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4편 강해-여호와는 반석이시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말씀은 시편 144편입니다. 1절에서 15절까지 있어요. 이 말씀을 같이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제가 홀수 되는 구절을 읽고, 여러분들이 짝 수 되는 구절 읽고요, 마지막 구절은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1.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2.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3.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4.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5.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

6.번개를 번쩍이사 원수들을 흩으시며 주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무찌르소서

7.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8.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9.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10.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그의 종 다윗을 그 해하려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

11.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13.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14.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15.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아멘! 요즘 환절기라서 여러분들 감기 걸리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수 년 동안 이 시편을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144편이니까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50편까지 있고요, 지금 계획대로라고 한다면 11월 마지막 수요일에 시편 공부가 다 끝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이 144편은 조금 특이합니다. 모든 시편들이 다 특징이 있는데요, 이건 조금 더 특별합니다. 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시편 144편은 <제왕축제의 시>라고 얘기합니다. 거기 유인물에 보시면 나오죠? 제왕이요, 이건 왕을 가리키는 건데요, 큰 권력이 있는 힘이 있는 그런 왕의 축제의 시라고 합니다. 왕을 높이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마 다윗을 이야기할 거고요. 또 계승한 다윗왕조의 여러 왕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건 북이스라엘이 남 유다의 왕들을 가리키겠죠?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르호보암 시대에 분열 됬어요. 그 전에는 통일이었었고요,

 

그래서 이스라엘 왕조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통일왕조와 분열왕조, 혹은 통일왕국과 분열왕국입니다. 통일왕국은 누구누구인지 여러분들 기억하시지요? 사울부터 시작해서 사울, 다윗, 솔로몬까지입니다. 이 세 명의 왕이 있을 때만 나라가 하나였고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대에 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보통 왕정이라고 하면 세습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부터 세습이 되는 거지 그 이전에 있었던 사울왕은 요나단이 아들이었었는데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런 건 조금 더 역사 비평적으로 보면 이 사울과 다윗이 권력투쟁을 했었던 거 같아요. 성경에는 아름답게 다윗이 굉장히 하나님의 뜻대로 해 보려고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사울과 다윗이 권력 투쟁을 했던 거 같고요. 결국 거기서 다윗이 이겼고 사울이 져서 사울은 왕이 한 대로 끝났습니다. 그 뒤에 다윗 왕조가 계속 뒤를 이었습니다. 그 정통성이 남 유다에 내려왔어요.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이렇게 까지만 내려 왔습니다. 쭉 내려 왔습니다. 여기서 제왕이라고 할 때는 다윗, 또는 다윗왕조를 가리키는 거고요, 그러니까 왕들을 높이는 축제 때 부르는 노래, 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아시겠습니다마는 고대 왕정국가에서는 그 왕하고 국민들 백성들이 일체였습니다. 그건 아주 근대까지 내려올 때 그렇지요. 프랑스 왕도 자기가 하나라고 생각을 했고요, 나폴레옹의 혁명을 통해서, 이제 새로운 시대, 왕정이 아니라 민주적인 정치가 유럽에 싹트기 시작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오랫동안 왕과 백성들의 일치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위해서 축제를 열고 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은 주로 남 유다를 주로 가리키는 거예요. 같이 연관해서 생각을 드립니다. 여기 다윗왕조를 말할 때는 남 유다기 때문에 제가 좀 구분했는데 그냥 그대로 왕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왕을 위한 노래라고 하는 것은 그 왕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 유대국가요,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노래예요. 이런 노래들이 사실은 우리 민주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죠, 대통령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개인 정치가일 뿐이지 그 대통령이 국가는 아니잖아요? 그 민주사회에서 새롭게 이해된 국가통치자에 대한 이해거든요, 그러니까 고대사회에서는 왕을 위해서 노래를 하고 축제를 연다고 하는 것은 그 나라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민주사회에서는 맞지 않은 이야기인 겁니다. 요즘도 가끔 독재국가에서는 국가지도자와 국가제도가 일치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조찬기도회 같은 것들이 가끔 있는데 이런 것들도 그런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사회에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이 좀 일어나긴 하죠, 예, 서론적으로 말씀을 드렸고요,

 

오늘 이 144편 전체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다” 이렇게 잡았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뭐라고 그랬지요? 제왕 축제의 시입니다. 이 제목은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을 제가 인용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다, 그래요. 첫 구절부터 그렇게 시작하죠? 144편 1절을 보십시오. 1절과 2절은 간단한 기원문, 찬송, 송영 독솔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든, 시도 그렇고, 산문도 그렇고 들어가는 서론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1절과 2절은 이 시의 서론 격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어떻습니까, 익히 알던 거죠? 많이 들었지요? 시편에는 반석이라고 하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곳곳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 낱말 뜻이야 제가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바위와 같다, 안전하다, 우리를 지키는 토대다, 그 얘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들었기 때문에 좀 상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러지 말고요, 이걸 처음 읽는다는 생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 읽을 때 가장 중요한 하나의 태도라고 할 수 있어요. 너무 똑 같은 일들이 길들여지면 그 시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나의 반석이라고 얘기 합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 할까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가 뭘까요? 제가 설명 드리지 않아도 뻔한 거죠, 이 사람은 다른 데서는 반석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삶의 토대가 없는 거예요. 그건 이것저것 얘기 안 되니까, 뭐, 도피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오해입니다. 우리의 운명, 아니면 우리의 숙명이 우리의 어떤 살아가는 삶의 토대들, 실존 이런 것들을 보면 그게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게 다 허물어지는 거거든요, 우리가 아무리 탄탄하게 우리의 삶의 토대를 쌓는다고 하더라도 보통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은행 예금 잔고가 아무리 많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의 토대는 될 수 없잖습니까, 그걸 여실하게 뚫어보는 사람만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내가 할 일도 많고 다 내가 안전하게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 이건 말장난이 될 수 있습니다. 그걸 뚫어 본 사람에게서 나온 놀라운 신앙고백이고 찬양이고 그렇습니다. 이제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걸 제가 제목으로 삼았어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다” 이것을 나중에라도 좀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144편이 왕의 축제 때 부르는 시라고 그랬습니다. 왕의 업무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적과 싸우는 겁니다.

 

1절에 이미 그렇게 나와요.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런 걸 보면 아, 여호와는 전쟁을 가리켜주는 신? 전쟁의 신? 이런 것처럼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말고도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나와서, 가서 물리쳐라 죽여라 그런 표현도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그 당시에 하나님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어요. 그걸 똑 같이 오늘 받아 드려서 오늘도 우리는 적과 싸워야 된다, 적개심을 갖다가 이렇게 부추기거나 그런 방식으로 이 하나님의 방식을 받아 드리면 오용, 혹은 왜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건 그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나님과의 관계에 필요한 어떤 문학적인, 아니면 그들의 어쩔 수 없이 받아 드릴 수 밖 에 없었던 삶의 현장이었던 겁니다. 그걸 전제하고 이런 말씀들을 읽으셔야 되요. 2절에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 규정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2절에요. 여호와가 누구냐라고 하는 규정이 반복되고 있어요. 여러 가지로 나열되고 있어요. 사랑, 요새, 산성, 건지시는 이, 방패, 이런 것들이죠, 그건 나의 반석이라고 하는 것하고 비슷한 하나님에 대한 성격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1절과 2절은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 혹은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단락에는 3절과 4절에 나오는 건데, 고백입니다. 오늘 전체를 한 번 쭉 틀을 보시죠, 오늘 공부의, 네 단락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말씀 드린 대로 고백이고 세 번째 단락은 5절에서 11절로 간구고요, 네 번째 단락은 12절에서 15절까지로 복을 구하는 것, 축복이라고 제가 그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약간씩 변화되는 내용들을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앞으로 발전되기도 하고요, 또 깊어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고백입니다. 이 제왕축제가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왕을 높이는 거니까 얼마나 재미있었을까요, 그걸 오늘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죠? 지금으로 말하자면 관현악단 백 몇 십 명 되는 대형 관현악단 해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대통령 이 취임식, 장엄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국가를 어떻게 다스리겠고, 꿈도 야무지게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고 이 제왕축제시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렇게 즐겁고 자신감 넘치고 정말 재미있는 그런 순간인데 놀랍게도 당연하게도 인간실존이 어떤 건가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이런 부분들이 유대교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의 뛰어난 점입니다. 시편만이 아니예요. 이게 일반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문헌들이나 종교적인 문헌도 있고, 일반적인 문학도 많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보면 왕을 그냥 높이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 좋은 그런 것만 얘기하는데 우리가 보는 이 유대문헌, 하나님의 말씀인 여기에는 그 인간을 높이지 않아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안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영웅처럼 묘사되고 있긴 있지만 사실은 그 사람 영웅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뭘 이야기하려고 하죠? 그 뒤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하거든요,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고대 여러 종교들은 자연자체를 높입니다. 자연숭배라고 할 수 있어요. 이 구약성경에서 자연 숭배와 같은 것들이 곳곳에 나옵니다. 시편에도 나오고 창세기에도 나오고 그 이외에 예언서등에도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자연자체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그걸 만드신 분에게 주목해라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의 영적인 시각이 유달랐다, 유별났다, 특별났다, 새로웠다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걸 바탕에 두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그 유대역사에서 나오신 거고요,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교를 배제하고는 기독교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 제왕을 축제하는 자리에 그 인간이 어떠냐, 그 왕이 어떠냐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4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헛것 같다고 해요, 우리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하지요?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라고 합니다. 헛것과 그림자 비슷한 표현이네요. 헛것이고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왕을 높이는 그러한 자리에서 왕이 교만하지 않게 하는 그러한 영적시각이죠, 너 그래봤자 왕이지만 헛거다, 그림자와 같다 그 얘기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가 망각하지요. 이게 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작용 하거든요? 아무리 외면하려고 하더라도 외면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기의 즐겁게 업적이라든지 하여튼 자기의 즐거움을 찾아서 굉장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마저도 우리가 지울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점점 어떤 것을 집착하게 되죠, 여러 가지 면에서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방향인데 다른 길이 없으니까 그렇게 될 수 밖 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걸 직면해야 됩니다. 직면이요, 헛것이라고 하는 것, 이건 허무하다 그런 뜻은 아니라는 것은 아시죠?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행위들, 그리고 우리 경험들, 이런 것들이 절대적인 거 아니고요, 다 지나가 버리고요, 무상하고요, 잠정적이고 그렇습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그건 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런 것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더 깊이 생각해야 될 것 같아요. 예, 자기의 어떤 업적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이 부분은 더 유심히 생각하셔야 됩니다. 많이 소유할수록 그리고 많은 사회적인 지위가 있을수록 이 부분을 더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높은 자리가 제공하는 교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걸 아시죠? 사람은 약해서요, 아무리 겸손 하려고 하더라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 자리가 그렇게 교만하게 만듭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래요. 지금 왕을 높이는 자리에서 이런 것을 역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시편기자의 영성을 아시겠죠? 그래야만 교만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저도 말은 하지만 이건 부단한 구도적인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기도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교만으로부터 벗어나긴 정말 힘듭니다. 거의 이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될지 모릅니다. 그런 이유로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사람은 죄의 본질을 가리켜서 뭐라고 한지 아시지요? 휘브리스(ὕβρις)라고 얘기했습니다. 휘브리스요, 이게 헬라어로 교만이라고 하는 뜻이거든요? 그게 원죄다,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하는 죄, 바로 이 교만이다, 이건 벗어나기 힘들다고 하는 거지요. 이 교만이 생명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니까 이게 죄인 거죠, 아시겠지요?

 

죄의 속성이 생명과 단절시켜서 우리와 하여금 생명을 일치를 못하게 하는 어떤 강력한 힘, 이걸 가리켜서 우리는 죄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교만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니까 죄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또 다른 신학자들은 다른 얘기를 했어요. 참고정도로 아시면 되겠습니다. 세 번째 단락입니다. 5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인간의 실존이 뭐냐, 그런 걸 고백한 다음에 정말 왕에게 필요한 것들을 간구하는 거지요. 왕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간구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5절에 그렇게 나와요. 참 성경은 우리가 하나하나 면밀히 뜯어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재미있기도 합니다. 재미도 있어요. 문학적으로도 깊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철학적으로 깊이가 있고요, 신앙적으로도 물론 당연히 그렇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적인 깊이에서 경험한 사람들의 진술이기 때문에 놀랍습니다. 5절에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간구하는 거예요.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하늘을 드리운다, 그게 뭘까요? 가득 채운다는 걸까요? 그 다음에 강림하시며, 하늘에서부터 오신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 6절에 보면 번개를 번쩍이사 원수들을 흩으시며 주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무찌르소서 그렇게 나옵니다. 5절과 6절에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들을 화산폭발, 천둥번개, 이런 걸로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 진짜 이렇게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아닌 거지요. 이 성서가 기록 될 때 그 당시에 세계관이 어떤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그 당시에 문학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거거든요, 그 당시에는 다 이런 방식이었죠, 화산폭발이 왜 이러나는지 그들은 몰랐습니다. 알 수가 있나요? 지질학적인 이해가 하나도 없었고요, 천둥번개, 더더구나 몰랐지요. 비가 왜 오는지도 사실은 물리학적인 현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다 오묘한 거예요.

 

그들의 눈에, 정말 자기들이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켜서 초월적인 것,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초월적인 거요, 화산폭발, 번개 이런 것들이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분의 행위다, 생각했습니다. 그 두 개가 서로 연결이 되는 거지요. 천둥번개, 화산폭발, 이런 것들은 물리적으로 초월적인 거고요. 지금 우리들에게는 안 그렇습니다. 그 당시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근원적인 힘들이 거기 있는 거고요. 그러한 초월적인 것들이 하나님을 초월적인 존재로 이해 할 수 있는 것하고 딱 맞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설명한 거예요.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그렇게 초월적인 능력의 담지자(擔持者)로 묘사한 뒤에 담지자라는 말은 그걸 소유했다, 그런 것을 조금 학문적으로 표현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초월적인 담지자로 묘사한 뒤에 전쟁에서의 승리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걸 바라는 거지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요? 어디서 나와요? 1절에 나와 있듯이 왕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을 하는 거예요. 놀랍게도, 사울왕, 다윗왕 다 장군이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로 장군이고요. 모세 뒤를 이은 여호수아 다 전략가이고 장군이었습니다. 전쟁을 잘 했기 때문에 자기네 민족을 끌고 출애굽하고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고요, 가나안에 있었던 많은 부족들하고 계속 전쟁을 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묘사하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왕이 해야 될 일의 가장 중요한 업무, 그것을 간구합니다. 전쟁의 승리죠, 전쟁의 승리, 지금도 한 나라가 전쟁에서 지면 완전히 쑥대밭이 되지 않습니까, 고대시대에는 이건 말 할 수가 없어요. 전쟁에 졌다하면 모든 국가의 재산은 다 몰수당하고 그리고 노예로 끌려가고, 종으로 끌려가고 여자들은 다 하인으로 끌려가거나, 하여튼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왕이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예, 쭉 그런 이야기를 해요. 11절을 보면 11절의 내용은 7절과 8절의 반복입니다 똑 같은 이야기가 반복이 됬어요. 이건 시편 편집한 어떤 사람이 약간 실수로 배열을 잘 못 한 것 같습니다 성경이 그런 부분이 가끔 나와요. 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속성이 거짓말하는 사람들로 나옵니다. 이방인하면 거짓 이예요. 거짓, 거짓이다, 여기서 거짓이라고 하면 누구를 속였다, 그러한 단순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속이고 하죠, 사람이 거짓말 안하고 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기서는 단순한 거짓말이라기보다도 우상숭배라고 봐야 합니다. 우상은 참된 신이 아니라 거짓신이죠? 참된 생명이 아니라 거짓생명을 약속하는 그런 신이죠?

 

그러니까 그게 궁극적인 거짓말입니다. 생명을 줄 수 없는 자가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얘기되는 것, 그게 우상이고 그런 점에서 거짓을 하는 자들이다.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예, 마지막 단락입니다. 예, 여기에 12절부터 15절까지 되겠습니다. 그냥 축복을 바라는 거지요. 12절부터 이 시 분위기가 달라져요. 앞에서는 전쟁에 승리해야 되겠고, 인간은 헛것이고 그림자 같고, 또 이방은 거짓말하는 자들이고, 우리가 우리 왕이 승리하게 해 주소서, 진지하죠? 그러다가 여기서는 일상의 축복, 아주 평화스러움, 백성들의 평화스러운 일상의 축복으로 내용이 바뀝니다. 그 한 절 한 절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자녀들이 잘 되는 것, 곡식이 풍년이 드는 것, 그리고 14절에서는 평화롭게 이렇게 사는 것, 뭐, 그런 것들입니다. 그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복지상태일 겁니다.

 

이런 건 지금도 우리가 바라지요. 자녀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살지 않습니까, 이건 단지 희망사항이었지 이런 시대가 없었어요.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자체가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상대적으로 좀 낫다, 아니다 그런 차원이지 절대적인, 그리고 모두가 다 그러한 이런 상태로 질적인 높은 수준의 행복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사실 불가능 합니다. 14절 후 반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거기에는 슬피 부르짖음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건 우리가 실수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서도 일어나고요, 그렇습니다.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그렇게 간구하는 건데요,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하는 것은 잘 못은 아닙니다. 그렇게 희망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기도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요.

 

그런 희망의 내용들이 있는 거기에 실현되는 세상을 향해서 나가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면 이런 축복의 기도와 간구 이런 것들은 정말 바람직한 거죠, 나만 그렇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 공동체가 그렇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투쟁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하는 의지가 이 기도에 포함 되어야만 되고요, 그런 점에서 이런 축복의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 오늘 공부를 다 했습니다. 제목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다.” 요 제목만 기억하시죠? 나머지는 뭐, 우리가 시편공부를 하면서 늘 되새겼던 부분들이니까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다. 이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이해하려면 반석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착각하면 이건 말장난이 될 수 있는거예요. 과연 우리가 여호와는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여호와만이 반석이라고 믿고 살 수 있는가, 그러니까 그러한 영적인 도전이 오늘 144편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왕축제의 시 한 편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아주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나온 기도이고 간구이고 고백인 이 시인데 25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필요한 영적인 가르침이었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우리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왕으로 살기를 원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무엇인지 분간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 모든 우리 삶의 토대가 여호와만이 우리 삶의 반석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인정하고 또한 믿고 또 희망합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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