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5편 강해-왕이신 나의 하나님

 

시편 145편, 1절부터 21절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자세로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1.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4.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5.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6.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7.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8.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9.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10.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11.그들이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업적을 일러서

12.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리이다

13.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15.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17.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18.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9.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20.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21.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아멘! 예, 시편 145편 여기에는 익숙한 구절들이 제법 나옵니다. 시편은 전체적으로 서로 통하는 부분들이 서로 있지요. 그래서 읽다보면 아, 어디선가 읽은 건데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145편도 그렇습니다. 여기저기 있었던 내용들이 이렇게 편집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145편은 제의공동체가 의식을 행할 때 불렀던 찬송시라고 합니다. 제의공동체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제사를 드리는 공동체입니다. 제의, 그러니까 제멋대로 모여서 그냥 노래나 부르자 그게 아니라 예전을 통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아주 형식이 갖춰져 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 자리를 생각하시면 되요. 그걸 가리켜서 제의공동체라고 합니다. 바로 제의공동체가 의식을 행할 때, 의식요. 형식을 갖춘 예식이죠, 우리가 지금 주일 날 드리는 예전예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의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게 공동체가 의식 때 부르던 찬송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하고 약간 어긋나는 대목이 1절과 2절, 21절입니다. 여기 보면 주어가 1인칭으로 되어 있어요. 1절도 보십시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공동으로 드리는데 왜 내가라고 했을까, 그건 약간 어긋나기도 하고 2절도 마찬가지로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주어가 1인칭 이예요. 21절도 이건 공동체기도, 공동체찬송입니다. 예, 오늘은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들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전체흐름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설명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물론 이 145편 여기에 표제가 있긴 있어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전체주제이긴 하는데 여러 가지 다른 구절들이 여기 함께 들어와 있어서 일관되게 설명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약간 분산되는 느낌이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하고 중요한 구절을 좀 발췌해서 따라가겠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이게 오늘 공부의 제목으로 제가 잡은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표제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저는 조금 더 편하게 1절 시작하는 부분, 구절을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예요. 왕이신 나의 하나님, 이런 구절들도 익숙하지요. 왕이신 나의 하나님, 이런 복음 찬송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묘사하지요? 왕은 고대인들에게 절대권능을 행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거지요. 왕이 모든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사냐, 죽냐는 그런 절대적인 권한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고대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묘사할 때가 제법 있었습니다. 흔하게 있었습니다. 그런 전통을 이어 받아서 신약에서도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지요. 또 그냥 왕이 아니라 왕 중의 왕,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물론 고대인들이 왕과 예수님에게 이름 붙이는 왕 중의 왕은 이건 차원이 다른 거지요.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생명, 구원문제예요. 생명을 얻냐, 못 얻냐 그런 겁니다.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라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또 신약으로 보면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내용의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간접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왕에 대한 평가지요. 그러니까 세상의 왕은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거지요. 세상에서는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이지만, 그러나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건 제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걸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보통 우리들은 왕, 요즘으로 말하자면 돈이죠, 요즘이야 뭐, 옛날과 같은 왕은 없으니까요. 대통령이라고 해도 몇 년하고 그만두고요. 대학교 총장이라고 하더라도 하다가 말고, 다 그러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그런 왕들은 없는데요,

 

요즘엔 왕이 돈이 되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간섭을 합니다. 그건 사실이죠, 그래서 거기에 많이 속습니다. 그런 것들을 확보하면 생명이 주워지려니 하죠, 그게 아니라는 건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시편기자는 지금 주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하지요. 왕이라고 표현한 다음에 1절에서 다시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건 뭐, 그 구절에 이미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주가 참된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지요.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들었던 구절인데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기도 하고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긴 합니다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여러 가지 온갖 것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고 살거든요. 그게 우리의 한계인데 그걸 넘어서야지요. 우리가 송축할 분은 오직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그리고 지금도 비밀한 방식으로 이 세계,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종말론적 생명에 참석할 수 있도록 약속하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생명을 주신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 분을 송축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 송축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물론 맨 날 교회 나와서 예배드린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건 하나의 형식인거고요, 우리의 어떤 삶의 자세를 하나의 예배로 표현하는 것뿐이고요, 뭘까요? 그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공부를 할 때도 송축은 찬송, 찬양 똑 같은 이야기예요. 주의 이름을 송축한다, 하나님만을 찬양한다, 이게 뭐냐고 하는 것 앞에서도 여러 번 얘기했기 때문에 그만 두겠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만 하고 지나가면 이렇습니다. 우리 운명 전체를 그 분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영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8절입니다. 예, 여기에 여호와의 속성이 네 가지로 표현되어 있어요. 이것도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를 은혜로우신 분으로 표현합니다. 은혜롭다고 하는 거예요. 잘 하는 내용이지요? 은혜, 은혜, 우리 입에 붙어있을 수 있습니다. 붙어 있죠,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 낱말 뜻으로 본다면 선물이거든요? 선물을 받는 것을 은혜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이예요. 우리 모든 것들은 다 선물입니다.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거든요.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빚진 자다, 그런 면에서 빚진 자고 나그네고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예, 그걸 잘 알고 계시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사시지요? 우리의 소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식도 우리 소유가 아니고요. 그 무엇도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래도 사는 게 좀 짜증이 나고 불평하고 속상하고 그럴 때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선물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큰 걸 받거나 작은 걸 받거나 기쁘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기준으로 좋다, 나쁘다,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 비교하게 되고, 짜증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면 그럼 다 똑 같지 않겠습니까? 다 소중하죠, 인간적인 것으로 비유가 될까요?

 

부모와 자식 간에, 아니면 애인사이라고 할까요? 그 애인이 5 천만 원 짜리 다이아 반지를 해 주든지, 아니면 5만 원 짜리 간단한 것을 해 주든지 정말 사랑한다면 다 똑 같은 귀중한 거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삶과 우리의 모든 관계된 것들을 선물을 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은혜로우신 분,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두 번째는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긍휼, 이건 영어로 보면 com-passion 이라고 하거든요? com 더불어서 passion, 아픔을 같이 한다. 어원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같은 마음을 갖게 되는 거죠. 같이 슬퍼하고 같이 나누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정말 우리가 안다면 외롭지 않겠지요. 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좀 힘들긴 하지만 버텨낼 수 있겠지요. 친한 친구가 옆에 있어도 조금 위로가 되는데,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정말 com-passion 마음을 함께 하신다고 하는 걸 안다면 정말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습니다.

 

그걸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건 아닌데 그런데 아주 리얼한 거거든요? 안 보이는 것은 다른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셋째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예, 이건 무슨 뜻일까요? 저는 거기서 두 가지를 나눠서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의 악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이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분인지, 정말 다 박살내고 싶은 일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이런 일이 이렇게 아직까지 그대로 놓아두는가, 그런 걸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인거예요. 우리 스스로 실존적으로 우리 자신의 부패성, 우리의 악, 우리의 교만 이런 것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노하기를 참으시는구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죠, 고백하게 됩니다.

 

네 번째는 인자하심이 크신 분입니다. 인자하심이 크신 분, 예, 인자하심은 너그러운 마음이거든요, 예, 그 분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네 가지 정말 익숙하고 간단한 것 같지만 정말 중요한 거지요. 여기서 한 가지만 잘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의 자세가 크게 달라질 겁니다. 네 가지예요. 은혜, 긍휼, 세 번째는 노하기를 더디함, 네 번째 인자, 이겁니다. 저도 매번 설교하고 글 쓰고 합니다만 왜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살아야 되거든요. 그냥 되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어려운 거예요. 그런 쪽으로 잘해야 되겠다, 생각을 합니다. 가르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실제로 이런 영성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영성 없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예, 세 번째는 13절입니다. 주의 나라는 뭐, 이렇게 나오지요.

 

13절에 보면 두 가지가 있어요. 주의 나라와 주의 통치가 나와요.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고 했습니다. 영원하다고 하는 거나 대대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똑 같은 이야기죠, 주의 나라와 주의 통치도 똑 같은 뜻입니다. 주의, 하나님의 나라는 나라, 우리는 그걸 보통 공간적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건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하셔야 되요. 하나님은 어디 우주 공간에 있는 분이 아니라 통치하는 거로 존재하는 거예요.통치, 힘으로, 그 분의 어떤 능력으로, 아시겠지요? 창조의 능력 이예요. 종말론적 심판의 능력이고요, 꼭 그건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공간적으로 이해하시지 마시라, 통치다, 13절, 아주 정확하게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 영원한 나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주의 나라는 나라라고 하는 이런 표현이요. 어떤 걸까요? 영원한 주의 나라, 그의 대대에 이르는 주의 통치, 이런 것들이요.

 

이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세상나라를 암시하는 겁니다. 다시는 우리가 영원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를 못해요. 사실은요, 지금 여기 시간과 공간 안에 지금과 같은 세계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같이 결합 되서 돌아가고 있거든요. 여기서는 성서가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한하게 계속되는 이것하고는 다른 차원이거든요. 상대적으로 우리가 설명할 수 밖 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유한성인 겁니다. 이 세상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유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말이 또 피조세계가 무의미하다고 하는 뜻은 아니예요. 영원하다고 하는 것하고 유한하다고 하는 것이 대립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완전히 상관없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하고 무능력한 이 세계가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고요, 거기에 어떻게 연결이 되냐, 하는 걸 우리가 잘 따라가야 됩니다. 한 부분만 여기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피조세계가 무의미하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제한적이고 유한한 피조물이지만 여기에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합니다. 예,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이 역사, 우리 삶 안에 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월과 내세가 변증법적으로 연관되는 겁니다. 긴장이 있는 거지요. 그 다음 네 번째는 16절입니다. 예, 이건 특이한 표현 이예요. 하나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고 하는 것을 지금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통치, 이것은 피조물을 지키는 능력입니다. 피조물을 지키는 능력이이요. 그래서 그것을 여기 16절에서 이렇게 설명하네요. 모든 생명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다. 모든 생명의 소원을 만족하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하는 거죠,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궁핍합니다. 부족하고요. 배고프고요. 서로 싸우고요.

 

그리고 생존경쟁, 이 정글의 법칙, 사나운 야수들 포식자들만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인간들도 생존경쟁하고 살지 않습니까, 늘 뭔가 부족하게 느끼지 않습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런 거예요. 그런 것만 보고 살면 늘 여기는 부족한 거죠, 그러나 심층적으로 보면, 그 두 가지가 비교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는 것하고 심층적으로 보는 거예요. 심층적으로 보면 모든 생명체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살아 갈수 있도록 하나님이 사실은 모든 걸 충분하게 준비하셨습니다. 주기도에서 나오지요?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기도를 하는데요, 다음 주 중간쯤에 그<주기도가 무엇인가?> 책이 나올 겁니다. 홍성사에서 어저께인가 다 마치고 인쇄에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주기도가 무엇인가?>에서 거기에 제가 한 번 말씀 드렸지요? 우리가 예배 때 하는“오늘의 기도”그것도, 교회력에 따른 “오늘의 기도”도 부록으로 넣고 해서 나오는데요, 주기도에 그런 대목이 나와요. 작년에 우리가 수련회 때 한 공부였었는데요, 일용할 양식, 성만찬과 그리고 유대인들의 만나 이런 것하고 다 연결되는 겁니다.

 

거기에 오늘 하루의 양식으로 우리들이 만족할 수 있다면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소유나 이런 문제로 싸우지 않는 참된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질 텐데, 하여튼 그런 문제들이 거기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충분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미리 준비를 해야 되니까요, 사실은 이게 현실 이예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오늘 먹을 것만 갖고 만족 하냐, 이건 보통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마는 방향은 그런 거예요. 내일 것까지 너무 일일이 구체적으로 준비해서 살려고 하다보니까, 늘 부족한 거지요. 이것이 바로 죄가 아닐까, 내일 일을 당겨서 염려하는 것, 이것 말이죠,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하다가 늙어서 죽겠지요. 20절, 마지막입니다. 다섯 번째로 우리가 선택한 구절입니다. 여기에 결론이나 마찬가지예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과 악인들, 이렇게 둘로 구분하지요?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어떻게 하시고 악인들은 멸한다,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물론 의인이겠지요? 의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 이게 완전히 구분되는 이원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우리가 늘 자꾸만 이원론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이 있거든요. 그걸 넘어서야 됩니다. 이 구절은 착한 사람만 이렇게 뽑아서 어떻게 하고, 실수 한 사람들 내친다, 그런 뜻이라기보다도 물론 하나님의 심판은 또 심판입니다마는 이걸 이원론적으로 누구를 딱 가른다고 하는 차원이라기보다도 왕이신, 그리고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기 보다도 여호와 하나님께 연결되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그렇게 보호하신다고 하는 것, 그리고 악인을 멸하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을 때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조금 선정적으로. 문학적으로 강한 것으로 표현한 거죠, 하나님과의 연결 이예요.

 

이것을 여러분들이 그러려니 말고 정말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을까요? 기독교에서 원죄를 이야기하는데요,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있는데 그러니까 단절되었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잃었다고 하는 겁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되는데, 이건 기초적인 교리인데요. 이게 그냥 교리가 아니라 정말 인간을 뚫어보는, 역사를 뚫어보는 통찰에서 나온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별로 이런 것들을 신자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보적인 건데 그것을 아주 실질적인 것으로 생각 안한다는 거지요.

 

어떻게 가능 하냐, 그걸 한 두 마디로 어디 끊어서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부분만 이야기 하면 그렇습니다. 영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것, 제가 보기엔 그게 최선입니다. 영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것, 그러니까 한국의 그 소리꾼들요, 소리꾼들, 창을 하는 사람들도 어떤 소리를 보거든요? 그 시각을 얻는 거예요. 시인들도 그런 시각을 얻는 것처럼 말이지요? 보이지는 않는 건데, 그 시각으로 어떤 것을 봅니다. 영적인 시각을 넓혀야 되는데 오늘 여기 강의안 마지막 구절에 썼네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새로운 게 보이듯이 영적인 시각을 확보하고 깊이 있게 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들에게 유지된다, 확보된다,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또 공부해야 하고 그냥 또 공부하는 게 아니라 신학적인 토대를 갖고 공부해야 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뚫어보아야 되고 인문학적인 통찰도 필요하고 그런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시각이 깊어집니다. 그러면 누가 어떤 것을 증명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본인 스스로 하나님의 관계가 어떻게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예,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45편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이심을 저희들이 오늘 시편기자와 더불어서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에게만 은혜, 긍휼이 있음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잡을 수 없는 화살처럼, 혹은 시냇물처럼 빨리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생명의 창조자 이신, 그리고 완성자 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가 생명을 얻음을 온전히 믿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시각을 열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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