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2편 강해-부르짖는 기도

 

시편 142편입니다. 1절에서 7절까지 있습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이게 기도거든요, 기도하는 자세로 읽겠습니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1.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5.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아멘! 오늘 우리 공부할 시편 142편은 좀 특이합니다. 특이하다고 할 것 까지도 없죠? 시편 자체가 다 특이합니다. 특이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고유하다는 뜻이예요. 이 142편은 구절이 아주 절절합니다. 다른 시편들도 비슷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여긴 좀 더 특별해요, 오늘 전체 제목을 “부르짖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제목의 설교도 제법 있었을텐데, 저하고 어울리나요? 혹시 어울리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안 어울려요? 그럼 제목을 잘 못 정했나요? 이게 본문에 나오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이 많이 나와요.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픔과 절망을 이 시편기자가 몇 단어로 뭐라고 할까요? 한이 맺힌다고 할까, 억지로가 아니라 속에서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단어를 몇 개를 제가 추렸습니다. 원통한, 토로, 우환, 상함, 올무, 돕는 이 없다, 없다는 말도 반복이 많이 됩니다.

 

이 몇 가지 단어만 보더라도 우리가 이 사람이 얼마나 상황이 어려운가, 그런 걸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기대 할 게 없는 상황 말입니다. 이게 늘 그렇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이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142편을 유형별로 나누면 탄원에 속합니다. 뭐, 찬양도 있고, 영광송, 찬양, 간구, 이것저것 여러 가지 종류, 제사, 의식 기도, 또 순례자들의 노래,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는데, 탄원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자기의 하소연을 다 늘어놓고 하나님에게 특별한 도움을 기원하는 그런 기도입니다. 아주 절망적인 그런 상태죠, 이런 시편을 읽을 때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가 뭔가 배워야 되겠다, 그것을 생각하기 전에 이 사람의 마음과 일치되는 게 중요합니다. 탄원기도를 드릴 수 밖 에 없는 그 사람의 영혼이 어떤가 하는 것 말이지요.

 

이런 상태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자꾸 느껴지지 않아요. 이 사람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들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예민한 사람만이 가능하거든요? 감수성도 좀 예민하고요, 또 어떤 인간이해에 대한 것도 깊어야 되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보면 다른 사람의 이런 아주 어려운 상황을 제 3자가 같이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최근에 영화 <도가니>라고 뭐, 그게 아주 이렇게 저렇게 센세이션하고요, 장애인에 대한 이런저런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고요, 한국의 사학의 문제점들도 많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은 쉽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장애를 실제로 그렇게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오직 하나님에게 탄원을 드릴 수 밖 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빠진 사람의 영혼은 두 가지 가능성에 노출됩니다. 하나는 완전히 피폐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삶이 힘들어지면 우선적으로 영혼도 그렇고, 감수성도 그렇고 삶 자체가 파괴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의 가능성이고요, 다른 하나는 오히려 투명해지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신앙적으로 배워야 될 부분이고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가야 되고요, 그런 준비가 된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건 또 실제적으로 영혼이 투명해진다고 하는 이 사실, 이런 것도 그냥 말장난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냥 되는 것도 아니고 나이브한 것도 아니고 아주 실질적인 거예요.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어떤 투명해지는 그런 영혼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여름에 먹구름장으로 그리고 습도가 높아서 아주 칙칙했던 그런 하늘이 가을이 되니까 투명해진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똑 같은 하늘이지만 다르잖아요, 요즘 특별히 구름이 예쁘던데,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오늘도 제가 차를 타고 올 때 시간이 여섯 시 조금 넘어서 출발하거든요, 어떤 때 집에서 밥 안 먹을 때는? 아, 서쪽을 향해서 오잖아요?

 

요즘 서쪽 하늘이 정말 멋있습니다. 구름이 끼어 있는데 구름이 층처럼 지고요, 무늬도 그런 무늬가 없어요. 예, 하늘이 투명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어떤 그 자연의 오묘함처럼 영혼의 투명성도 있습니다. 이게 왜 가능한지 아시겠어요? 이 탄원기도를 드릴 정도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 영혼이 피폐해지는 가능성으로 나가지 않고 투명한데로 나가는 게 어떤 건지, 그리고 왜 그런지 아시겠지요? 일단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제가 여기 서론 부분에서 너무 시간 끌지 말아야하겠는데요, 일단 복잡한 게 다 없어지는 거예요. 아주 어려워지니까 그 다음에 이것저것 다른 것을 신경 쓰게 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불행한 게 영혼이 혼란스러워진다고 하는 게 복잡한 생각 때문에 그런 거고 계산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탄원이라고 하는 그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다른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아요. 간단하게 한 가지만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사실이고요, 또 하나는 한 가지만 생각하는데 그게 복권 사갖고 복권 당첨될 날을 한 가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거기에 Concentration(집중), 하나님을 향해서 집중하는 거예요. 투명해지는 겁니다. 거기에는 私가 끼지 않지요, 私가 안 끼고 오직 公적인 생명에, Reality 여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서론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서 이 142편의 기자가 그런 투명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참 부러워요, 그 사람이 정말 어려운 가운데 빠졌을 텐데 그럴수록 더욱 그의 영혼은 혼란스럽지 않고 아주 일관성 있게 쭉 나가면서 건강하다고 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건강하다고 하는 것, 여러분들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가능했거든요, 거기서만 오늘 제목을 통해서 말씀 드린다면 그런데서만 부르짖는 기도가 가능하다, 부르짖는 기도는 바로 하나님에게 Concentration 하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걸 전제하고 오늘은 제가 한 절씩 따라 가 볼까 합니다. 시편기자가 1절에서 여호와께 부르짖는다고 얘기합니다. 이건 6절에도 똑 같은 표현이 나와요, 이 부르짖는다고 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보통 우리 한국교회서는 바깥으로 드러난 것을 주로 많이 생각하거든요? 지난여름에 제가 수련회 강사로 잠깐 강의하러 갔다 왔는데, 목사님들 대상으로도 강의 하러 갔었고요, 그런데 많이 모여서도 이것저것 노래 드럼 치면서 열심히 부른 다음에 강사 나오니까 주여 삼창으로 하고 통성기도로 강사가 강의를 잘 하도록 그런 기도를 하시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익숙한 기도형식이 됬습니다. 그런 것들을 부르짖는 기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소리를 지를 수 있습니다. 아픈 데 소리 어떻게 안 지르겠어요. 고함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그런 경우 말고 그 준비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소리치는 것 그것 말고 일반적으로 영혼의 깊이에서 드리는 기도는 오히려 소리가 작아집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극한의 슬픔 앞에서 말문이 막힌다고 하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큰 소리를 칠 수 있을까요? 거룩한 두려움 앞에서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입을 떼는 것조차도, 말을 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아, 이게 불손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데 말, 언어 너머에 계신 분인데 우리가 그 분 앞에서 모든 걸 쏟아 놓겠냐하는 겁니다. 1절 후 반절에 따르면 이 부르짖음은 간구와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시편기자가 그걸 같이 병렬시키잖아요? 부르짖는다고 하고, 간구한다, 이게 같은 이야기예요. 이겁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혹은 간구한다고 하는 그 사람의 영혼은 삶의 본질, 그 밑바닥에 들어간 사람의 그것입니다. 부르짖는다, 여호와께 간구한다고 하는 말을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우리 삶의 심층에 있는 하나님의 오묘한 그 통치 그런 것들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기도인 거죠, 그렇지 않은 기도는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라기보다도 자기푸념, 신세한탄, 자기 원하는 것 달라는 정도, 그게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도 있어요. 그러나 제가 기도의 본질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투정, 이런데 머무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가 뭐냐,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기도의 상투성에서 좀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생명의 깊이에서 만나는 경험들이 없이 우리의 종교적 욕망을 막 끌어내려고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에게 투사시키려고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 혹은 간구하는 기도에서는 좀 모자란다, 생각합니다. 1절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요, 2절에 이 시편기자가 자기의 원통함을 토로한다고 얘기합니다.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아요. 그래서 걱정거리 일을 짊어지게 됬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고 우환, 걱정거리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내 놓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아주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들, 부도를 만났다거나 자녀들이 불치병에 걸려 있다거나 지금 서울 샘터교회 도희 때문에 지금 마음이 다들 그렇습니다.

 

소아 백혈병이라고 하는 게 잘 치료가 되면 좋은데 안 될 경우에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 경우는 정말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 거 말고 우리 오늘 현대인들은 이런 시편기자의 고백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3절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그러니까 그 어려움이 얼마나 진했던지 영, 영혼 똑 같은 말이예요. 그게 상처를 받고 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겁니다. 그럴 수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그것도 너무 살아가는 게 힘들면 어려운 일이 반복되고 하면 흔들릴 수도 있고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 인격도 흔들리게 되고, 그렇지요. 내 영이 상할 정도로 어려운 일을 많이 이 사람이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하잖아요?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 길을 아셨다, 정말 어려운 일에 빠져 살아가는 자기의 삶의 길을 여호와께서 알고 계셨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표현들은 성경에 가끔 나와요,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성경은 나보다 성령이 나를 더 아시는 분이다 그렇게 얘기하잖습니까, 그걸 이해하시겠어요? 내가 나를 잘 모릅니다. 사실은 사람이 사람을 잘 모르는 것 아시죠?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뭐냐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어요, 인간의 퍼스낼리티가 뭔지도 사실은 모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다중인격 이런 거 얘기하잖습니까, 아직 인간의 본질이 뭔지 아직 드러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계속 그런 게 연구가 되어가고 있고요, 그런 근원적인 문제만 아니라 작은 부분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조그만 부분조차도 모르는데요? 성령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그런 말씀도 있고요, 지금 여기 본문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이 나를 아셨다, 혹은 나의 길을 아셨다, 이런 고백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가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 나와 있는 것들은 대개 비유적인 거고요, 메타포이기도 하고, 어떤 은유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 시적인 표현들이예요. 하나님이 나를 아셨다, 나의 길을 아셨다,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건데요, 거기서 여러분들이 한 번 더 질문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 혹은 나의 길을 아셨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 사람이요, 기도 많이 하게 되면 알게 되나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도 질문해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깊이 안다고 하는 것을 내가 얼마나 경험하고 사는가하는 거지요. 이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을걸요? 그러려니 하고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아, 일이 잘 되더라, 기도하니까 응답받고 잘 되더라, 나의 뜻대로 이뤄지면 응답 받았다고 보통 사람들이 얘기 하는데요? 사실은 엄격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들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응답 받았다, 안 받았다 하는 것도 너무 우리 기준으로 생각할 건 없어요. 나를 아셨다, 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알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아, 그건 제가 아직 설명할 준비가 사실은 되지 못했습니다. 이 문장 하나만 갖고도 많을 걸 생각해야 되는데요? 그냥 부분적으로 아직 부족하지만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삶이 이해되는 것, 이해가 되,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 여러분들이 받아드리시면 됩니다. 맞는 얘기인가요? 또 전달이 됬나요? 이걸 조금 더 설명하면 내가 몰랐던 내 삶의 혹은 내 생명의 깊이가 자꾸만 열리는 경험인 거예요.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요, 일단 알아야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신앙은 신앙공부가 최선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삶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어떻게 무죄한 자들이 받는 고난에 대해서 고민했는지, 그리고 시간의 신비 앞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려고 했는지 이런 것들을 깊이 공부하고 알아 가면 그럼, 이제 내 삶이 이해되는 거고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그 신앙고백이 말하려고 하는 그 신앙의 신비, 어떤 차원 그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요? 제가 조금 설명이 부족했지만 아쉽기는 합니다. 언제 한 번 기회가 되면 좀 본격적으로 문제를 짚어 볼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고 하는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는 거지요. 그걸 오해 할 수도 많이 있거든요? 사이비 이단들도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큰 소리 얼마나 많이 칩니까, 예, 생각을 많이 해야 할 부분입니다. 내 길을 아셨다고 해요. 참 이런 상태에 들어간다면 자유롭겠지요? 불안하지 않겠지요, 4절에 보면 이 사람의 상태가 또 얼마나 어려운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오른 쪽을 살펴보는데 아는 이도 없고, 없다는 게 세 번이나 반복되죠? 히브리어로 없다고 얘기 한 건지 아니면 단어는 하나인데 이렇게 세 번 우리가 번역한 건지 제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는 이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영혼을 돌봐주는 이도 없다, 아무도 없어요. 오른쪽은 보통 유대인들의 생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도신경 있지 않습니까, 그건 바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로, 영적인 권위로 예수님이 생명의 세계로 올라 가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오른 쪽에, 도와 줄 사람을 찾을 수 있는데 아무도 없는 거지요. 3절과 4절이 좀 대비됩니다. 3절 후 반절은 빼 놓고 하는 이야기예요. 3절 전반전에 나의 길을 아시는 하나님이 한 쪽에 계세요. 그런데 4절에 보면 아무도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이 없어요. 요 사이에 있는 거지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있고, 다른 한 쪽으로는 인간적 차원에서 절대고독에 있습니다. 이걸 사람들은 못 견뎌합니다. 절대 고독은 일단 못 견뎌 합니다. 사람들이 없으면 힘들어 합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예요. 이게 사람과의 관계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교회공동체안의 이 모임에서 영적인 Koinonia(Kοινωνία)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기 혼자 하나님께 가는 건 아니예요. 그러나 또 사람들과만 더불어 있으려고하면 이건 또 문제인거예요. 벗어나야 됩니다. 제가 보기엔 아주 어려운 상황에 빠졌지만 그러나 아주 그 영혼이 투명할 수 밖 에 없는 그런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거예요. 외로울수록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아까 서론에 말씀 드린 것 하고 연관되는 건데요, 외로울수록 영혼이 파괴되는 사람이 있고, 정말 외로워서 못 견디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승화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영성가라고 할 수 있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5절입니다. 다시 부르짖는다고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얘기합니다.

 

부르짖는다, 1절에서도 그렇고 5절에서도 부르짖는다고 그랬습니다. 이건 늘 그렇게 생각하세요. 고함친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깊숙이 들어간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높이보다는 깊이에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납니다. 옳습니다. 이게 그냥 문학적으로, 수사적으로 한 거예요.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지요. 높음은 깊음 이예요. 그 부르짖는다고 하는 그런 표현들이 나오면 이건 일상적인 그런 대화가 아니라 모든 주변과의 대화를 끊고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단독자로서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의 자세, 기도구나 그리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이게 필요한데요,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다른 사람한테 하소연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얘기하는 거예요. 그게 부르짖는 거예요. 말하기를 나의 피난처이시요, 피난처는 4절에도 나왔지요? 피난처가 사람에게서는 없어, 오른 쪽에는 없어, 오른편에는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피난처다, 여기저기 찾을 생각하지마라, 하나님이 피난처다, 그 얘기죠, 참 놀라운 표현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저기서 자꾸만 이것저것 찾는다고 많이 노력하지 않습니까, 생존욕망들도 사실은 다 피난처를 찾는 거고요, 저금액수와 연금 이런 것들이 많이 있어야 마음이 편한 것 아니겠습니까, 복지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안전장치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데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피난처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그게 우리를 온전하게 지켜주지는 못한다고 하는 것, 명백한 사실이죠, 예, 그건 그것대로 사시면 됩니다. 그건 세상 상식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고요, 하나님이 곧 피난처라고 하는 사실, 이 영적인 사실 안으로 일단 우리가 들어가야 됩니다. 이걸 경험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경험이 다 있으시리라고 봐요, 그러니까 그런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경우와 형편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두려울 게 없는 거지요. 없을 수 밖 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이미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어디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없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위대한, 그 영성가 신학자들의 말들은 그게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오랫동안에 성경과 신학과 세계를 뚫어 보고 하는 이야기예요.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만이 피난처라고 하는 사실을 더 넓히고 그건 확실하게 들어가는 삶의 구도적인 과정,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게 쉽게 주워지지는 않습니다. 피난처이고, 분깃이라고 하는 것도 비슷하니까요, 넘어가겠습니다. 예, 6절, 주님이 피난처라고 하는 것을 5절에 전제하고요, 여기 또 부르짖는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군요. 예, 부르짖는다고 하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1절에도 나왔고, 5절에도 나왔고, 6절에도 나오고요, 다시 부르짖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비천하다, 이게 어떤 뜻일까요?

 

지금 형편이 매우 어려워졌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절대자 앞에서 인간이 고백할 수 밖 에 없는 그러한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양쪽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예, 그 비참하다고 하는 사실하고,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너무 강해서 자기 약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이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겁니다. 제가 너무 설교조로 말씀 드리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 부분을 이렇게 코멘트 할 수 있습니다. 비천과 약함, 6절이 이야기 하는 대로 이것은 기도의 원동력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 높은 것, 비천과 반대된 너무 높아, 여러 가지로, 그게 불편해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너무 강해, 이런 것들도 무조건 좋은 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비천과 약함은 이것도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양면성이 있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파괴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나 신앙적으로라고 한다면 그 바른 길로 간다고 한다면 기도의 원동력이다, 기도의 원동력, 이거 설교제목으로 좋지요?

 

기도의 원동력, 이건 비천과 약함, 이런 것들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 거죠, 이 시편기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탄원기도 드리는 것은 그냥 자기의 신세를 어쩔 수 없어서 그 분에게 늘어놓고 들어 달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아룀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이미 수납되었다고 하는 경험에서 나온 고백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동시사건 이예요. 구하면서 이미 이루어진 거예요. 그게 같이 경험되어야 되요. 그러니까 이미 이뤄진 거예요.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사건들은 다 응답입니다. 우리 눈에 그렇게 안 보이는 것은 인식이 부족해서 그런 거죠, 이미 우리기도 안에 하나님의 응답, 수납은 다 이루어진거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우리는 불안한 거지요. 그 영적인 상태로 들어가지 못하니까 불안한 겁니다. 마지막 7절 입니다.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왜 그랬을까요?

 

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는 간구인데요, 이 사람이 어떤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있는 걸까요? 바울도 옥에 여러 번 갇혔으니까요,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시편기자의 모든 상황을 다 아는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아는 정도 안에서 우리가 따라 가면 됩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고, 또 하나는 자기 억압적인 상황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끝 부분에 나오는 문장,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요거는요, 제가 본 주석의 설명에 따르면 성전에서 드리는 감사의 제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함께 쭉 둘러서서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특별히 이건 일반 어떤 희생제사 그 공적인 제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감사 제사를 드리는 그런 사적인 제사 일겁니다. 그럼 여기 동료들 가족들 같이 모여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그런 제사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고 합니다. 7절이 이걸 얘기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감사제사를 드리는 거지요? 그래서 그런 제사 드릴 때 의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그런 백성들이 함께 한다 그 얘기입니다.

 

예, 1절에서 7절까지 우리가 쭉 봤는데요, 어떻습니까, 전체적으로요, 탄원에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나잖아요? 예, 늘 기계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오늘 여기 142편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예, 탄원으로부터 감사로 나아가는 이 사람의 영적인 순례길이라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절망적인 그러한 상황이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다. 실제로 삶의 상황이 좋아 질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그래도 그게 가능합니다. 오늘 제목이 “부르짖는 기도”라고 했는데요, 부르짖는 기도의 본질이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탄원으로부터 감사로,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실제적으로 모든 일이 다 풀렸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영적으로 더 승화되고 어른이 되는 거지요. 예, 아주 오래 전, 2500여 년쯤 전 한 우리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 빠졌던 팔레스틴의 어떤 유대인이 하나님 앞에 드린 탄원기도 속에 있는 그런 귀한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 좋은 계절에 수요일 저녁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 시간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은 모르나 지나가면 알 수 있듯이 그러나 지나가기 전에 매 순간 순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더욱 성숙하고 깊어 지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탄원 할 수 밖 에 없었던 어떤 한 시인의 음성을 그 영혼의 깊이에서 듣습니다. 우리의 삶도 탄원적인 삶이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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