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7편 강해-하나님의 말씀과 자연

 

오늘 우리 같이 읽고 공부할 시편은 147편입니다. 20절까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눠 읽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홀수를 읽겠어요. 147편입니다.

 

1.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2.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3.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4.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5.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6.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7.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8.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9.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10.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1.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2.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13.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14.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15.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6.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17.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18.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9.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20.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아멘! 예, 147편입니다. 오늘 공부하면 딱 세 편이 남았군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147편을 포함해서 146편 이하 다섯 편이 각각 시편이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요. 그렇죠? 지난주에 우리가 146편을 보았는데 그것도 역시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146에서 150까지 이 다섯 편을 할렐루야 묶음 집으로 분류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데도 좀 있긴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집중적으로 다섯 편이 그런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지난주에 잠깐 생각을 했듯이 여호와를 찬양하라 입니다. 찬송한다, 찬양한다, 다 똑같은 이야기지요? 그게 이 147편에서는 핵심주제입니다. 이 마지막 다섯 편이 바로 할렐루야로 앞뒤가 딱 짜여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바로 시편 전체가 할렐루야와 똑 같다, 그 내용이, 시편 전체의 결론을 그렇게 맺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되겠지요?

 

그러니까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 혹은 당위,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당위와 이유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찬양이어야 되는 거고요, 그리고 우리가 자주 들은 이야기입니다. 찬양, 예배, 송영,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신앙적인 태도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영성인거지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태도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성경 필 때마다 많이 들었던 거고 설교시간에도 많이 나오는 거고요, 여러 가지 신앙적인 책들을 읽으면 많이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냐, 그런 것들은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요, 실질적으로 이해를 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 이예요. 그건 신앙이 성장하면 점점 골수분자가 된다거나 외골수가 된다거나 아주 바리새인처럼 된다거나 전형적인 예수쟁이의 그 아주 편협한 세계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훨씬 더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요, 관용이 넓어지고 정말 영적인 자유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신앙이 깊어지는 게 아니라 굳어져요. 이건 참 어떻게 극복해야 될지 개인의 진단인 것 같아요. 깊은 쪽으로 가는 걸 잘 모르니까요. 그냥 열정적으로 찬송 부르고 QT하고 그런 경건의 모양, 이런 것들을 잘 규모 있게 행하는데, 말하자면 좋은 습관이죠, 경건의 좋은 습관을 길러 주는데 주일 안 빼먹고 헌금 안 빼먹고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그런 건 있는데 조금 더 나가면 마음 착해질 수 있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고 보통 신앙적인 덕성 이런 것들이 늘어나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는데 좋은 쪽으로는 그런 쪽으로 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 그런 깊이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게 뭔지 사실은 모르고요, 안타까운 거지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는 것을 낱말 뜻으로 알고 있지, 교회 열심히 나오는 거, 그리고 기도 많이 하는 거, 그런 정도로 알고 있지,

 

생명의 어떤 깊이에서 하나님과의 만남, 또 거기서 움직이는 힘인 성령과의 공명을 통해서 모세가 호렙 산에서 혹은 시내 산에서 경험한 것 같은 거룩한 두려움, 이러한 깊이로 들어가는 신앙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신앙의 성숙이 없는 거예요. 제가 어떤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할 때의 용어를 빌리면 신앙이 강화되기는 하는데 신앙이 심화는 참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게 쉽지 않은 거지요. 예술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의사 선생님들 하는 거나, 변호사, 법조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전문가가 되면 거기에 딱 묶여 버려요. 참 이상해요, 전문가가 되면 더 넓어져야 되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재단하고 매도하고 그런 일들이 사실은 많이 있습니다. 예술가들도 정말 예술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잖아요, 오랫동안 교회 공동체 안에서 머물러 있고요, 평신도들도 많이 만나고 목사님들도 많이 만나고 하는데 그러한 신앙의 성숙을, 참 만나기 힘들더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영적인 태도가 뭐냐,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이 시작되고 유지되고 완성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 때 드리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이 시작되고 유지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그럴 때에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할렐루야 찬송을 돌리는 일이 가능한 거지요. 기독교인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 말은 합니다. 그래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요, 흉내 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이 부분에서 한 마디만 하면 이렇습니다. 생명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이해 하는가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이 시작되고 유지되고 완성된다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격이 달라지는 거예요. 무당을 찾아가는 태도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머릿속 에는 그 차이가 없어요.

 

그냥 겉모양만 예수 믿는다고 하는 거지 속은 또 같다고 한다면 이건 예배를 드리나 송영이 아니라 자기관심, 자기연민, 자기집중, 자기표현, 자기업적 여기에 있는 거지요. 이런 거 한 편으로 생각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이 세상살이가 힘든데 영적으로 깊이 들어 갈 수 있겠냐,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되긴 하는데 그것이 좀 아쉽지요.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성숙해지지 안하면 영성의 깊이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 오늘 우리는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시편의 마지막 5편중에서 두 번째인 147편, 이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이 제목을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찬양이거든요? 송영 이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하나님로부터만 생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기본적인 그 인식과 경험에 근거해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데 오늘 본문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그것이 두 대목에서 설명 됩니다.

 

두 대목, 하나는 말씀, 하나는 자연, 거꾸로 가야되는데 오늘 본문의 순서에는 맞습니다. 자연에 대한 것과 말씀, 이 두 가지가 같이 연결됩니다. 오늘은 세 단락으로 좀 나눠서 보겠습니다. 첫 단락은 1절에서 6절입니다. 하나님의 위로, 제가 소제목을 잡았습니다. 1절에서 6절 이예요. 이 147편은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바벨론 포로가 끝나고 귀환 한 때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가 시작될 때가 기원전 587년 이예요. 바벨론 포로 잡혀갈 때가 예루살렘이 망한 때가 기원전 587년입니다. 이건 중요한 햇수라고 여러분 말씀드렸습니다. 외워두세요. 587년, 그런데 그거보다 십 년 전에 이미 일부는 포로로 잡혀갔어요. 바벨론에 의해서 여러 번 공격을 받았어요. 사실, 약간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했다가 자꾸만 그런 게 반복됩니다. 첫 번째 포로가 기원전 597년 이예요. 이때 에스겔로 붙잡혀갔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았어요.

 

바벨론 느부가넷살왕이 대신 그 왕을 잡아가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의 왕은 잡아가고 대신 왕의 삼촌인 시드기야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 놓고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간 겁니다. 그래도 아직은 유대가 계속되는 거지요. 그렇게 하다가 정치가 복잡해져 가지고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그게 587년 이예요. 그래서 한 50년쯤 지난 다음에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부수고 새로운 신흥제국으로 나오잖아요? 세계사에 나오는 사건인데요. 페르시아요. 고레스라고 하는 그 왕의 칙령에 따라서 각각 포로로 잡혀 왔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은 다 너희나라 가라, 해방을 시킵니다. 그래서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1차 귀환 이예요. 한꺼번에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도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하시면 되요.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지 시대 때 그러니까 소련, 러시아 쪽으로 많은 피난을 떠나가고, 중국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해방 된다면 돌아오는데 한꺼번에 못 돌아오잖아요? 몇 차레에 걸쳐서 돌아오기도 하고 남아 있기도 그런 것 하고 비슷합니다. 바벨론에 가서 거기서 정착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어쨌든 1차, 2차, 몇 차에 걸쳐서 돌아와요. 1차 귀환이 기원전 537년이었습니다. 그들이 거의 50년 만에 돌아 온 건데 그러니까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대다수는 죽었겠지요. 거기서요. 50년 동안, 아니면 어렸을 때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 할아버지를 따라서 포로로 잡혀갔던 아이들은 이미 할아버지가 되어 갖고 돌아 올 거고요, 2세나 3세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곤란했을까, 상상이 갑니다. 그들이 돌아 왔다고 해서 금의환향, 그런 것 절대로 아니거든요? 그리고 예루살렘은 굉장히 어려운 시대였고요, 계속해서 이민족들이 몰려 있었고요, 그래서 거기서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제3이사야도 그렇고 에스겔은 같이 갔을 거고요. 제3 이사야가 바벨론 포로 귀환 온 사람들 시대에 살았어요.

 

그래서 성전재건하고 그런 일 노력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다 실패예요.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 하고 어떻게 도와주고 예언들 많이 한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예언들이 그대로 적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예언을 점쟁이가 앞일을 내다보듯이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하는 역사가의 어떤 역사해석이고 비전, 미래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적중되지 않아도 괜찮은 거예요. 설교가 뭐, 우리 인생의 미래의 일이 된다, 안 된다, 그런 거 얘기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 얘기하는 거고,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거고요. 그건 사실적으로 맞느냐 틀리느냐,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알겠어요, 지금 그런 시대입니다. 그 때, 이 시편의 묶음은 다 바벨론 포로후기에 주로 많이 쓰여 졌어요.

 

가장 어려울 때 시가 나오는 거예요. 신앙적인 고백들도, 그런 반성들도 사실은 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 이런 것들도 그 전에 쓰여진 게 아니라 바벨론 포로를 배경으로 해서 기록된 겁니다. 그러니까 근원에 대해서 질문할 수 밖 에 없는 가혹한 역사의 하나의 Reflection, 하나의 반성이고 거기서의 영적인 논의이고 그리고 희망을 담아내는 거지요. 예, 여기서 위로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 시편기자가 제3이사야도 위로 많이 합니다. 여기 시편도 위로가 나오는 거지요. 하나님의 위로예요.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3절에 있는 대로요, 상처를 싸맨다, 이게 필요했던 시대에요. 5절에 보면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할렐루야 감사 찬송을 부르는데, 하나님이 정말 도움이 되신다고 하는 사실과 그리고 그 분이 위대하시다고 하는 사실, 이런 것들이 거기 근거가 되는 겁니다.

 

6절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예, 이게 하나님의 통치방식이거든요? 예, 하나님의 정의지요.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신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통치방식인데요, 어떻습니까, 이런 말이 옳은가요? 이걸 두 가지로 봐야 됩니다. 이런 것들을 실증적인 사실로만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늘 붙들지 않잖아요? 힘들어지고, 악인이라도 하더라도 잘 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실증적인 차원에서 보면 안 되는 겁니다. 실증적이라고 하는 말은 신문기사 보도처럼, 객관적인 보도처럼 보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영적인 그리고 신앙적인 통찰 이예요. 그렇게 사실적이지 않다가아니라 표면적인 사실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이게 우리 눈에는 잘 안 들어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겉돌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진술은 두 가지로 봐야 됩니다. 짧은 시간 안 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없는 것 같아요. 짧은 시간 안에서는, 그러나 긴 시간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긴 시간으로 보면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나요. 아무리 강한 제국이라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는 무너진다고 하는 게 성서기자들의 일관된 통찰이고 가르침입니다. 둘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짧은 시간 에서도요, 하나님은 비밀한 방식으로 정의를 세웁니다. 예, 비밀한 방식으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참된 위로를 주시는 거죠, 그게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놓치지 말아야 될 영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그 어떤 악한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영적인 준비만 된다면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거죠, 하나님만의 비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를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며 사느냐, 중요한데요, 현대인들이 그런 위로를 필요로 할까요?

 

너무 가진 게 많게 되면 이걸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게 사람의 딜레마입니다. 뭐든 삶의 조건들을 우리가 늘려가면서 사는데 누구나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필요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영적으로 어떤 갈급한 마음들이 없어지게 된다고 하는 것,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위로를 우리가 받을 수가 없는 거지요. 그게 첫째 단락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7절에서 11절입니다. 두 번째 단락의 소제목은 “감사의 노래”,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147편이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전체주제입니다. 그런데 찬양해야 될 이유, 그것이 첫 번째 단락에서는 하나님이 위로하신다고 하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참된 위로자로 안다면 그럼 당연히 할렐루야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예, 그거지요. 두 번째는 그런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 드리는 거지요. 예, 강의안을 보시면 제가 그렇게 썼습니다.

 

시인은 두 번째 단락에서 찬양의 성격을 감사로 규정한다고 말이지요. 예, 찬양의 성격을 감사라고 하는 겁니다. 감사의 이유는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돌보신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9절에 보면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얘기했습니다. 예, 8절에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이고 9절에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예요. 식물 동물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돌보신다, 그 얘기죠, 예, 이런 시편기자의 고백도 우리가 뻔 한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편기자는 이 세상을 운영하는 손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걸 놓치지 않는 거예요. 그 분이 하나님인 거죠, 그 분이 하나님인 겁니다. 산에 풀이 자라게 하고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는 그런 분, 그 분이 하나님이다, 그걸 의식한 겁니다.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이 있고, 의식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건 자연이다, 자연 저절로 자연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요, 아니면 아예 그걸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 거고요, 그러나 시편기자는 그걸 주관하는 어떤 분이 있다, 그게 드러나는 건 아니예요. 누구 눈에나 똑 같이 보이는 건 아닙니다. 현상은 똑 같아요. 풀이 자라고 까마귀 새끼도 살아나잖아요? 우리 앞에 나타나는 현상은 비슷한데 그 근원이 뭐냐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른 거죠, 이건 뭐, 우리 일상에서도 비슷한 걸 찾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도 부모와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고 돈을 주고 학교에 보내주는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을 거고요, 우리 자녀들 중에, 조금 크면 어머니, 아버지라는 분도 한 인간으로서 자기들의 인격이 있구나, 그래서 인격적인 관계를 나눌 만한 자녀들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것처럼 이 세계에서도 자연현상은 똑 같아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 같이 햇볕비치고 믿지 않아도 잘 될 건 잘되고 예수 믿어도 잘 안 될 수도 있고 그렇거든요? 이 자연도 다 그렇고요, 그걸 어떤 시각으로 보냐, 영적인 시각이 뭐냐, 그게 중요한 거죠, 예, 그분인거죠, 그분이 바로 생명을 유지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창조론은 진화론과 대립관계가 전혀 아닙니다. 정말 전혀 아닙니다. 이걸 대립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데가 많이 있고, 그런 것 보면 딱해요. 왜 그렇게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지식인들이 모인다고 하는 교회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창조과학회 사람들 데려다가 강연하고 말이지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신학자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닙니다. 사이비 비슷한, 좀 냉소적으로 이야기해서 그러한 사람들인데 기독교인들이 그런 쪽으로 듣고 생각하다 보면 근본으로부터 자꾸 멀어지는 거죠, 진화가 생명의 원리라고 한다면 그것이 지금 밝혀지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하나 걱정 할 것 없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방식입니다. 진화의 방식으로 세계를 통치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간단한데,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참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데서 자연신학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학의 흐름 중에 자연신학이요, 감사해야 될 부분이 여기 하나님의 피조물을 책임지신다고 하는 관점만이 아니라 또 하나가 있는데 10절에 나와요, 여호와는 *(horse)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말의 힘이 세다 하여, 이 말은 우리가 말하는 말이겠죠? 달리는 말 아니겠죠? 원어로 확인 안했는데,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기뻐하지 않고,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그렇지요? 사람들이 주로 어떤 사람이 말이 강하다 아니다 생각할 때는 말을 잘 하는 것, 말의 권위가 있는 것,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시편기자의 고백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סוּס쑤쓰:말)

 

이런 시편이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가 보다 하고 우리 삶은 따로 생각한다는 말 이예요. 그게 완전하게 일치 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영성가, 보통 그렇게 말하는데요, 우리가 일상생활 하다보니까 너무 이 세계의 돌아가는 메카니즘에 완전히 물들지 않습니까? 여기는, 이 세계 돌아가는 메카니즘은 이 방식은 아니잖아요?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얘기한 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정글의 법칙, 자기 PR시대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세계 메카니즘이라고 하는 것, 그런데 우리가 거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우리의 많은 인생의 많은 것들이 거기 묶여 있어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옳긴 옳은 것 같은데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요. 그건 뭐, 어쩔 수 없긴 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Incanation 될 수 있도록 성육신이예요. 실질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구도적으로 이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여기 11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이야기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그리고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이라고 했잖아요? 이게 무슨 뜻인지 우리가 더 생각해야 됩니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 시편기자는 찬양의 성격이 감사다, 추상적인 감사가 아니라 낭만적인 감사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이런 피조물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그리고 경외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그것을 명확하게 보고 감사, 찬양한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 놀랍지요. 이런 시인들의 영성이 인간의 삶을 정확하게 본 겁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의 내용으로 차지 않으면 우리 삶은 공허하거나 공연한 정열로 소비, 소진됩니다. 마지막 세 단락은 12절에서 20절입니다. 여기 소 제목으로 “말씀의 능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전체 제목을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이라고 그랬어요. 자연에서 하나님께 감사 찬양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번째 단락으로 한 거고요. 말씀의 능력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단락이 자연신학이라고 한다면 이제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자연신학” 그럼 세 번째 단락은 말씀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는 자연의 위대함, 그 신비 그 자체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건 아니예요.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분에게 주목합니다. 자연신학 앞부분에서 얘기 할 때도 이미 그걸 말씀 드린 거예요. 그래서 다른 근동의 여러 종교들은 그냥 자연종교예요. 자연종교, 정말 태양을 섬겼습니다. 태양을 섬긴 종교들은 많습니다. 이집트도 그렇고요, 잉카문명도 그렇고요, 태양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 되요. 기독교에도 그런 흔적이 조금 있긴 있어요. 성탄절도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던 날이 들어온 거거든요? 그러나 성서는 자연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를 섬기지 않습니다. 근동의 다른 종교, 아메리카의 잉카문명, 그리고 고대의 많은 종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자연을 주술적으로 섬기는데 반해서 성서는 脫주술이예요.

 

脫주술적 자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자연의 魔性에 두려워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대단한 신앙인거지요. 화산폭발 이런 거 보고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러나 그것 자체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요. 인격적인 하나님 말입니다. 그런데서 구약의 유대인들은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도 상대화시키고,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하심인데, 하나님은 말씀으로 통치하신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지요? 그것을 15절에 보면 아주 재미있게 표현해요.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의인화인가요? 말씀이 속히 달린다, 그러니까 이 세계가 운행되고 통치되는 모습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이 막 달리는 것과 같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 이 세상을 하나님의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를 한 겁니다. 언어, 말 그게 핵심인데요? 직접 연관된 것인지는 조금 더 생각을 해야 되지만, 그래도 참고적으로 필요해서 하이덱거의 경구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는 것을 강의안에 제가 다뤘습니다. 언어, 말씀, 로고스잖아요? 이것이 단순하게 의사 교환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인 힘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 있기 전에 언어가 먼저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참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요? 감나무가 있잖아요? 감나무가 먼저 있었던 게 아니라 감나무라고 하는 이름, 말이 먼저 있었다고 하는 관점입니다. 아, 그럼 좀 이상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이고요, 그건 뭐,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성경적으로 좀 이야기하자면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고 하는 말이 먼저 있었잖아요? 빛이 있기 전에 말이 있었던 거예요.

 

빛이라고 하는 말이 먼저 있었던 거예요. 다른 모든 것들도 그렇게 창조된 거거든요? 요한복음에 보면 로고스라고 하는 걸 예수그리스도와 일치시키는데 창조 때 이미 로고스가 있었다, 아이구 참, 복잡한 얘기인데 그냥 참고적으로 들으십시오. 12월 마지막 주일이 이번엔 성탄절하고 겹쳐요. 11월 기독교사상에 제가 원고를 이번 주간에 맞춰서 줘야 하는데 뭐 좀 준비하고 있습니다. 설교 공부할 때 원고예요. 성탄절의 본문이 1장 1절에서 14절이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해서 말씀이 하나님이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요,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된다, 정말 어려운 말들이 요한복음 1장에 쫙 나옵니다. 그러니까 헬라 사람들의 로고스라는 개념을 끌어들여서 예수그리스도의 선재적 역사, 역사 있기 이전에 어떤 근거들을 이야기하는데 참 대단한 요한복음 기자의 통찰이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이고 아주 엄청난 그리스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그겁니다. 참고적으로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영성은요. 이게 결론 이예요. 이건 기억해야 합니다. 영성은 말씀과 자연, 말씀과 세상을 우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이게 다른 차원으로 확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두 가지하고 결탁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말씀과 세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그런 것들이 언급되고 있지 않냐 그렇게 보았습니다. 예, 다시 말씀 드립니다. 시편을 비롯해서 이 성경말씀은 참 놀라운,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통치와 신비를 그 당시에 최고 학문과 보편적 진리에 근거해서 그리고 유대교와 초기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신앙 경험에 근거해서 진술된 말씀들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준비만 되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어떤 비밀들을 우리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들을만한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거겠지요. 이런 귀한 말씀들이 약장수의 약처럼 떨어지면 참 곤란하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47편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와 2500년 이라고 하는 시간적인 사이에서 살았던 한 유대인 영성가의 고유한 신앙적인 진술이었습니다. 긴 시간의 차이지만 바로 그것이 살아 있는 오늘 여기서 우리들에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우리 삶이 이 세계와 그리고 자연에 대한 깊이, 그리고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끊임없이 찬양하는 삶이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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