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3편 강해-참회와 탄원

 

시편 143편, 1절에서 12절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다시 여성분, 남성분,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여성분들 먼저 읽으십시오.

 

〚다윗의 시〛

1.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2.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3.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4.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5.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6.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7.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8.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9.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10.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11.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12.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아멘! 예, 우리가 매주 수요일마다 한 번씩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작년 1월부터 했으니까요, 1년 10개월 가까이 됩니다. 시편이 11월 말까지 가면 다 끝나겠고요, 성서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공부를 하게 되겠습니다. 당분간은, 11월 말까지는 시편을 공부합니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마는 꼭 가르친다는 입장에 있는 건 아니고요, 저 스스로 흔한 표현이지만 배운다는 생각으로 이 말씀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시간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계속 될까요? 좀 세월이 가면 죽을 사람은 죽고 나이 들 사람은 들고, 이런 모임이 여기서 계속하지 않고 또 다른 데 옮길 수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영원하지 않은 거고요, 어떤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아쉬움이 있어서 갈급한데 이것을 우리가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 드려야 되고요, 그만큼 우리의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각 순간이 다 소중하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수요일마다 이러한 공부하는 이러한 시간들이 당장 돈벌이가 된다거나 당장 우리의 신앙적인, 신학적인 지식이 갑자기 많아진다거나 그렇지는 않은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정말 한 걸음씩이요, 또 바느질하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면 누비옷을 만들 때 한 땀 한 땀 따는 것 처럼요, 한 땀 따는 것 거의 표시도 안 나잖아요? 그런데 그게 하다보면 이불 한 채가 되기도 하고 옷 한 벌도 됩니다. 우리 신앙의 어떤 옷을 짓는데 한 땀을 따는 정도의 시간이 수요일 저녁입니다. 귀중한 시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예, 오늘 143편입니다. 성서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143편은 참회시로 분류가 됩니다. 시편에 7개의 참회시가 있다고 그래요. 우리가 앞부분에 하면서 얘기한 겁니다. 그 중에 하나이고 이 143편이 마지막 참회시 입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다른 참회시하고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참회의 내용도 있지만 탄원이 더 많이 들어가요,

 

그래서 이것을 탄원시로 분류해도 크게 잘못된 건 아닙니다. 초기그리스도교회가 이것을 참회시로 분류를 했어요. 그게 전통입니다. 유대교는 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참회시로 분류한 건 초기그리스도교예요. 지금까지 계속 내려오고 있습니다. 참회지만 탄원이 들어간 거예요. 참회와 탄원은, 그 내용은 아시지요? 낱말 뜻을 제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참회는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는 거고요, 탄원은 어떤 것을 하소연하고 그리고 강렬하게 어떤 걸 요구하는 그런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회와 탄원은 서로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참회하는 영혼으로, 자기 죄를 자복하는 영혼으로 탄원할 수 있고요, 그 참회하는 영혼이 아니라면 그럼 탄원의 깊이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또 거꾸로 상호적인 건데 탄원의 깊이로 들어가게 되면 참회가 나올 수 밖 에 없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연결이 될까요?

 

제가 그렇게 한 번 생각해 본 겁니다. 이 143편이 원래는 참회의 기도로 분류되어 있는데, 탄원의 요소도 많이 있어서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그런 시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왜 같이 들어 있을까, 제가 조금 정리를 한 거죠, 참회와 탄원이 서로 연결 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탄원은 내가 억울한 일 당했다, 그렇게 하소연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순전히 원망으로만 가지 않고 어떤 그런 차원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잘못도 눈에 보이는 거죠, 자복하는 심정으로만이 우리는 나의 억울한 일을 하나님에게 하소연 드릴 수 있다, 그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오늘 이 제목이 “참회와 탄원”입니다. 참회와 탄원 이예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눠 봤습니다. 첫 단락은 1절에서 4절입니다.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 소제목을 잡았습니다. 시편기자가 1절에서 아주 간단한 기원으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여호와께 기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 가지로 문장이 나와요,

 

하나는 내 기도를 들으시며 두 번째는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세 번째는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세 가지지요? 들으시고,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 하소서,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각각 흔하게 접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세 번째 기원이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만한 내용입니다.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무조건 응답을 바라는 게 아니네요.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이렇게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잣대가 아닌 거죠, 주의 진실과 의가 드러나기를 원하는 거예요. 자기를 도와 달라고 하는 마음은 있는 거죠, 왜 사람이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특별히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만난 상태이니까요. 간구하고 기원하고 탄원하는 것은 다 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것을 무조건 이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잖아요, 주의 진실과 진리죠, 주의 참된 것하고 그리고 의로움으로 응답해 달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의 이 기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 아, 그렇구나 배울만하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요? 이러한 기도의 깊이로 들어가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기의 문제가 앞을 다 가리는 거예요. 그래서 말로는 겉으로는 하나님 뜻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그 영혼은 자기의 갈망으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래요. 이 시편기자는 자기 갈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대로요, 사람은 비슷합니다. 그게 다 있지만 하나님의 진실과 의, 이쪽을 향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영적인 촉수를 예민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절도 기원이죠, 이게 약간 이해하기 까다롭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와요, 이렇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이건 기원하는 거잖아요? 나 좀 봐 주십시오. 하는 거예요.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눈을 한 번 감아 주십시오. 그런 뜻인데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 얘기하는 겁니다. 예, 그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실이 내가 심판을 면해야 될 이유가 될까요? 또는 이런 뜻은 아닐런지요? 잘 못한 것, 불의한 것, 이런 것들을 다 일일이 하나님께서 다 심판하신다면 결국 심판을 면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하여튼 그것은 제가 딱 끊어서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시편 기자가 어떤 뜻으로 이렇게 두 문장을 연결했을까요? 여러분들이 각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렇다고 하고 2절에서 시편기자가 분명한 사실을 보고 있네요. 의로운 인생이 없다고 하는 것은 불의하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의의 보편성을 보고 있어요. 보편성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예, 불의의 보편성, 이런 것을 시편기자가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탄원기도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탄원을 다시 말씀 드리지만 억울한 일을 자꾸 호소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불의하다고 하다는 것, 그러니까 참회와 더불어서 탄원을 드릴 수 밖 에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3절과 4절에 이 시인의 영적인 상태가 정확하게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핍박하며 그냥 나를 핍박 하며 라고 하지 않고 내 영혼을 핍박하며 라고 했어요.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자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내 영혼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요, 아니면 더 생명의 깊이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 영혼이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핍박이 하도 심하니까 그 다음에 표현에 나오는 그런 말처럼 됩니다.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더 어려운 형편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해서 4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심령이 상한다고 해요, 예, 이게 무슨 뜻일까요? 심령이 속에서 상한다, 억울한 심정일까요? 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다고 얘기합니다. 그 만큼 자기가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속상하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마 그런 쪽 보다는 자기의 상황자체가 정말 어렵게 되니까 이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게 아니냐, 그런 자책감에 떨어질 수도 있고요, 하여튼 그러한 자기를 굉장히 학대한다고 할까요? 자괴한다고 할까요?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겁니다. 내가 그냥 억울한 일 당해서 되나, 내가 싸워서 해결해야지 그런 게 막 솟아나면 마음이 상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안 되는 거예요. 자기가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영적인 열등감이라고 할까요? 하여튼 그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목을 상한심령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너무 사람이 교만해도 안 되는데 상한 심령에 빠진 것도 또 영적으로 좋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이 사람은 아주 어려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아무도 도와 줄 수 없는 그러한 상태죠, 옆에서 몇 사람의 달콤한 위로의 말로 사실은 그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두 번째 단락으로 제가 말씀 드릴 5절과 6절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고요, 거기를 가고 있습니다. 주를 기억한 거죠, 멋진 표현 이예요. 그 심령이 상한 이 시인이 살길은 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그 옛날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것이고요,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그랬어요. 거기서 행하시는 것하고 주님하고는 똑 같습니다. 주, 주는 하나님이죠, 주님의 행하심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는 똑 같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를 읊조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말하고 똑 같습니다.

 

예, 5절에 나와 있는 몇 가지 문장들이 같은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는 옛날을 기억하고 두 번째는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고, 세 번째는 주의 행하신 일을 생각하고 그건 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그런 뜻입니다. 이런 말들도 여러분들이 상투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냥 이 세상살이가 불안하고 재미없으니까 도피한다, 현실도피 식으로 어디 빠져든다,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이건요, 그 사이가 참 미묘해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게요, 그 성서신앙이라고 하는 게 그렇습니다. 자칫하면 그게 현실도피 그래 갖고 결국은 자기개인도 그렇고 공동체에서도 그렇고, 창조적인 일은 전혀 있을 수 없고요, 아주 생명이 취약해지는 아주 병약해지는 그러한 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 아니예요. 기독교 신앙은 전혀 그럴 수 없습니다. 성서 신앙은 당연히 그럴 수 없어요.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서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얘기하면 되겠네요.

 

염세주의는 전혀 아닙니다. 이건 그런 것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를 향하는 거예요. 오히려 생명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거죠, 생명의 근원으로 아주 피상적이고 추상적이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그냥 지나가는 것들 속에 아주 분분했던 우리의 영혼이 중심으로, 어떤 생명의 근원으로 나가는 게 바로 주를 기억하는 겁니다. 주의 행위를 기억하는 겁니다. 주를 기억한다, 아니면 주의 행위를 생각한다는 말이 조금 거리가 있게 느껴지시면 그 주를 생명, 혹은 생명의 능력이라고 바꿔놓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게 정말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많이 먹고,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우리의 생명이 확보된다면 정말 그건 간단한 거죠, 그런데 그렇지 않잖습니까, 그걸로 참된 만족이 안 되지 않습니까, 참된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은 생명의 완성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세요.

 

주를 생각한다, 좀 멀게 느껴져요? 막연합니까? 그게 생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요, 그것도 여전히 관념적으로 생각이 된다면 참된 만족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두루두루 생각해서 그 상태가 뭔지를 정확하게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기독교 신앙이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자기도 모르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찬송하고 살아가니까 그런가, 그런 정도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오래 다녀도요, 딱 만나서 물어보면 거의 자기가 무슨 말 해야 될지 몰라요. 구원이 뭐냐 얘기하더라도 그것을 사실 말 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 등등 종말에 오게 되면 휴거 받는다고 얘기하잖습니까, 휴거가 뭐냐, 이런 것들도 사실은 생각을 안 해요. 아니면 만화 같이 생각하든지 구름타고 올라간다,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구름 타고 올라가는 것, 그런 표현이 있긴 있지만 휴거가 그걸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 성서신앙을 그 중심을 바로 잡아나가도록 하는 것 실질적으로 그걸 이해하는 훈련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렇게 안 되면 우리 입에서 종교적인 언어가 막 쏟아지긴 하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개인기도 정말 많이 하는데 아주 막 나오지 않습니까, 굉장히 허황한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시라는 거예요. 주, 하나님, 좀 멀게 느껴지냐, 그러면 생명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것도 여전히 관념적인 것으로 생각되면 영적인 만족을 우리가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보시면 되죠, 우리가, 그래 교회 다니지 않아도 영적으로 만족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입니다. 자기착각인 거예요. 사람은 얼마든지 착각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식, 뭔가요, 증권사, 맨 날 아침부터 가서 문 4시에 닫나요? 그 때까지 신나 가지고 살 맛 난다, 그 순간은 그렇게 될 수 있겠지요, 그건 착각이지 않습니까, 생명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어떤 구원사건, 그게 하나의 정답 이예요. 명제예요.

 

거기서 우리가 얻는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이 어떻게 주변의 신앙의 내용과 더불어서 우리 신앙의 토대가 되느냐, 그 부분들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들이 자신 있게 생각하셔도 되요. 이건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으니까 도피하는 식으로 종교적 위로를 받으려고 기독교가 시작한 게 아닙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하고 정면대결하고요, 철학, 과학, 사상, 이런 것들하고 치열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음 편안하게 생각하시고, 이게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시면서 그 내용의 현실들을 Reality 라고 얘기하거든요? 신앙의 Reality를 여러분들이 찾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건 몇 번 제 설명을 들어서 해결되는 건 아니예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예, 여기서 기억한다는 말을 반복하잖습니까, 신앙은 기억 이예요. 기억, 참 놀랍지요. 성서기자들의 말들이 이게 그냥 가벼운 게 아닙니다. 인간과 세계와 역사와 시간과 모든 존재하는 것들, 허무 이런 걸 다 뚫어 본 사람들의 고백인 거예요.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에 보면 기억하라, 기억하라, 많이 나옵니다.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성찬식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이예요. 왜 중요 하냐, 우리 영혼이 기억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기억함으로 우리 영혼이 거기에 공명하는 거예요. 예수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사건에 우리가 공명하는 거죠, 예, 5절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올라오는 겁니다. 6절에서 그것을 다시 한 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요.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놀라운 기억이죠? 예, 하나님이 행하신 출애굽과 등등 많은 행하신 그 사건들을 기억하고 그래서 거기서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고요. 주를 향해서 손을 펴고요. 손을 편다는 것은 그를 향해서 간다는 뜻입니다. 문학적인 표현이 나오네요.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마른 땅은 물을 흡수하잖아요? 주를 사모한다.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얼까요? 도대체가, 또 다시 질문합니다.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와요.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교회 열심히 나온다고 하는 것, 그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뭐, 자기 책임만 맡아도 열심히 나올 수 있어요. 그건 인격으로 할 수 있는 문제고요. 이건 다른 문제죠, 이 얘기 또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아까 말한 것으로 다시 보충하겠어요.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한다, 얘기할 때 주를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내가 영적인 깊이에서의 만족할 수 있는 어떤 그 생명의 근원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가 없는가하는 거죠, 갖기 쉽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이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에요. 맨 날 우리 눈 뜨자마자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고 우리를 재미있게 만들기도 하고 이모저모로 우리를 건드리잖아요, TV로부터 시작해서요, 돈 벌어야 되는 문제와 인간관계와 그런 것들이 예민하게 주변에서 우리를 심심하니까 누가 건드리는 것처럼 생명의 중심, 이것 영적으로 깨어 있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습니다. 현대 올수록 더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인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가, 이걸 읽을 수 있네요. 그리고 또 5절과 6절을 조금 더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과연 내가 이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영적인 상태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 말이지요. 이래야 행복하거든요, 이래야 정말 영적인 만족으로 조금이라도 가게 되거든요, 세 번째 단락에서 이 시인은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탄원을 드립니다. 앞에서는 참회와 자기 영적인 태도를 이야기 했다면 세 번째에서 탄원하는 거죠, 7절에서 12절입니다. 두 단락으로 이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은 7절에서 9절이고요, 두 번째 단락은 10절에서 12절입니다. 일부러 나눌 필요는 없지만 하여튼 조금 차이가 있어요. 7절에 이 시편기자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앞에 1절에서도 기원을 했는데, 7절에서 좀 더 많은 내용으로 기원을 하는 거예요.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피곤하다,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그러니까 피곤한 영혼에는 여호와만이 응답할 수 있거든요, 그게 어떤 상태인지는 아시겠죠, 자꾸만 찾아서 되지 않습니다. 아시지요? 여호와의 응답으로만 우리 지친 영혼이 힘을 얻습니다. 그런 표현은 사실은 다른데도 많네요. 또 이어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합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러니까 두 가지가 거기 나오죠? 자기 영혼이 피곤하다, 내게 응답해 주소서 내가 정말 두렵다, 무덤에 내려갈까 두렵다, 그러니 얼굴을 숨기지 마십시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시편기자의 태도가 어떤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간절하지요? 그러나 불쌍하게 생각은 안 들지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지금 이 사람은 자기 삶을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이랬으면 좋겠어요. 8절에 비슷한 기원입니다. 자기 영혼을 주께 드리겠다고 그렇게 대담하게 이야기를 하는 군요.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그리고 9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기원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이런 것들은 탄원이죠,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그러니까 원수들에게서 피할 수 있는 길은 주님께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10절에서 12절입니다. 10절에서 12절, 여기도 기원 이예요. 시편기자의 생각과 태도가 귀합니다. 기원하고 무엇을 원하고 탄원 이런 것 들을 드리는데 자기 뜻을 무조건 관철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오히려 주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것 그것입니다. 행하려고 하는 것, 10절에 그렇게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라는 거요, 그러니까 주의 뜻에 행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왜 자기가 힘들어서 좀 피한다, 힘들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왜 주의 일을 행하게 해 달라고 하느냐, 이어서 이미 설명이 되는 거예요.

 

주의 영, 주의 영은 선 하시니까요. 주의 일을 하는 게 결과가 좋은 거예요. 이건 당연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는 할 것 없어요. 주의 뜻을 따라서 행하게 하소서 그게 선한 것이고 그게 자기를 올바른 대로 이끌어 주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지극한 지를 우리가 알 수 있겠죠. 우리는 우리가 계속 머리로 판단하잖아요? 이 세상살이는 그렇게 합니다. 친구를 사귈 때도 이해타산이 많고 사업을 할 때도 이것저것 많이 살피잖아요? 그런데 이 시편기자는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뜻을 알고 행하게 해 달라, 아주 단순해요.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이러한 상태까지 들어가 있을까요? 이제 그런 걸로 우리가 배워야 되는데요? 그런데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이게 열광주의자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예요.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사이비 이단들이 더 열심히죠,

 

이것저것 앞 뒤 재지 않고 무조건 자기 교주 따라서 하는 것 있잖습니까, 성서신앙은 그건 아니거든요? 이건 자기에게 불행이 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결국 선하다고 하는 그 인식, 그 판단에 도달한 거예요. 그 뒤로 여호와가 어떠신 분이냐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11절에 그렇게 이야기하네요. 그걸 기대하면서 그렇게 기도하는 거지요. 그러신 분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기도하는 겁니다. 10절과도 비슷한 차원의 이야기예요. 주의 이름을 위하여, 10절에서는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그랬지요? 주의 뜻이 중요하다고 그랬지요? 그게 결국 자기에게 좋은 일이라고 하는 걸 알고 있지요? 11절에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주의 뜻, 주의 이름, 이런 것들 속에 들어가는 게 바로 자기 살길이다, 그걸 이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기자의 기원은 결국은 자기가 판단해서 옳다고 하는 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그러한 욕망이 아니라 주의 뜻, 주의 이름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도 자칫하면 제 강의안에 썼습니다마는 아전인수로 떨어 질수도 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하죠, 이건 하나님 뜻이야, 해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막 하잖습니까, 과연 그게 하나님 뜻인지 아닌지는 정말 생각을 많이 해 봐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아전인수로 많이 해석될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그렇게 풀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늘 위태위태합니다. 이게 비슷하게 보여요. 그게 자칫하면 열광주의 그리고 사이비라고 할까, 그런 위험성도 많이 있고요, 동시에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집중하는 참된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선을 긋기가 힘든 거예요. 거의 불가능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거든요? 거기 사이비 예언자들하고 참된 예언자들하고 차이가 겉으로 볼 때 없었어요. 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다 얘기했고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다 진정성이 있었어요. 그 사이비 예언자들도 신탁을 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거짓말로 한 게 아니예요. 그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결국은 완전히 정 반대인거지요. 그러한 부분이 어려워서 대개는 신앙이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약간 뒤로 물러서 있습니다. 그게 좀 편하니까요. 예, 그러면 편하긴 한데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이상한대로 떨어지는 위험성이 없어서 조금 안전하기는 한데 신앙의 깊이를 맛보지 못하겠지요. 예, 12절 마지막 절요, 여기 좀 노골적으로 원수 박멸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여기 주의 뜻, 주의 이름, 주의 의, 10절, 12절에 반복해서 그런 표현이 나오지요, 주의 무엇, 주의 무엇, 주의 무엇 하다가 12절에 주의 인자가 나와요. 다 연결되는 문장 같습니다.

 

그런데 10절과 11절에서는 주의 의, 주의 이름으로 뜻대로 행하기를 바란다,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다가 12절에서는 표현이 굉장히 사나워져요.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예, 그러니까 원수들을 끊어 내는 것,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요. 이것도 좀 위험한 발언이긴 합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12절 이런 표현을 시편기자의 한계다, 그렇게 말을 하네요. 구약적인 한계가 있긴 있습니다. 구약은 늘 거의 유대인 중심으로 생각을 해 왔고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모든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했고요, 기본적으로 그런 것이 깔려 있어요.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12절의 시편기자의 이런 말도 그런 한계로 봐야 할지 제가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양쪽 다 있을 거예요. 한계가 있는 건 분명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누구나 억울한 일 당하면 원수 갚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보통 힘든 게 아니라 정말 결정적으로 힘들 때 그냥 지나가는데 누가 몽둥이로 치면 소리치고 대항하는 것과 비슷해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누가 몽둥이로 치는데 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아주 자동 발생적으로 나오는 건데, 이 사람도 아마 그러한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찾기가 개인과 개인으로 원수 갚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드러나는 어떠한 상태 그것을 엿보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43편, 참회와 탄원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공부했습니다. 이 시편기자의 고통스러웠던 삶과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찾는 모습들을 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나태한데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마른 땅이 주를 갈급하듯이 갈급 한다고 하는 시편기자의 표현처럼 생명의 주이며 생명의 능력이신 그리고 마지막 때에 모든 생명을 완성하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이 온전히 집중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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