서만 영혼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예, 아마 제 설명이 아직까지 확 와 닿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시간이 더 필요하고요, 우리가 일반 시를 공부할 때도 처음 여러 번 읽어서 시가 다 이해됩니까, 천천히 그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공부와 시 읽기와 삶에 대한 통찰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야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서도 똑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실망할 필요도 없고 혹은 또 교만할 필요도 없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 가면 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다 준비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태도가 준비되면 깊이 깨달아지게 됩니다. 마지막 말씀을 드려야 되겠네요. 그가 마지막으로 탄원을 구체적인 내용으로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 올무와 함정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얘기합니다. 올무와 함정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요, 숨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경험하고 있는 올무와 함정이 어떤 건지는 다 모릅니다. 아까 유혹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일들이 있었을 거고요, 아니면 같은 동네 사는 사람들에게 모함 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 이 시편기자를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적으로 신체적인 위협이 오는 걸까요? 어떤 건지는 우리가 다 모릅니다. 다만 그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같이 수렁으로 빠지는 것과 같은 위기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면 쉽게 피할 수 있는데 눈에 잘 안 보이니까 문제고요, 우리는 어쩌면 그런 점에서 다 영적인 시각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분별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거든요? 억지로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8절을 설명할 때 드린 그 이야기예요. 그가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간다, 그에게 피한다, 그에게서 내 영혼이 풍요로워진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가 다 거기에서만 올무와 함정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이 뭘까요? 앞에서도 한 번 설명한 거고요, 구체적으로 설명은 아니었고 잠깐 짚고 넘어간 겁니다. 공부를 하면서 너무 초월적인 거 질문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다 생각하시라고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믿는다, 안 믿는다고 할 때 그게 뭐냐 라고 하는 거지요. 이런 것들을 차근차근 짚지 않고 신앙생활하게 되면 그게 다 모래위에 세우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영혼이 영적인 세계가 빈궁해져서 다른 걸 자꾸만 찾게 되요. 하나님께 피한다고 하는 것, 그건 그 분과 일치되는 길입니다. 거기서 풍요로워지는 것이고요. 그 분과 일치된 것은 그건 뭘까, 또 생각해 보세요. 지금 제가 몇 가지 연결해서 설명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피한다, 그 분에게만 향한다, 그 분만 본다, 이야기하고요, 그것은 그 분과 일치를 원하는 거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치되어야만 우리가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또 다르게 설명을 해 보세요. 첫째 그것이 뭔가 말이지요. 그건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전체 말씀과 연관 짚어서 본다면 그리고 앞에서도 한번 짚은 것입니다만 이런 뜻이죠, 하나님 이외의 것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 접는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외의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만 하나님에게 피하는 일들이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머릿속에 굉장히 빨리 돌아가요, 누구하고 친해야 되고, 어떤 돈이 어디를 통해서 들어오고 그런 것이 우리 머릿속에 계속 작동하기 때문에 그걸 멈추고, 완전히 끊고, 생각을 완전히 단절하는 거죠, 그리고 성서가 우리들에게 여러 번 반복해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을 집중하는 그런 일들이 되는데 그런 일들이 쉽지 않은 겁니다.

 

다른 데로 우리의 생각들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 이예요. 여호와 하나님에게 피할 때만 우리 영혼이 풍요로워지고요, 그럴 때만 올무와 함정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 날 수 있고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 오늘 말씀을 잘 보았습니다. 우리 말씀을 잘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성경을 읽겠습니다. 141편, 1절에서 10절까지, 남성 먼저 읽고 그 다음 여성이 읽고 그렇게 읽겠습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2.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3.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4.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5.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6.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7.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

8.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9.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10.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렇게 좋은 절기에 일상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거의 2500년 전, 한 유대인 영성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준 이 탄원의 기도를 통해서 영성의 중심이 무엇인지 기도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공부했습니다. 이 탄원을 드리는 이 시편기자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처럼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눈을 두며 여호와 하나님께만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자들이 되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영적 풍요로움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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