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6편 강해-하나님의 영원한 통치

 

오늘 성경공부, 시편 146편입니다. 10절까지 있어요. 오늘 우리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먼저 여성분들이 홀수 읽고 남성분들이 짝수 읽는 방식으로 읽겠습니다. 읽으십시오.

 

1.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예, 오늘 공부 제목은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입니다. 익숙한 구절이 많이 나와요. 어떻게 보면 오늘 이 146편만 우리가 공부 잘하면 시편 전체를 공부하는 것 하고 마찬가지일 정도로 중요합니다. 시편 각 편이 다 중요하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기본적인 그 시편의 영성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저도 공부를 준비하면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목이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예요. 이 통치라고 하는 것, 10절에 나오는 대로 그대로예요. 다스린다, 통치하신다, 그렇게 나오지요? 직접 통치입니다. 다스림입니다. 아, 이게 대단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 나라 보통 이야기 하는데 그 나라는 공간적인 의미가 통치의 의미예요. 보통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있다, 없다, 자꾸만 공간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통치, 다스림, 운동, 힘 이런 쪽으로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이 그런 면에서 중요한 것이고요, 그런 쪽으로 여러분들이 자꾸만 거듭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넓혀 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그 물리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거지 딱 결정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습득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한의학도 제가 보기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답이 따로 있어서 그걸 달달 외우면 한의사가 되는 게 아니고요, 그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사람의 몸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거든요, 끝이 없습니다. 사람의 몸에 대한 개념, 그걸 점점 넓게 이해해 가고, 끝이 없어요. 끝이 없을 정도로 가까이 가는 거지요. 다른 공부, 음악공부도 마찬가지고, 미술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경지에 들어갈수록 그 영역에 더 깊이 들어가서 더 세세히 아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여러분들이 교리문답 받는 정도로 끝나면 안 되고 끊임없이 그것을 넓혀가야지요. 그러니까 통치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다, 그런 쪽으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통치가 신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거죠,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뭔가를 생각하고 또 판단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그걸 전제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 얘기하는 것도 그 하나님 나라가 어디 보입니까, 그렇게 시뻘겋게 옵니까, 어떤 형체가 아니거든요, 고유한 방식의 통치인거예요. 통치, 그게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그를 영성가, 혹은 예언자, 그렇게 이야기하고요, 그게 흐릿하면, 마냥 흐려지죠. 가까이 가지 못하니까. 임박한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는 이야기입니다. 예, 하나님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에 따라서 신앙의 경지가 달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불치병에 걸렸는데 기도 했더니 병이 낫더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런 방식으로 신앙경험을 하는 거고요, 또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의 비밀을, 비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신비, 그것을 아는 게 우리 신앙의 하나의 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중요한 구절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걸 다 하나님의 통치차원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을 “영원한 통치”라고 그랬어요.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그 세 가지 단어가 거기 연결되죠, 제목만 보십시오, 일단, 하나님, 영원, 통치예요. 영원하다, 이건 형용사이고, 하여튼 단어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 영원, 통치, 이 세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통치를 하시는데 영원하게 하신다, 그 얘기입니다. 예, 그런 정도로 우리가 서론을 정리하고 오늘 본문을 따라가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네 단락으로 좀 보겠습니다. 첫째 단락은 1절과 2절입니다. 이 146편의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하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어요. 10절입니다. 결론 부분에 나오는 그 10절 이예요.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할 일은 한 가지 뿐이 없는 거예요.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렇게 이야기하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요, 그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움직이는 생명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좀 표현이 추상적이지요? 추상적으로 말 할 수 밖 에 없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그런 표현 말고 딱 부러지는 것, 실증적인 것을 좀 얘기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하나님을 그렇게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약간 추상적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리얼하다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하시면서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아 라고 이렇게 시편기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상투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생명의 능력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심층적인 차원에서 움직이는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건 밥을 배부르게 먹는다고 해서 만족이 되지 않죠, 육체는 만족이 됩니다. 배고플 때 밥 먹으면 만족스러운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어떤 사회적인 욕망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다 생명의 흔적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사회에서 지위나 신분을 얻게 되면 만족하게 됩니다. 시장선거에서 당선되면 뿌듯하겠지요. 그런데 영혼은 그런 걸로 안 되는 거예요.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성령과의 공명을 통해서만 만족이 가능한 어떤 차원인 겁니다. 좀 이해하기 좋게 비유적으로 말씀 드리면 창을 배우는 소리꾼들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어디 한 자리 준다, 이런 걸로 만족을 못하거든요?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그 사람들은 그 음악적으로 만족을 하는 겁니다. 이 영혼아,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족할 수 있는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을 향해서 호소하는 거죠, 예, 그런 것 경험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쪽으로 나가지 않으면 우리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약장수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처세술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심리적인 만족이나, 교양적인 세련미 이런 것들을 얻는데 불과합니다. 그런 거라면 굳이 교회 나올 필요까지 없는 거예요. 사회에서 단 수련도 있고, 여러 가지 요가도 있고 하니까, 그런 걸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 편리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것하고는 다른 차원이거든요, 영혼의 그러한 문제입니다. 영혼이라고 그래서 우리 실제적인 삶과 완전히 관계없는 이원론적인 차원에서의 그런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심층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위에 쌓여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생명의 어떤 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찬양하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만족이 가능한 차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찬양한다는 말이 여기 여러 번 나오잖아요, 여기만이 아니라 시편에는 펼쳤다 하면 다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건 또 신약성서에도 많이 나오고요. 예배자체가 찬양이고요, 그건 송영을 돌린다고 하는 겁니다. 독솔로지(Doxology)라고 하거든요? 독솔로지, 독사(δόξα:Doxa)라고 해서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는 이 표현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종교적이라서 실질적으로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말 중요한 기독교의 어떤 생명 경험의 통로입니다. 찬양이라고 하는 말이 자주 나오잖아요? 하나님을 찬양하라,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러한 종교적인 용어를 자기말로 해석할 수 있어야 됩니다. 소화가 되어야지 그걸 해석할 수 있는 거죠, 찬양하라, 찬양하라 한 손 들고, 가슴에 손 얹고 뜨겁게 열정적으로 경배와 찬양 그런 것은 하나의 형식인데요? 대개 그런데 머물러 있거든요, 자기감정에 휩싸이는 거죠, 제가 자주 말씀 드리는 겁니다만 감정은 2차원적인 문제예요. 그건 두 번째 문제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일치예요.

 

찬양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의 말로 좀 설명해 보십시오. 제 말로 설명하면 강의안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을 집중시키는 거예요. 영혼을, 그러니까 내 삶의 가장 심층에서 움직이는 생명의 힘을 어느 곳으로 집중하는 거죠. 그게 찬양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온통 돈 버는 데만 쏠리면 돈을 찬양하는 거고요, 창조자 하나님을 향한다면,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그리스도를 향한다면 그리스도교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고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 분에게 우리의 영혼을 집중시키는 겁니다. 예, 다른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아시지요? 이것저것 우리가 취미생활도 하고 가정생활도 하고 이것저것 건강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도 하는데 다 지나간다고 하는 것 아시지요? 그런 건 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것 뿐입니다.

 

그냥 적절한 관계를 맺고 이렇게 덕스럽게 살면 되는 거고요. 그런 것으로 우리의 생명의 가장 심층이고 가장 근원적인 초석인 영혼이 만족할 수 없는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시편기자는 그렇게 하나님에게 자기의 영혼을 집중시키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2절에 가면 평생 동안 한다고 얘기를 하고 있네요. 그러니까 한 번 뜨거워져서 은혜 받고 확신 갖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죠, 기독교 신앙은 평생 구도적으로 하는 거지요. 그 말이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구도예요. 구도정진입니다. 죽을 때 숨이 끊어질 때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내 삶을 집중시키는 그러한 삶의 태도지요. 뭐, 그러냐, 구도적이라고 하는 말은 신자들이 잘 이해를 못합니다. 다 이해를 못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대개 기독교신앙을 형식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그 단계까지 잘 들어가지 못해요. 똑 같은 일들의 반복, 그래서 한 시간 기도하는 것을 두 시간으로 늘린다,

 

예를 들자면 그런 것들만 생각하지 정말 영혼을 하나님에게 집중시킨다고 하는 평생 동안 구도적으로 한다고 하는 것을 신자들이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태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예, 그렇게 찬송하라 얘기하고요, 그게 첫 번째 단락입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그 이야기의 연속 이예요. 3절, 4절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곧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게 관계에서 이해를 하셔야 되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에게 집중한다, 영혼을 집중시킨다고 하는 것은 그건 사람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어떤 삶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래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아시잖아요? 사람에게 매이는 게 얼마나 우리를 영적으로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아시지요? 그게? 아무리 자식들 사랑해도 그게 우리를 얽매게 됩니다. 연인들 사이도 마찬가지고 말이지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3절과 4절에 보면 사람 의지하지 말라고 얘기하네요. 3절에 재미있게 표현해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귀인들, 귀한 사람들, 권력자들, 힘 있는 사람들, 우리가 보통 눈치 보려고 하고, 옆에 가서 좀 의지해 보려고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거라든지, 아니면 정치적인 거라든지 이런저런 귀인들 의지하지 말라, 잘 생각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억지로는 안 되요. 자동적으로 그 쪽으로 쏠리잖아요, 그게 이 세상살이의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귀인들 의지하지 말고 또 그뿐만 아니라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정 반대의 사람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네요. 무슨 말일까요?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아예 의지하지 않잖아요?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여기 의지하지 말라고 굳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는 정확하게 설명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런 뜻 같아요.

 

어려운 사람들을 내가 거기 가서 베풀어주고 시혜를 베풀어준다고 하는 것처럼 베풀어주고 자기만족 하는 것, 그런 것 하지 마라 그런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확한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렇게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건 옳은데 도울 힘없는 자까지 얘기하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런 방식으로 설명 했는데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여기서 어떤 사람이든지 힘이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런 뜻이겠죠, 왜 그러냐, 4절에 정확하게 사람의 운명 실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사람은 무상한 거죠, 숨이 끊어지면 모든 것들이 끝나는 거예요. 피조물의 엄정한, 아주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그걸 잘 느끼지 않고 살지요. 그렇다고 하는 걸 알기는 알지만 실질적으로 와 닿지는 않습니다.

 

이 성서기자는 그것을 명확하게 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숨이 끊어지면 흙이 돼버리고 생각이 다 없어지는 그런 정도의 사람을 의지하면서 살면 되겠냐, 두 번째 단락이었습니다. 그 두 번째 단락을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무상성, 일시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무상성을 기억하는 것이 영성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영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기독론적인 영성하고는 좀 다른 거지요. 연관되기는 합니다마는 이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하고 어떻게 연관 되냐, 좀 설명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그만 두겠습니다. 일단 시편기자가 말한 이 부분에서 보면 삶의 무상성을 확실하게 알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에 이르는 영성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거거든요,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5절 한 절만 좀 따로 뽑아서 생각했습니다.

 

예, 그러니까 이거예요. 흙으로 돌아갈 인간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의지해야 되는가, 당연히 하나님이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5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고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 그거야 우리가 많이들은 이야기인데 이 말이 의미하는 말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사람이 도울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요. 당연하지만 그걸 실질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누가 나를 도와 주냐 이걸 어떻게 처리해서 해결 하냐, 그런 쪽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도움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보면 막연하게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너무 주술적으로 생각을 하거나 양극단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걸 뚫고 나가서 양극단이 아니라 아주 고유한 영적인 시각으로 하나님이 우리 참된 도움이라고 하는 사실 속으로 풍덩 빠져 들어가는, 그게 신앙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서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만 도움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건 아니고요, 사람끼리 도와봤자 그건 한계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일시적인 겁니다. 그리고 앞에서 4절에 이야기했듯이 서로 돕고 사는 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건 해야 되요. 그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는 겁니다. 그 두 개를 구분하셔야 되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 안 나와도 당연히 상식적으로 건전하고 합리적으로 살아가야 될 삶들, 그건 있는 거예요. 그건 뭐, 하라, 하지 말라 할 것도 없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우리가 더 깊이 들어가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것은 정말 열심히 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사실은 별게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실은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에게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목사에게 대한 기대도 그렇고 목사도 신자들에게 그렇게 기대할 게 없습니다. 그래봐야 개인 개인도 다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게 다 지나가는 거니까 말이지요. 상황에 따라서 서로 판단들도 다르고 말이지요. 제가 너무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그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고 얘기를 또 하지요?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하나님만이 참된 미래이고 생명의 근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잘 이해를 해야 될 텐데요, 여러 번 제가 이 시편 공부하면서 말씀 드린 거기 때문에 이걸 길게 끌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미래를 더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잠깐 우리가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죽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방식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열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인간끼리 할 수 있는 일들, 그건 죽음까지만 가능한 거예요. 죽을 때까지만 이 때까지 서로 돕고 이렇게 저렇게 할 일들이 가능합니다. 또 야무진 꿈을 꾸고 그리고 서로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것,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 죽음 전에만 가능한 거죠, 죽음과 죽음너머의 생명을 가리키는 부활의 세계, 여기서는 오히려 하나님만이 통치 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둘 수 밖 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서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사실은 분간하기도 힘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미래다. 그런 하나님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다, 참된 복을 이야기하죠? 그 다음에 네 번째 마지막 단락입니다. 아, 마지막 단락은 10절이 하나 더 있군요. 네 번째 단락은 6절에서 9절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우리가 도움으로 삼고 우리의 미래를 맡길 때에 복이 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해서 시편기자가 여기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고 하잖아요? 이것은 하나님은 창조주다, 하는 이야기는 성경 곳곳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도신경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로 시작하고요, 왜 그런 이야기를 성서기자들이 자꾸만 하느냐, 성서기자들이 창조된 세계를 명확하게 뚫어 보고 있는 거예요. 직면하고 있는 거죠. 이게 정말 신기하고 놀랍고 위대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러한 분이시다, 그것에 대한, 그걸 뚫어 볼 수 있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거죠. 창조자만이 피조물들을 살릴 수 있는 분이라고 하는 그런 신앙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7절 이하에서 시편기자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6절에서는 천지창조하신 하나님, 그 창조자만이 그 피조물들의 생명을 책임 질수 있다는 고백이고요, 그런 것들을 7절 이하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특별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생명이 취약하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소외된 사람들, 마이너리티, 또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책임지는 것 같지도 않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 부분으로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난한 자, 그리고 장애인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그걸 편애라고도 할 수 있고요, 신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의 파당성(波黨性)’,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파당성, 독일어로 파르타이리히카이트(Parteilichkeit) 하는데 하나님이 특별히 고아, 과부, 소외된 자,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당파적으로 보호하신다, 그런 입장으로 구약성서를 보려고 하는 신학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게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거예요. 유대교, 구약성서의 메시아관이 거기에 상응하는 겁니다. 메시아가 와서 하실 일이 무엇이냐에 대한 그런 이야기들이 구약성서의 곳곳에 있고요, 이렇게 쭉 흩어져 있습니다.

 

많이 있는 건 아닌데 그런 메시아관이 어떤 부분에서는 아주 선명하게 이야기도 되고 어떤 부분에서는 흐릿하게 되어 있는데 어쨌든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거든요?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 굴곡이 많은 세상이 평탄해지고요, 빈부의 격차가 없어져야 되고,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그 정의와 평화가 실현될 그러한 세상을 꿈꾼다 말입니다. 구약의 메시아관이예요. 그게 신약성서에도 예수님이 오실 때에 마리아와 연관된 이야기, 전승에 나옵니다. 그걸 *‘마리아 찬가라고 하거든요, 누가복음 1장 46절 이하에 보면 그런 이야기들 나옵니다. 제가 잠깐 보고요, 누가복음 1장 46절, 마리아 찬가라고요, 그게 엘리자벳을 방문한 다음에 엘리자벳과 마리아의 서로 화답하는 노래가 나오거든요, 이게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자들이 이런 것들을 근거로 예수의 어떤 민중해방적인 성격들을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지금 예수를 잉태한 상태에서 부르는 노래예요. 이건 그러니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고백이라고 해야 옳지요? 마리아가 직접 이런 말을 어디 했겠습니까? 10대 중반 그 때 아이를 가졌으면 그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10대 중반 됬을 텐데, 우리도 옛날에는 여자들이 일찍 시집갔지요? 그런 나이에 이런 역사의식이 있었겠습니까, 초기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예수님의 어떤 구원, 어떤 해방의 능력, 이런 것들을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는 겁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쭉 나가서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등등 그런 이야기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1:46-56)

 

오늘 시편에서 보는 것 하고 비슷하죠, 예, 거기 7절에서 9절까지 다 보지 않고 한 두 구절만 좀 보겠습니다. 예, 7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억눌린 자를 위한 정의로 심판하신다, 여기 보면 어떤 뉘앙스가 있지요. 억눌린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나오는 거예요. 억눌린 사람들이, 그러니까 이런 걸 보면 이 억눌린 자들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편파적인, 좋은 뜻으로 드리는 거예요. 옹호,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아주 극빈한 사람들, 자기들이 게을러서 그렇다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마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어쩌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글로벌한 세계가 그러한 되서 경제만 하더라도 초국가적인 나라들이 많아지고요, 옛날에 월드컵, 지금도 열광적입니다마는 월드컵 축구화나 공 만드는데 네팔이나 그런 곳 소년들의 노동력이 많이 들어갔거든요, 그런 걸 세계의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고발들을 하는데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 말씀을 보면 억눌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로운 심판인거죠, 정의,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이 세계를 정의로 심판을 해서 억눌린 사람들이 없는 세계로 만들어 가고 있을까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나요? 어떻습니까, 2000년 전 보다도 지금이 억눌린 사람들이 덜한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해방되기는 했습니다. 남녀문제도 이제는 많이 좋아지기도 했고요, 여성들이 해방 됬다, 성적으로 억눌린 상태에서 해방 됬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남녀 불균형 지수로 볼 때 106위인가 그렇다면서요? 몇 년동안 더 떨어졌답니다. 그 뉴스 나왔는데 믿을 수도 없고 이상합니다. 정말 우리나라가 남녀 불균형에 세계 백 몇 위랍니다. 이게 기준이 어떤 건지 모르지만, 하여튼 좋아진 점도 있고요, 옛날처럼 좋은 제도는 없어요. 그런 걸 놓고서 억눌린 사람들이 정의로 좀 새로워졌나, 그런 것 어떨까요?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이게 다 객관적으로 좋아지는 점이 있긴 있습니다마는 여전히 상대적인 차이일 뿐이지 정의롭지 못한 건 여전하거든요, 그렇다면 오늘 여기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희망사항 뿐 인건가요? 무얼까요?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정의로 심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당장 일어날 수 있지만 거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말도 안 되는 쓸데없는 공허한 말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이 부분은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더 보충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옳은 말씀이긴 한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대로가 아니라는 것,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셔야 됩니다. 거기서 한 마디만 드린다면 종말론적인 그런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는 재림, 그 때를 우리는 종말이라고 얘기하는데요, 그 때에 온전하게 이루어질 그러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억눌린 자를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 이야기는 타당합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좌우지간에 불평등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지금 현재하고 아무 의미가 없느냐, 그렇지 않은 거지요. 이건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을 새롭게 끌어갈 수 있는 영적인 다이나믹이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기 약자와 악인을 대비하는 9절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나그네, 고아, 과부 이것을 붙드신다고 그랬어요. 이 세 계층이 나옵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 그 당시 가장 서러움을 많이 받을 만한 계층과 그 운명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붙드신다, 그게 하나님의 통치는 그렇다, 그리고 이런 시편을 읽는 유대인들은 아, 하나님의 통치는 이런 사람들을 붙드는 식으로 나타나는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말씀들은 종말론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관점을 열어 주면서 동시에 오늘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냐, 어떤 강력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한다고 하잖아요? 예, 두 가지가 대립되고 있습니다. 억눌린 사람의 대표인 나그네, 과부, 고아, 한 쪽엔 악인들, 악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 불이익을 취한다거나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한다, 어때요? 어떻습니까, 과연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까요? 실제로 일어 날 수도 있고요, 아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것을 이렇게만 보충설명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악인의 길을 굽게 한다고 하는 것을 악인이 지금 쫄딱 망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현실에 있는 그대로 좋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두 가지로만 조금 연결해 볼께요. 이미 악인의 길 자체가 굽은 거예요. 악인은 그 일을 통해서 참다운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또 그렇게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요,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악하다고 하더라도 그 방식으로는 영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건데 거기엔 참된 만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착각을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자체가 삐뚤어지는 거지요.

 

예, 그런 쪽으로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시면 잘 되는 것일 겁니다. 두 개로 한다고 했는데, 그 걸로 그만 끝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악인의 길을 굽게 한다고 하는 것은 악인의 길 자체가 굽었다고 하는 겁니다. 거기서 구원을 경험 못하는 거예요. 사람은, 굽은 거지요. 길이 아닌 거지요. 예, 마지막 절입니다. 여기 끝마치는 결론입니다. 참, 멋진 표현 이예요. 앞에 있는 것을 다 정리하는 구절 같습니다.10.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시온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하는 거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백성들아, 이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영원히 통치하시고, 그러니까 고유한 방식으로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여러분의 머릿속으로 끌어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하나님이 고유하게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예수님 사건으로 말씀 드리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다는 것까지입니다.

 

그건 악이 할 수 있어요. 그건 가능합니다. 그런 일들은 반복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일 마저도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시잖아요? 다른 방식,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생명의 근원적인 차원으로 하시잖아요?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마칩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시편 146편은 재미있게도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할렐루야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찬양에서 찬양으로 끝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그런 불의한 것들, 모순, 부조리 이런 걸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다 이야기하잖아요? 그들의 삶이 당장 좋아지지 않는 것도 알고요, 악인이 당장 저주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더 잘 사는 모순을 다 압니다. 알아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그의 눈이 어디 있나, 그의 영적인 시각이 어디 놓여 있나, 우리가 그걸 배워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46편, 아주 고대의, 유대의 한 영적시인이 고백한 이 찬양시를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하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생각대로 이 세계를 통치하신다고 하는 이 놀라운 이 비밀을, 이 사실을, 이 신비를 우리도 놓치지 않고 살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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